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음 교회 가던 날
초등 5학년 때 무섬증이 심했다. 문풍지 떠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가는 그것이 본 적도 없는 귀신의 울음 같아 벌벌 떨고, 비가 부슬부슬 오는 새벽녘이나 달이 밝은 밤에는 무엇이 나타날 것만 같아 괜히 긴장하곤 했다.
반 친구들로부터 우리가 사는 사택에 귀신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난 뒤부터 그랬다. 엄마는 워낙 잘 놀라는 까닭에 아예 물어볼 수도 없었고 아버지는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나무람만 하실 것 같아 혼자 불안했다.
급우 순이가 내게 전도했다. 공부도 잘하고 다른 재능도 많은 친구였는데 그 애가 나를 제일 싫어했었다. 그런데 저하고 같이 교회 다니면 귀신도 나타나지 않고, 무서운 일이 생겼을 때는 기도로 물리칠 수 있다니, 순이와 친해지기 위해서도, 무서운 생각에서 놓여나기 위해서도 그리하고 싶었다.
생전 처음 가 본 교회는 초가지붕에 멍석바닥, 낯설고 신기한 분위기였다. 남녀노소 서른 명 쯤 앉아 있었다. 담임전도사님이라는 젊은 아재가 괘도를 넘겨가며 가르쳐 주시는 찬송가도, 그림 이야기도, 처음 듣는 것이어서 흥미로웠다.
전도사님이 통성기도를 하자고 하셨다. 그게 무슨 말인지 궁금했으나, 장터에 묶여 있는 촌닭처럼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다 함께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임을 알았다.
하품하는 사람, 훌쩍거리면서 중얼거리는 사람,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 손뼉을 딱딱 치며 누굴 야단치듯 하는 사람, 눈도 감고 입도 다물고 가만히 있는 사람. 옆에 앉아 있는 순이는 얌전하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맞잡고 뭐라뭐라 하고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방언기도였다고 한다. 나도 순이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손바닥을 맞붙였다.
"예수님, 저 모르시지유? 저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러유. 순이가 가자 해서 오긴 왔지만 아무것도 몰러유. 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몰러유. 예수님한테 기도하면 귀신도 쫓아내주시고 무서운 생각도 안 나게 해주신다구유? 그럼 우리 식구 사는 사택에 귀신 안 나오게 해주세유. 대문 밖 우물에도 부엌이나 헛간 어디든지 다유. 애들 말 들으면 무서워 죽겠어유. 예수님, 저 전학온지 얼마 안 돼서 친한 친구가 없어유. 따돌림 안 받고 잘 지내게 해주세유. 교회 다니다가 아버지나 엄마한테 들켜서 혼나는 일도 없게 해주시고유......"
설교대 위의 종이 땡, 울리자 조용해졌다. 전도사님이 한쪽 팔을 들어 두어 군데를 가리키더니 원을 그리는 시늉을 하셨다. 그 쪽에 성령님이 임하셨다며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이다. 순이와 내가 있는 쪽을 향해서도 그러셨다. 나는 성령님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설마 나한테도 오셨을라구? 우리 쪽에도 오셨다면 순이한테 왔다 가셨겠지. 그럼 혹시 내가 부탁한 말도 들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 내 부탁을 들어주는 이가 있다면 참 신나는 일이겠다 싶었다.
2. 사탄아, 물러가라!
하교 하려는데 순이가 말했다. "오늘밤이 크리스마스이브여. 저녁 먹고 교문 앞에서 만나자."
"난 못 가. 엄마가 밤에는 돌아댕기지 말랬어. 그리고 나도 우물 앞 지나올래면 무서워서 싫어."
"어른들도 댕기니까 괜찮어. 너도 데려다주실 거여....선물도 받고 재밌는 일도 있을 거여."
저녁식사 후 한참 망설이다 엄마한테 말했더니 순이네 집에 가는 줄로만 알고 너무 늦게까지 있지는 말라며 허락해 주셨다.
교회에 도착하니 크리스마스트리, 색종이로 만든 꽃과 종이사슬이 예쁘게 장식돼 있었다. 뎅그렁 뎅그렁 종이 울리자 어른 아이 가득 모였다. 찬송가도 부르고 기도도 하고 설교도 듣고 공책이나 연필도 받았다.
예배가 끝났을 때는 밤이 다돼 있었다. 순이와 매산동네 사람들과 서낭당을 넘었다. 당산나무 아래 돌무더기, 어지러이 걸쳐놓은 알록달록한 헝겊들에 기분이 으스스했지만 어른들이 계셔서 괜찮았다.
동네 초입에 있는 사택으로 가려면 학교 후문 쪽으로 들어서야 했다. 그런데 사택 앞까지 데려다주실 거라는 순이 말과는 달리,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무도 학교 안으로 들어서지 않았다.
숙직실을 지나 두레박 우물 쪽으로 가려니 머리끝이 쭈뼛, 기분이 안 좋았다. 순이가 시킨 대로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만 계속 중얼거렸다. 그래도 무서웠다. 달밤이 아니어서인지 우물가에 머리 푼 귀신은 없었다.
우물 앞에서 돌층계 몇 개를 올라가면 사택, 마침내 대문 앞에 다다랐다. 대문이 잠겨있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살며시 밀어 보았다. 그때 대문 저쪽에서 허연 물체가 나오려고 했다. 이게 바로 귀신인가보다 싶어 나도 모르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그것은 명령이라기보다 겁에 질려 터뜨린 비명이고 울음이었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상대방은 외마디소리를 지르고 아예 쓰러져 버렸다. 아버지가 황급히 나오셨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는 내게, 이 밤중에 어딜 갔다 오는 거냐고 무서운 목소리로 호통 치셨다.
쓰러진 물체는 엄마였다. 동무네 집에서 놀다 오겠다던 딸이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자 대문밖으로 나가보려던 참이셨다. 그런데 하필이면 겁쟁이 모녀가 같은 시각 같은 장소 이 저쪽에서 문을 열려다 서로에게 놀란 것이었다.
그날 이후 장승백이, 초가지붕 교회에 다시는 가지 못했다. 한 가정에서 두 가지 종교를 믿을 수 없으니 너는 시집간 뒤에나 네 맘대로 하라는 아버지 분부 때문이었다.
교회에는 못 가도 가끔 혼자 기도는 했다. 사택 과 그 주변에 귀신 나타나지 않게 해 달라는. 그런데 한 달에 한 번 쯤 지내는 기일 때마다 갱물도 꼭 먹었다. '갱물'이란 제사 때 제삿밥 한 숟가락을 맑은 물에 말아놓은 것이었는데 그것을 먹으면 무서움을 타지 않는다고 해서, 자다 말고 일어나 제삿밥 먹을 때 꼭 먹으며 조상님께 빌었다. 무서운 생각 안 나게 해주시고 귀신 안 보이게 해달라고.
눈이 푸짐하게 내려 쌓인 이른 아침이면 아무도 없는 운동장으로 나갔다. 아무도 밟지 않은 넓은 운동장은 하얀 목화솜을 펴 놓은 것 같았다. 발자국으로 꽃을 그리거나 이런 저런 무늬도 만들어보고, 눈사람을 만들다가는 네 활개를 펴고 누워 생각나는 노래는 다 불렀다. 학교가 동네와 떨어져 있어서 누구 눈치볼 걱정도 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귀신도 보이지 않고 무섭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있었다.
보름달밤, 문득 귀신 소문이 생각나면 혼자 살며시 대문밖 두레박 우물을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늑자늑 비 오는 새벽이면 마루로 나가 집 근처를 둘러보곤 했지만 정물처럼 고요한 주변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누룩한 동산 쪽으로 눈과 귀를 모아 보아도 어둠 짙은 숲에서 나무와 풀들이 장난치는 소리, 함석지붕에 촐촐히 떨어지는 빗소리가 정답게 들릴 뿐이었다.
조상님께서 음덕을 베풀어주셨는지, 예수님이란 분이 나의 어수룩한 기도를 다 기억하셨다가 들어주셨는지 무섬증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산골에 살던 어렸을 적 없어진 무섬증이 도시에서 늙어가는 지금 되살아나는 듯하다.
첫댓글 ㅋㅋ 그 어떤 절대자가, 어린 소녀의 애절한 마음(기원)을 가납하지 않으실 리 있겠습니까?^^
감동적인 내용의 탄탄한 글 앞에서 한참 머물다 갑니다~~^^
무섬증이 생기지 않기를 응원합니다.
샘은 수필 쓰면 참 좋을듯해요 감동이 있어서요.
고마워요~~ㅠㅠ
원래 수필가시지요! ㅎㅎ소설같은 수필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무지 재밌어요 즐겁습니다
아름답고 순수한 젊은 시절의 감동~ 큰 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