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과학의 발전은 생활의 편리함을 보장해 주었지만 그 이면에는 끊임없는 자연 파괴와 공해 문제가 공존해왔다. 또한 물질 문명의 발달은 인류에게 성경의 진리마저 외면케 하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으며, 서구 사회에 만연하기 시작한 허무주의, 인본주의, 냉소주의는 이를 구제하지 못한 정신적 지주의 상실로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 동양적 신비사상에서 비롯된 사탄이즘을 받아들여 전파하려는 뉴에이지 음악이니 명상치료니 요가니 하는 식으로 그 바람이 새어들어 반기독교적 양태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하나의 신앙으로까지 자리잡으려 하고 있는 뉴에이지는 과연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가려내야 하는지 알아보는 것은 '새로운 문화'의 탈을 쓴 사탄이즘에 대항하는 시작이 될 것이다.
뉴에이지의 기본원리
뉴에이지의 모든 의식들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지 '힘'이라는 대상과 연관되어 있다. 그 힘은 의식 정신 영혼 빛 생명 기(氣) 등으로 정의된다. 뉴에이저(new Ager)들은 힘을 신으로 규정하며, 모든 구분을 초월하는 비인격적 단일성을 띤 실체로 간주한다.
인간과 신 사이에는 선천적인 연관이 있으며 인간은 자신들 속에 내재된 신성의 힘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분명히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 또한 뉴에이저들의 주장이다. 뉴에이저들에 따르면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인류와 세계를 변형시킬 수 있는 영적 기술을 통하여 내재되어 있는 신성을 깨닫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환경 정치 사회적인 많은 문제는 인류 전체가 무엇인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이럴 때 인류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희망은 인간과 우주를 보는 근본적인 시각교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인류에게는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한데, 새로운 세계관이란 인간의 신성실현과 만유일체론을 의미하는 것으로 뉴에이지 사상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그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그리 멀지 않았다고 뉴에이저들은 역설한다.
이외에도 뉴에이저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설명하는데 몇 가지 더 부수적인 논리를 첨가한다. 그들은 인간의 정신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진리란 상대적이므로 신에게 도달하는 방법도 다양하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들의 전체주의적 시각은 교육 건강 저이 등 사회전반에 걸쳐 접근을 시도하게 한다.
뉴에이지의 매력 ,'모두가 신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이 되려 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평범성을 벗어나 초능력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그래서 상당한 매력을 발휘하게 된다.
"네가 바로 신이며 나도 신이며 우리 모두는 신이다"라고 외치는 뉴에이지 운동에 많은 사람들이 끌리는 이유는 어디있을까? 무엇보다 사람들은 표면상으로 심판하지 않는 뉴에이지의 신에 이끌리며 모든 종교는 공통적 진리를 표방한다는 주장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 요가 유체이탈 등 여러 가지 신비한 의식의 경험을 통하여 의식의 전환을 맛보기 때문이며 자연요법을 통한 건강의 증진, 인간관계 개선과 자아개발을 강조하는 것도 뉴에이지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주원인이 되고 있다. 뉴에이지는 사회적인 성공을 이룩했지만 공허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영적 진공상태를 메워 주며 인생을 자신의 힘으로 조정하는 힘을 강좌기도 한다.
점성학. 복술(卜術)을 이용하여 미래를 점치며 자신의 미래를 조절할 수 있다는 유혹에 사람들이 끌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고통은 왜 있는 것인가?' 등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진리인 듯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 또한 뉴에이지의 매력(?) 이라 할 수있다.
뉴에이지의 세계관
'이것이다'라고 잘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뉴에이지의 세계관은 동서양의 여러 종교와 사상, 밀의(密議)식이 융합돼 있다.
① '모든 것은 하나다'
이들은 현상세계의 차이를 인정치 않고 본질적으로 같다고 믿는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생물, 인간과 무생물도 하나인 관계로 보기 때문에 언제든지 서로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②모든 것은 선하다
얼핏보면 도덕적 완성주의를 말하는 것 같지만, 선과 악을 비롯해서 세상에 실재하는 대립개념들을 인정치 않으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선한 세상 속에서 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의식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모든 것이 산하다'는 것은 회개 없는 구원, 심판 없는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탄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었고 그 죄의 결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멸망의 실존을 거부하고 하나님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③의식개혁. 초월사상
인간이 기존의 지식과 경험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신성(神性)을 깨닫지 못하는데 그런 것들을 초월해서 우주와의 합일을 경험하게 되므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뉴에이저들은 주장하며 그 실행 방법으로 명상, 초월명상. 강신술 등이 타당성을 얻는다.
④윤회사상 인과응보
뉴에이저들이 불교적 사상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자신들의 구원관과 가치관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들은 어떤 종교나 철학이든 다 환영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초기 뉴에이지 운동 지도자로 알려진 셀리 맥클레인은 인과응보 즉 업(嶪:karma)을 우주적 정의라고 불렀는데, 이는 인간이 수천 수만 번의 삶을 계속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⑤세속적 인본주의
인간의 존재를 그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두자는 개념이 세속적 인본주의이다. 이것은 과학의 도움을 받아 인간의 관심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켜 인간 자신에게만 쏠리게 하는 것이며 인간의 잠재력 개발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결국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의 성공과 번영에만 긍극적 목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⑥범신론
뉴에이자들의 또 다른 세계관의 하나는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신이며 명상을 통하여 신과의 합일을 경험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이다. 이렇듯 뉴에이저들은 세속적 인본주의 사상으로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자유를 한없이 주장하고 있다는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들도 기독교의 하나님을 부르짖는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신이며 그 신을 다 수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그들의 신관이다.
철저히 이용당한 영화. 음악
오늘날 영화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쉽게 바꾸어 놓기도 하는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는 크리스천에게 영화는 더더욱 중요하다. 우리 나라에서 뉴에이지가 대중화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영화 '사랑과 영혼'이었다. 죽은 귀신과의 접신을 자연스럽게 보여주었고, 천국 지옥의 개념을 혼동케 했으먀 구원의 조건이 이성을 지극히 사랑하면 된다는 그릇된 사상을 심어준 것이다. 이렇게 뉴에이지 정신을 주입시키는데 영화는 철저히 이용되고 있으며 과거에 비해 이런 양상이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다.
뉴에이지 영화는 대개 성령이 아닌 어떤 다른 영혼과의 만남을시도하며 성경의 내용을 주제로 하되 전혀 다른 내용을 다루고 구원에 대해 그룻된 가르침을 내용으로 한다. 또 부활이 아닌 환생을 보여주거나 (뉴에이지의 환생개념은 불교의 환생설하고는 다르다. 불교에서는 윤회설을 갖고 있지만뉴에이지는 점진적 진화론적 환생설로써 죽은 사람을 누구나 내세에 더 나은 존재로 태어난다는것이다.)그리스도를 왜곡시키며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인간이나 다른 신이 대신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뉴에이지 영화이다.
우리 나라에서 뉴에이지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음악부분이다. 상업적인 통로를 통해 쏟아져 들어온 뉴에이지 음악의 홍수가 명상음악이라는 새 장르를 이미 개척해 놓았기 때문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음악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거나 잘못 사용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귀중한 영역 중의 한 영역을 뺏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위험한 다원주의적 범신론
다원주의와 상대적 진리에 대하여 논할 때 신의 인격성 유무가 거론되어야 한다. 뉴에이지의 주장처럼 만유일체의 신이라면 진리의 상대성을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인격을 지닌 신에게는 진리는 상대적일 수가 없다.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도 만약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면 용서받을 수있는 방법, 신에게 이르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게 된다. 그러나 돌아온 탕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구원의 방법이 오직 하나님뿐임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뉴에이지의 치료
신사고 운동은 뉴에이지 운동을 태동시킨 여러 움직임 중의 하나이다. 뉴에이지 운동에 끼친 신사고 운동의 영향은 바로 정신치유력에 잘 나타나고 있다. 유명한 뉴에이지 저술가인 샤쿠티는 "우리의 육체는 의식의 단순한 표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건강과 아름다움은 결정된다. 우리가 의식을 바꾸면 그 껍데기인 육체도 그 옷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병의 치료에 있어서도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 모두 검토되어야만 치료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치료해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분이 치유하지 않는 분이라는 뜻은 아니다. 때때로 그분은 여러 목적을 위하여 치유의 기적을 베푸시며 설혹 치유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뉴에이지에서는 치유되지 않는 것은 믿음의 부족이며 약한 정신력 때문인 것으로 규정된다.
뉴에이지 운동은 역사의 돌연변이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초월주의, 동방종교, 세속적 휴머니즘, 밀교주의 심령술, 신사고 ,신지학 60년대의 반항문화들의 혼합적 결정체로서 우리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뉴에이지 서적이 베스트 셀러를 기록하고 음악이나 영화가 최다 관객을 동원하는 등 기독교의 부흥을 비웃는 듯한 현상이 일어난 것도 최근의 일이다.
마치 에덴 동상 최초의 유혹처럼 우리 곁에 다가서고 있는 뉴에이지에 올바로 대항하는 것은 인격자이고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또 하나의 지상과제가 될 것이다.
참고자료: 뉴에이지에 대한 이해와 연구 월간 현대종교 94년8월호 p96-101
뉴에이지 음악
뉴에이지는 사회의 어느 한부분 특정계층이나 문화의 한 장르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신조류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 종교다원주의, 명상 및 요가, 뉴에이지 음악 등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나타나기 때문에 구분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쥐뿔도 모르면서(사실 쥐에 뿔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름)글을 쓴다는 게 그렇지만 이에 대해 아는 대로 올려보면, 뉴에이지는 형식의 파괴와 자유와 평화를 위장한 신 인간주의로 나타납니다. 뉴에이지운동가들은 평화를 자주 말합니다. 그들이 음악을 하건 미술을 하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평화는 사람이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사람의 힘으로 평화로운 영원한 세계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적그리스도적인 생각입니다.
기독교인은 듣는 것과 보는 것이 절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재즈(ZAZZ)로 혹은 록(ROCK)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뉴에이지 음악 혹은 클래식일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은 사람들이 다른 목적으로 만든 곡이라면 자제해야 되지 않을까요?
-SAPARAM-
뉴에이지 음악과 관련하여 상당부분 오해가 있지 않은가 합니다. 사실 뉴에이지라는 말은 영어로 NEW AGE, 고유명사 이전에 단순히 '새 세대'내지 '신세대' 라고 번역되지요.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를 종교적 형태의 활동인 NEW AGE MOVEMENT 의 뉴에이지와 연관하여 이를 고유명사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합니다. 그러나 뉴에이지 음악은 사실 현대음악 중 퓨전재즈 계통으로 갈라져 나온 한 음악갈래를 가리키는 경우로 알고 있고 이 경우 NEW AGE라는 말은 쓰지만 사실상 뉴에이지 운동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퓨전재즈니 뭐니 하면서 부르는 음악의 구분들 중 뉴에이지라는 일련의 음악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뉴에이지라는 종교적 활동은 팝이나 록, 재즈에 관계없이 전반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지 꼭 그들의 이름을 전반에 내세워서 나오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국의 많은 기독교 문화를 말하는 분들은 이러한 뉴에이지라는 단어를 마치 고유명사로 생각하여 뉴에이지라는 단어가 나오면 무조건 거부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오해를 하는 분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구분은 힘들지만 정말로 뉴에이지적인 세계관에 의해서 만들어진 음악일지라도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지 위험해서 피해야 되거나 귀를 틀어막고 듣지 말아야 될 음악이라고는 안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길가의 스피커에서 뉴에이지 음악이 나오면 귀를 막고 달려가야 합니다. 따라서 문화적인 체험이 적은 기독교인들이 주로 말하듯이 '안들으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왜 세상음악을 듣습니까?라는 식의 답변은 지나치게 세상을 단순하게 본데서 나온 오해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비단 음악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뉴스,신문, 영화 역시도 하나님 것이 아니면 보지 말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뉴에이지 음악을 구분하는 기준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이 시점에서 물론 (물론 구분하는 기준을 말하는 분들이 있지만 결국은 주관적인 판단일 뿐입니다) 기독교적인 대안 음악이 좀더 발전해야 겠고 또 뉴에이지 음악을 말하는 분들 역시도 막연한 선언적인 주장들(위험합니다! 듣지 맙시다! 식의)수준을 넘어서 그 음악의 어떤 구조, 어떤 화성, 어떤 분위기가 과연 영적으로 위험한 것인지 하는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지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EBES-
형제님의 말대로 뉴에이지라는 음악의 장르가 존재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기준이 모호해서 그렇지 사실 뉴에이지 음악을 하는 사람이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곡을 만든 경우가 많은데,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영감은 불신자에게도 동일하게 내려진 하나님의 축복이죠. 오히려 믿는 사람이 그런 깊은 음악을 만듦에 있어 소극적이란 느낌도 들 때가 있어 아쉬움을 금치 못합니다. 다만 많은 기독사역자들이 뉴에이지 음악에 대새서 경계하는 것은 일부 그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영성입니다.
그들은 동양의 주술과 인본주의적 명상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알겠지만 음악의 소재를 깊게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영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요. 그레서 음악을 통한 폐해는 그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은 사람의 영혼을 할퀴는 힘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음악이란 자체도 가치중립적인 문화의 요소라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사실 아니지만 충분히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겠죠. 그러나 음악만큼 힘이 있고 그러나 제한하기에 너무나 방대한 요소도 없기에 사실 많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객관적일 필요도 있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