|
▩ 선릉(宣陵) 9대 성종과 2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
선릉은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덕종)의 둘째아들 성종(자을산군)과 2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동원이강릉이다.
정비 공혜왕후 한씨(한명회 넷째 딸)은 파주삼릉의 순릉에 있으며, 1계비는 폐비 윤씨(연산군 생모)로 서삼릉 회묘에 있다.
선릉은 성종의 둘째아들인 11대 중종의 정릉과 함께 있어 선정릉으로 불리운다.
ㅇ 선정릉 (삼릉)
강남구 삼성동 시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며, 선릉의 2릉과 정릉을 묶어서 삼릉이라고도 부른다.
ㅇ 선릉(宣陵) : 9대 성종과 2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동원이강(同原異岡) 릉
ㅇ 정릉(靖陵) : 11대 중종의 단릉 (성종의 둘째 아들)
<강남구 삼성2동... KOEX와 현대백화점 옆 시내 한가운데 위치하였다.>
<그림으로는 숲속에 있는듯 하지만 실제로는 주택가, 도로등으로 깎여나가 도로에서 왕릉이 손에 닿을듯 보인다.
선릉... 왼쪽이 성종왕릉, 오른쪽이 2계비 정현왕후 왕비릉으로 정릉은 아들 정종이 부모곁에 혼자 묻힌 것이다.>
ㅇ 할머니와 어머니, 장인이 만든 임금, 성종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추존왕 덕종)와 세자빈 한씨(소혜왕후,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생후 두 달이 되기 전에 의경세자가 20세로 요절하자 할아버지인 세조가 궁중에서 키웠는데, 성품이 뛰어나고 서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살았으면 왕위를 이어받았을 세손이었지만 아버지가 요절하자 삼촌(예종)이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예종 역시 즉위 14개월만에 승하하자 왕의 후사를 정하기에 이르렀다.
예종에게는 원손 제안대군이 있어 당연히 왕위를 이어 받아야하지만 그 자리는 다시 큰아들 의경세자의 둘째에게 넘어간다.
이는 대왕대비(세조비) 정희왕후와 큰며느리 의경세자비(소혜왕후 한씨, 인수대비), 그리고 둘째아들 자을산군의 장인 한명회의 작품으로 보여지는데 장남인 의경세자가 왕위에 오르지못하고 요절하여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궁을 나갔던 의경세자비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절치부심 아들 왕 만들기의 결과이다.
인수대비는 그를 위하여 당대의 권력가 한명회와 사돈을 맺고 힘을 합쳐 사촌에게 빼앗긴(?) 왕위를 찾아온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왕통의 정통성을 합리화 하기 위해 자을산군을 예종의 양자로 삼아 왕위계승을 이루었다.
한명회는 셋째 딸 왕비 만들기가 실패한데 대한 집념으로 다시 넷째 딸을 기어코 왕비로 만들었으니 자매지간이지만 궁중에서는 숙질간이 되는 전례없는 경우가 되었으며 한명회는 왕비 두명을 배출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것이다.
이렇게 아버지가 못이룬 왕위를 형 월산군(月山君)을 대신하여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9대 임금 성종이다.
즉위 후 7년 동안은 세조비 정희대비(貞熹大妃)의 수렴청정을 받아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못했으며, 훈신세력이 모든 군국사무를 주도했다. 20세가 되던 1476년(성종 7)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성종은 20여년에 걸쳐 완성한 조선 최고의 법전 경국대전을 비롯해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동국통감, 악학궤범 등을 완성했다. 모든 것을 다 이룬 왕이라 해서 성종(成宗)이란 묘호가 붙었다. 세조 때의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진사림세력을 등용,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등 재위 25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94년(성종 25) 12월 24일 창덕궁의 대조전에서 보령 38세로 승하했다.
ㅇ 3명의 대비를 위하여 창경궁을 짓다.
성종(자을산군)의 생모는 수빈 한씨였는바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남편을 왕으로 추존함에 따라 수빈 한씨는 인수왕대비가 되니 그리하여 인수대비라 부르는것이다. 또한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는 인혜왕대비로 책봉되었으며 이 두 사람의 서열에 대한 갈등이 여러 번 나타나게 되는데 형제의 서열로 하기로 매듭을 짓는다.
왕이 된 성종은 할머니인 세조비 정희왕후, 양자로 들어간 양모 안순왕후, 그리고 생모 소혜왕후 3명의 대비를 모시게 되는데 그녀들을 위하여 지은 궁궐이 창경궁이다. (세조비 정희왕후는 조선왕조 최초의 대왕대비이다.)
ㅇ 성종의 부인들
성종은 부인 12명(아들 중종과 함께 역대 임금중 공동 1위)에 16남 12녀를 두었다.
왕비는 3명이었는데 정비 공혜왕후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로서 후사가 없었다.
공혜왕후가 후사 없이 죽자 윤기견(尹起畎)의 딸 숙의 윤씨(淑儀尹氏)를 왕비로 삼아 연산군을 얻었으나 윤씨의 투기가 매우 심해 왕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는 사건이 일어나자 1479년 폐위하고 1482년 사사(賜死)하였는데, 이는 훗날 연산군 폭정의 계기가 되었다.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로 숙의에 봉해진 후 윤씨가 페위되자 이듬해 왕비에 책봉 되었으며 성종의 여성편력에 의도적으로 관대하게 대하여 어진 왕비로 칭송받은 정현왕후는 성종이 먼저 떠난 후 연산군의 폭정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으나 반정으로 자신의 소생이 임금(중종)이 되자 공경 받으며 편히 살다가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정비는 일찍 죽어 순릉에 모셔지고 1계비는 폐비가 된 덕에 2계비가 지아비와 나란히 묻혀 가까이에 아들(중종)을 두고 있다.
ㅇ 선릉은 원래 남의 무덤 자리
이곳은 원래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무덤자리였다.
광평대군은 성종의 작은 할아버지이다. 당시 왕실에서는 이 자리를 꺼림칙하게 여겼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적극 반대한다. 당시 광평대군의 자손들이 병들거나 요사한 경우가 많아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데다가, 그 주변 왕실 종친들의 무덤이 많아 그것들을 이장하려면 나라에서 부담해야 할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상주(喪主)인 연산군 역시 할머니 인수대비의 의견과 같았다 (이때까지는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윤씨 사건을 몰라 할머니 인수대비와 사이가 나쁘지가 않았으며 정현왕후를 생모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자리를 강력하게 추천한 이는 왕실의 외척이자 훈구공신인 영의정 윤필상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 1495년 4월에 성종의 유해가 안장돼 장례가 마무리되는데, 이미 불길한 일은 그 전부터 시작된다. 장례 한 달 전쯤인 3월, 연산군은 부왕 성종의 묘지문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어머니 윤씨가 폐비가 된 것을 알게 된다. '그날 연산군은 밥을 먹지 않았다'고 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연산군과 왕실의 비극이 시작된 날인 것이다.
반면 성종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대모산 자락(현 강남구 수서동 일원역 부근)으로 이장된 광평대군의 무덤은 그 후손들의 묘들과 함께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진다. 게다가 광평대군이 이곳으로 이장된 뒤 그 후손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주이씨 문중은 조선시대 문과에 850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는데 그 가운데 광평대군 후손이 115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 후손들은 이 묘역의 명당 발복이라고 믿고 있다.
성종 임금을 광평대군의 묘지에 안장시킨 윤필상은 어찌 됐을까?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는 폐비윤씨 사건에 연루된 죄로 연산군에 의해 멀리 진도로 유배되어 죽임을 당한다.
ㅇ 유해가 없는 빈 무덤
성종대에 일어난 폐비 윤씨 사건은 그의 사후 연산군의 폭정으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중종반정으로 마감되었으니 연산군이나 중종이나 모두 성종의 친아들로 연산군은 1계비 폐비윤씨 소생이며 중종은 2계비 정현왕후의 소생이다.
선릉은 유난히 많은 변고를 겪었다. 성종의 왕릉 선릉은 현재 유해가 없는 빈 무덤이다.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선조 26) 왜적들이 무덤을 파헤쳐 도굴하고 정자각은 불태웠다. 왕의 시신은 행방을 알 길 없다. 임란이 끝나자 선조는 성종의 유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전란 중 몽매한 왜군들이 아무렇게나 흩뿌려버렸을 것이다. 선조는 새로 관을 짜서 부장품으로 넣었던 옷을 태운 재를 담아 다시 안장했다. 성종의 무덤 속에는 수의로 넣었던 옷을 태운 재만 관에 들어 있다.
인조3년(1625) 11월 15일에는 홍살문, 정자각에 불이나 완전히 타버렸다. 능참봉과 능수호군은 하옥되었다. 그 다음 해 2월 4일, 2월 15일 연이어 능상에 불이 났다.
ㅇ 아들 연산군이 모신 선릉
선릉, 즉 성종의 능은 아들 연산군이 모신 능이다.
1494년(성종 25) 12월 24일 38세의 나이로 성종이 승하하였고, 1495년(연산군 1) 1월 14일 묘호를 성종, 능호를 선릉이라 하여 같은 해 4월 6일 지금의 선릉 자리에 안장하였으며, 그로부터 35년 후인 1530년(중종 25) 8월 22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경복궁에서 6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고, 같은 해 10월 29일 선릉에 예장되었다.
선릉은 동원이강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왼쪽 언덕에는 성종의 능, 오른쪽 언덕에는 2계비 정현왕후의 능이 배치되어 있다.
성종의 능침 봉분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웠다. 능에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세조의 유교에 따라 세조의 광릉 이후에는 세우지 않았던 병풍석을 성종의 선릉에 다시 세운 것이다. 그 밖의 상설은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장명등의 양식은 태종의 헌릉을 본떴으며, 문석인과 무석인의 얼굴은 극히 사실적이나 몸집이 크고 입체감이 없다. 왼쪽 언덕의 왕비 능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만 돌려져 있고, 석주의 윗부분은 초기 난간의 부드러운 맛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성종릉의 문무석인이 윤곽이 굵고 강직하다면, 왕비릉의 문무석인은 그 윤곽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어우동(어을우동) 스캔들
종친인 태강수 이동과 결혼했다가 소박 맞은 여인. 이동은 세종의 둘째형 효령대군의 다섯째 아들의 서자였다.
소박 맞았으나 법적으로는 계속 왕실의 부인으로 남아 있으면서 시중의 뭇남성들과 어울려 결국 간통사건으로 조정에 올려진 후 사형에 처해 진 어우동.
성종과 스캔들이 있다는 說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음.
<전해 들은 얘기로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올릴때 가장 걱정이 이곳 선정릉이었다고 한다. 왕릉 지척까지 도로가 생기고 건물과 주택이 들어서 결격사유가 되면 어쩌나 하였는데 이 근처 땅값을 들은 관계관이 오히려 선릉을 잘 지킨것이라고 격려하였다는 후문이다.
선정릉을 답사한것은 작년 8월, 매우 덥고 비도 많이 내려 여기저기 훼손된곳이 많았다. 선릉입구 홍살문....>
<배위가 큰 돌 하나로... 정자각 뒷편으로 라마다 호텔이 꽉 막혀 보인다.>
<오른편으로 보이는 수복실... 왼편의 수라간은 보이지 않는다.>
<비각..... >
<정자각에 오르는 동계(東階)... 신도와 어도가 소맷돌만 차이날 뿐 대동소이하다.>
<정자각 뒷문으로 바라 본 풍경... 동원이강릉으로 왕릉과 왕비릉이 좌우로 있어 정면으로는 숲속으로 신도만 보인다.>
<동원이강릉이지만 세조의 광릉처럼 완벽한 V자형 나비모양은 아니며, 왕비릉이 왕릉보다 뒷쪽으로 멀리 있다.>
<왼편으로 보이는 왕릉... 앞쪽으로 예감이 보인다.>
<정자각 뒷문으로 이어지는 신도... 작지만 神橋라고 부른다.>
<정자각 뒷쪽으로 이어지는 신도가 오솔길처럼 보인다.>
<왼쪽 왕릉으로 다가가 올려다 본 모습... 바깥세상 교회 십자가가 보인다.>
<왕릉에 올라서 정자각을 내려다 본 모습... 테헤란로와 삼성동 지역 마천루가 빼곡하다.>
<성종 왕릉 전경... 세조이후 사라졌던 병풍석이 보이고 난간석이 둘러쳐져 있다.>
<문석인.... 아까 올려다 보였던 십자가 배경이 이색적이다.>
<무석인은 고층빌딩을 배경으로 서 있다.....>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 귀면상을 새겼다.>
<곡장 안쪽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각각 2쌍씩... 망주석에는 귀(耳) 모양의 세호가 보인다.>
<장명등... 뒤로 혼유석과 봉분이 보인다.>
<왕비릉으로 가는 길.... 신도로 보이는 길이 많이 훼손 되었다.>
<왕릉은 능침까지 올라가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으나 왕비릉은 근접까지만 다가가되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왕비릉 전경.... 많이 내리는 비에 대비하여 봉분을 보호중이다. 병풍석이 없다는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본 왼쪽 무석인... 어깨위로 이끼가 피어 있다.>
<맞은편 무석인 모습....>
<장명등과 문석인....>
조선왕릉 40기 완답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그중 유독 선정릉만은 근접확인을 할수 없었다.
규정이나 절차는 무시하고 '우리 소장님은 누가 와도 허락을 안합니다.'라는 관리소 직원들 반응에
제한구역 출입과 답사공부를 위한 사진촬영을 신청하러 갔던 발길이 무색해졌다.
중종의 정릉은 더더욱 볼수가 없어 멀리서 바라보는것에 만족해야 했다.
주의사항을 환기시키면서도 친절한 안내로 신청에 따른 허가를 내주던 다른 관리소들과는 전혀 다른곳이다.
그것도 안되는 이유가 '우리 소장님이~'라니?... 선정릉은 관리소장 사유재산인가?
그런 공무원들에게 세금으로 봉급을 주는것이 참으로 아까웠다.
문화재청 예하의 관리소인데도 유독 선정릉만은 성격이 다른 인허가 관청인듯 했다.
그런데 월정기권 판매나 주차장 사업, 경내의 매점사업등은 무척 열심인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데 따른 자긍심과 우리 문화에 대한 늦깎이 공부에 나선 4~50대들의 열정에
긍정적이고 전향적인 안내를 기대해본다.
날씨가 좋아지면 선정릉을 한번 더 가 볼 요량이다.
< 계 속 >
|
첫댓글 한번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꼼꼼한 기록과 설명이 소설책 보다 흥미롭네여... 감사합니다...
평상시 부실한 공부를 샵님땜에 채울수 있어서 고맙다는 말씀드립니다.
선릉에 가 보았는데.정말 관리소가 옥에 티였음 옛날 배집으로 기와로 고품으로 지었으면 더욱 빛날것을
세멘벽돌로 지워저 있어 많이 실망했삼-- 문화유산 등재 되여있다고 하면서 관리는 엉망이라
일본 관광각과 같이 하면서 눈빛이 -- 정말 .낮뜨거워. 참배하는.길. 줄 처 놓은 것하며 .그개무어냐 ?
부꾸럽고 .얼굴 뜨거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