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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마오 격하"
1977년 4월 30일, 마오쩌둥 주석 사후 첫번째 당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화궈펑 주석과 덩샤오핑 총리, 예젠잉 국방부장, 리셴넨 당 부주석, 녜룽전 중군위 부주석 겸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차오관화 외교부장, 천시롄 부총리 등 당의 핵심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였으며, “동방의 붉은 별”을 쓴 에드거 스노우의 아내 로이스 휠러 스노우를 포함한 국빈들 역시 자리했습니다.
사인방이 숙청되면서 모든 파벌들은 문화대혁명의 종료를 찬성하나, 이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승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우더, 천시롄, 왕둥싱, 지덩쿠이를 위시한 보수파들(화궈펑의 측근들)은 ‘양개범시’를 내세우며 “문화대혁명이 일부 극좌 모험주의자들의 책동으로 바람직한 방향에서 어긋난 것은 맞으나 마오 주석의 원래 의도는 선의였다”는 논리와 함께 “문혁의 정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부작용만 제거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비해 개혁파들은 문혁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아예 마오 주석에 대한 급진적인 재평가를 요구합니다. 항일투쟁, 반국민당투쟁을 지도하여 신중국 건설에 앞장선 것은 고평가해야 하나, 결국 그 역시 독재자로 타락하여 나라를 망쳤다는 주장이지요.
당의 공식적인 방침을 정해야 하는 만큼,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며 나아가 마오 주석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 지 여부는 아주 중요합니다. 이번 당대회는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요?
11차 당대회의 중앙위원석에 새로 자리한 5인의 측근들은 수천명이 모인 회의장의 기류를 빠르게 훑으며 눈치를 봤습니다. 포스트 마오 시대, 새로운 시대의 기준을 세우는 매우 중요한 회의였지만, 여기서 섣불리 말을 뱉었다가는 자칫 큰 피해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죠. 회의는 왕둥싱을 위시한 보수파들이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마오 동지께서 행한 것은 모두 옳으며, 린뱌오와 사인방 등 일부 극좌 모험주의자들에 의한 곡해로 부정적 결과가 촉발되기는 했으나 전반적인 사항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공식화해야 합니다. 문혁의 완수를 선포한 이후에도 그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급진적 정책을 펼치는 것은 합당치 않을 것입니다.”
아연실색핢 만한 발언이었습니다. 문혁의 참상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이들은 절대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보수파들이 문혁의 '수혜자'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나라가 말 그대로 망하려 하는데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자랑스럽게 해대는 이들이 주석의 최측근이라는 점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화궈펑이 잠시 휴회를 선언했을 때, 류메이란이 그의 옆에서 조용히 말했습니다. "오히려 마오의 수혜를 입은 입장에서 그를 강력히 비판해야 그 효과도 배가되는 법"이라고요. 이대로면 '과감한 움직임'을 가져가려는 개혁파의 공세 앞에서 유약하고 보수적인 모습만 보일 위기에 처한 주석은 조용히 끄덕이며 이 말에 동의를 표했습니다.
재개된 회의에서, 분위기를 바꾼 것은 자오쯔양의 발언이었습니다. 그는 덩샤오핑의 심복이자 국무위원이었고, 당 중앙의 간부로서는 처음으로 양개범시론을 반박하는 발언이었죠. 화궈펑은 재빨리 그의 심복인 위안차이나에게 눈짓을 주며, 비서를 시켜 쪽지 하나를 보내게 했습니다. "펑더화이를 기억하라" 위안차이나는 그 말뜻을 빠르게 이해하고, "신중국 건설을 위해 분골쇄신한 대원로조차 사소한 비판을 이유로 핍박한 문혁을 옹호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톰페티 라마 역시 그를 지원사격했으나, 보수파들은 전형적인 '스킬'인 논점 흐리기와 허수아비 때리기로 맞받아쳤습니다. 매우 좋지 않은 토론 태도였으나, 목소리 큰 놈이 아무튼 이기는 공산주의식 토론장에서는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었죠. 모두가 그들의 페이스에 말려 사소한 지점을 반박하는 데 매몰되어 있을 때, 류메이란이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화궈펑에게 발언권을 넘겨줬습니다. "문혁 피해자와 수혜자의 싸움이라는 비이성적 구도를 타파하고 그 당사자인 주석에게 판단의 권리를 넘기자"는 것이었죠. 개입 타이밍을 재고 있던 화궈펑은 회심의 미소를 띄고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우선 당 중앙위 주석이자 인민해방군의 통수권자로서 여기 있는 모두가 전임자인 마오 주석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려 하오. 왕둥싱, 지덩쿠이, 천시롄 동무의 논리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 것만은 아니오만, 나는 인간과 집단의 발전을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하오.
우선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를 하기 이전에, 마오 주석 본인께서 생전에 하셨던 말씀을 일깨워보기로 하겠소. ‘백화제방, 백가쟁명!’ 무릇 인민을 제국주의적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겠다면, 모든 견해가 자유로이 교환되어야 한다는 것은 본래 마오 동지의 뜻이었소. 그러나 동지께서는 1958년 반우파투쟁으로 당의 한쪽 날개를 완전히 꺾어버리셨소. 이것이 그의 첫 번째 과오요.
또한 대약진운동은 어떻소. 잘못된 농법과 잘못된 과학으로 무리한 목표를 밀어붙였는데도, 그 누구의 비판도 무거이 듣지 않았소. 게다가 그 폐해를 수습했던 류샤오치 동무를 끊임없이 모함하고, 공격했소. 이것이 그의 두번째 과오요.
마지막으로, 문화대혁명은 마오 주석 동지의 그간 공을 완전히 덮을 만큼 큰 과오라고 생각하오. 문혁으로 이 신중국에 티끌만치나마 남아있었던 건전한 비판의식과 자생적 발전의 가능성이 짓밟혔으며, 산업의 피해를 차치하고서라도 ‘사상의 피해’를 복구하려면 몇십년이 걸릴 지 가늠조차 할 수 없소.
결론적으로 마오 주석은 대장정, 항일투쟁 및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 국면에서의 공에도 불구하고 ‘주로 과로써’ 평가해야 할 인물이라는 것이오. 앞의 공들은 신중국 건설을 위한 헌신이었는데, 마오 주석 스스로 그 열매에 고엽제를 뿌린 격이 아니겠소? 아이에게 좋은 음식과 좋은 교육을 제공했는데, 그 아이가 장성하자 마자 총칼과 군홧발로 짓밟는다면 그 사람의 육아에 대한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이가 있소?
내가 하는 말에 대해 이렇게 반문할 동지 역시 있을 것이오. ‘그때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소?’라고 말이요. 나는 근대 프랑스의 개량주의자 자크 시에예스의 말을 인용하겠소.
‘나는 살아남았소!’
권력에 굴종했기에 살아남았고, 시류를 잘 탔기에 살아남았고, 마오 주석의 동향 출신이라 살아남았소. 허나! 나는 나의 과오조차 부정하며 뻔뻔스레 권력을 탐하는 그런 추악한 정치인은 되지 않을 것이오. 동무들이 동의한다면 나, 당 중앙위원회 주석이자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화궈펑은 책임있는 모든 자리에서의 재신임을 본 당대회에서 요청하겠소. 그에 앞서 나는 나의 자아비판서를 당 정치국에 기탁하는 바이며, 전 당원에게 그 내용을 공개할 것이오."
폭탄 선언이었습니다. 8억 중화인민공화국의 1인자가 자신의 직책을 전면 재신임받겠다는 이야기는 듣도보도못한 것이었죠. 장내가 마구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매우 고무된 샤오나이는 "화 주석 동지야말로 시대의 호걸!"이라며 호응을 유도했고, 가만히 무게를 지키고 있던 후종밍 장군마저 기립박수를 쳐댔습니다. 보수파들은 곧바로 얼굴이 사색이 되어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덩샤오핑과 예젠잉을 비롯한 개혁파들마저 선수를 빼앗겨 몹시 당황한 얼굴이었죠. 결국 재신임안은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고, 장내는 화궈펑의 이름을 연호하는 함성으로 가득 차버렸습니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톰페티는 자신을 심하게 모욕한 보수파들을 찾아가 화해의 악수를 건넸습니다. 이 장면은 당원들의 눈을 끌었고, 보수파는 이 장면 탓에 완전한 실각만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화궈펑의 발표를 기반으로 "건국이래 몇가지 역사적 문제에 대한 당의 결의(이하 '결의')"가 덩샤오핑의 주도로 작성되었고, 주석 측 참관인으로 위안차이나가 참여했습니다. 11차 당대회가 끝난 지 3달 뒤 나온 결의문에서는 '마오주의'라는 단어가 '마오 노선'으로 대체되었고, 중국의 이념을 '중국 특색 사회주의'로 정의하는 등의 대격변이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대놓고 마오를 쓰레기처럼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찬양할 만한 위인은 되지 못한다는 암시가 여기저기 적혀 있었죠. 결과적으로 중국 공산당은 리다자오가 창건해 마오가 지도했다가 화궈펑의 노선으로 넘어간 연속적 일체라는 점이 입증되었고... 잠시 잊혀졌던 1920년대 당의 창건 주역들이 재발굴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 뿐만 아니라 마오에 대한 평가까지 '매우 중립적'으로 하겠다는 방침이 발표되자, 여러 가지 안건들이 튀어나왔습니다. 반우파투쟁 때부터 반동 내지 우파로 규정된 이들의 복권안이 그 중 하나였죠. 리지선, 천밍수, 펑위안 등 입에 담기도 가슴 졸여야 했던 인물들의 복권이 결정되었고, 린시링, 천런빙, 판첸 라마 10세에 대한 복권마저 재심사에 부쳐졌습니다. 이 재심사에서 류메이란은 린시링을, 톰페티는 판첸라마를, 그리고 샤오나이는 천런빙을 변호해 그들의 복권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만 급진적 민주주의자의 거두였던 장보쥔의 경우 모든 판단을 보류하고 더욱 면밀한 검토를 거치자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화궈펑은 곧바로 인민들에게 민주주의와 자유의 상징으로까지 자리잡았습니다. 물론 본인은 중국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데에 회의적이었지만, 고무된 인민들은 베이징 시청 벽에 '민주의 벽'을 조성해 마오와 사인방, 보수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전단을 붙여댔습니다. 이는 덩샤오핑, 예젠잉, 리셴넨에게 대중주의적 광기의 트라우마를 연상시켰고, 이들은 서서히 공포감과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당의 권력대립구도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재편되고 있었습니다.
07. 혁명적 외교방침
1977년 여름, 파키스탄의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에 대항한 이슬람주의자들의 쿠데타 모의에 대한 소식이 중국 국가안전부에 접수되었습니다. 또한 7월이 되자 소말리아 민주공화국의 시아드 바레 대통령이 대소말리주의를 외치며 에티오피아의 오가덴 지방을 침공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소말리아군은 오랜 기간 전쟁을 준비해 양질의 장비와 대량의 병력으로 빠르게 기동했고, 오가덴 지역을 빠르게 장악해나가고 있습니다.
소련, 쿠바, 동독 등 동구권은 에티오피아의 멩기스투 정권을 지지합니다. 위기에 빠진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장군은 SOS를 쳤고, 쿠바군 15,000명과 바실리 페트로프 장군이 이끄는 소련군 군사고문단 2,000명이 출발했습니다.
화궈펑 동지는 빠르게 비공개회의를 소집해, 파키스탄에서 들려온 첩보와 동아프리카 지역 상황의 대처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것은 '새 중국'의 외교방침을 결정지을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격론이 오갈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 반대로, 주석의 측근들은 노골적으로 에티오피아의 편을 들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소말리아가 계획대로 오가덴 지역을 점거해나가는 것처럼 보이나, 애초에 열강의 지원, 체급, 산업력 등 모든 측면에서 압도적인 에티오피아가 곧 전세를 역전할 것이라는 분석이었죠. 게다가 소련과의 관계회복은 체제개혁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더 이상 그들과 척졌다가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았습니다. 친소파들은 소말리아를 지원할 시 소련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된다며 엄중하게 경고했죠.
개입의 강도는 최소한으로 하자는 것이 중론이었기에 인도적 지원으로 그치려 했지만, 문제는 소련이 비공식적 루트를 통해 중국에게 소규모라도 군사고문단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소련이 갑자기 왜 이렇게까지 살갑게 나오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비공식 고문단장으로 "동아프리카지역 평화구축대사"라는 임시직함을 단 후종밍 중장이 파견되었습니다. 이후의 이야기이지만, 그 선택은 상당한 나비효과로 돌아왔습니다. 구 영국령 소말릴란드 지역으로의 적극적인 공세를 주장한 후종밍은 실제로 해당 지역을 점거하고 소말리아군을 두쪽내는 데 성공했고, 소말리아는 그냥 오가덴 지역을 다시 빼앗기는 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아예 소말릴란드 인민공화국과 소말리아(였던 것)으로 공중분해되었습니다.
또한 후종밍은 놀라운 전보를 보내왔습니다. 아디스아바바 소련 대사관의 비밀회의에 초대되어 소련 정치국원이자 레닌그라드 당서기이며 유력 후계자후보인 '그리고리 로마노프'에게 견해를 전달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었죠. 이에 화궈펑은 류메이란에게, 류메이란은 나름의 정보를 수합해 다시 아디스아바바의 후종밍에게 전송했습니다. 사정은 이러했습니다. 전쟁은 이겼고 멩기스투는 승전 지도자가 되었으나 로마노프를 위시한 소련의 특정 파벌은 그의 정치방식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에티오피아를 아프리카의 혁명수출기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보다 '정상적인'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서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류메이란이 지적했던 것처럼 보다 온건하지만 안정적인 인민혁명당-전에티오피아사회주의운동을 밀어줘 정식 프롤레타리아 전위당을 꾸리는 전략이 채택된 것이죠. 이로써 중소관계는 국경분쟁 이전의 수준에 가깝게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논의되던 파키스탄 건의 경우 샤오나이와 위안차이나의 정보분석이 주효했습니다. 이슬람주의자인 보수파 지아울하크 장군의 쿠데타가 성공한다면 이들은 확실하게 친중노선을 타겠지만 인도와의 관계개선에 몹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터였고, 이는 주변의 안정을 원하던 중국의 이익과 배치됐습니다. 이 문제를 공유하기 위해 부토 총리의 '신뢰 가능한 측근들'이 베이징에 파견되었고, 이들은 이때다 싶어(...) 중국에게 핵개발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아니, 쿠데타 경고해주려고 했더니만 무슨 핵개발?"이라고 생각했던 중국인들이었지만, 이내 동요를 가라앉히고 냉철한 사고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파키스탄이 핵을 가지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도가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 상황에서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가지는 것은 오히려 핵균형의 달성을 불러와 지역의 안정화에 기여하는 것이었으니까요. 다만 외교부장 차오관화의 의견은 "자금 전달 선에서 컷트하지 않으면 외교적으로 매우 불리해질 수 있다" 였고, 그러한 내용으로 비밀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는 중국 정보인력의 적극적 협력으로 쿠데타 음모를 미연에 분쇄, 광장에서 위세를 뽐냈습니다. 또한 파키스탄은 중국 주도의 '포괄적 경제협력기구'에 가입함은 물론 중국의 요구대로 인도와의 현상유지를 기초로 한 화해를 목표한다는 성명까지 발표했습니다. 물론 갈등이 한순간에 종식되지는 않겠지만, 이는 분명한 외교적 성과였습니다.
08. 제5차 중동전쟁?!
에티오피아에서의 '대성공' 또는 '대재앙' 이후, 세계 정세는 요동쳤습니다. 소련에서는 로마노프를 위시한 혁명강경파가 세를 확장했고, 미국의 럼스펠드 국무장관 등 신보수주의자들은 그 나름대로 크게 으르렁대며 데탕트를 완전히 끝장내기 위한 움직임에 돌입했습니다. 태국에서 왕당파의 쿠데타 모의가 발각되어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자진 칩거에 들어가는 사건까지 발생했고, 이란에서는 팔레비 샤에 대항한 반대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 미 해병대 병력이 대사관 주위에 증파되었습니다.
1978년 1월 17일, 미국 외교당국의 사보타주에 가까운 무성의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 평화협상이 무위로 돌아가자 이츠하크 라빈 내각이 총사퇴, 노동당 대아랍 강경파인 아리엘 샤론 농무장관이 총리직에 취임했습니다. 샤론 내각은 3월 20일 갈릴리호 인근의 PLO 부대를 일소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갈릴리 호수 자유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레바논 내전에 개입, PLO를 지원하는 시리아와 사실상의 전쟁상태에 돌입했습니다.
이집트의 사다트 정권은 외교적 해법을 우선시했지만, 알리 사브리를 비롯한 나세리스트의 공공연한 반발 움직임에 울며 겨자먹기로 개입을 결정했습니다. 이로써 5차 중동전쟁이 막을 올렸고, 미국은 즉각 동지중해에 항모전단을 보내 소련의 개입을 미연에 차단하려고 합니다.
럼스펠드 국무장관과 체니 국방장관을 필두로 한 네오콘들이 포드 대통령을 쥐락펴락하며 세계를 몇번씩이나 불태울 각오를 다지고, CNN 방송에 대통령의 보좌관이라는 인간들이 나와 "이스라엘을 위협한다면 핵무기도 '예고 없이' 발사하겠다"는 큰소리를 뻥뻥 쳐대던 와중에, 전장에서는 이스라엘군이 초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시나이 반도를 재수복하려는 이집트군의 시도를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오히려 포트 사이드를 점령한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전선에서도 PLO와 시리아 지원군을 압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이나 아랍동맹이나 장기전을 치를 역량은 없다는 점이 증명됐지만, 전쟁은 협상의 연장이었죠. 물론 협상이 전쟁의 연장이기도 했고 말입니다.
어쨌든 전세계는 상호확증파괴의 두려움에 벌벌 떨어야 했습니다. 쿠바 핵 위기와 4차 중동전쟁 때의 악몽이 재현되려 하고 있었죠. 미국에서는 공화당 진보파 넬슨 록펠러 부통령을 주축으로 "이 미친 짓을 끝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었고, 소련에서는 그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가진 '그로미코' 외무장관의 타협파와 '로마노프' 레닌그라드 당서기의 '혁명파'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시나이반도 유지를 버거워하던 이스라엘과의 협상을 통해 수에즈를 재확보하고 내실을 다지자는 사다트의 노선이 흔들리며 나세르주의자들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준동할 조건이 마련되었습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사다트는 부트로스 갈리 외무장관을 중국으로 보내 다급히 중재를 요청했습니다.
비공식 외교루트를 담당한 샤오나이는 갈리 장관으로부터 여러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수에즈 회복에 실패한다면 이집트는 광기로 분열될 것이고, 이는 미국, 소련, 중국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미치게 될 것이라는 정보가 가장 결정적이었죠. 핵전쟁의 위기, 급진 모험주의자들의 준동 위기가 겹쳐 모두가 두려움에 떨 때, 뉴욕에서 유엔 안보리 비상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뉴욕에서, 대표단은 미국과 소련의 상황을 보다 소상히 알 수 있었습니다. 부다페스트에서 함께 공부한 체코슬로바키아 외교관 파벨 루키치 대표부참사관은 샤오나이에게 여러 정보를 알려줬습니다. 우선 모스크바는 브레즈네프-코시긴-수슬로프-키릴로프의 집단지도체제가 와해되어 1960년대부터 유지되어왔던 '수성전략'이 빠르게 힘을 잃고 있었고, 수슬로프는 제1세계의 공세에 무기력하게 얻어맞고 있기보다는 그들에게 끊임없는 출혈을 강요해 소련이 '말라죽는' 상황을 방지하고 싶어했습니다. 이는 외교부 내의 이른바 '1917위원회'로 나타났고, 수슬로프의 복심인 그리고리 로마노프는 마치 혁명 초기를 연상케 하는 공격적인 대외혁명전파노선을 견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과의 협상을 파토내고 이집트에 혁명주의자들을 재집권시켜 미국의 대소봉쇄정책을 완전히 망쳐버리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죠. 반면 브레즈네프가 지원하는 그로미코를 위시한 보수주의자들은 미국과의 협상에 응해 모험주의적 대외관을 배격하자는 주장을 내고 있었습니다.
중국 유엔대표부 사무실에 모인 일행들은 차오관화 외교부장에게 자신 나름의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샤오나이, 위안차이나, 톰페티 등은 그로미코의 계획에, 후종밍과 류메이란은 로마노프의 계획에 찬동했습니다. 장시간의 토론 끝에 "일단 미국과의 협상을 성사시켜 이집트를 구원하되 이슬람 사회주의의 입김을 늘리고, 결론적으로는 공산권이 이익을 보게 하자"는 합의안이 도출되었습니다. 전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톰페티 라마가 미국인들과의 협상을 담당하는 조건이었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협상은 성공했습니다. 류메이란이 친소 및 중립 입장의 비상임이사국들을 설득하며 이스라엘의 '불필요하게 공격적인' 외교정책에 대한 성토 분위기를 이끌어내고 있을 때, 톰페티는 미국인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방어해내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서독마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입장을 지지해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이스라엘 역시 공세종말점에 이른 상태에서 미국은 더 이상 자신의 입장을 밀어붙일 수 없었습니다. 통과된 안보리 결의안에는 이스라엘의 운하 통항권을 보장하기 위해 남부 시나이의 몇몇 항구들을 이스라엘이 관할하는 선에서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고, 이스라엘을 만족시키기 위해 PLO의 배후지원을 '우려'하는 문구가 들어갔습니다. 이집트는 이로써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입장을 밀어붙이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강했고, 그들 역시 버섯구름으로 하늘을 물들이고 싶지는 않았죠. 결국 이들은 제네바에 모여 안보리 결의안을 바탕으로 한 평화협정에 서명했습니다.
이집트는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결국엔 성과를 챙긴 셈이 되었습니다. 사다트는 권좌를 지킬 수 있었고, 아랍사회주의자들의 압력으로 친중친소 노선을 타는 선에서 대내정책을 집행할 권한을 보장받았죠. 갈리 외무장관은 베이징에서 열린 축하연회에서 화궈펑 주석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편 소련에서는 대외정책에서의 성공에 고무되어 혁명파가 대권을 잡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로미코가 실각했고, 로마노프는 중앙감찰위 위원장직에 올라 사실상 지도체제의 일각을 담당했습니다. 브레즈네프는 건강을 핑계로 총서기직을 내려놓았죠. 후임은 그나마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안드로포프 KGB 의장에게 돌아갔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후종밍과 합을 맞춘 바실리 페트로프 대장이 원수로 진급해 국방장관직을 차지했고, 원래 국방장관이던 대미강경파 드미트리 우스티노프가 외교라인의 수장에 올랐습니다. 안드로포프 총서기, 수슬로프 부총서기, 로마노프 중앙감찰위원장, 우스티노프 외무장관, 페트로프 국방장관은 1978년 11월 "현대공산주의의 실현조건에 관한 당의 공식입장"이라는 43페이지짜리 문서를 통과시켜, 훗날 '현대공산주의 개혁(современная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реформа, "소브레콤")'이라 불릴 대규모 조정안을 준비했습니다.
미국의 경우 네오콘들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축출되었습니다. 물론 상황을 귀신같이 감지하고 모르쇠로 일관했던 체니 국방장관은 자리를 지켰지만, 럼스펠드 국무장관은 사실상 정계은퇴 수순을 밟았죠.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CIA 국장이 신임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어 균형을 잡았습니다. 공화당 및 포드 행정부의 지지율은 바닥을 치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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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나서, 일행은 원래의 자리로 복귀했습니다. CITIC 부회장이자 사실상 개혁개방의 머니건을 쥔 샤오나이는 농업농촌부 부부장 위안차이나와 함께 천윈을 위원장으로 하는 '농업재건 및 현대화 소조'의 공동 부위원장으로서 농업개혁을 담당해 매우 큰 성과를 거뒀습니다. 천윈은 회식자리에서 마오쩌둥의 농업정책을 대놓고 '병신 짓'이라 칭했다는 후일담이 있죠. 아무튼 수입한 트랙터와 각종 농기구를 요긴하게 사용해 비닐하우스, 비료생산시설 등 각종 제반시설이 놀라울 만치 확장되었고, 1978년 11월 기준 수확량은 작년 동기에 비해 거의 280%나 증가했습니다.
또한 후종밍은 에티오피아 건 이후 상장으로 진급해 선양군구 사령원이 되어 군부 실력자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데 힘썼습니다. 중앙검찰위와 동북3성 공안부에 '꽌시'를 기반으로 한 인적 기반을 다져 '그저 계급만 높은 지역 실력자'에서 '차세대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까지 올라서는 데 성공했죠. 심지어는 예젠잉 국방부장과 녜룽전 총참모장의 후임자로 거론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후 상장을 더 이상 '붉은 장쉐량'으로 비하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톰페티는 주인도대사로 파견되어 뉴델리의 국회의사당에서 의원들과 장판파 토론대결을 벌였습니다. 중국-파키스탄 밀월관계를 문제삼는 의원의 입을 다물게 하고, 심지어 영토분쟁으로 꼬투리를 잡는 의원과도 대화를 원만히 이어나가는 데 성공하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죠. 화궈펑과의 전화통화에서 당의 방침을 들은 그는 "2000년까지 인도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중국계 주민을 위한 자치기구를 보장하는" 선에서 아루나찰프라데시의 잠정적 상태를 합의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끝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시작의 끝은 맞아 보였습니다. 아, 그리고 달라이 라마가 경호상의 이유로 뉴델리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것이 누구의 의중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 중요한 것은 티베트 망명정부가 사실상 종교동아리가 되었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류메이란은 이란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공산주의 투데당과 사회민주주의자 국민전선, 자유주의자 이란자유운동을 주축으로 하는 인민전선의 가능성을 검토했고, 시아파 원리주의자 집단 내에서도 바니사드르 등 '말이 통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국가안전부장 뤄칭창은 이란 혁명의 키스톤이 '이슬람주의자들의 구심점을 제거하는 것'이라던 류메이란의 입장에 동의하며, 열심히 계획을 고심한다고 합니다. 과연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인적사항.
1.
- 이름: 류메이란(刘梅兰)
- 플레이어: 렌지파일
- 생년월일: 1942년 3월 16일
- 성별: 여성
- 민족: 혼혈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러시아어, 영어(약간)
- 능력치:
통솔(8)/체력(10)/지능(10)/지혜(9)/매력(17)
- 기술:
지휘(0)/관리(0)/사격(1)/격투(0)/조사(0)/연구(0)/설득(3)/토론(0)/기만(1)/협박(0)/선동(1)/심문(1)/매혹(3)
- 트레잇:
#Fake News / 집단 간 갈등을 증폭시키고 이간시키는 데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5
- 배경:
충칭 태생의 류메이란은 (아마도) 백계 러시아인인 아버지와 (역시 아마도) 치앙족(서하인의 후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모든 게 추정인 이유는, 메이란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의 공습으로 부모님이 사망하였기 때문이며, 메이란은 충칭에서 암약하던 공산당의 간부인 류한이라는 여성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중국의 적화 후 충칭 시장이 된 덩샤오핑과 군부의 실력자 양상쿤과 함께 손을 잡은 류한은 류메이란을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키웠습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노선을 자주 비판하는 등 '이상한 징조'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어머니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메이란은 1962년 중인전쟁에 자원하여 인도군과 맞서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메이란은 모병포스터의 모델이 될 정도로 유명세를 끌었으며 촉망받는 청년당원이 되었습니다. 공청단의 간부가 되기도 했죠.
그러나 운명의 그 해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양상쿤과 덩샤오핑 모두 위기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메이란의 양모인 류한의 과거도 밝혀졌습니다. 류한은 과거 28인의 볼셰비키를 비롯한 소련 유학파를 지지하던 당간부로써 대장정의 대참사에 책임이 있었고, 그래서 양상쿤과 친분이 있었으며, 그 과거가 30년을 돌아 다시금 닥쳐온 것이었습니다. 혁명의 배신자라 낙인찍힌 류한은 조리돌림을 당한 끝에 음독자살하였습니다. 혁명가의 딸에서 반역자의 딸이 된 메이란은 1년 동안 수감되었고, 그 이후에는 장시성의 석유기계 공장에서 천윈의 밑에서 일하며 친분을 쌓았습니다.
메이란은 마침내 천윈과 덩샤오핑이 1973년 저우언라이에 의해 복권되면서 함께 복권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음독자살할 때 마오 주석도, 덩샤오핑도, 양상쿤도 도와주지 않은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만을 추구해야 하며 다른 모든 노선은 수정주의에 불과하다고 믿는 류메이란은 천윈의 충복입니다. 하지만 다른 그 누구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2.
- 이름: 위안차이나(袁彩䛔)
- 플레이어: dear0904
- 생년월일: 1939년 9월 1일
- 성별: 남성
- 민족: 한족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영어, 노어, 프랑스어(약간)
- 능력치:
통솔(16)/체력(10)/지능(12)/지혜(7)/매력(9)
- 기술:
지휘(0)/관리(3)/사격(0)/격투(0)/조사(0)/연구(4)/설득(2)/토론(1)/기만(0)/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트레잇:
#웃는 사자 / 당원 및 동지들에 대한 설득과 매혹에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6
- 배경:
위안차이나는 후난성 출신 관리 위안졔치(袁解奇)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시기의 혼란기중 몇몇 군벌의 눈에 들어 입신양명할 많은 기회가 있었으나,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은 후회되었기에, 자식에게는 그러지 말라는 뜻에서 "비단줄을 붙잡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위안졔치는 아들을 훌륭한 관리로 키워 내었습니다.
칭화대학 농대를 졸업해 허난성에서 대약진운동의 폐해를 수습하는 농경제진흥소조 관료로 일하던 차이나는 1971년 우연한 기회를 잡았습니다. 9.13 사건의 수습과정에서 마침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이었던 후난성 지역혁명위원회를 지도하던 화궈펑 정치국위원에게 조언할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화궈펑은 그의 답변에 감명을 받아 위안차이나를 정식 공산당원으로 추천했고, 이내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습니다.
이제 '사람좋은 관료' 화궈펑은 국무원 총리가 되었고, 마오 주석의 후계자로 낙점되었습니다. 위안차이나는 '주군'의 말도 안되는 성공에 매우 기뻐했으나, 그 책임감은 어느 때보다 무겁습니다. 그의 이름은 주석과 함께 할 것입니다.
3.
- 이름: 샤오나이(肖奈)
- 플레이어: 카라멜 마끼아또
- 생년월일: 1942년 10월 1일
- 성별: 남성
- 민족: 한족(북방계)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헝가리어,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 능력치:
통솔(9)/체력(10)/지능(12)/지혜(10)/매력(12)
- 기술:
지휘(0)/관리(2)/사격(0)/격투(0)/조사(2)/연구(1)/설득(2)/토론(2)/기만(0)/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트레잇:
#데이터 사이언스 / 현 상황의 파악과 조사에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9
- 배경:
샤오나이는 중국 공산당 수뇌부인 샤오즈푸의 자식으로 태어나 공산당 수뇌부의 일원으로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샤오즈푸는 마오쩌둥의 최측근으로 정강산 시절부터 공산당의 자금 수급과 재정 관리를 도맡아 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재정부 부장과 상무부 부장을 역임했습니다.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데다, 다른 형제들이 하나둘씩 전란에 휩싸여 죽고 그만 유일하게 남은 터라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별 탈 없이 초중고를 졸업한 뒤. 대학도 국내에서 다닐까 했으나. 해외에서 더 많은 경험을 쌓아보면 어떻겠냐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동유럽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유학지는 헝가리였습니다.
부다페스트 칼 마르크스 대학에서의 유학생활은 그에게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1956년 헝가리 혁명과 소련군의 잔혹한 진압을 대학 친구들에게 듣자, 그가 태어나고 자랐을때 생긴 가치관에 조금씩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1968년 프라하의 봄 무력 진압 이후부터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믿음마져 무너져내리기 시작했습니다.(비록 내색은 안했지만) 그리고 굴라쉬 사회주의로 만들어진 헝가리의 (다른 공산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는 그의 가치관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석사, 박사 과정을 거친 후 경제학 교수로 취직했습니다. 1966년 약혼녀인 베이웨이웨이(贝微微)와의 결혼을 위해 잠시 귀국한 것을 제외하면 칼 마르크스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며 헝가리에서 지내다가. 저우언라이의 부름을 받아 1975년 11월에 중국으로 귀국했습니다.
그렇게 샤오나이가 해외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때. 조국의 모습은 매우 처참했습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해 경제는 파탄 직전이었으며, 반우파 투쟁으로 인한 국내의 대대적인 숙청. 그리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실로 경악할만한 사건으로 인해 중국은 그야말로 인외마경이 따로 없었습니다. 귀국 이후 샤오나이는 재정부에 들어갔고, 그의 탁월한 업무능력 덕분에 고속 승진을 하여 재정부 내에서 상당히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공산당과 함께라면 신중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말에 의구심을 품습니다. 진정한 신중국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4.
- 이름: 라싸더챠오(拉萨的橋) (본명:톰페티)
- 플레이어: 하일레 셀라시예
- 생년월일: 1910년 10월 4일
- 성별: 남성
- 민족: 티베트족
- 모국어: 티베트어
- 사용가능언어: 중국 보통화, 영어, 산스크리트어, 힌디어
- 능력치:
통솔(7)/체력(8)/지능(18)/지혜(7)/매력(13)
- 기술:
지휘(0)/관리(1)/사격(0)/격투(0)/조사(0)/연구(0)/설득(4)/토론(4)/기만(0)/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트레잇:
#미소짓는 부처 / 성적인 상황을 제외한 모든 상황에서 매혹에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2
- 배경:
포달랍궁에서 전대 달라이 라마의 시중을 들던 톰페티는 영특한 두뇌를 가져 달라이 라마의 총애를 받으며 원하는 학문을 마음껏 공부하며 자랐습니다. 그는 성인이 되어 티베트 불교내에서도 알아주는 뛰어난 라마가 되었으나 1959년 티베트의 대규모 봉기와 중공의 탄압이 벌어지고,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를 떠나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티베트인들을 불쌍히 여긴 톰페티는 차마 라싸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많은 승려들이 인도로 망명을 가거나 투옥되어 죽는 가운데 남아있는 승려들을 규합하여 티베트인들을 안정시키고 공산당과 티베트 독립세력간의 의견차이를 좁히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평화와 공존을 위한 그의 오랜노력 덕에 티베트인들에게 대대적인 지지를 받게 될 무렵 시찰을 나온 저우언라이와 만나게 되었고 긴 설득 끝에 독립운동을 확실히 막기 위해서는 더욱 큰 자치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을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저우언라이의 도움과 함께 몇년간 라싸의 시장으로 있으며 티베트를 발전시키고 강경파를 회유하던 톰페티는 공산당 인물들에게 '라싸강경파들과의 대화창구'라는 뜻에서 '라싸더챠오(라싸의 다리)'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자치권을 얻기 위해서는 단순히 저우언라이에게 기대며 티베트에 있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저우언라이의 요청에 따라 자신을 따르는 젊은 승려들 몇을 데리고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5.
- 이름: 후종밍(胡中明)
- 플레이어: 세르게이 비테
- 생년월일: 1930년 8월 8일
- 성별: 남성
- 민족: 한족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러시아어, 진어
- 능력치:
통솔(18)/체력(9)/지능(9)/지혜(11)/매력(7)
- 기술:
지휘(4)/관리(3)/사격(0)/격투(0)/조사(0)/연구(0)/설득(0)/토론(0)/기만(1)/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잔여 포인트: 4
- 트레잇:
#물은 답을 알고 있다 / 적에 대한 심문에 +1 모디파이어.
- 배경:
후종밍은 인민해방군의 고위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후챠오밍은 국공내전과 조국해방전쟁에서의 공로로 북부전구의 동원국장과 육군 정치위원직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지난의 북부전구 육군 사령원으로서 북부전구 내에서의 상당한 영향력을 보유하였습니다. 후종밍은 그러한 아버지의 위세를 덕에 청소년 시절부터 저명한 군사 전문가들에게 개인 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로 중국인민해방군군사학원에 1대 입학생으로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중국인민해방군군사학원에서 재학하는 동안 북부 전구 지역 출신의 생도들과 파벌을 형성하였고,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북부 전구의 장교로 임관하여 고속 승진한 그는 아버지의 입김을 빌려 중국인민해방군군사학원 재학 시절 자신이 형성하였던 북부 전구 출신의 파벌원들을 북부 전구의 주요 요직에 앉히며, 북부 전구에서의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대륙 전역을 휩쓰는 과정에서 챠오밍-종밍 부자는 적절한 처신으로 오히려 입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고, 그 과정 속에서 대외적으로 중앙정부에게 능력있고 당에 충성하며 비교적 젊고, (마오 주석이 만든 군사학원의 초대 졸업생)장교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킨 후종밍은 사십 대의 나이로 북부 전구의 부사령원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마오 주석이 사망하고 정국이 혼란스러운 지금, 그는 겉으로는 당에 충성하는 면모를 보이며 최대한 당을 자극하지 않고 있지만, 은밀히 공청단과 접촉하고, 북부 전구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등 면종복배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는 상당히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상황.
※미국과의 관계: 4(미묘함)
※소련과의 관계: 7(친밀함)
※당내 계파의 세력분포:
- 백화제방파(후야오방, 21%)
: 이들은 제11차 당대회에서의 과감한 '사고 이행'을 열렬히 환영한 이들로, 1950년대의 쌍백방침의 복구를 지지합니다. 일부 급진파들은 다당제를 비롯한 큰 폭의 민주화 개혁을 주장하지만, 모두가 그에 찬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후야오방이 재건한 공청단 출신의 젊은 당원들을 주축으로 합니다. 주요 멤버는 후야오방, 자오쯔양 등이 있습니다.
- 쇄신파(화궈펑, 36%)
: 화궈펑은 당정쇄신론을 내세우며 마오 주석의 과감한 격하를 이루었지만, 많은 대중들이 바라는 대로 민주화의 수호신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중국의 체제를 과감하게 개혁해야 한다는 점은 동의하며, 개인차는 있지만 자본주의의 방식을 일부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주요 멤버는 화궈펑과 5명의 주요 측근들이 있습니다. 그 중 후종밍과 류메이란은 실질적으로 '신사회주의파'와 가까운 입장입니다.
- 신 사회주의파(덩샤오핑, 35%)
: 이들은 대부분 원래 개혁파 내지 중도파를 이루던 '왕년의 반 마오주의자'이자 '문혁의 피해자' 그룹입니다. 11차 당대회 이후 당의 분위기가 180도 전환되고 '민주의 벽' 사건이 발생하자, 이들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이들은 아무리 개혁개방을 하더라도 사회주의의 기본 틀은 지켜내야 한다는 입장이며, 특히 대외정책 면에서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를 추구합니다. 주요 멤버로는 덩샤오핑, 예젠잉, 리셴넨, 차오관화, 천윈 등이 있습니다.
- 보수파(왕둥싱, 7%)
: 일명 양개범시파입니다.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급격한 개혁에 우려를 표합니다. 마오 주석의 급격한 격하 움직임에도 꾸준한 우려를 표하고 있으며, 특히 민주주의를 도입하자는 주장에는 큰 반감을 표출합니다. 주요 멤버로는 왕둥싱, 천시롄 등이 있습니다.
※포괄적 경제협력기구(CEPO) 가맹국:
중화인민공화국,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라오 인민민주주의공화국,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타이 입헌왕국, 파키스탄 공화국, 이집트 이슬람공화국(옵저버)
다음 이벤트는 수요일(22일) 오후 1시에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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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방파를 적당히 자중시키기만 할거면 드골 메타로 천윈 사퇴 쇼를 여는 거는 어떨까요? 너무 무린가?
유구한 전통이 있는 양위쇼… 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전통이 있긴 한데, 그거 했다가 메이란이 달려와서 뚝배기를 날릴까봐 ㅋㅋㅋ...
... 그 둘이 측근? 대체... 무슨 좋은일이라도 있었나요?
위안차이나의 직접 측근이라기보다는 화궈펑의 측근이겠지만, 화궈펑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위안이고 위안이 걔들보다 윗사람이니까 비스무리하게 된 거죠. ㅋㅋ
ㅋㅋㅋ... 그렇군요. 저번 bp때 조언하길래 대체... 무슨일이지? 했는데 그랬군요.
+ 일단 인사가 제일 쉬운 방책이긴 한데, 티가 좀 나긴 하네요.
경고만 줄거면... 걔네들이 적은 벽보랑 똑같은 구도로 'xxx(대충 벽보 적은 인간)동지 최고!'라고 하는 벽보를 설치하면 직접적으로 비판은 아닌데 누가 설치고 다니는지 아니까 조심하라는 암묵적 신호로 작용할 수 있겠네요
뭐, 그렇죠. 명단을 알고 있으니 몇몇 불러다 면담의 시간을 가지는것도 좋고, 제안을 반려하는 방법도 있고...
반쯤 드립이긴 한데, 백화제방파 내에 한때 소련 간부였던 우스트랼로프(.....)를 추종하는 무리가 있으니, 우스트랼로프가 자본주의 개혁에 적대적이었다는 문서를 발굴해내서 뿌리면 알아서 일부는 와해될 것 같습니다.
ㅋㅋㅋ... 인지 부조화를 일으키다 보수파나 신 사회주의파로 전향할지도 모르겠군요.
우선 지금까지 나온 방책을 정리하면…
1) 인사사 주임 또는 다른 핵심보직을 측근으로 교체해 대규모 보직이동을 단행한다.
2) 벽보를 통한 역공작으로 제방파에게 경고의 메세지를 던진다.
3) 제방파 내 트로츠키주의자와 자유주의자 간 내분을 조장한다.
4) 기타
이렇게 나오는군요.
+ 뭐 그 외에 부서의 드레스코드를 양장으로 통일해서 누가 자기네 파벌인지 구분을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것도 있겠습니다만.. ㅋㅋㅋ
그렇죠. 일단 위일수록 티가 좀 많이 나고, 타격도 좀 강한 대신, 조직 장악은 확실해지죠. 1번이 티가 많이 나는거만 아님 최선으로 보이고, 2번은 티를 덜 낼수 있지만, 벽보+면담으로 깎아야 하니, 즉효성이 아닌게 단점이고, 3번은... 음...
+ ㅋㅋㅋ 그거 다른 이야기로 샤오나이가 했던말이죠. 왜 다들 인민복만 입냐고 ㅋㅋㅋ...
일단 전략 정하시면 말씀해주심 됩니다. 일단 다음 화 마지막 부분까지 작성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어서.. ㅋㅋㅋ
일단 진행이 되어야 다음 글이 나올테니...
- 위안차이나는 생각했습니다. 조직을 이끄는 방법에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원 목적이 규합과 갈등 봉합을 위해서 였다는걸 다시금 떠올렸고, 그로 인해 다소 과격한 방법일 인사 단행과 내분 조장은 머릿속에 남겨 둔채로, 제방파 소속인 고위층 (국장급) 등을 만나, 조직 내부를 단속하고, 하급 관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벽보를 붙여 경고를 주기로 결심 했습니다. 물론, 위원장인 천윈 동지는 과격한 인사를 단행하기를 원하겠지만, 그것은 일단 본인의 화술로 납득 시키기로 했습니다.
+ ㅋㅋㅋ... 이거 정하고 쓰는동안 저게 나왔군요.
그런데 위안의 개인이벤트까지 끝나면 이걸로 이번화는 끝인가요?
네 지금 3화 작업중입니다. ㅋㅋ
빨리 다음 화를 보고싶네요. 이것만 끝나면 된다...!
협박 굴림. 노 모디파이어. 기준 10.
1/2/6 = 9.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뤄잉 동지 만세! 라는 벽보를 붙여 제방파의 기를 죽이려는 전략은 그리 잘 먹혀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잠깐 위축되는 듯 했으나, 주인공인 뤄잉 판공청 부주임은 오히려 구내식당에서 더욱 적극적인 개혁개방을 촉구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동료 제방파들의 노력을 호소했습니다.
천윈 의장은 위안차이나를 집무실로 부르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조금 더 직접적인 조치를 취하게나. 자네가 영 물러터지게 행동한다면 내가 직접 인사를 단행하는 수밖에 없네."
위안차이나는 결국, 뤄잉 부주임을 직접 불러 토론 해보기로 했습니다. 인사를 단행 하는건 확실한 해결책이 될테지만... 일단 평화적으로 해결 할 필요가 있긴 하니까요.
"뤄잉 부주임. 자리에 앉게나. 자네가 구내 식당에서 한 연설은 잘 들었다네..."
이리된거 드레스코드랑 내분도 같이 진행하시죠.. 쿠바에 우스트랼로프의 책이 있을테니(?) 사오면..
우스트랼로프와 함께 일했던 사람이 중국에 있는데 굳이 쿠바까지 갈 이유가 있을까요?
후... 그래야 하려나요? 안정적이고 평화롭게 끝내는건 정말로 꿈일까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도 국가기관 내에서 정치문제로 구내식당에서 연설하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보세요(...) 하물며 일당영도제인 중국에선..
뭐... 그래서 말로 조질라고 부른거긴 한데...
뤄잉:
“잘 들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부장 동지. 이처럼 자유로운 토론과 토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익명으로 써붙인 벽보의 작성자를 누군가 캐냈더군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래. 자유... 좋은말이지. 근데, 앞에서 못 할말은 뒤에서도 하지 말라고 했다는 옛말과, 무분별한 자유는 뭐라고 부르는지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무분별한 자유덕에 벌어진 일이 20년도 지나지 않았다네. 지금이 북한의 소혁명, 스탈린의 대 숙청과 달라 자네의 자유를 보장해 주고 있지만, 구내 식당에서 그러는건 너무 나간 행동이라 생각하지 않나?"
+ 이걸 3화 전에 끝냈어야 하는데... 옮기기도 뭐하네요.
뤄잉:
“알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응당한 징계를 받는다고 해도 감수하겠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동지. 천윈 의장 동지께서 저와 같은 유학파, 자유파 관료들을 평소에 얼마나 천대하는지 아십니까? 저희도 생업이라는 게 있는 사람들입니다. 생존투쟁이라는 겁니다… 저희 재주는 주판을 튕기고 경제이론을 적용하는 것들인데, 이곳에서 밀려나게 되면 갈 곳이 또 어딨겠습니까? 부장 동지께서 대안을 소개시켜 주시기도 까다롭잖습니까…”
제방파 관료들은 일찍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심지어 미국같은 서방국가들에 유학경험이 있거나 그런 이들에게 배운 인사들을 주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대안을 제시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자네들이 나를 믿을수 있다면, 충분한 대안이 있다는걸 알려줄수 있네. 그리고 그걸 위해서 나또한 도전에 나설 생각도 있지. 내가 제방파는 아니지만... 연구와 개발에는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위안차이나는, 농업 개혁을 떠올렸습니다. 농업 개혁 소조를 차려 대 성공 시키고, 다시 농업부로 되돌렸을때. 그리고... 저 유학파들이라면, 전자사업부를 독립 시켜서 미래 산업을 만들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죠... 물론, 이걸 하려면 천윈 동지와 화궈펑 주석의 지지가 필요 하겠지만, 천윈 동지는... 골치 아픈 자유파를 따로 보낼수 있으니 기뻐할테고, 화궈펑 주석 또한 농업 개혁때를 생각하신다면 흔쾌히 보내 주실것입니다.
+ 사실 부서 적성만 따지면 국제 합작사-특구 운영사를 빼는게 낫긴 한... 저는 2부에 남고, 그 두부서 맡을 대표를 생각하는게...
집무실 책상에 놓인 인민일보 오늘 자 기사의 헤드라인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광동성에서 가돌리늄, 네오디뮴, 리튬, 코발트 등 16개 희귀원소 광맥 발견! 이것은 중국의 미래인가?”
“룽이런 CITIC 회장, 국영기업의 역할 강조하다”
역시 희토류... 이것도 3부 독립 격상을 꾀하기엔 충분한 근거로군요. 이럼 저쪽을 3부 독립으로 설득하고, 이 기사등으로 주석을 설득 하러 가야겠네요.
+ 일단 개혁 부서의 준동을 막는거라면 거의 달성인듯 싶은데 ..
+ 3부 격상보다... 희토류 채굴과 수출에 대한 전문 국영 기업 창설을?
재료는 준비되었고… 이제 담판을 지으러 갈 타이밍입니다..!
자... 가야죠! 일단, 천윈 의장 동지부터...
"의장 동지. 의장 동지께서 우려하시던 일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기사를 둔다) 저 치들도, 국익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건 아닐겁니다. 그러나... 화합을 깬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많은게 사실이긴 합니다. 그래서, 저 인사들에게 제안을 하나 하려합니다. 희토류 전담 국영 기업 "중화 희토 기업" (약칭 crem) 의 창립입니다. 저 자들도 충분한 대안이 되어줄 회사로의 이동을 거부하지 않을것입니다. 그리고... 저 자들에게 안심을 주기 위해, 개혁위의 3부를 농업 소조위처럼 임시 격상하여, 전자 산업 개혁부로 분리 하여 소관이 맡고자 합니다. 허가 해 주실수 있겠습니까?"
천윈:
“뭐… 공기업의 경우에는 샤오나이 총장이 임기를 곧 마치고 돌아오니 그쪽이 관리할 거고, 자네가 그 전자산업부를 책임진다면… 좋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지. 적어도 지금처럼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업무를 분리하는 것이 훨씬 나을 거라 생각하네.”
이제... 주석께 가는 일만 남은거 같네요. 논지는 비슷할거 같은데... 거기에 의장 동지의 묵시적인 허락을 받았다는거만 붙이면 될 느낌?
화궈펑:
“전자공학 분야는 어느 정도 산업기반이 닦아진 후에야 본격적으로 가동 가능하고, 그 동안은 자유롭게 계획과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이 중요하게 되겠지. 또한 희토류는 그 분야에서 특히 필수재이니… 적절한 곳에 잘 밀어준 것 같군. 그렇게 해보게나.
역시 자네를 믿기 잘했네.”
"믿어주신 주석각하 덕분입니다. 감사드립니다."
개인이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이제 4포인트를 사용해 통솔을 18까지 올릴 수 있습니다.
전자공업부의 독립, 그리고 중국희토류개발유한공사(CREM)의 창설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제방파의 엘리트들로 이루어진 “21세기 중국제조” 씽크탱크 역시 자오쯔양 부총리 겸 부주석의 지원을 받아 창설되었고, 이들은 중국의 미래를 신나게 계획하게 될 것입니다.
현재 플레이어들의 잔여 포인트입니다. (개인 이벤트 반영)
- 류메이란: 8
- 위안차이나: 1
- 샤오나이: 4
- 톰페티: 5
- 후종밍: 5
흠... 조사를 3까지, 선동을 2로 올리겠습니다.
그러고보니, 매력 18은 일부러 미뤄두시는건가요?
'설득 5'
논리로 안 되면 감성으로 승부한다!
바로 5포써서 설득올리겠습니다
막상 매력을 쓸 일이 생각보다 적어서(...) 고민중입니다.
하긴, 설득, 매혹, 심문에 들어갈건데... 의외로 설득 말곤 쓸 일이 적은데다, 설득은... 이해가 가네요.
+ 저야 모디파이어가 달려서 찍은탓에 죄다 분산난 ㅋㅋㅋ...
일단 4포인트는 킵하겠습니다.
이쯤되면 진짜로 레닌에게 "캐피탈리즘 호!"를 외치게 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 지금 관리 4렙 되어있는건가요?
네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럼 포인트 5로 관리 5레벨 만들겠습니다
넵 다음화 밑에 반영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