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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령 옥씨의 계보>
옥씨(玉氏)는 중국에서 계출된 성씨로 우리나라 옥씨의 인연은 고구려의 요청에 의해 당나라에서 634년 파견된 8재사(八才士) 중의 한 사람이다. 고구려는 통일신라에 의해 패망하자 옥진서는 국학교수(논어,효경,예기,주역 가르침)로 신라국에 공적이 커서 의춘군에 봉해지고 의령(구, 의춘군)에 많은 농토를 부여 받고 생을 마감하였다.
지금 옥씨 종친회에서는 의령옥씨 1500년사를 제작 중에 있으며, 중국에 본향을 둔 지역이 어디이며 왜 거제도에 많은 옥씨들이 살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연구 중에 있다. 우리나라의 옥씨는 중국에서 도래한 의령옥씨로써 역시 왕씨와는 관계없습니다. 개성옥씨들의 경우에도 6.25 동란으로 호적이 모두 파괴된 후에 새로 등록사업을 하면서 나타난 성씨로서 유래나 기원을 당사자들도 알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우리나라 성씨는 286개(일부333개)이며 그 중 1위가 김해김씨로 410만명, 2위는 밀양박씨로 300만명, 3위는 전주이씨로 260만명, 4위는 경주김씨로 170만명이며 5위는 경주최씨로 142만명이다. 참고로 옥씨는 19,368명(2,000년 통계)으로 순위는 225위이다.
의령옥씨 계통도 | |
옥씨의 기원 | 皇帝(BC259~210)금세공사에게 玉 띠를 만드라고 명하였는데, 옥띠를 잘 만들어 玉氏성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발생지역은 중국 황하강 하류 제남땅으로 추정되며 중국에서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주나라 옥광보(BC1050), 한나라 옥대 (25~220), 송나라 옥산 (960~1279),원나라 옥리(1271~1368), 명나라 옥은 (1368~1644) 등이다. |
始祖 | 옥진서 (의춘군) 서기 634년 당나라에서 고구려에 파견한 학자의 한분으로 주로 논어, 효경, 예기,주역을 가르쳤으며 고구려가 멸망하자 신라에서 국학교수를 하자 그 공적이 있어 나라에서 의춘군으로 봉하고 의령에다 집과 농토를 하사하여 말년을 보냈다. |
中始祖 1세조 옥은종 | 옥은종 (1171~ ) 유래 및 업적 의령옥씨(宜寧玉氏) 의춘군(宜春君)은 서기 635년 고구려 27대 영유왕 18년에 당나 라에서 고구려 교수로 선발 파견되어온 팔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으로 그는 의춘군 의 후예로 고려 의종(18대)조 창정(倉正)의 벼슬을 지낸(1204) 옥은종(玉恩宗)이며 공의 고손 사온(四溫)이 고려 우왕 3년에 과거에 1등 급제하여 참의(參議) 정은공(正隱公)이 되었다. 공의 5세손 玉汝가 門下侍郞平章事까지 올랐다.
◎ 공은 고려말엽(1200~1240년경)거제에 와서 상당 기간 머물렸음으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입거제 거제 조상으로 보인다. ( 창정(倉正)의 벼슬 : 고려 때 향리직의 하나, 지금 같으면 시청의 국장이나 과장급정도인가?_) |
4世 | 평장사공파 분리 ( 주로 황해도) |
6世 | 校理公波 : 전라도,경상도,경기도,서울등지에 널리분포 學士公波 : 평안북도 |
7世 | 玉斯溫 : 고려 창왕 기사년(13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의였는데, 고려 말에 온 가족을 이끌고 거제도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옥안덕이다.
1) 별시위공파 : 12개의 거제 파문으로, 일명 의령옥씨가 아닌 거제옥씨라고도 한다. 전국 최대규 모이다. 2) 감사공파 : 부산,경남,경기도,전북지역에 분포 3) 학생공파 ; 평안남도 평안북도 |
12世 | 옥신변 ; 別侍衛公波 入巨濟 先祖이다. 천곡공원묘지 부근에 배향하고 있다. 옥신변은 임란 시 거제 최초 의병대장 제인국의 사위이며 왜군에게 잡혀가 6년동안 고생을 하다 임란이 끝나자 1600에 돌아와 경상우도수군에게 군사정보를 제공하였다. 손자 옥명규는 이조참판이며 우암 송시열 문화에 들어갔으며, 증손자 삼헌은 뒤에 반곡서원을 세웠다. 옥포해전의 패잔병들은 국사봉 산림속으로 숨었다가 조총을 앞세워 고현성으로 행했다. 이를 전해들은 씨족의 원로인 제인국씨가 의병을 일의컸다. 제인국은 옥신변의 장인으로 한 때 훈련원 부장으로 있은 지라 아우 억과진 그리고 아들홍록과 연초 하청의 장정 200여명이 모여 항일구국 봉기에 났다. 한편 거제현령 김준민은 관군 300명을 이글고 제인국과 합세하여 연초열려천변(연초농협)에 매복하고 있다가 날이 저물자 기습공경을 하여 다공들판이 피로 물들었다. 이전투를 ‘밀바대’, ‘몰바대’, 전투라 한
옥계성 :公의 휘諱는 桂成이요 字는 德固이며 호는 견수당堅守堂이다. 견수당은 오비에 있으며, 묘소는 동부 부춘마을 뒷산에 있다.
별시위공파 호의 5세손이며 서기 1571년(선조 4년 신미)에 출생하여 1658년(효종 9년 무술)에 卒 하였다. 公은 타고난 기질이 활달하고 총명하였으며 일찍이 지혜를 배우고 弓, 馬의 무예에도 능숙 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붓을 던지고 의병을 모집하여 홍의장군 곽재우의 막하에 들어가 많은 무공을 세웠다. 전쟁 중 추풍령에서 왜적의 대부대를 만나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세가 위태롭고 급박하게 되었을 때 문득 큰 구렁이 두 마리가 눈앞을 스쳐갔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니 그 자리에 두 자루의 보검이 있었고 그 칼자루에는 구름처럼 무성한 악을 무찔러라(決雲모耶)라는 명이 새겨져 있있다. 公은 이 칼이 하늘에서 내리신 신검이라 여기고 이칼을 휘두르며 맨 앞에서 적진으로 용맹 무쌍하게 뛰어 들어가 백여명의 적을 베어 대첩을 올렸다. 이와 같이 용맹스러움에 곽재우장군이 그 구국 단성에 감탄하여 호를 견수당이라 내려 그 공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그 후부터 곽장군과 더불어 전략을 세워 싸우면서 많은 전공을 세우니 조정에서 그 공훈을 찬양하여 선무원종 2등공신에 채록하였다. 그 후 여러 내외직을 역임하여 인조 때에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묘는 거제시 동부면 부춘리이 있다. (*거제시 옥포동에 옥포대첩 기념공원에 견수당 기록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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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列字 | 12세(有),13세 (啓),14세(鷹),15세(成),16세(敬),17세(得,炳), 18세(基), 19세(衡,斗),20세(大), 21(相), 22세(煥), 23세(致) 24세(錫), 25(泳), 26(杓),27(容,裕), 28(周,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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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희 외가쪽도 옥씨가 많습니다. 모두 거제 출신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