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수로 수중에서 마스크가 벗겨져 곤란한 경우를 당한
사례입니다...참고하시길..
처음 스쿠바다이빙을 배우던 때(1998년)가 기억 난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내가 임용시험에 여러 번 떨어진 끝에 스물 여덟에 교사가 되어 맞이하는 첫 여름방학이었다. 대학로에 있는 어느 조용한 커피숍에서 강사선생님(사실 “M선생”이랑 나는 나이가 한 살 차이인데다 같은 학번이어서 우린 그냥 친구로 지낸다. 그래서 호칭도 어느 때는 선생에서 어느 때는 ‘누구야’로 존대도 하다 반말도 하다 자유롭게 부른다.)을 처음 만났고, 그 자리에서 바로 두어 시간의 강의를 들었다. 그 이후에도 강의는 어렵지 않고 쉽게 쉽게 진행이 되었다.
내가 워낙 몸이 불어 있고 물을 무섭게 여겨서 쉽진 않았지만 수영장에서의 강습도 그럭저럭 지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해양실습이었다. 그러나 강사선생님도 방학이었고, 나도 방학이었지만 무엇인가 스케줄이 꼬인(?) 덕분으로 나는 여름방학에 오픈워터 교육을 하지 못하였고, 언젠가 시간이 나면 하자고 미루어진 채로 추석 즈음까지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강사선생님이 전화를 하셨다.
“김 선생. 추석에 뭐해? 바빠? 제주도 가는데 갈 생각 있어? 같이 갈래?” 오, 기다리던 바 나는 물론 가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비행기표, 추석 며칠 전에 제주도 비행기표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결국 나는 강사 선생님 편에 짐만 먼저 부치고 공항에서 혼자 스탠바이를 해야만 했다. 길고 지루한 기다림 끝에 간신히 밤 비행기 표를 구했고 거의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제주도에 내리게 되었다.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다. 물론 나보다 더 늦게 비행기표를 구해 내려온 언니도 있기는 했지만.
숙소에 짐을 풀고 다음날 아침(10월 3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오전에 다이빙을 하고 나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드디어 내가 물 속에 들어가야 할 때가 왔다. 장소는 문섬 새끼섬, 모든 장비를 갖추고 일어서서 한 발을 디뎌야 할 그 순간이 왔다. 내 양 옆으로는 다이빙 숍의 김 사장님과 윤 강사님이 나를 부축하고 계셨다. 시퍼런 바닷물을 내려다보는 순간 나는 무서웠다. 너무너무 무서웠다.
물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강사선생님(사실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어린 덕분에 나는 선생님이라기보다는 그냥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은 “나 믿지? 괜찮아, 안 죽어 내려와 내려와. 그냥 한 발만 걸으면 돼” 하며 연신 나를 얼르고 달래고 꼬시고 있었고, 함께 계셨던 김 사장님과 윤 강사님도 나를 격려하고 계셨다. 5분 여의 실랑이 끝에 - 우리 강사선생님은 이 이야기만 나오면 “5분이라고????? 그게 무슨 5분이야 10분도 더 넘었지.”라며 목소리를 높이지만 하여간 나는 늘 5분이라 주장한다.- 어찌어찌 간신히 한 발을 내디뎠고 마냥 물 속으로 추락할 것만 같던 내 생각과는 달리 내 몸은 떠올랐다. 그런데 ‘으악’ 따가웠다. 마스크가 벗겨진 것이었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나는 상황이 어찌 된 줄도 모르고 호흡기만을 꼭 잡고서 버둥버둥 대고 있었고, 강사선생님은 불안해 하는 나를 꼭 잡고서는 “진정해, 진정해,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 사이 다이빙숍 김 사장님께선 물 속에 들어가셔서 벗겨진 내 마스크를 찾아 오셨다. 바닥이 있는 얕은(? : 12미터) 곳이라서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그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나는 첫 다이빙을 포기하고 육지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감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실랑이한 5분과 마스크를 주워오신 사장님과 근심스런 얼굴로 나를 보는 강사선생님께 너무나 미안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물위에 떠서 버둥버둥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면서 약간의 눈물을 흘려 바닷물을 씻어내고, 다시 마스크를 쓰고 줄을 따라서 입수했다. 이퀄라이징도 무사히 잘 이루어지고, 맑은 날은 아니었지만 바닥에 내려앉은 것이 나를 조금은 안심되게 했다. 앉아서 호흡기 찾기를 하고 잔압을 확인하는 수신호도 해보고, 마스크 물빼기는 했는지 안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는 건 강사 선생님이 내 손을 꼭 잡고 다녔다는 것이다. 불안해 하는 나를 안심시키려고 그랬을까 하여튼 37분의 시간(로그북에 적힌 시간) 내내 손을 잡고 다녔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 나는 건 해초 이파리들이 물의 움직임에 따라 동시에 움직인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고, 바다 속의 그 알록달록한 산호들이 너무너무 예뻤다. 오징어 세 마리가 내 머리 위로 지나간다는 것 또한 신기했다. 온통 아름답고 신기한 일 뿐이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신기한 것들을 본 건 아니었지만 나는 그 첫 다이빙에서 바다 속의 세계에 매혹 당했다. 다이빙을 마치고 올라와 나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곳엔 쥐구멍도 없었다!! 그래도 ‘이 중에 제일 못하는 사람이 난데 이런 실수쯤이야 뭐 어때’ 이런 뻔뻔한 마음가짐으로 간식을 먹었던 것 같다.
그렇게 얼떨결에 오픈을 마치고 겨울은 그냥 흘려보내고 다음해 여름에 열대바다로 해외투어를 다녀오면서, 1999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 날 나는 열 일곱 번 째의 다이빙을 다시 제주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 팀의 멤버는 갓 오픈워터 교육을 마친 다섯 사람(남자 둘, 여자 셋), 대학 다이빙부 출신의 능숙한 네 사람, 강사선생님, 그리고 부진아인 나까지 해서 모두 11명이었다. 그러나 내가 갓 오픈워터 교육을 마친 사람들보다 열 번쯤 더 다이빙을 했다고 해서 뭔가 더 나은 점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수영을 할 줄 몰랐고, 중성부력은커녕 내 몸 하나 가누기도 영 힘든 상황이었다.
그 날은 마지막 날이었다. 아침부터 숍에선 어디를 갈까 의논을 하더니 검은여에 간다고 했다. 서귀포 KAL 호텔 앞에 있어서 KAL호텔 동굴이라고 한다고도 했다. 어렵지 않은 동굴이고 예쁘다고 했다. 보트를 타고 내려서 입수했다. 기온은 10℃, 수온은 18℃, 시야는 5m, 최대 수심 24m, 그리고 총 잠수시간 35분.(물론 이것들은 로그북에 적어 놓은 것들이다) 조류는 없었다. 내 짝은 물론 나보다는 훨씬 실력이 좋은 물개 같은 친구였다. 짧은 동굴을 지나 동굴에 모여있던 공기방울 들이 위로 올라오는 것도 구경하고, 라이언피쉬가 헤엄치는 것도 보고, 감탄 어린 표정으로 바다 속을 둘러보며 상승을 준비했다. 짝과 수신호를 주고, 받고 천천히 상승하는 중이었다.
수심 8m 쯤 까지 왔을 때 “삑삑”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내 컴퓨터가 내는 소리였다. 그때 내 컴퓨터는 손목형이 아니라 잔압계에 같이 붙어 있었다. 컴퓨터가 계속 “삑삑” 소리를 내며 slow라는 글자를 띄우고 있었다. 나는 비씨에서 공기를 빼고 조금 천천히 올라가길 기다렸지만 컴퓨터는 계속 “삑삑” 거리면서 나를 당황시키기 시작했다. 컴퓨터의 계속 삑삑 거리는 소리에 나는 어찌할 줄을 몰랐고, 곧 내가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놀란 나는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고 버둥버둥 거리다 급기야 코로 숨을 쉬면서 마스크 밑 부분에 약간 고여 있던 물을 코로 들이마시게 되었다. 놀라서 허둥거리던 중에 마스크가 벗겨지고, 곧 호흡기도 놓치고 물을 왈칵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도 여전히 버둥버둥 거리고 있었다. 호흡기를 물 생각도 못하고 나는 잠시동안 손으로 코를 막고 입을 꼭 다물었다. 물론 눈도 꼭 감은 채로. 기도 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불과 1, 2초 안팎이었을 거라 생각되지만,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는 중에 나의 짝이 호흡기를 입에 물려주었다.
곧 나의 친애하고 존경하는 강사선생님이 내 옆으로 왔다. 우리는 곧 물 위로 떠올랐고, 나는 하늘을 보고 누웠다. 두 분의 강사선생님께선 놀란 나를 진정시키느라 애쓰셨고, 나는 파란 하늘만 바라보았다. 눈이 부셨다. 배에 오르고 모두들 나를 염려하고 걱정해주고 안심시켜 주었으나 나는 죽고 싶었다. 그 심정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 마스크가 내 목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어찌된 일인가 잘 생각해 보니,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놀라서 버둥거리다가 내 스스로 마스크를 잡아 내렸던 것이다. 이런 창피한 일이.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첫 다이빙에서 마스크가 벗겨져 고생을 했다. 그 이후로 나는 마스크에 예민해져 있었다. 한 방울이라도 물이 코로 들어오면 당황했고 그런 사태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다이빙도 매우 조심스럽게 허둥대지 않고 당황하지 않으려 노력하던 중이었다.
결국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컴퓨터의 천천히 상승하라는 말 한마디에 놀라서 허둥지둥 버둥버둥 거리다 마스크를 내 손으로 벗겨내고 놀란 나머지 호흡기마저 놓치고선 가장 간단하고 수영장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기초지식인 호흡기 찾기 마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나선 기도를 열고 올라갈 생각도 못하고 눈도 감고 코도 막고 입도 막고. 짝이 올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는 이야기다. 오 빵점짜리 학생이다. 지진아거나 늦된 학생인 것이다. 바보..라고 한마디 해주면 딱 어울릴 상황이다. 직업이 교사인 나로서는 우리 강사선생님의 심정이 얼추 짐작이 갔다. 내가 가르친 제자가 저 모양이라면 참 망신스러운 일일 것이다. 한편 안쓰럽기도 하였을 것이고, 보기에 불안하기도 하고 교사로서의 능력에 잠시나마 의문도 가질 것이고. 참 한심한 제자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나는 두 번째 다이빙은 포기하고 배에 남았고, 나의 물속 해프닝을 보고 초보 다이버 한 사람도 놀란 나머지 겁을 먹고, 두 번째 다이빙을 쉬었다. 나는 그녀에게 정말로 미안했다. 배에 남아서 다른 사람들이 다이빙하는 동안 갖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이렇게 남들 놀라게 하는 일만 하면서 다른 사람들 걱정만 시키면서 다이빙을 왜 하나?’ 하는 생각, ‘나는 언제쯤 남들 보기에 불안하지 않고 편안하게 다이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나도 언젠가는 남을 살피고 남에게 초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능숙한 다이버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만일 버디가 나를 못 보고 다른데 보고 있다가 시간이 좀더 흘렀다면??’ 하는 생각 등 한마디로 자괴감이 들었다. 바다 속에서 혼자서 몸을 가누지 못한다면 항상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말인데 누구도 나를 위해 그리 해 줄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머 미안한 건 미안한 거지만 이미 엎질러진걸 어쩔 꺼야. 나도 나중에 익숙해지면 잘 할 수 있다 머. 나라도 언제까지 이러겠냐 이런 두꺼운 배짱과 철판 깔은 얼굴로다 웃으면서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 방학에 마스크를 바꾸었다. 동양인의 얼굴에 맞게 고안되어 나왔다는 노란색과 남색이 섞인 예쁜 마스크로 바꾸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강사선생님이 자신이 쓰려고 도수를 맞추어 놓은 마스크를 내가 한 번 써보고서는 내 눈에도 잘 맞아서 내가 그냥 쓰겠다고 조른 것이다. 그 이후로 내가 다이빙기술이 향상된 건지 장비 덕분인지 더 이상 마스크로 인해서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심각한 실수도 저지르긴 했지만, 더 이상 마스크에 물이 샐까 신경 쓰지 않고 약간 물이 들어와도 놀라지 않게 되었다. 점차로 나아지고 있다. 물론 아직도 중성부력 맞추기는 서툴지만 이제 혼자서 몸은 가눌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이런저런 실수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다만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는 것은 다 좋은 강사선생님을 만난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좋은 강사선생님을 소개해주신 분께 정말 감사 드린다. 첫 다이빙의 그 정신 없는 상황에서도 강사선생님 덕분에 나는 바다 속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연산호 가지에 붙어 위장하고 있는 손톱 만한 게오지라던가, 해초들, 굴속에 숨어 있는 작은 새우들 같은 바다생물 들은 나를 매혹시켰다. 아는 바가 전혀 없는 나로서는 봐도 뭔지 모를 뿐더러 찾기조차 힘든 것들이었다. 사실 첫 다이빙은 체험다이빙이나 다름없었다. 강사선생님이 부력도 맞춰주고 손잡고 데리고 다녔다. 아마도 겁먹고 놀란 나를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바다가 더 이상 무섭지 않았고, 바다에 매료되었다. KAL 동굴에서 죽다 살아난 후에도 다이빙을 그만 하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나를 잘 알고 있는 강사선생님과 3년 여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함께 다이빙을 한다는 사실이 나의 심리적인 안정에 한 몫을 한다.
이제 두어 달 후면 다시 방학이 온다. 내게는 방학은 곧 다이빙투어를 의미한다. 바다에 갈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어 온다.
주) 담당 강사의 변...
다이빙 교육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실기에 있어서도 같은 과정을 가르치고 익히게 도와주는데 짧게는 이틀에서 길게는 열흘 이상이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과정을 수영장에서 완전히 숙지를 하고 해양실습을 나가는 것이 원칙이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수영장에서 어느 부분을 완전히 숙지를 안 하거나 아예 나중으로 넘기고 바다로 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강사가 100% 책임을 지고 통제가 가능한 상황일 경우에 한합니다.
이 글을 쓴 강습생의 경우는 물과 굉장히 안 친한 경우였지만, 본인이 다이빙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편법을 썼습니다. 수영장을 10회 이상 갔음에도 불구하고 보통 강습생들이 이틀정도 나가는 진도를 못 나갔고, 이런 진도로 나가다가는 자칫 다이빙을 포기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본인의 책임 하에 바다에 나가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런 학생을 만난다면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강사로서는 학생을 포기시키는 편이 속은 편합니다. 남들과 같은 강습비를 받고 남들의 몇 배 이상의 노력과 시간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강사라는 책임감과 위치 때문에 그러는 경우는 없습니다.)
첫 제주도 해양실습의 경우는 바다에 대한 친밀감을 높이고 바다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겨주어 좀더 분발을 하게 만들려는 의도에서 수영장 교육을 100%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강사인 본인이 수고스럽고 힘들기는 하지만, 강습생을 잘 이끌 경우에는 학생이 더욱 분발하여 스스로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이 경우에는 성공을 하였습니다. (참고로, 본인은 바다에서 강습생의 손을 잡아주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강습생의 손을 잡아주는 것은 강사가 편하고자 하는 생각에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강습생이 상승을 한다고 하더라도, 본인 스스로가 상승을 하고 있음을 알고 적절한 대응을 하고 있고, 바다의 상태가 양호하다면 그냥 보고있는 스타일 입니다.)
사고가 났을 때에도, 여섯 명의 강습생에 본인, 그리고 현지의 강사 한명, 그리고 자격 있는 보조자(A.I 자격이 있는 후배) 네 명이 다이빙을 했습니다. 강습생과 강사 그리고, 보조강사의 비율이 1:1을 맞추어 혹시 있을 수 있는 사고에 대비를 했습니다. 만약, 이 비율이 안 되었더라면, 애당초 다이빙을 안 했을 겁니다.
사고가 났을 때는 다이빙을 마치고 안전감압정지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글 쓴 이가 스스로 5미터에서 중성부력을 맞추려고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로, 당시 글 쓴 이는 주변의 사람들을 기준으로 자신의 중성부력을 맞추려고 무던히 애를 쓰던 상태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하였고, 컴퓨터는 얕은 수심에서 주인이 급상승을 반복하자 계속 경고음을 발했습니다. 본인은 다른 강습생과 짝을 이루고 있었지만, 글을 쓴 사고자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고의 처음부터 같이 버디를 하던 후배의 적절한 사후 조치까지 다 보고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어느 정도의 무리는 있었지만, 모든 상황이 강사인 본인의 통제 하에 놓여있었고, 사고 후에도 적절한 대응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후회를 하거나 잘 못 했다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현재 이 글을 쓴 강습생은 다이빙 횟수가 50회를 넘었으며 어드밴스드 강습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다이빙 기술과 다이빙을 대하는 마음이 어느 누구 못지않습니다.
첫댓글 뛰어내리는데 5분 정도 걸리는 데...휴우...저도 걱정되네요....글 쓴 친구를 보니 ...나를 보는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