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장목면 천주교 전래 이야기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때 일본의 종군 신부 세스페데스(Cesfedes)에 의해서 傳(전)하여 졌다는 1964년 거제군지의 기록을 바로 잡는다.하느님께서 만드신 아담(Adam)은 “사람”을 뜻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말로 인류의 원조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인간을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하여, 아내 하와와 아들인 카인, 아벨을 두었는데, 하느님을 불신하고, 불순명함으로써 원죄를 범한 첫 인간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고, 죄인이 되어 죽게 되었지만,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무죄판결을 받고, 풍성한 은총을 입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로마서5:12-21)라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고 살면, 풍성한 축복을 주시며, 하느님과 인간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도록 바라며, 우리 인간에게 주신 십계명은 다음과 같다. 1. 하나이신 하느님을 欽崇(흠숭)하라. 2.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3. 主日(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4. 부모에게 孝道(효도)하라. 5. 사람을 죽이지 말라. 6. 姦淫(간음)하지 말라. 7. 도둑질 하지 말라. 8. 거짓 證言(증언)을 하지 말라. 9.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10.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율법을 정하시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 함으로써 地上(지상)에 平和(평화)를 가져 오게 하자는 종교를 만드셨다. 천주교는 동양선교를 위하여 중국에서 붙혀진 이름으로 한국에서는 西學, 또는 天主學, 천주교, 카톨릭교등으로 혼용되어 오다가 1932년에 주교회의에서 가톨릭을 선택 공인하여 규정하므로써 공식 명칭이 되었다. 가톨릭이란 라틴어에서는 Catholicus 영어에서는 Catholic 우리말로는 “일반적, 보편적, 공번된” 이란뜻으로 가톨릭 섭리, 가톨릭 부활이라 했는데, 그리이스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시어 세우신, 예수교는 예수그리도 자신이 12 使徒를 제자로 삼아 인류 구원을 위하여 宣布하신 교회다. 천주교는 서기 60년경 그리스도의 제자인 유태인 선교사 베드로와 바울로가 세웠고. 중국 천주교회는 1292년에 이태리 사람 몬떼코르비노가 와서 傳敎하였으나, 1582년부터 마테오리치 선교사가 더욱 발전시켰다. 일본은 1549년 스페인 사람 프란치스꼬 하비에르(1506∼1552) 선교사가 일본 가고시마에 上陸하여 傳敎하면서 시작되었다. 전 세계 모든 나라는 다른 나라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워졌으나, 우리나라는 1770년경부터 10여년간에 걸친 젊은 선비들의 天眞菴 講學을 통해서, 自發的으로 信仰團體를 시작하여 출발함로써 세계 교회 역사상 유일하게 외국인 선교사 없이 한국인들에 의해서 창립되었다.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明나라를 정벌한다는 핑계를 내세워, 일본의 천주교 신자들을 없애기 위해 조선 정벌의 선봉을 천주교 신자들만으로 편성된 무장 小西行長을 중심으로 5만 여명으로 맡게하고, 그 뒤를 이어 독전 부대를 불교 신자들로 편성된 무장 加藤淸正등의 군졸과 더불어 15만 7천여명의 대군을 풀어 조선을 쳐 들어왔다가, 이듬해 명나라와 조선의 의병들에게 쫓기어 부산 지방으로 집결한뒤 울산, 웅천 거제에 이르는 해안 지대에 18城(성)을 쌓고, 이후 6년 동안 머물게 되었다. 이때 웅천성에 머물던 소서행장의 군대와 기장성에 있던 黑田長政의 군대는 모두 천주교 신자였으므로 소서행장은 그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고, 軍律을 바로 잡기 위하여 일본 주재 예수회 부(副) 관구장 고메스(Comez) 신부에게 군종 신부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메스 신부는 九州(구주) 肥前(비전)에 있던 포르투갈 사람인 세스페데스(예수회) 신부와 일본인 전교회장 후간 에이온(Foucan Eion)을 조선에 보내어, 대마도를 거쳐 1593년 12월 27일 부산에 상륙하고, 그 이튿날 웅천성으로 왔다. 1년에 한번씩은 告解聖事를 받아야할 왜군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 미사성제를 드려 성체를 받아 모시게 하고, 입교를 지망하는 왜병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길가에 버려진 전쟁 고아들을 구제하고, 일본으로 압송하는 조선 포로들을 돌봐 주었으나, 그 밖의 조선인들은 자취를 감추어 접촉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세스페데스 종군 신부는 조선에 천주교를 전파할 기회도 없었고, 한국 천주교회를 창립하는데, 아무런 영향도 도움도 주지 못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서학 전래시기는 1600년경부터 1770년 사이며, 1777년 경부터 1783년 사이에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를 시작하여, 이벽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 드린 이승훈은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와 1784년을 한국 천주교 창립원년으로 제정 선포하여 1984년 5월 6일에 200주년 기념 행사로 교황님이 오시여 103위 시복시성을 여의도 광장에서 성대히 치렀다는 사실은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다. 이제 한국 천주교회는 124위 순교자와 2위 증거자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현실을 앞에 두고 있다. 1610년(광해군 2)에 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허균(許筠;1569~1618)은 한국인 최초로 천주교 신자가 되어, 천주교의 기도문인 게(偈)12장을 얻어왔으며, 또 광해군 때의 이수광(李賥光:1563~1628)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마테오 리치의 天主實義의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했다. 또한 유몽인(柳夢寅:1559~1623)도 어우야담(於宇野談)에서 천주교 교리를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 유교, 불교, 도교와의 차이점을 논했다. 아울러 1631년(인조 9) 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鄭斗源:1581~?)이 천리경(千里鏡)·서포(西砲)·자명종(自鳴鐘), 염초화(焰硝花), 만국지도(萬國地圖), 천문서(天文書)·서양풍속기(記), 천주교 서적 등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모두는 우리민족의 救靈(구령) 사업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병자호란(丙子胡亂1636.12.)으로, 불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를 따라갔던 李蘗(이벽)의 5대조 李慶相(이경상1603癸卯生-丁亥卒)이 간직한 서책의 영향으로 李 蘗(이벽)이 西學(서학)에 심취되어 조선의 세자(洗者) 요한이 되어, 한국 천주교 창립 聖祖(성조)로 崇仰(숭앙)을 받고 있다. 李 蘗(이 벽)은 1779년 기해년 섣달 그믐 눈오는 날 천진암 주어사에서 당대의 학자 권철신과 정약전등이 儒彿仙 강학회를 개최 한다는 소문을 듣고,(己亥冬講學于天眞菴), 서울 수표동 집에서 100여리를 짚신 감발하고, 눈 덮인 산길을 걸어서 천진암 주어사를 (走魚寺雪中)찾아 갔을때는 子正 무렵으로, 잠자던 스님들을 깨워 동행케하고, 맹수의 습격을 막기 위해 쇠방망이를 짚고, 캄캄한 밤중에 앵자산을 넘어 천진암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참석자들은 촛불을 밝히고, 經書(경서)를 談論(담론)하고, 있었는데, (李檗夜至 張燭談經) 이자리에서 李蘗(이벽)이 天學(천학)을 論證(논증)하므로 미처 날이 새는것도 몰랐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10여일간 강학회를 통하여 그들은 천학(天學)을 信奉(신봉)하게 되었다. 당시에 이벽이 지은 천주공경가. 어와세상 벗님네야 이내말씀 들어보소 집안에는 어른있고 나라에는 임금있네. 내몸에는 영혼있고 하늘에는 천주있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는 충성하네 삼강오륜 지켜가자 천주공경 으뜸일세 이내몸이 죽어저도 영혼남어 무궁하리 인륜도덕 쳔주공경 영혼불멸 모르며는 살아서는 목석이요 죽어서는 지옥이라 천주있다 알고서도 불사공경 하지마소 알고서도 아니하면 죄만점점 쌓인다네 죄짓고서 두려운자 천주없다 시비마소 아비없는 자식봤나 양지없는 음지있나 임금용안 못뵈었다 나라백성 아니런가 천당지옥 가보았나 세상사람 시비마소 있는천당 모른선비 천당없다 어이아노 시비마소 천주공경 믿어보고 깨달으면 영원무궁 영광일세 영원무궁 영광일세 *만천유고 蔓川遺稿*에 전하는데, “기해년(己亥年 : 정조 3) 12월 주어사走魚寺)에서 이광암 벽(檗)이 지은 노래”라는 주기(註記)가 붙어 있다. 이것을 볼 때 권철신權哲身의 주어사 강학이 끝난 뒤 지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당시에 선암 정약종이 지은 십계명가. 세상사람 선비님네 이 아니 우수운가 사람나자 한평생에 무슨귀신 그리많노 아침저녁 종일토록 합장배례 주문외고 있는 돈 귀한재물 던져주고 바쳐주고 자고깨자 행신언동 각자귀신 모셔봐도 허망하다 마귀미신 위대한건 사람일세 허위허례 마귀미신 믿지말고 천주믿세 하늘위의 계신천주 벌레같은 우리보소 광대무한 이우주에 인간목숨 내어주셔 지혜자가 깨달으며 우주섭리 알고나면 천주은혜 밝은빛을 무궁토록 받들련가 사람지혜 우둔하여 꼭두각시 나무신막 외고우러 복받드냐 절한다고 효자되냐 잘되어서 내복이라 못되면은 남탓이네 (己亥 臘月 於走魚寺 講論後 丁巽菴 權公相學 李公寵億 作歌寄之)” *이 노래 이름 밑에 “기해년(己亥年, 1779) 12월 주어사에서 강론한 뒤, 丁選菴(정약종), 권상학, 이 총억이 지어 부친 것이라는 주기(註記)가 있는 것으로 보아, 3인이 합작하여 이승훈에게 준 것임을 알 수 있다이때 광암 이벽은 천학 연구와 강의및 천주교 신앙을 주도하며 천주 공경가와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저술하였고, 1783년 가을, 이벽은 몇 해 동안 수차에 걸친 시도와 노력 끝에 마침내 만천 李承薰(1756∼1801)을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하시며, 거룩히 훈계하시니, 이승훈은 이를 듣고 스승의 말씀으로 마음에 새겨, 조선의 주춧돌을 상징하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서, 성물 구입등 부여된 사명을 정성껏 완수하고 귀국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若鍾供原初李檗聞有西洋學裝送李承薰隨其父東郁貢使之行入往洋人所居之堂與洋人結識購得洋書以歸與李檗及伊之兄弟若銓若鏞李家煥等同與講讀師法遂乃棄父母結徒黨. - 정약종을 문초한 결과, 서양학은 이벽한테 처음으로 배웠고, 이벽은 이승훈을 그 아버지 이 동욱공을 따라 좇아 가도록 북경에 몰래 보내어(裝送) 그곳 천주당에 가서 서양선비들을 만나 천주교에 입교하고, 천주교 책을 가지고 오게 하였습니다. 이벽과 정약전 정약용 형제, 이가환등과 더불어 결당하여 법(천주교 도리)을 강독하고 마침내 부모를 버리고 도당을 결성하였습니다라고 진술했다. 1784년 (갑진년) 2월, 이승훈 베드로는, 북경에서 얻은 많은 책과 십자고상, 상본과 신기한 물건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와 제일 급한 것은 이벽에게 자기 보물의 일부를 보냈다. 이벽은 그동안 날을 새가며, 사신들의 귀국을 몹시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이승훈이 보내준 많은 서적을 받자마자, 외딴 집을 세내어, 독서와 묵상에 전념하여 열심히 연구하였다. 이벽은 이승훈과 함께 정약전과 정약용 두 형제를 설득하여 천주교에 입교시키고, 상반(常班)의 계급을 초월하여 중인 계급인 최창현, 최인길, 김범우, 그리고 김종교 등에게도 전도하였다. 이 후 곧 이존창, 유항검, 윤지충등 십여 명도 세례를 받았다. 이때 이벽의 부인 유한당 권씨(병조판서 권암의 딸), 이승훈의 부인 나주 정씨(다산 정약용의 누이), 직암 권일신의 부인 광주 안씨(순암 안정복의 딸)등은 천주교 교리의 우월성에 대한 신앙심 위에 당시 사회의 여필종부 정신의 영향으로, 남편들을 따라 천주교를 믿는 동시에, 한문을 모르는 서민들을 위하여, 한문으로 된 기도서와 교리책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일반 상민들의 입교를 늘리었고, 이벽(李蘗)의 집에는 상민(常民) 신자들의 출입과 집회가 부자유스러워, 명례방(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에 있던 이벽의 제자이고, 중인계급의 통역관이었던 김범우의 집으로 집회장소를 옮기게 되어, 남녀유별, 장유유서, 양반 상인 계급차별 등의 제약을 덜 받게 하였다. 즉, 천진암에서 출발한 양반 남자들만의 천주교회가 수표동에 와서 남녀 서민 천주교회로 분리되었다가, 명례방에서 통합일치를 보게 되었다. 이리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서울 장안 명례방(현 명동 성당)에서 힘찬 발전을 하게 되었다. 1785년 을사추조 적발 사건을 계기로 시작하여 대규모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직자 영입 운동과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1827년 교황청 포교성성이 파리 외방전교회에 조선교회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여,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 교구를 설정하여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신앙대회를 여의도 광장에서 성대히 치렀다. 그 동안 1785년 을사박해, 1791년 신해박해, 1795년 을묘박해, 1801년 신유박해, 1815년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수 많은 교인들이 순교하는 동안 비로소 1882년 (고종 19년) 한미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되고, 1866년 한불수호 통상조약에 따라 신앙의 자유를 얻게하게 되었다. 1887년 5월 30일 조선의 外衙門督瓣(외아문독판) 金允植(김윤식)과 프랑스 전권위원 콜랭드 픙랑시[(Collin de Plancy 葛林德(갈임덕)] 사이에 韓佛 修好通商條約이 비준되어 효력을 발생하게 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1888년 6월 12일 정식으로 프랑스 공사 플랑시가 서울에 주재하게 되자, 숨어 다니면서 전교를 하던 프랑스 선교사들도 차차 활동을 활발히 하게 되면서, 부산 지방의 포교를 제일 먼저 담당한 신부는 1889년 입국한 조조(J0zeau, 趙得夏) 신부였다. 1890년에 영남 지역이 분활 독립되어, 부산 본당이 창설되었다. 1911년 초대 大邱 교구장 이였던 드망즈(Demange 安世華)주교가 1898년 조선에 입국하여 다음해 첫 포교지로 부임 한곳이 부산이였다. 대구 교구에 속한 부산은 1954년 6월 18일 감목대리는 徐正吉 신부였다. 부산교구는 1957년 1월 21일 초대 교구장으로 崔再善 주교가 임명 되었고, 1966년 2월 15일에 마산 교구가 분리되어 초대 교구장에 金 壽煥(추기경) 신부가 임명되었다가 1968년 4월 27일에 서울 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임되고, 이듬해 3월 28일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1968년 8월 3일에 張炳華 신부가 2대 마산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거제도는 마산교구 관활에 들어갔다. 부산 교구 약사 1911년 6월 11일 대구 교구 설립 1954년 6월 18일 경남 감목 대리구 설정 1911년 6월 11일 대구교구 설립 1954년 6월 18일 경남 감목 대구구 설정 초대 감목대리 서 정길 신부 취임 1955년 9월 1일 제 2대 감목대리 정 재석 신부 취임 1956년 4월 10일 경남 교구 교구장 인선 수임 1957년 1월 21일 부산 대목구 인가 취득 1957년 5월 30일 부산교구 초대교구장 최 재선 주교 성성 및 착좌식 거행 부산교구 참사회 구성 1962년 10월 26일 재단법인 천주교 부산교구 유지재단 인가 취득 1962년 8월 24일 초대 이사장 최재선 주교 취임 1964년 5월 5일 교구청 이전 1966년 5월 31일 마산 교구 분리 1966년 11월 28일 교구 사목위원회 조직 1971년 6월 25일 초대 보좌주교 이 갑수 주교 성성 1972년 1월 23일 제 2대 이사장 이 갑수 주교 취임 1972년 3월 30일 이 갑수 주교 부산교구 관리주교 피명 1973년 11월 7일 초대 교구장 최 재선 주교 은퇴 1975년 3월 16일 교구청사 기공 1975년 7월 17일 제 2 대 교구장 이 갑수 주교 착좌 1975년 7월 30일 교구 청사 준공 1979년 5월 23일 학교법인 성모학원 인수 1980년 12월 9일 카톨릭 센타 기공 신현본당 10년사에서는 거제도에 언제부터 천주교가 전례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알수가 없다고 전제하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의 영향으로 두분의 신자가 거제도로 귀양왔다는 것은 기록으로 남는 최초의 사건이다. 첫째분은 1801년(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黃嗣永(황사영:알렉산델1775-1801)의 모친 李允惠(이윤혜)이다. 황사영이 죽은 후 그의 가산은 籍沒(적몰)되고, 부인 丁命連(정명연:마리아, 丁若鉉(정약현:茶山 정 약용의 형님)의 따님은 제주도로 귀양갔고, 아들 黃景漢(황경한)은 추자도로, 모친은 거제도로 귀양갔다. 그러나 모친 李允惠(이윤혜)의 세례명은 알수가 없고, 또 거제도 어느곳에서 어떻게 사셨는지도 모른다. 平昌(평창) 李氏(이씨)였던, 그 분은 黃嗣永(황사영) 帛書(백서) 사건으로 연루되어, 거제도로 귀양온 李承薰(이승훈1756-1801)의 동생 이치훈(그는 신자가 아니였다)과도 친척이였지만, 두 사람은 내왕이 없은 듯 하다. 1801년 12월 겨울쯤 거제도 어딘가에 죄인의 몸으로 정착한후 기도로써 일생을 보낸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둘째분은 1801년 10월 진주 監營(감영)에서 순교한 유항검(아오스딩)의 막내 아들 柳日碩(유일석)이다. 유항검은[호남의 사도]라고 불리울 만큼 열렬한 분으로 박해가 전라도 지방을 강타했을 때 제일 먼저 체포된 분이다. 따라서 그의 순교로 가족 모두 치명의 길을 걷게 되는데, 부인 申喜(신희) 큰 아들 柳重哲(유중철:요한)과 며느리 李順伊(이순이:누갈다) 차남 유문석은 참수 치명됐고, 따님(9살)은 흑산도로 삼남 日文(일문:6살)은 거제도로 귀양 갔다고 이순이 옥중 편지에 남기고 있다. 3살 난 어린 생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애석하게 전해지지 않지만, 그것도 童貞(동정) 夫婦(부부)로 알려진 李順伊(이순이:아명은 유희)의 옥중 서한이 아니였다면 행방마저 모를뻔 하였다. 아무튼 두분의 형극의 삶이 거제도 포교의 진한 밑거름이 되었음은 잊어서는 안될 史實이다. ( 위 내용 중 유항검의 딸은 흑산도로 아들 유일석은 거제도로 귀양갔고로 기록 되어 있는데, 잘못 기록되어 수정한다. 딸 유섬이는 거제도로 아들 유일석은 흑산도로 귀양갔다) 신유박해의 결과로 두분의 순교성인 가족이 거제도와 인연을 맺었다면 본격적인 거제 전교의 출발도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興宣大院君 李昰應(이하응)이 주도하여 일으킨 병인박해는 경기지방에서 시작됐는데, 많은 신자들이 목선을 이용, 對馬島로 피신하기도 했었다.1887년 겨울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방문하고 떠난지 몇 달이 지난 이듬해 봄에 眞木亭[진목정:지금의 巨濟郡(거제군) 二運面(이운면) 眞木亭(진목정)]에서 박해가 있었다. [韓德華(한덕화)의 증언은 로베르 신부가 15명의 영세를 준 날자를 1887년 12월 29일(음11월15일)]라고 慶南(경남) 巨濟島(거제도) 福音(복음) 宣布(선포)의 經路(경로)를 窘亂記(군난기)에 적고 있다. 거제도의 첫 순교자 윤봉문의 가족이 거제도에 정착한 것은 1868년 경이다. 그의 부친 윤사우(尹仕佑)는 원래 경북 영일군 사람이었는데 할머니의 입교로 가족 모두 영세하게 되었다. 신자가 된 尹仕佑(윤사우)의 가족은 양산 대청이란 곳에 숨어 살았는데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부산 동래에 숨어 살면서 대마도로 신앙을 찾아 떠날 계획을 세웠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가족들을 이끌고 대마도를 향해 떠났다가 풍랑에 의해 거제도에 표류되어 서이말 근처에 살면서 다시 기회를 찾다가 거제도 안쪽으로 옮겨살게 되었다고도 하고, 부산에서의 출항이 어려웠기 때문에 용이한 거제도를 택하여 숨어 들어와 장목면 유호리(버드래)에 살다가 외포, 덕포를 거쳐 옥포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날품팔이 필묵행상을 하면서 어렵게 살면서. 어느날 필묵을 팔려고 서당에 들렀다가 陳氏(진씨)라는 접장을 만났는데, 尹仕佑(윤사우)의 유식함에 놀라게 되었다고 한다. 문답이 오가던 중 尹仕佑(윤사우)가 변소에 간 동안에 그 접장은 봇짐속에 감추었던 성교 문답책을 발견하고, 천주교인 임을 알게되었다고 전한다.옥포에서 동수(洞首-洞長)로 있던 진진부(陳進富)는 이것이 인연이 되어 尹仕佑(윤사우)는 그 接長(접장)을 신앙으로 인도하게 되는데, 그가 훗날 거제도의 첫 신자가 되는 陳進富(진진부)이다. 신앙을 받아 들이기로 결심한 陳氏(진씨)는 열심히 교리 공부를 한뒤, 尹仕佑(윤사우)와 함께 걸어서 경북땅 星州墨方(성주묵방)이로 가서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전한다. 그 뒤 진요한은 딸 陳順岳(진순악:아네스)과 尹仕佑(윤사우)의 둘째 아들 尹鳳文(윤봉문:요셉)을 혼인시켜 두 집안은 더욱 가깝게 지냈으며, 또 尹仕佑(윤사우)의 큰 아들 尹景文(윤경문:베드로)도 지세포 사람 주관옥의 딸 주도금이와 혼인하도록 주선하여 신자 집안이 많아 지도록 배려 하였다. 뒤에 이 朱氏(주씨) 집안에서 朱在用[1975년 作故(작고) 하셨는데 주재용(바오로) 신부님은 한국 카톨릭史(사)의 擁衛(옹위:1970년 1월 30일 발행)를 집필하여 한국 가톨릭의 초창기 사료를 남김으로서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이 오늘날 대 역사를 이루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유는 당시 이 자료를 보신 변 기영 몬시뇰님의 끈질긴 연구결과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의 대 역사를 이루게된 발판이 되었다.[사진 참조]신부님이 태어났으며, 陳氏(진씨) 집안에서는 陳聖萬(진성만:베드로) 신부님을 배출 시켰다.1887년 11월 칠곡 신나무골에 은거하고, 계시던 프랑스인 로베르 김 신부[(한국명:金保祿(김보록)]는 그 동안 준비해온 거제도의 예비자들을 위해 眞木亭(진목정)으로 역사적인 방문을 하셨다. 이 방문에서 거제도의 첫 영세자들이 탄생하게 되는데, 陳進寶(진진보)의 가족과 뒤에 제산공소의 씨앗이 되는 한 상필(도마)등 15명이였다. 이들은 陳氏(진씨)의 사랑채에 모여 공소 예절을 보며, 본당으로서의 꿈을 키워 나갔고, 40년 뒤인 1926년 5월 30일 眞木亭(진목정)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어 첫 본당 신부인 김후상(바오로) 신부님이 부임하게 됨으로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따라서 이 본당이 거제도의 첫 본당이며. 지금의 玉浦본당의 前身이다. 1886년 韓佛 수호조약으로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지방에서는 官憲에 의한 시련을 거쳐야만 했는데, 천주교를 미워한 진목정 주민들이 마을 이름마저 菊山(국산)이라 바꾸고, 첫 신자들에게 박해를 가했던 것이다. 이 사건에서 尹鳳文(윤봉문:요셉), 한상필(도마), 진명석, 주남이 등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는데 대표적인 尹鳳文(윤봉문)만이 통영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심하게 받았다. 그러다가 진주로 이송되어 3개월동안 몇 차례 혹형을 당한뒤 1888년 음력 2월 22일에 獄(옥) 담장 널판 밑으로 넣은 올개미로 교살당해 순교 하셨다. 당시 나이 40세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진주의 비라실(장재동) 공소의 신자들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가매장하였다. 순교자의 유해는 그 뒤 순교자의 외아들 이었던 윤학송(루까)은 부친의 유해를 거제도로 모셔왔고 옥포 앞산의 족박골(足泊谷)에 안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윤봉문의 무덤 앞 비석에는 그의 이름을 봉용(鳳用)이라고 새겨놓았고, 옥포 본당 첫 주임신부였던 김후상 신부가 지은 거제도 천주교 연혁에도 그의 이름은 봉용으로 나온다. 아마 봉용은 그의 속명(俗名)이었고 봉문(鳳文)은 관명(冠名), 즉 항렬을 따른 족보상 이름이었던 것 같다. 몇몇 자료에는 그의 이름이 봉주(鳳周) 혹은 봉동(鳳同)으로 나오는데 봉용을 잘못 읽은 결과로 보인다. 순교 당시 尹鳳文(윤봉문)에겐 아들과 딸이 각각있었다. 아들 학송(루까)은 자라서 장승포 김씨 가문으로 장가 들었는데, 후손없이 죽었고, 딸 송악이는 뒤에 신부옥이라는 분에게 시집을 가서 딸(랑선) 하나를 낳고 죽었다. 신부옥은 새 장가를 들었는데, 후처는 朱氏(주씨)였다. 그리고 이 두분 사이에서 태어난 분이 辛尙道(신상도) 신부님이시다. 辛尙道(신상도) 신부님은 1968년에 作故(작고)하셨고, 세례명은 방지거이신데, 명진 출신 辛尙道(신상도) 아우스딩 신부님과는 다른 분이시다. 거제도 인물로는 1935년 5월 25일 출생하신 정명조(鄭明祚.아우구스티노)신부로 1962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1965년부터 1985년까지 군종장교로 육군본부 군종감실 기획과장을 지내다가, 예편 후 부산 남천동 본당 주임신부를 거쳐 1989년 군종 교구장을 거쳐 1990년 주교로 서품되었다. 1998년 부산교구 부교구장을 거쳐, 1999년부터 제3대 부산교구장직에 올랐으며, 대한민국 보국 포장을 수상하였으며,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등을 역임하다가, 2007년 6월 1일 금요일 오전 6시 56분 지병으로 72세로 선종하였다. 본당내 공소의 역사 (1) 제산공소-1893년 옥포 소재 진목정 공소에서 분리 되어 한상필(도마)댁에서 공소 예절을 시작하였다. 당시 신자 20여명으로 1900년 양정리 재산 부락 849번지에서 대지 149평 초옥 12평(현 공소 자리)을 매입하여 공소로 사용 하였다. 1914년 초옥을 헐고 공소를 지었다. 1917년 11월 말경 안 플로니아노 주교님께서 공소 순회 차 다녀 가셨다, 1952년 이 지역에 포로수용소가 들어서면서 미군인 군종 변 신부와 한국인 보좌신부 張 大翼[루도비꼬:필자도 이 신부님에게 1967년 8월 14일 후암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사진참조] 신부님께서 공소를 거쳐 가셨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얼마후 미군들이 작전상 인근 민가를 불태울 때 중단되었다. 이때 유서 깊은 공소가 불타 버렸다. 1954년 장승포 본당 박문선 신부님의 주선으로 불태운 보상금으로 현 공소를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2)연초 공소(옛 이름 효자문 공소) 생략~ (3) 양정 공소~ 생략(4) 하청공소 ~ (5) 칠천도 공소 ~ 생략 (6) 유개공소 ~생략 ~ (7) 문동 공소 ~ 생략 ~ (8) 석포 공소 ~생략 (9) 진들 공소~생략 (10) 고현 공소는 1975년 12월 26일 본당으로 정식 승격됨 ~생략 (11) 외포공소 (12) 송진포공소가 생겼다. 1967년 1968년 당시 카메라를 가지고 촬영할 신자들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다.성당에서 일어나는 기념사진은 모두 후암동 소재 케네디 사진관에 의뢰하였으나, 당시 한국 출사 분과위원회 주임기사로 근무하던 필자가 교우들의 사진을 촬영하여 많이 나누어 주었던 사진중에 한장으로 故 장 대익 신부님을 모시고, 성모회원 몇몇이 기념촬영을 하시겠다고하여 촬영해드린 사진으로 뒷쪽 좌측에서 3번째가 당시 영원한 도움의 셩모수녀원에서 파견 근무 하시던 주 캔디다 수녀님이시다. 하청공소 장목면과 인접한 하청공소는 1906년 제산 성당의 김 회장에게 교리를 배워 영세한 임 지식(베드로)가 첫 신자로 이후 10여명의 신자들이 모여 수계생활을 꾸준히 해왔다고 한다. 이때 윤병용(모이세)회장이 중심이 되어 그의 자택을 공소로 제공했고, 장승포 본당의 교리교사를 초빙하여 창동부락의 마을 회관을 빌려 교리를 가르치도록 주선 하기도 하다가. 1955년 연초공소에서 분리되어 박 문선 신부님께서 하청리 310번지 대지 281평 및 가옥을 매입하여, 하청 공소를 발족 시켰다. 그러나 뒤에 부지일부는 매각되어 143평으로 줄었다. 1986년 경에는 신자수가 증가하였으나 공소 건물이 낡아 새로운 건물의 필요성에 따라 도로면 일부 땅을 매입 길을 넓이고, 협소한 구 건물을 헐어 버리고, 윤 학규 회장을 중심으로 전 신자가 일치, 현대식 새 건물 32평, 부속실 10평 총 공사비 1,600만원 정도를 들여 다시 지었다. 1980년 경에 연초면 汗內里가 고향인 筆者의 고종사촌 여동생 서 춘희(로사리오)가 부산에서 영세를 받고, 살다가 거제도에 이주하여 하청공소에서 어린이 교리반을 만들어, 전교에 활력소가 되고, 성당신축 모금에 앞장서서 열심히 뛰고 있다며, 윤 학규 공소회장의 서한을 받고, 하청공소를 돕기 시작하였다. 낙도 거제 하청 공소를 짓는 이야기를 카톨릭 신문에 내어 독지가를 찾는다고 광고하는 한편, 고향 장목에 천주교 전교가 되지 않고, 성당이 없어 안타깝던 차에 거제도가 落島라는 이유를 대고 당시 이태원 본당 이 병문 신부님과 상의하여 한남 2동과 자매결연을 맺게하여, 한남 2동 교우들의 협조를 받아 민박을 시켜가며, 하청 공소 어린이 중고등생들에게 서울견학을 해마다 시켰다. 그리고 이태원 성당 차원에서 공소 건립기금 모금 운동을 벌여 공사비 일부를 충당하는데 앞장섰다. 지금도 서 로사리오는 그때의 교우들과 인연이 되어 고현에서 해수탕을 운영하면서 서로 왕래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역대 공소회장은 1대 윤 병순(요한:1955-1959) 2대 윤 병용(모이세:1960-1965) 3대 윤 병관(이냐시오:1966-1967) 4대 옥 형석(요셉:1968-1970) 5대 박 태영(도나도:1971-1973) 6대 제 갑생(분도:1974-1976) 7대 윤 학규(안또니오:1977-) 이후는 알길이 없다. 한국의 사격 선수의 대부로 알려진 김 일환(스테파노)씨와 부인 스테파니아 여사도 거제 하청공소 학생들의 서울 견학과 성지순례에 많은 협조와 솔선수범 하였으며, 오른쪽 검은 옷을 입은 사람 앞에 부인 스테파니아 여사와 나란히 서 있다. 한 사람 건너 탁 정선(루시아)씨도 많은 협조를 하였고, 그외 한남 2동 구역 반원들 모든 사람들이 협조하였다. 장목면 소재 외포 공소 1956년 연초 지역에 살던 윤또애(빅토리아)가 장목면 외포리로 출가하여 시부모의 이해와 도움으로 연초 공소까지 걸어 다니다며, 신자 생활을 하다가 장승포 본당 박 문선 신부님이 판공을 기하여 방문 하셨고, 정남기(토마스)가 자기 소유의 논을 기증하여 공소를 신축하려고 목재까지 준비를 한적이 있는데 태풍 사라호와 본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중단되었다. 그뒤 외포 공소는 집도없이 윤 빅토리아의 개인(금포다방)에서 판공을 보고 미사를 드리면서 신앙을 지켜 나갔다. 1대 공소회장 이 정근(바오로) 1960-1975년 2대 공소회장 윤 또애(빅토리아: 1976-1986년 이후는 알길이 없다)장목면 소재 송진포 공소 1959년 2월경에 민병도(바오로)씨가 부산에서 장목면 송진포로 이주하여 자기집을 중심으로 전교를 시작하였다. 옥포 본당의 강영철(방지거)신부님을 초청하여 첫 미사를 올렸고, 부산 중앙성당의 지원과 구호물자의 덕으로 신자수는 늘었으나 많지는 않았다. 1973년 8월 1일 민병도 회장은 자신이 살고 있는 송진포리 573의 4번지 대지 61평 및 건물을 교구에 헌납하였다. 이터와 집은 초창기부터 공소로 사용하여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는데, 매입 당시 옥포의 강 신부님께서 당시 돈으로 25,000원, 송진포 교우들이 5,000원 나머지는 민 회장의 개인 돈으로 충당하였다고 한다. 1986년 현재 송진포에는 4가족이 신자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역대 공소회장은 설립 당시부터 민병도(바오로)씨가 혼자 담당해 왔는데 1986년 이후의 역사는 알길이 없다. <남원양씨 거제문중 병부공파 30세손 양 방수 정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