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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산리(平山里)
본래 남이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옹점리, 신평리, 장산리, 평산리를 병합하여 평산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평산촌(平山村), 신동리(新洞里), 입자점(笠子店)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입자점은 옹점리, 신동리는 신평리로 이름이 바뀌었고, 장산리가 새로 생겼다. 1990년대에 옹점리는 장평리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1910년 면제 실시에 따라 면소재지로 1914년에 분향리로 옮겨갈 때까지 남이면과 남면의 소재지가 지금의 장평마을에 있었다.
현 행정이동은 평산 1리는 장평이고, 평산 2리는 장산, 평산, 신평이다.
ㅇ 장평(長平)
장평은 250여년 전에 전주이씨가 터를 잡아 들어왔다고 한다. 뒤에 신안주씨가 들어와 자작일촌을 이루고 살았다. 중년에 김해김씨·전주이씨·죽산안씨·해주최씨·이천서씨 등이 들어 왔다. 마을형성은 신안주씨 15호, 김해김씨·해주최씨 6호, 전주이씨 3호, 이천서씨·반남박씨·죽산안씨 2호, 한양조씨 등 51호에 160인이 살고 있다.
마을 이름을 모발(毛髮)이라 하였는데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 입자점(笠子店)으로 기록하고 있다. 1910년 면제 실시 때 면사무소가 이 곳에 있었으며 이때 옹점이라 하였다가 해방 후에 장산과 통합 장점으로 하였다. 1981년에 장평으로 다시 변경하였다. 1960년대까지 옹기를 생산하였다.
인물로는 남면 면의원 주일남, 서울경찰서경감 주동진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ㅇ 장산(長山)
장산은 200여년 전에 이씨가 터를 잡아 살았다고 전한다. 바로 뒤에 반남박씨와 광산김씨가 들어왔으며, 중년에 김해김씨·죽산안씨·나주오씨·천안전씨·한양조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광산김씨·김해김씨 4호, 반남박씨·한양조씨·해주최씨·천안전씨·이천서씨·경주이씨 2호, 죽산안씨 등 36호에 87인이 살고 있다.
마을이름을 장산이라 한 것은 마령리 서촌에서 백운 장평으로 내려오는 주령이 길고 맨 끝에 위치하고 있어 장산이라 하였다 한다. 해방후 한때 장평과 병합되어 장점이라 하였다가 1981년에 분리 다시 장산이 되었다.
인물로는 육군 소령 박인두가 이 마을 출신이다.
ㅇ 평산(平山)
평산은 300여년 전에 광산김씨가 터를 잡아 자작일촌을 이루고 살아온 마을이다. 근년에 밀양박씨와 해주최씨가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광산김씨 29호, 해주최씨 4호, 밀양박씨 등 47호에 116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세가 평사낙안(平沙落雁)이라 하여 평산이라 하였다 한다.
인물로는 남면 면의원 김천마, 김용구, 보건복지부 과장 김경호, 육군 소령 김경춘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효열수부인수원백씨지비"와 "평우광산김공원주효행비"가 있다.
ㅇ 신평(新坪)
신평은 200여년 전에 광산김씨가 터를 잡아 살았다 한다. 뒤에 청송심씨가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중년에 하남정씨·전주이씨·나주임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청송심씨 5호, 광산김씨 2호, 전주이씨·하남정씨·나주임씨 등 11호에 40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은 조리형국이라 하고 마을 앞동산을 연화도수(蓮花倒水)형국이라 한다. 마을 이름이 1789년에 간행한《호구총수》에 신동(新洞)으로 기록하고 있다. 1910년에 신평으로 바뀌었다. 일명 어덕밑이라 하여 "엉떠러지기"라고도 하였다.
인물로는 광주지방법원장 심의섭이 이 마을 출신이다.
(7) 행정리(杏亭里)
본래 남이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검정리, 행정리, 승가리, 송정리를 병합하여 행정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검정리(檢亭里)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행정리와 승가리·송정리가 새로 생겨난 마을이다. 그러나 송정리는 일제말기에 없어졌다.
현 행정이동은 행정 1리는 행정, 승가이고, 행정 2리는 검정이다.
ㅇ 행정(杏亭)
행정은 300여년 전에 양성이씨가 터를 잡아 살았다고 한다. 뒤에 광산김씨와 행주기씨가 들어왔다. 중년에 안동김씨와 여흥민씨가 차례로 들어오고, 근년에 여산송씨와 청안이씨가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광산김씨 8호, 양성이씨·행주기씨 3호, 밀양박씨 2호, 청안이씨·여산송씨·진원박씨 등 26호에 74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수레차형국이라 하여 수레에 짐을 실으면 내려야 하는 것과 같이 부자가 되면 옮겨야 한다는 설이 있다. 마을 이름은 살구나무가 집집마다 있어 행정이라 하였다 한다.
인물로는 남면 면의원 김일호, 교회 목사 이종택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는 백제석실고분이 정자고개 옆에 있다.
ㅇ 승가(升加) (신거무)
승가는 200여년 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나 토착 성씨가 없어 알 수 없다. 이천서씨가 4대를 거주하고, 근년에 여산송씨·함풍이씨·순창설씨·풍천노씨·광산김씨·남양홍씨·행주기씨·나주임씨 등이 차례로 들어 왔다. 마을형성은 이천서씨 6호, 함풍이씨 5호, 행주기씨·전주이씨·남양홍씨·광산김씨 3호, 풍천노씨·하동정씨·전주최씨·나주임씨 2호, 순창설씨·천안전씨 등 42호에 112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은 무중와우(霧中臥牛) 또는 초중와독(草中臥犢)이라 하여 소형국으로 본다. 마을 이름이 본래 신거무이다. 신거무장(시장)과 신거무다리의 전설로 알 수 있으며 이 신거무장은 지금의 비아장으로 옮겨갔다.
인물로는 광주지방법원 민사과장 이재우, 장원초등학교장 기복호, 해군중령 이문행, 육군소령 이도행, 사법고시 합격한 임창헌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는 말 무덤이라 하는 백제고분과 신거무 다리가 있었던 곳에 다리 재료인 돌을 세워 2개의 입석이 승가교 양편에 세워져 있다.
ㅇ 검정(檢亭)
검정은 본래 청송심씨의 텃자리로 전해온다. 400여년 전에 양성이씨인 이증(李增) 처외가인 진사 심백붕의 연고로 들어와 자작일촌으로 12대를 살아 온 마을이다. 근년에 외손인 광산김씨와 밀양박씨가 들어와 살고 있다. 마을형성은 양성이씨 20호, 광산김씨 3호, 밀양박씨·경주최씨 2호, 청송심씨 등 30호에 70인이 살고 있다.
마을은 본래 열두 동네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한다. 지금도 서당동, 학동, 사장등, 저벙골, 검바우, 시성골, 광검, 새터라는 지명으로 그들 마을의 흔적이 전해온다. 서당동에서 돌도끼, 치마골에서 화살촉이 발견되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고, 2기의 고분(말 무덤)과 여러 기의 석실분(돌방 무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백제 때도 중요한 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마을 앞 사장등에 군사 훈련장인 활터가 있었다고 전하며, 서당동과 저벙골에서는 무문토기와 백제토기, 고려청자, 조선백자가 출토되는 고분이 많아 수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마을이다.
구전에 의하면, 검사하는 정자가 있어 검정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마을은 배형국이라 하여 집안에 샘을 파지 않는 풍습도 전해 온다.
인물로는 장락원정을 지낸 이증, 무과에 급제한 이선량·이병두, 장성국민회장 이근우, 제2군수지원사령관 육군소장 이연신, 광주민속박물관장 이종일, 전남대학교 교수 이형종, 장흥 장동초등학교장 박경호, 광주전신전화국 기계계장 이정규, 한국복장협회 광주 전남지부장 이종채, 연천석재 사장 이봉구, 동원상사 사장 이재철, 한국정보통신 사장 이종해, 전남수영연맹 회장 이관웅, 한국통신 마케팅국 과장 이종식, 인하대학교 강사 김상채가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는 양성이씨 제각 추원재와 영모재가 마을 앞·뒤에 있으며, 쪽박등에 백제고분이 있다.
(8) 월정리(月汀里)
본래 남일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정리, 월계리, 월산리, 우치리, 신아산리를 병합하여 월정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안청리, 비아리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월정(불정)리와 우치리·궁산(월산)리·만동리·월계(구례)리가 새로 생겨난 마을이다. 그러나《호구총수》의 비아리는 비아면으로 안청리는 하남면으로 편입되었다. 비아리의 일부가 신아산리로 새로 생겼다.
현 행정이동은 월정 1리는 불정, 새터이고, 월정 2리는 월계, 우치, 신아산이며, 월정 3리는 월산이다.
ο 불정(佛汀)
불정은 200여년 전에 청송심씨가 참새골과 서당골에 터를 잡고 살다가 현재 마을로 옮겨왔다고 한다. 뒤에 행주기씨·의령남씨·전주이씨·광산김씨·순천박씨·경주김씨가 차례로 들어왔고, 근년에 양성이씨·양천허씨가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전주이씨 9호, 청송심씨 6호, 행주기씨·광산김씨 4호, 의령남씨 3호, 양성이씨·경주김씨 2호, 양천허씨·순천박씨 등 44호에 111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운중반월이라 하여 월정이라 하였는데 일제시에 마을 뒤에 부처바위가 있어 불정으로 고쳤다 한다.
인물로는 남면 면장 기치섭·기기옥, 장성경찰서 경무과장 기유섭, 육군대령 기세원·기세갑·김영수, 판사 심명구, 아세아자동차 과장 김석주, 대신생명 소장 남재욱, 레스링 국가대표선수 이기춘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는 1849년에 세운 이승례부사선정비가 있다.
ㅇ 새터
새터마을은 100여년 전에 함평이씨가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았는데 뒤에 장수황씨·행주기씨·전주이씨가 차례로 들어왔고, 해방 후에 광산김씨·순천박씨·반남박씨·전주최씨·고령신씨가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광산김씨·함평이씨·전주이씨 2호, 고령신씨·행주기씨·순천박씨·반남박씨·전주최씨·경주이씨 등 13호에 32인이 살고있다.
마을이 새로 생겨 새터라 하였다. 1960년대까지는 불정에 속했다가 10호가 넘어 분리되어 새터로 독립되었다.
인물로는 광양대학교수 이동건이 이 마을 출신이다.
ㅇ 월계(月溪)
월계는 100여년 전에 김해김씨인 김치문이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였다. 바로 뒤에 밀양박씨가 들어왔고 일제시대에 문화유씨·창영조씨가 들어왔다. 해방 후에 수원백씨·영광정씨·경주이씨가 차례로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형성은 밀양박씨 5호, 김해김씨 4호, 수원백씨 2호, 경주이씨·창영조씨·문화유씨·영광정씨 등 19호에 59인이 살고 있다.
마을 이름이 본래 구례 또는 시네거리라 하였다. 옆 마을 우치가 소형국으로 이곳은 소의 구레에 해당된다 하여 구례라 하였다 한다. 마을이 커짐에 따라 해방 후에 월계로 부르게 되었다. 이는 월정리의 시네거리를 따라 월계하고 우치마을을 편입하였다. 1980년대에 다시 우치로 분리되었다.
인물로는 조선대학교 교수 조종기, 적십자병원 의사 조종덕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ㅇ 우치(牛峙(治))
우치는 100여년 전에 연안차씨인 차두순이 비아에서 들어와 살았다 한다. 같은 시기에 진주강씨가 들어 왔고 이어 함안조씨가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형성은 밀양박씨 4호, 김해김씨 3호, 함안조씨 2호, 연안차씨·나주오씨·파평윤씨·하남정씨·장수홍씨 등이 14호에 41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소형국으로 본래 소치라 하였는데 한자로 우치라 하였다. 일제 시에는 월계마을이 우치에 속하였는데 해방후 월계가 커짐에 따라 월계에 합하였다가 1980년대에 다시 분리하여 우치(牛治)라 표기하고 있다.
인물로는 군산대학 교수 차정남, 공군 준장 차정렬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ㅇ 신아산(新牙山)
신아산은 130여년 전에 김해김씨와 광산김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아 들어왔다 한다. 다음에 인동장씨·옥천조씨·청주한씨가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김해김씨 5호, 옥천조씨 3호, 밀양박씨·진주정씨 2호, 광산김씨·경주김씨·인동장씨·청주한씨·진주강씨 등이 22호에 58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나는 가마귀 형국으로 상아산 하아산을 비아리라 하는데 새로 생긴 마을이라 신아산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비아리는 광산에 편입되고 신아산은 장성에 남게 되었다. 일제시에 이곳에 과수원이 형성되어 일본인이 2호가 거주하기도 하였다.
인물로는 전남대학교 교수 조동산·조동섭, 산부인과 의사 조동을, 충주병무청 과장 장상옥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ㅇ 월산(月山)
월산은 120여년 전에 광산김씨인 김기영이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였다 한다. 같은 시기에 파평윤씨와 진주강씨가 들어왔으며, 일제시에 전주이씨·연안차씨·탐진최씨·장수황씨·여양진씨·동복오씨·김해김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연안차씨 9호, 파평윤씨·탐진최씨 8호, 김해김씨 3호, 장수황씨·전주이씨·진주강씨·밀양손씨·여양진씨 2호, 금성나씨·동복오씨·장성서씨·장흥고씨·현풍곽씨·광산김씨 등이 48호에 131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쌍가마(釜)형국으로 쌍가촌이라 하였는데, 뒤에 궁산(弓山)이라 하였다. 일제시 일본 총무대신 이름이 궁산이라 하여 쓰지 못하게 해서 월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인물로는 법무부 차관 김영천, 남면 면의원 차기동, 장성군의회 의장 최남호, 동신 대학교 교수 조병기, 조선대학교 교수 윤관중, 공인회계사 최윤호, 해남경찰서 과장 윤세중, 현대화재 미국지사장 최갑필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참봉강상운시혜비와 의당민영관시혜비가 있는데 마을에 토지를 희사해 마을에서 세웠다.
(9) 삼태리(三台里)
본래 남일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태리, 서태리, 중태리, 지촌리를 병합하여 삼태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동태리, 중태리 서태리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지촌리는 새로 생겨난 마을이다. 1983년에 지촌마을은 광주시 오룡동에 편입되었다.
현 행정이동은 삼태 1리는 서태이고, 삼태 2리는 중태이며, 삼태 3리는 동태이다.
ㅇ 서태(西台)
서태는 400여년 전에 진원박씨가 터를 잡아 들어왔다고 한다. 뒤에 나주임씨와 나주나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나주임씨 26호, 진원박씨 18호, 나주나씨·광산김씨 3호, 장흥고씨·남평문씨 2호, 영천이씨·행주기씨·창영조씨·곡부공씨·이천서씨 등 68호에 166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삼태성의 별자리에 해당하는데 서쪽에 있는 별자리라 하여 서태라 하였다 한다. 또한 저울대 형국이라 하여 중앙 축을 중태로 보고 서태가 흥하면 동태가 쇠하고, 동태가 흥하면 서태가 쇠한다고 한다
인물로는 남면면장 임면규, 헌법위원회 비서관 박중보, 비아 우체국장 나철수, 육군중령 박철현, 서울대학교 교수 임광훈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박풍환의 처 전주이씨 효열각·효열부진주강씨행적비·농암박공명환기적비·서원재·송석당 등이 마을 안에 있다.
ㅇ 중태(中台)
중태는 400여년 전에 진원박씨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여 자작일촌을 이루고 1900년대까지 살았다. 뒤에 광산이씨·광산김씨·덕수이씨·나주나씨 등이 차례로 들어 왔다. 마을형성은 진원박씨 16호, 광산김씨 6호, 덕수이씨 4호, 나주임씨 3호, 나주나씨·문화유씨·광산이씨·김해김씨 2호, 장흥고씨·행주기씨·밀양박씨·파평윤씨·도래정씨·한양조씨·청주한씨·보성선씨 등이 54호에 138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삼태성의 별자리에 해당하는데 가운데 있는 별자리라 하여 중태라 하였다 한다. 또한 삼태를 저울대 형국이라 하여 중태를 가운데 축으로 본다.
인물로는 국회의원 이종남, 대주건설사장 김익중, 육군소령 임정채·김영덕, 아남산업 소장 박종현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고려말 충신 130인의 위패를 봉안하였던 경현사지가 있다.
ㅇ 동태(東台)
동태는 300여년 전에 진원박씨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뒤에 홍주송씨가 들어오고, 근대에 황주변씨 평택임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 형성은 진원박씨 9호, 홍주송씨·울산김씨 6호, 인동장씨·광산이씨 3호, 현풍곽씨·황주변씨·탐진최씨·진주하씨·평택임씨 등이 45호에 105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삼태성의 별자리에 해당한다 한다. 동쪽에 있는 별자리라 하여 동태라 하였다 한다. 또한 저울대 형국이라 하여 중앙 축을 중태로 보고 서태가 흥하면 동태가 쇠하고, 동태가 흥하면 서태가 쇠한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형국을 운중반월형으로 보는 설도 있다.
인물로는 연산초등학교장 박홍주, 육군 중령 김혁수, 서울병무청 사무관 박영주, 광주시 동구 총무국장 박혁주, 남면 면장 박남주, 전남염업조합장 김창수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10) 월곡리(月谷里)
본래 남일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곡리, 신촌리, 덕촌리, 금리와 평촌리 일부를 병합하여 월곡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신촌리, 득양산리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월곡리와 금리는 1900년대에 새로 생겨난 마을이다. 그리고 안평마을은 1980년대에 덕촌에서 분리되었다가 2000년대에 다시 합병되었다.
현 행정이동은 월곡 1리는 월곡, 금리이고, 월곡 2리는 덕촌, 안평이며, 월곡 3리는 신촌, 금월이다.
ㅇ 월곡(月谷)
월곡은 100여년 전에 수원백씨인 백윤명이 처음으로 터를 잡아 들어왔다 한다. 바로 뒤에 나주임씨와 진원박씨가 들어오고, 이어 남양홍씨·금성정씨·행주기씨·김해김씨·전주이씨·경주이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나주임씨 13호, 금성정씨 9호, 진원박씨 6호, 전주이씨 5호, 밀양박씨·남양홍씨 4호, 광산김씨 3호, 행주기씨·김해김씨·수원백씨 2호, 죽산안씨·경주이씨·천안전씨·청주한씨·보성선씨·장흥마씨 등이 59호에 171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반월형이라 하여 월곡이라 하였다는 설과 옛날 마을 입구에 다리가 있어 다리골이라 부르다가 달골로 변하여 한자로 월곡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인물로는 서울 신광여중교장 김금룡, 장성군축산협동조합장 임종성, 남면장 박중대·임팔도, 전라남도의원 임인철, 영화감독 임권택, 조선대학교 교수 박길현, 공주대학교 교수 임종태, 장성군경영기획실장 정우익, 서울경찰청 경감 홍덕기, 의사 박화현·박흥현, 해상화재보험 과장 김형호, 변호사 임채윤, 광주시교육청 사무관 임유택, 부산검찰청사무관 박요현, 서울경찰청 경위 홍범기, 전남경찰청 경정 한재숙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효부임상규처진원박씨비각이 마을 입구에 있다.
ㅇ 금리(錦里)
금리는 100여년 전에 선산곽씨가 터를 잡아 살았다 한다. 뒤에 행주기씨가 들어왔으며, 일제시에 탐진최씨·한양조씨·김해김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진주강씨·울산김씨 2호, 김해김씨·회진임씨·한양조씨·창영조씨·탐진최씨 등이 9호에 16인이 살고 있다.
마을 일제시에 금광이 생겨 마을이 형성되어 처음에는 금리(金里)라 하였는데 마을 뒤에 비단바위가 있어 금리라 하였다 한다.
인물로는 한국외환은행 과장 김상균이 이 마을 출신이다.
ㅇ 덕촌(德村)
덕촌은 500여년 전에 문경전씨가 터를 잡아 살았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뒤에 수원백씨가 들어왔다. 근대에 전주이씨·밀양박씨·조양임씨·한양조씨·천안전씨·청주한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전주이씨·하동정씨 10호, 김해김씨 9호, 조양임씨 6호, 밀양박씨 4호, 경주정씨 3호, 수원백씨·청주한씨·한양조씨 2호, 진주강씨·곡부공씨·행주기씨·개성왕씨 등이 73호에 182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배형국이라 하여 마을에 샘을 파지 않았다 한다. 본래 마을 이름은 득양산(得良山)이라 하였다. 이는 이곳에 득양원(院)이 있어 득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덕촌으로 표기하였다.
인물로는 장성군양잠협동조합장 정동익, 순천시 과장 정환갑이 이 마을 출신이다.
ㅇ 안평(雁坪(安平))
안평은 60여년 전에 천안전씨인 전재풍이 덕촌에서 이거하여 살았는데 1960년대에 김해김씨·진주강씨·장흥고씨·광산정씨·광산김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천안전씨 3호, 광산정씨·광산김씨 2호, 김해김씨·전주이씨·진주강씨·울산김씨 등이 11호에 35인이 살고 있다.
마을은 본래 덕촌에 속한 하촌이라 하였는데 1980년대에 자연마을로 분리하면서 옛날에 이 곳이 바닷가로 기러기가 놀던 곳이라 하여 안평이라 하였다 한다.
ㅇ 신촌(新村)
신촌은 500여년 전에 해주오씨가 터를 잡아 살았다 한다. 뒤에 장성서씨·창영성씨·상산김씨·김해김씨·광산김씨·여주이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해주오씨 5호, 창영성씨·김해김씨·밀양박씨 4호, 광산김씨·상산김씨·진주강씨·수원백씨·여주이씨 2호, 장성서씨·금성정씨·탐진최씨·장수황씨·청송심씨·양성이씨 등이 41호에 97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노서하전(老鼠下田)형'이라 한다. 새로 생긴 마을이라 신촌이라 하였다 한다. 일명 '화전(火田)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이 곳이 천수답으로 한해가 들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담양호 물이 들어와 수리안전답이 되었다.
인물로는 한국통신 부장 성길효, 한국통신 과장 성신효, 군농협 과장 박광호, 의사 김용철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는 마을 주민이 세운 전참봉강상운시혜비가 마을에 있다.
ㅇ 금월(錦月)
금월은 1940년대에 김해김씨인 김재국이 평촌에서 이거해 왔다. 뒤이어 장흥고씨·밀양박씨가 들어 왔고, 해방 후에 남원양씨·홍주송씨·담양전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함양박씨·홍주송씨·남원양씨·전주이씨·진주강씨·담양전씨·평강채씨·여양진씨 등이 13호에 23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은 평촌과 같이 와우형국으로 본다. 마을 이름을 금월이라 한 것은 본래 금리에 속했다가 뒤에 신촌에 속하여 신금이라 하였다. 1980년대에 자연마을로 분리하면서 월곡리에 속한 금리라 하여 금월로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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