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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 (요한복음 11 : 25)
[출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 (요한복음 11 : 25) (예수마을선교회) |작성자 뚝심이
믿는 사람이든지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를 불문하고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의 영원불변한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예수 부활자체를 부인하는가 하면 온건한 입장의 사람들일지라도 부활이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부활 전의 몸과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등 무성한 의심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예수 부활 사건은 한편 구석에서 된 일이 아닙니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친히 게바에게 보이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나타나셨고 열 두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500여 형제들과 야고보에게 나타나셨으며 자신의 부활을 40일 동안 친히 증거 하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신에게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복음에 부활이 없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생명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생명은 생명됨의 표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 생명은 지금 이 시간에도 죽음을 호령하고 있습니다.
Ⅰ.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생명의 주체 입니다.
1) 예수는 죽은 한 소녀에게 부활을 명했습니다.
마가복음 5장 41절에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소녀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었습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이것은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의 딸을 지극히 사랑했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동시에 예수님의 치유의 권능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야이로는 허탈감에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아버지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했습니다(막 5:36). 그 집에 도착한 예수님은 죽음이란 참혹한 정체 앞에 딸의 생명을 빼앗기고 울고 있는 통곡의 장면을 목도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마가복음 5장 39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 40절에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슬피우는 자들을 그 방에서 밖으로 다 내어보내신 후에 그 소녀의 부모와 제자들을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열 두살난 어린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명령입니다.
주님의 명령 앞에 반응은 즉각적이었습니다. 소녀는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주님은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심으로 많은 사람 앞에서 부활을 확증해 주었습니다(막 5:42-43).
죽은 자를 소생시켰던 이적들은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엘리사가 수넴여인의 아들을 회생시킨 것이나(왕하 4:32-37) 바울이 유두고를 살린 사건이(행 20:7-12)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기적을 나타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써 죽은 아이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 어린 딸을 데려갔던 사망의 정체는 침묵하고 말았습니다. 사망의 정체를 내어쫓은 그 집은 부활의 기쁨으로 인하여 넘치는 즐거움과 행복을 다스리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2) 예수는 죽은 한 청년에게 부활을 명했습니다.
누가복음 7장 14절에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나인성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인성은 가버나움에서 하룻길의 거리에 위치한 곳이며 그 부근에는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던 곳인 수넴지방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한 과부의 독자였습니다. 지금 이 과부의 아들은 죽은 시신이 되어 관속에 담겨서 공동묘지로 운반되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이 성으로 들어가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사망과 부활이 마주치고 있는 순간입니다. 죽음과 마주친 부활은 마침내 죽음을 호령하였습니다. 주님은 죽음에게 빼앗긴 아들로 인하여 슬퍼하는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 과부에게는 죽음이 원수였습니다. 그녀는 이 죽음의 원수에게 아들을 빼앗겼습니다. 예수님은 아들을 빼앗긴 과부를 향하여 울지 말라고 했습니다(눅 7:13). 그리고 주님은 가까이 오셔서 그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사망을 향하여 호령했습니다. 부활의 생명이 죽음을 삼켜버리는 시간입니다.
그 결과 누가복음 7장 15-16절은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의 능력이 사망 앞에 유감없이 발휘되고 말았습니다. 이 과부는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부활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3) 예수는 죽은 나사로에게 부활을 명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3-44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나사로는 베다니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도움'이란 뜻입니다. 베다니는 "베이뜨" 즉, '집'이라는 명사와 "아니" 즉, '슬픔'이라는 명사의 합성어입니다.
'슬픔의 집'에서 살았던 나사로였습니다. 그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하는 자였습니다(요 11:3). 예수님은 나사로를 친구라고 했습니다(요 11:11). 그는 병으로 마침내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가리켜 잠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죽은지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냄새가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친구 나사로를 깨우기 위하여 나사로의 시체가 안치된 무덤의 입구를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를테면 사망의 무덤 앞에 부활의 생명이 당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망을 향하여 큰 소리고 "나사로야 나오라!!"고 했습니다. 죽어서 나흘이나 되는 썩어서 냄새가 나는 완전 사망의 정체를 향하여 호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 내 부활을 명받은 죽은 나사로는 수건을 동인 채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개인을 지명하여 불렀습니다.
그 공동묘지에 있는 시체들을 다 불렀다고 하면 다 일어날 것인데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최후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부활의 본질을 알려주기 위하여 나사로 하나만을 부활시켰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활을 명령할 때 수건을 동인 것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겠다든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썩어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일어설 수 없다든지 하는 것은 나사로 편에서의 사정이고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일어나라'고 하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바로 신앙세계입니다.
성경이 죽은 시체가 부활한다고 하면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이나 과학으로도 증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슬픔의 집 베다니는 이제는 베다니가 아니라 기쁨과 환희의 잔치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온통 베다니입니다. 이 세상은 슬픔의 집입니다. 괴로움의 집입니다. 그 슬픔의 집에서 부활 생명의 잔치를 배설하는 곳이 오늘의 교회입니다.
Ⅱ.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는 자들 의 구원을 확증했습니다.
1) 믿는 자들의 의(義)의 본질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2) 믿는 자들의 영화의 소망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부활의 소망이 사라지면 모든 구조는 결단이 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3) 믿는 자들의 승리의 힘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57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4) 믿는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5)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23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라고 했습니다.
6) 믿는 자들의 부활을 보장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우리의 구원은 죄를 속하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최종적으로 그의 부활에 의하여 완성되었다."라고 했습니다(로마서 주석 p.102).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우리 각자의 부활의 확실한 보증을 가질 수 있습니다.
Ⅲ.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역 사의 절정입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하는 말에 우리는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너무 막연합니다. 역사란 어떤 이상을 현실화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역사란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화 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역사의 꽃이자 절정이 분명합니다.
1) 믿는 자들에게 승리한 부활이 되게 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부활에도 실패한 부활이 있고 승리한 부활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전자는 심판의 부활이고 후자는 생명의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승리한 부활이 되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1) 예수께서 우리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9절에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9-11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2)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인정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4절에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했습니다.
2) 신약시대 교회 시작의 절정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지상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초 위에 세워졌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예수 부활 승천 이후 임하였고 이것은 바로 교회 출생의 기원이 되었고 교회 출생의 멤버는 사도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이후 본격적으로 복음전파를 시작했습니다.
3) 복음전파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4-15절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부활 사건은 신약시대 교회의 혁명적인 메시지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부활 사건 때문이 아니라 예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부활 사건은 왜 혁명적이지 못하고 전설처럼 쓸모 없는 이데올로기로 취급당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 부활 사건을 믿고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은 그의 죽음 자체를 화려한 승리로 장식했습니다.
예수 자신이 심판의 주시요 구원의 주이십니다. 구원의 수단이 구속이라고 할 때 예수는 구속 자체입니다. 예수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예수 자신이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첫째 부활인 영적 중생입니다(요 5:25).
그리고 마지막 날에 생명의 부활을 약속받았습니다(요 5:29). 이것이 둘째 부활인데 영원한 부활입니다(롬 8:23). 예수 그리스도만이 부활을 명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안에 있는 자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제2아담) 안에 있는 자는 부활과 영생을 보장 받은 행복한 자입니다.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날 때 구차한 이유는 소녀 편에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세계는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결국 소녀는 일어나는 순서밖에 없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면 이 청년은 일어나는 순서만이 있을 뿐입니다.
"내 친구 나사로야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서 베다니를 걸어나와 가족과 함께 이 세상 괴로움의 집인 베다니 한 복판에서 예수를 위하여 가족들과 함께 부활감사의 잔치를 하는 순서밖에 다른 순서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역사는 기독교를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기를 쳤다고 할 것입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속았고 지금도 지구상의 기독교인 38 % 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확실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땅에서의 삶이 의미가 있습니다. 이유는 영원한 하늘 나라를 준비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선하고 착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나라가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인정되었습니다.
예수 부활로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 확증되었습니다. 예수 부활은 기독교 역사의 절정이 되었습니다.
칼빈(Calvin)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의 부활의 향기는 나드유와 값비싼 약이 없어도 온 세상을 살릴 만큼 충분한 효력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고린도전서 15장 20절~28절 | | | 절기설교 |
2008.08.27 09:54 |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고린도전서 15장 20절~28절
김찬종 목사
기독교는 예수님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셨습니다. 그 날을 축하하는 날이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날을 기억하는 것이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장사지내셨다가 사흘만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날을 축하하는 것이 부활절입니다. 오늘입니다.
죽음은 슬픈 것입니다. 비극입니다. 두려운 것입니다. 불길한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죽음은 연기할 수 없습니다. 죽음에는 항거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죽음은 영원한 이별입니다. 아무리 의술이 뛰어난 의사라도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없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대영제국의 의술이 총동원되어도 자신의 죽음을 막을 수 없게 되자 “내 생명을 촌각만이라도 더 연장해준다면 100만 파운드를 주겠다”며 안타까워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70년 동안이나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부와 명성을 누려왔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광대한 제국을 다스렸었지만 그도 죽음 앞에는 손을 들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인간이 얼마나 부했던지, 명성과 인기가 있었던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죽음의 날에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에게 맡길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죽음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의 장’이라고 합니다.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고 자세하게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을 중심하여 부활의 의미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의 특성입니다. 본문 20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같이 죽었다가 살아난 여러 사람의 기록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열왕기하 4장에는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방금 죽은 회당장의 12살 먹은 딸을 살린 기록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죽어서 상여가 나가는 것을 멈추시고 청년을 일으키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죽어서 무덤에 장사 지낸 나사로를 무덤까지 가셔서 살리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사도는 구제에 힘쓰던 다비다(행 9:40)를 죽음에서 일으켰습니다.
바울은 졸면서 자신의 설교를 듣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행 20:9-12)를 살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살아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는 다릅니다. 이들은 일시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것뿐입니다.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죽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로마서 6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그들이 살아난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렇게 뚜렷하게 다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영체가 되셨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이 되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갈보리 산상에는 십자가가 세 개 세워졌습니다. 가운데 십가가가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양 옆에는 살인 강도짓 하다가 잡힌 자들이 있었습니다. 세 사람이 같이 사형집행 당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주님만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전에 없었던 사건입니다. 인류 최초의 부활입니다. 부활의 주인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최후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간계를 물리친 승리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흉계를 꾸며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로마정권의 압박을 이긴 표적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여 무덤에 장사지내면 끝날 줄로 알았으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사 로마정권의 압박을 물리치셨습니다.
마귀의 세력은 예수님을 죽게 하고 무덤에 장사지낸 것을 보고 축배를 들었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부활로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생의 깊은 욕구에 대한 해답입니다. 지구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상대성 원리’에 의해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간에게 눈이 있는 것은 보아야 할 물체가 있기 때문이고 귀가 있는 것은 들어야 할 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배가 고픈 것은 먹을 것이 있기 때문이고 목이 마른 것은 먹을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 원치 않는 죽음이 온다는 것은 그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저주받아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장사지냈습니다.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아담의 후손은 누구나 이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유교를 만든 공자도 죽어서 중국 창평향에 무덤을 남겼습니다. 불교를 만든 석가모니는 인도 살수산하에 무덤을 남기고 있습니다.
중동의 건설현장에 우리나라의 독실한 기독교인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같은 직장에서 일하던 이슬람교도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이 모슬렘은 자기가 믿는 이슬람교에 대해 자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며 엄한 규율대로 살고 메카를 순례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이슬람교의 큰 자랑은 메카에 있는 모하멭의 무덤입니다. 너희 교주 예수의 무덤은 비어있지만 우리 교주의 무덤은 굉장히 웅장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모하멭의 아름다운 분묘, 이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이 말을 들은 크리스챤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차이입니다. 모하멭이나 다른 종교의 교주들은 모두 죽어 무덤에 묻혀 썩어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지 사흘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빈 무덤입니다.”
제가 성지순례차 예루살렘에 갔을 때도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를 믿는 사람의 죄는 모두 용서해주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믿는 자들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확증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장 10절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복입니다. 죄에서 죽고 의로서 살으신 것입니다.
찬송가 156장을 소개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1절 싸움은 모두 끝나고 생명의 승리 얻었네
개선가를 높이 부르세 할렐루야
2절 사망의 나라 권세를 주께서 깨드리셨네
승전가 높이 외치세 할렐루야
3절 슬프던 사흘 지나고 주께서 살아나셨네
영광을 주께 돌리세 할렐루야
4절 사망의 문을 잠그고 생명의 문을 여셨네
부활의 찬송 부르세 할렐루야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본문 22절과 23절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문제는 그리스도가 아무리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더라도 나와 관계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어야 하고 주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죄 씻음이 있고 천국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을 그가 쓴 편지에 164회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성도들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먼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체험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말합니다. 율법에 충성을 다했던 그는 다메섹도상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3일 동안 소경이 되었고 3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눈이 뜨여졌습니다. 육체의 눈과 함께 영의 눈도 뜨여졌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결합된 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결합했다는 말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호흡하며 그리스도 중심으로 일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아침에는 예수로 잠을 깨게 하시고
저녁에는 예수로 잠을 자게 하소서
예수여 내주여 내 중심에 오셔서
예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된 자의 삶의 고백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와 함께 나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아담이 가진 요소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는 우리들 개인, 개인의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그 체험이 우리들 구원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민족적인 장벽이 있을 수 없습니다. 피부색깔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직업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귀한 직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의 신성을 이해하고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주님은 복을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죄인이던 죄인이 아니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인도 예수님은 용서했습니다. 탐관오리로 세상을 살던 여리고의 세관장 삭개오도 그의 회개를 보시고 주님은 복을 주셨습니다. 평생을 살인 강도짓을 한 죄수가 마지막 죽는 순간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 천국을 약속하시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는 자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뉘우치면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죄는 아담 안에 있을 때 지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 그 죄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구속의 주가 되셨습니다. 대속의 주가 되셨습니다. 인간이 고민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 모든 일을 마치시고 주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 말은 우리들도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삶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 23절은 말합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리스도께 붙었다’는 말은 그에게 속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부활할 수 있다는 기쁨의 소식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눈물을 거두게 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가 승리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 값으로 모든 인간이 당하는 죽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날입니다. 누구에게 이 복이 주어집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됩니다.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면 됩니다. 주 예수님 부활을 축하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이 놀라운 복이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고린도전서 15장 20절~28절 (예수마을선교회) |작성자 뚝심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로마서 6:6-14)
임정석 목사
지난 주간 헨리 나웬의 『죽음 가장 큰 선물』란 책을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Our Greatest Gift』by Henry J. M. Nouwen)
책을 읽는 가운데 이번에 다시금 깊이 깨달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란 정말 귀한 큰 선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죽음이란 선물이 아니라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정말 귀한 선물입니다. 한번 보실까요?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선물입니까 비극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분명히... 선물입니다.
하나 더 묻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는 것은... 나에게 선물입니까 비극입니까?
이것 또한 분명히... 선물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죽음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앞장인 로마서 5:15-16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된 나의 죽음은.. 모든 것을 다 끝내는 것이 아니고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서
예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었고...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기 때문에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나의 죽음이라고 하는 이 두 죽음은 귀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사건이요 실화라고 하는데도 내용이 너무나 엄청나서..
그 내용이 사실인가 아닌가 아직 확인은 못해보았지만
믿을만한 분이 말씀한 것이기에 이 시간 잠시 옮겨보려고 합니다.
한 살인범이 재판정에서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형 되는 사람은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분이요 고위층에 있으면서
나라를 위해서 공헌을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형은 자기 동생이 죄를 짓고 곧 사형장으로 가게 될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체면 불구하고 견디다 못해 대통령을 찾아가 동생을 사면(赦免)해달라고
간절히 간청하니 대통령은 이 분이 그동안 나라를 위하여 공을 많이 세웠기 때문에
사면을 허락하고 이에 형은 사면장(赦免狀)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동생을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동생을 만나 사면장은 보여주지 않고 이렇게 묻습니다.
"야, 네가 만일 사형을 당하지 않고 대통령의 사면을 얻어 특별히 석방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겠냐? 만일 말이다..."
형은 생각하기를.. 자기를 사면해준 대통령을 찾아가 감사한다고 말한다든지
아니면 다시는 죄 짓지 않고 한번 멋있게 살아보겠다든지.. 그럴 줄 알았는데....
동생의 대답은 전혀 의외였습니다.
"만일 내가 사형 당하지 않고 대통령의 사면을 받아 이 감옥을 나가게 된다면
나가는 즉시... 내게 사형 언도를 한 그 판사를 찾아가 죽이겠습니다.
그리고나서는 나를 이렇게 사형 받을 수 밖에 없도록 불리하게 증언해준 증인들을
모조리 다 죽이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형은 마음이 너무나 아파서 아무 말 없이 감옥을 나와서는
대통령에게 받은 그 사면장을 찢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아니! 사형수가 사면을 받으면 먼저는 사면해준 대통령을 찾아가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그 다음엔 다시는 감옥에 들어가지 않도록 바르게 살아야지.. 그게 무슨 말이람....!"
아마도 대부분은 이런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옳은 느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살아가는 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어야할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예수 십자가 보혈로 특별 사면해 주었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답게 감사치도 아니하고.. 또 바르게 살지도 않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요..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로마서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을 알기는 알지만!... 알면서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며!..
이 사형수처럼.. 생각은 허망하여져서... 미련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거듭났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미련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될 것인가?
이것이 과제인데... 여기에 대해... 오늘의 본문 12-14절 세 절은 우리에게 분명히!!...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계속 사면(赦免)의 은혜와 은총 속에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쉽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는 그 길을 가야만 하는데!!...
그 길을 잘 걸어 갈 수 있도록 제시해 놓은 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 갈 수 있는 길을 4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6-7절 자기 자신이 어떻게 다시 살게 되었는지 분명히 알고 살아가라!
둘째 8-9절 자기 자신이 어떻게 다시 살게 되었는지 분명히 믿고 살아가라!
셋째 10-11절 자기 자신이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분명히 여기고!!... 살아가라!
넷째 12-14절 자기 자신을 다시는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가라!
이 4가지를 중심 개념으로만 살펴보면... "알라" "믿으라" "여겨라" "드리라"...
이렇게 4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이 4가지를 하나씩...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본문 6-7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의 옛 사람으로서
이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히고 나서!! 그 다음에 우리가!!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6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옛사람은 죽었고!!... 못도 박았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다시는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아니하려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고 났더니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이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십자가에 못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살다보면.. 이것이 종종 다시 살아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가끔씩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옛 사람을 온전히 죽이지 못했거나...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못 박은 그 못에 스스로 손을 대어... 옛 사람을 살려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 옛사람!!.. 이것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거나!!
못 박은 채로 계속 두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산 자답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5:24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다시 산 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그 옛 사람을!!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본문 8-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 줄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게된 삶은 일시적 삶이 아니라 영원한 삶인 것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기 때문이며!!...
다시는 사망이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망이... 다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함으로서
우리는 비록 약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까지도 사망이 주장하지 못할 줄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게 되면...
사망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곧 영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까지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부터 나를 주장하게 될 나의 새 주인은... 죽음이 아니라!!... 영생입니다!!
(My new master is the eternal Life, not death!)
믿습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5:24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또 요한복음 11:25-26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는... 바로 이것을 굳게 믿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다시는 사망이 그 생명을 주장하지 못하게 될 줄... 믿습니다!!
세 번째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는 무엇을 분명히 여기고 살아가야 하는가?
본문 10-11절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여기에서 중요한 말씀은 "여길찌어다"라고 표현된 말씀인데
이 "여기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간주하라".. "그렇게 알라"는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여기라"는 말이란 "의식화(意識化)"하라는 말이다!!...
이렇게 해석했는데... 참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거지가 왕자로 입양되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신분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고.. 또 그렇게 여기고 살아야 하는데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이 부분을 의식화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거지가 아니고 왕자다!!... 나는 거지가 아니고 왕자다!!...
이해가 되십니까?
나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다!!...
나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다!!...
적어도 이런 하나님 자녀 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의식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분명히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았거나...
아니면 정말 죽을 몸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다시 살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온전히 죽은 자로... 여기며 살지 못하고
가끔씩 죄를 짓던 과거를 회상하거나... 그때가 좋았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몸은 다시 산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아직도 다시 산 자가 되지 못하여
현재와 과거를 왔다갔다하며... 적당히 줄타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래서...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성향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정말 자기 자신을 온전히 쳐!!...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고!!
그리스도 때문에 다시 산 자답게... 정신도 온전히 복음으로 의식화시켜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며!!
그렇게..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네 번째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는 자신을 어디에 드리며 살아야 하는가?
본문 12-14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생명은... 사실 공짜로 얻은 생명, 덤으로 얻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것인데... 그렇게... 덤으로 생명 얻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기 맘대로 살지 말고!!.. 생명을 다시 주신 자를 기쁘게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원리인데... 오늘 본문도 이 점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드리지 말고... 드리며... 드리라!!
사람들 가운데는 죽어도 벌써 죽었을 생명이... 간절히 기도하여 다시 살아나기는 났지만...
다시 살아난 다음에는...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이... 혹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의 자세는... 바람직 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는 어떻게 살아야 바람직한 삶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시 얻은 그 생을... 그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드린다"는 말은 "바친다" "헌신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N.I.V. 성경에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Offer the parts of your body!!
무슨 말씀입니까?
다시 살게 된 나의 모든!!... 부분을!!... the parts of my body를!! 주께 다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전혀... 섭섭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었던 목숨! 이미 죽었던 모든 것! 사실 그것은 이미!! 다 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시 살게 된 지금, 다 드려도 전혀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시간, 나의 재산, 나의 취미, 나의 건강, 나의 모든 것....
그러나 사람들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는 말처럼!!... 어려울 땐...
"아이고 하나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이렇게 해놓고..
다시 살려 주면...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하는 식으로... 태도가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게된 자는 이것 저것 재지 말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모든 부분을 다 주님께 드리되...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하면...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도 의의 병기로!!... 물질도 의의 병기로!!... 취미도 의의 병기로!!... 재능도 의의 병기로!!
모든 것을 다.. 의의 병기로!!...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게 된 이후...
나의 신분이 어떻게 변화된 신분인지 알고 믿고 여기고 부단히 노력하며 산다고 할지라도!!
세상에는 여전히 사탄 마귀가 활동하고 있어서 우리를 공격하거나 유혹할 수 있기에!!...
우리는 더욱더 우리의 시간과 물질, 직업과 재능, 건강과 취미, 모든 것을 다!!...
의의 병기로 승화시켜서 하나님께 드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드리라"는 단어의 원어적(原語的) 의미를 살펴보면...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가 되었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의 모든 것을 한번만... 주님께 드려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다음에는 내 맘대로 사는!!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드리고"... 앞으로도 "드리고"... 또 미래에도 계속 "드리게 되는"...
계속적이며... 지속적이고... 또 반복적인 "드림"의 의미를 가진 동사(動詞)라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최근 출판된 책 가운데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Change Is Everybodys Business by Patricia Mclagan)
말하자면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내일부터 열심히 공부해야지.. 내일부터 바로 살아야지.."
이렇게 항상 결심만 하지.. 바뀐 것은 하나도 없기에... 바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바보요.. 남이 보아도 바보입니다.
항상 결심만 하고 실천이 없으니 그렇습니다. 우린.. 그런 바보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본문 12-14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예수 부활하셨다 / 막 16:1-11 | | | 절기설교 |
2008.08.27 09:51 |
[출처] 예수 부활하셨다 / 막 16:1-11 (예수마을선교회) |작성자 뚝심이
죽음 없이 부활은 없다 갈2;20, 고후 4;10-12
어떤 사람이 깊은 산 속에 들어갔다가 산불을 만났습니다. 산불이 멀리서부터 포위해 타들어 오고 있습니다. 꼼짝없이 타죽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살아날 길을 궁리하다가 주머니에 성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기가 있는 자리에 불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불탄 그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그 불이 점점 퍼져 나가다가 포위해 들어오던 산불을 만나니까 더 이상 산불이 타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탈것이 타버렸기 때문입니다.
1. 죽음을 정복하는 길은 죽음입니다.
이와 같이 죽음을 정복하는 길은 죽음인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들어온 죽음은 인생의 제일 큰 원수요 마지막 원수인데 이 죽음을 정복하고 생명과 부활을 주시기 위해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하셨습니다. 마치 산불이 포위해 들어올 때 불을 먼저 놓아서 그 안에 들어가서 안전하게 살게 된 것 같이 예수님이 우리대신 죽어 주시고 우리대신 심판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고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예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어 주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시고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영생을 얻고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되고 죽음이 없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12장2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사망의 종이 되었던 우리가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영생을 얻게 되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죽음을 정복하려면 죽음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10장3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2. 죽음을 거쳐야 부활이 옵니다.
반드시 죽음을 거쳐야 영광의 부활을 얻게 됩니다. 죽지 않고 죽음을 거치지 않고는 우리도 부활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①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음을 알아야 하고
② 우리도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죽을 몸도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3절 이하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③ 과거에 죽은 자 같이 살아야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같이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 속에서 마치 과거에 죽어서 천국에 갔다가 지금 부활해서 돌아 온 것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천국에 갔다온 한 사람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린도후서12장2절)고 했는데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후부터 바울은 죽었다가 산 것처럼 모든 세상 사물이 이전과는 달리 보였습니다. 전에 소중히 보이던 것이 분토와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쉴 틈 없이 복음만 전하다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전에 설 때 세상 것은 도무지 찬양 할 수가 없고, 세상에 대해 집착하지 않을 수가 있었고, 세상의 압력도 두려움 없이 분쇄할 수가 있었고, 세상의 부귀와 권세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것과 족히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와 같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11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즉 이 성경책 안에 들어 있는 주보 순서지는 이 성경이 부산에 가면 이 주보도 부산에 가고, 이 성경이 미국에 가면 이 종이도 함께 미국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로 여기며 순간 순간 살아야 합니다. 죽지 않고는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죽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 소용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죽지 않은 옛사람은 아무리 잘 나고 착하고 재주 많고 지식이 많아도 하나님께는 무가치 한 것입니다. 아담 안에 있던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조지 밀러(George Miller)씨는 큰 진리를 깨닫고 말하기를 "나는 어떤 날 죽었습니다. 조지 밀러에 대해서도 죽고, 세상이나 친구들의 칭찬이나 책망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욕을 해도, 꼬집어도, 송곳으로 찔러도 모르는 것처럼 우리 옛 사람은 죽었다는 믿음으로 살 때 불쾌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또 칭찬 듣는다고 우쭐하거나 교만 할 것도 없고, 책망이나 비방을 듣는다고 실망하거나 불쾌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같이 한번 입으로 시인합시다. "나는 죽었다." 자기 이름을 넣어서 "0 0 0는 죽었다." 이제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몸인데 칭찬 들으면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면 되고, 불쾌한 일이나 근심거리가 있으면 그것도 주님께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불안해 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고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장20절)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옛사람이 자꾸 사느냐 하면 TV의 전기 코드가 늘 꼽혀 있지 않고 뽑히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긴장에서 풀리면 옛사람의 성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하시면서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금방 시들고 마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칭의와 구원은 단번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져 변함이 없지만, 이 새사람의 생활 즉 성화(聖化)된 생활은 순간 순간 믿음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져 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성화된 성도라도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자라는 믿음의 긴장 속에서 풀어지면 죄악의 옛 성품이 다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13절에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는데 "드리라"는 말은 영어로 "yield"로서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3. 내가 많이 죽으면 남을 많이 살립니다.
"죽으면 한번 죽는 것이지 많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즉 내가 희생하고 죽어지는 범위가 넓고 시간이 길면 그만큼 나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고 살아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10-12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에 넘기움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고,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하느니라 한 것은 우리가 많이 죽을수록 다른 사람이 많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 갈 때에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물이 갈라졌고 그들이 요단강 한복판에 굳게 버티고 서 있을 때에 많은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제사장들이 강에서 올라오자 요단강이 합해져서 아무도 건너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요단강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제사장들 즉 교회의 지도자들이 죽음 한 가운데 굳게 버티고 서 있을 때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어 가나안 땅 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내가 많이 죽을수록 남을 많이 살릴 수가 있습니다. 영혼구원 사업은 누구의 말대로 생명놓고 생명을 따먹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려면 우선 주의 종들이 희생하고 죽어지는 생활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죽는 일이 없이 사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부흥은 멋진 설교를 흉내내서 그대로 한다고 해도, 큰 꿈을 가진다고 해도, 진실한 희생과 죽어지는 생활 즉 자기부인(Self Denial)이 없으면 생명을 살리는 역사, 부흥의 역사는 안 일어납니다.
죽음을 거쳐야 나도 살고 남도 살리게 됩니다. 죽음을 거치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2장24절 말씀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한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 많은 죄인들이 살아나게 될 것을 의미 하지만 이 말씀은 또한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한 알의 밀 알갱이가 낮은 땅속으로 떨어지기 싫고 습기차고 냄새나는 땅속에 썩어져 죽기 싫어해서 가만히 있으면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죽는 것이요 많은 생명의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이 생명이 살아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출처] 죽음 없이 부활은 없다 갈2;20, 고후 4;10-12 (예수마을선교회) |작성자 뚝심이
할렐루야 !!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은혜를 사모하여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말씀을 통하여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라 하는 동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한푼어치의 소망이라든가 희망이라곤 찾아 볼 수 없이 낙심과 실망에 빠져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터벅 터벅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제 나름대로 지난날들의 추억들을 하나씩 회상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었습니다.
이젠 예루살렘에도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자칫하면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예수님과 같이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피신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찬란하고 영화로웠던 날들이었습니까? 수천 수만명이 옹위를 하며, 가는곳마다 이적과 기사가 일어나고, 5병2어의 기적을 비롯해서, 바리새인과 대제사장 서기관들의 끈질긴 질문에도 무난히 척척 대답하심으로, 예수님을 따라 다닐때의 그 우쭐하던 마음과, 호산나를 부르는 환호성속에 승리의 입성을 하실 때는, 금방이라도 로마제국의 구속에서 해방을 시켜, 유대나라의 왕이 되며, 제자들은 한자리씩 높은 지위를 었겠노라는 소망도, 하루 아침에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심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젠 더 이상 희망이라고는 바랄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목숨이라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방치해 두었던 고깃배와 그물을 수리해서 고기를 잡아야 묵구멍에 풀칠이라도 할 수가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직장을 찾아야만 합니다. 이렇한 심정으로 그들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장사지낸지 사흘째 되는날 아침에 말로만 듣던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 사람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들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근심이 변하여 찬송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통이 변하여 즐거움이 죄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가 변하여 평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만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속의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우리 인생의 실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들이 죄로 인하여 소망이 없을 때에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간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 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은 낙망과 실망중에 빠져서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신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함께 은혜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두 사람중에 한 사람은 글로바 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또 한사람은 이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 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 사람은 바로 본 누가복음서를 기록한 누가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이 대목에 와서 그때 당시 자신의 믿음없었던 것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이름 밝히기를 고의로 회피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여행은 낭만과 꿈이 있는 즐거운 관광여행이 아닙니다. 기다려주는 이도 없고 그렇다고 약속된 장소로 찾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히 발걸음이 무거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습니다. (눅13:33)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루살렘을 떠났다가 화를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①룻기에 나오는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었다고 이방나라 모압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가서 아들 둘을 결혼까지 시켜 잘살아 보려고 했지만 남편도 죽고 아들 둘도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나오미는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에 축복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②왕상2:36절이하의 말씀에는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시므이는 다윗왕이 난리를 피하여 피난을 갈 때에 다윗을 욕하고 저주하였으나 나중에 다윗이 환궁을 할 때 용서를하여 주었습니다. 그후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위를 이어 받았을 때에 솔로몬은 시므이를 불러 예루살렘성을 떠나지 말 것을 명령하였고 시므이도 그렇게 하기로 하였으나 몇 년이 지났을 때에 시므이의 종 두명이 도망을 갔습니다. 시므이는 솔로몬왕과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종을 찾으려 예루살렘성을 벗어났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③눅10:36절 이하에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도 강도를 만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④창12:10절에는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시험과 환란을 당하였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예루살렘이나 하나님의 성지를 떠났다가 환란을 당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눅2:36절에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는 주야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기도하다가 결례받으러 오신 아기 예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행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 25리라고 하였는데 아마 이들은 지금 25리가 아니라 250리처럼 지루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일들과 신변의 위협 등으로 걱정과 근심에 쌓여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으나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머리속에 생각하는 것은 주님께서 평소에 말씀하신 "인자가 이런 고난을 겪어야 영광을 얻으리라"는 것은 추호도 생각지 않고 앞으로의 살아갈 걱정으로 그들의 눈은 어두워져서 주님을 보고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사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말함이라" 또한 저들은 자기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가면서도 주님께서 자기들을 떠난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시한번 자신들을 뒤돌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눈과 귀는 하늘의 신령한 것을 보며 하나님의 신령한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입은 찬송을 불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손은 지금 남을 도와주며 남을 섬기는 봉사를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발은 하늘나라를 향하여 날마다 날마다 한걸음씩 전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죄악의 길로, 불타는 지옥으로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슴에 두 손을 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났고, 우리의 눈과 귀가 어두워져서 주님이 보이지 않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곁에 여러 분곁에 오셔서 우리와 동행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왕상 19:3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브엘세바 광야의 로뎀나무아래 누워서 죽기를 구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엘리야에게 구운 떡과 물을 주어 기운을 회복케 하시고 40주야를 걸어서 호렙산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아담과 해와는 선악과를 먹고서 죄악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 축사하신 떡을 먹고 우리의 죄악으로 가리워진 육안이 신령한 눈으로 변화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세상의 근심과 걱정과 환란으로, 재리와 염려로, 가리워진 영의 눈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만나 주님이 주시는 말씀의 떡을 먹고 밝아지는 역사가 일어 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신령한 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자에게 열려지는 것입니다. 신령한 눈이 밝아지면 모든 세계가 달라집니다. 우리 눈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그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 파란색 안경을 쓰면 세상이 파라케 보이고, 빨간 안경을 쓰면 세상이 빨갛게 보입니다)
※ 찬송가 204장 3절 주안에 있어 즐거워라 마음의 풍랑이 잠자도다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영의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죄의 유혹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진리를 보고도 진리로 믿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아무쪼록 신령한 영의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보고 따를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리교를 창설하신 존 웨슬리 목사님은 올더스케ㅇ 거리의 작은 집회에서 그의 마음이 뜨거워 졌다고 했습니다. 절망에 빠져서 길을 가고 있던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들려 주실 때에 저들의 마음이 뜨거워 졌다고 하였습니다.
(눅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마음이 뜨거워 질 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음이 뜨거워 져야 한다는 것은 비단 우리가 성령의 불을 받아서 우리의 육체가 뜨거워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의 시대를 보면 너무나 냉정하고 너무나 차가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마치 남극이나 북극의 빙산과 같이 날이 갈수록 이 시대의 사람들은 차거워져만 가고 있습니다. 인간 본연의 아름답고 따뜻함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뜨거운 사랑과, 뜨거운 열심과, 뜨거운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 시대를 Mega death 시대라고 합니다. Mega라는 것은 핵폭탄의 푹팔력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로서 1Mega=100만명을 죽일 수 있는 단위입니다. 곧 떼죽음 시대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죽어도 한 두 사람 죽는 것은 눈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수십명씩 죽어야 그제사 마음이 동합니다.
(마11: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설교를 아무리 들어도 얼어붙은 마음이 녹을 줄을 모릅니다. 뜨거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고 하였습니다. 열심(熱心)이란 뜨거운 마음을 말합니다. 뜨거운 마음이 있으면 죄를 지을수가 없습니다. 또 마음이 뜨겁지 않으면 범죄를 하여도 가책이 없습니다. 주일날 빠져도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뜨거운 마음이 없으면 신앙생활 하기가 어렵고 힘이 듭니다.
예; 자동차도 기름에 불이 붙어서 뜨거워 져야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의 마음이 뜨거워 질 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남 같이 고달픈 인생길을 가는 여러분들도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받고 뜨거워 지는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결실입니다. 두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였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옴 같이,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옴 같이,
이 두 사람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은 능동적으로 행동을 합니다. 적극적인 신앙을 갖게됩니다.
회개란 가든 길을 돌이키고 180°회전하는 것입니다. 도적질 하던 도둑이 도둑질을 끊고 죄 짖던 사람이 죄를 짖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낙심중에 세상을 향하여 가던 발걸음이 예수를 만나 담대함을 얻어 생명의 위험을 무릎쓰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은 신앙의 열매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뜨거워 질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핍박을 피하여 가다가 주님을 만나고 다시 로마로 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낙심된 자를 찾아오셔서 구원하여 주신 주님은 오늘 이 시간이 자리에도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언제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곤 하였습니다.
브엘세바 광야에서 지친 몸으로 홀로 잠들어 있는 야곱에게도 하나님이 찾아 오셨고,
새벽 미명에 성전에서 고히 잠들어 있는 사무엘에게도 하나님이 찾아오셨고,
호렙산에서 양을 치던 모세에게도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속에서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한 밤중에 풍랑으로 고통을 당할 때에도 주님은 물위로 걸어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공포와 낙심중에 질려 있던 제자들에ㄱ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면서 저들에게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요20:22)
지금 이 순간에도 앞으로 우리가 어디가서 무엇을 하던지 동행해 주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28:20)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을 멈추고 돌이켜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돌아갈 예루살렘은 처음사랑 처음 믿음으로 뜨거웠던 바로 그 순간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면 않됩니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욜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고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구하는이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자에게 도움을 주십니다. 세상에서 실패와 낙심을 하였을 때에 우리 곁에 찾아 오셔서 말씀을 들려주시는 주님을 발견하고 우리들의 마음이 뜨겁게 변화를 받아서 새사람이 되고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땅끝까지 증거하는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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