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론 17
창세기 3:1-7
여자가 취한 선악 나무
하나님이 선악과를 왜 만드셨는가? 만드신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아담이 먹으려고 할 때 하나님이 먹지 못하도록 하셨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 물음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교회에서 배워왔던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는 우리가 만족할 만한 답을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를 유도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전제가 있기에 선악과를 먹도록 만드셨다는 답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지울 수 없으니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말아야 했다는 한탄만 할 뿐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죄가 우리에게까지 전가 되었으니 아담은 역사 대대로 그저 원망의 대상만 되었다.
우리는 그것이 결코 지금 나에 대한 말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십자가에 대한 말씀도 그저 뜬구름 잡듯이 막연한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만 그친다. 에덴의 회복이라고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회복되는 것에 불과한 교리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 하나님께서 영원히 찬송을 받으셔야 했다면 애초에 선악과를 만들지 않고 동산에 유혹거리를 차단하셨어야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만약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막으셨다면 지상 천국이 되었을까? 그런 지상 천국이 하나님의 목표였을까?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선악의 나무를 두셨다는 것은 원하시는 뜻이 있으셨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성경을 보는 관점은 이미 선악의 나무를 취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내 기준에서 선악으로 구분해 놓고 성경은 본다. 그러므로 단순히 나의 구원, 내가 속한 천국, 그것은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사로잡힌 망상이고 영생에 대한 탐욕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내 구원이 아닌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한 그 뜻이 무엇인가를 말씀 안에서 상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1절). 여기서도 “열매”라는 표현은 없는데 번역 과정에서 삽입된 말이다. “간교하니라”라고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로 ‘아룸’(헬 ‘프로니모스’)인데 ‘지혜롭다, 슬기롭다’라는 뜻이다. 같은 단어를 잠언에서는 거의 ‘슬기로운 자’로 번역하였다(잠 12:16, 13:16, 14:8,18). 마태복음 10:16에서도 “뱀 같이 지혜롭고”라고 하였고 24:45에서도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라는 말씀에서도 ‘지혜’로 언급하였으며 마태복음 25장에서도 같은 단어를 열 처녀 중에서 다섯을 슬기로운 처녀로 표현하였다. 성경에서 ‘지혜롭다’. ‘슬기롭다’라는 표현은 말씀을 알고 있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의미한다. 흙에 속한 존재 중에서 뱀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여자가 죄를 짓도록 이용하였다. 그렇다면 “뱀”(히, 나하쉬)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는가를 생각해 보자.
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출 4:2-4)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것을 모세에게 약속으로 주시면서 보여주신 이적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땅과 하나 된 뱀의 꼬리를 잡는 이적을 통해 뱀의 배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셨다. 단순히 뱀이라는 동물이 아니라 그 배후가 있고 그를 제어함으로 이스라엘을 빼내시는 권능이 하나님께 있음을 모세에게 보여주신 것이었다(참고 시 74:13-14, 사 51:9-10).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심판의 대상으로 말씀하고 요한 사도 역시 ‘옛 뱀’이라고 표현하였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사 27:1)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계 12:9)
뱀은 여자에게 ‘엘로힘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2-3절). 여기서 “죽을까 하노라”라는 말을 가지고 마치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 것으로 설교하는 이들이 많은데 직역하면 ‘죽지 않기 위하여’라는 말이다. 죽지 않기 위하여 먹지 말고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열매”라는 단어가 있는데 히브리어 ‘페리’는 ‘열매, 자손, 결과’라는 뜻이다. 즉 여자는 “열매”, “만지지도 말라”라는 말을 추가하여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동산 나무의 결과를 스스로 취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못하게 하셨다는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여자와 남자의 비밀이 교회를 말씀한 것이라는 바울 사도의 선언을 통해 생각해 보자면 오늘날의 교회들 역시 여자와 같은 모습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성경 말씀을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으로 받지 않고 그저 ‘엘로힘 하나님의 말씀’에 추가하고 왜곡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만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로 사랑하라”라는 새 계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요 13:34). 결국 십자가를 말하면서 율법주의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 나무로 보지 못하고 여전히 그들에게는 선악의 나무에 불과하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4절)라고 뱀은 율법을 행한 결과를 얻고자 하는 여자에게 죽음이 없다는 거짓, 비진리로 취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선악의 나무라는 죽음 안에 생명을 담아 주려고 하셨다. 죽음이 없는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마귀가 유혹하는 시험이었다. 뱀의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과 대조된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이다. 그러나 여자인 교회는 오늘날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 살아남는 것을 이야기하고 행복을 말하며 물질적인 부를 약속한다. 그러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죽음 안에 담겨 있다. 이런 점에서 누가 인간들에 의해 맞아 죽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5-6절). “남편”(히, 이쉬)이라고 번역하였는데 ‘남자’이다. 여기서 문제는 여자가 먹은 선악의 나무를 남자가 아무 생각 없이 취하였겠느냐 하는 문제이다. 여자가 취한 선악의 나무를 남자가 함께 취하였다는 것은 두 번째 아담을 통해 이루실 구원을 보여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1-15)
여자가 취한 것을 보고 남자가 함께 취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멸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여자요 신부 된 교회에게 생명을 허락하시는 비밀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나타내 보여주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의 관계에서 해산하는 후손이 진짜 아들이고 그것이 구원이라는 뜻이다. 요한 사도는 여자가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았던 것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론한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0-26)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7절)라는 말씀에서 “그들의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주신 것들을 율법으로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 말로 번역된 “치마”란 히브리어로 ‘하고르’인데 ‘띠, 허리띠, 허리 덮개’라는 뜻이다.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인간은 하나님이 벗겨 놓으신 상태를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를 가리려고 한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선악의 나무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가리고 자신을 덮으려고 하는 것을 선악의 나무를 취하는 율법의 행위로 폭로하고 드러내신 것이다. 하체를 가렸다는 것은 더이상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이어지는 후손은 부끄러운 것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4-38)
결국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것은 단순히 새롭게 변화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아들 만들기이며 그 아들은 곧 아버지와 하나 된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드심이다(시 82:6). 이것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만 주어진다(2022100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첫댓글 아직 참 복음에 초보라 그런지 ... 확 와닿지는 않지만,
모든 내용이 '오직 예수'로 복음의 은혜로만 풀려나가니 신비스럽습니다.
초보는 없습니다
아직 깨닫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는 있겠지요
한걸음 한걸음 가다보면 성령께서 알게 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