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의 빈 집
녹슨 낡은 자전거를 비비며 익숙한 비탈길을 올라선다. 동풍(凍風)에 떨어진 빛바랜 낙엽 한 무더기가 마당 구석에 몰려 마치 무덤처럼 쌓여 있다. 주인 없는 빈집 마당에서, 매서운 겨울 바람의 등살에 못이겨 이리 쫒기고 저리 쫒겨 다녔을 낙엽 무더기의 몸부림이 연상된다. 이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짓는다. 마당 다른 한쪽에는 집 안의 흥망성쇠를 수십 년간 지켜봐왔을 커다란 대봉나무가, 마치 시어머니의 핏기 없고 바짝 말라붙은 팔다리처럼 앙상하고 을씨년스럽게도 서 있었다.
내일은 정월 초하루. 설 상차림을 준비해야 해서, 여러 며느리 중에 제일 만만한 나는, 가장 먼저 어머니의 집에 도착했다. 지난해 추석에도 그랬던 것처럼 나는 맨 먼저 집안에 온기가 돌게 하기 위해 보일러를 작동시키고, 빗자루와 걸레를 찾아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시어머니가 낙상으로 뇌출혈이 있어 병원에 입원하고, 조금 나아져 지금 계신 요양원으로 옮겨진 날이 벌써 반년이 다 돼간다. 요즘 구순을 넘긴 시어머니는 식사를 코에 끼운 식사줄로 하고,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못하다. 이런 모습을 안 사람들은 누구라도 “에구~오래 사셨네. 이제 돌아가셔도 서운하지 않겠구만”, “오메~ 그리 사는 것이 사는 것이간디? 차라리 돌아가시는 것이 자식들한테나 본인한테도 나을 껀디~”하며 말끝을 흐린다.
아들, 며느리를 생각한다고 이렇게 말하는 이들의 영혼 없는 그런 말이 나에게 전혀 달갑지 않다. 외상 후 중환자실에 입원한지 4일 만에 담당의사는 자녀들을 불러 놓고 “그동안 복용 중인 약물에 혈액순환제 성분이 있는데 그것으로 인해 뇌내에서 발생한 출혈이 멈추지 않고, 병변이 더 커지고 있으니 마지막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라고 했었다. 그러면서 “가족들과 친지분들에게 연락해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볼 사람들은 와서 환자를 보고 가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담당의사는 시어머니가 수일 내로 사망할 수 있는 위급상황이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러한 상황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말마다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가서 어머님과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처녀 적부터 지금까지 살아나온 당신의 한 맺힌 이야기를, 매번 반복하셨다. 하지만 나는 매번 처음 듣는 것처럼 그냥 들어드리고 동조해가며 그 장단에 맞춰 나도 울고 웃었다. 그랬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된다니, 아무리 간호학을 공부하고 업으로 삼고 있는 나로서도 머릿속의 이론과 내가 처한 현실 간의 괴리가 너무 커서 납득할 수 없었다.
코로나 상황임에도 병원의 배려로 임종환자 가족에 준하는 면회를 허용해 줘서 자식들은 매일같이 어머니를 뵐 수 있었다. 늘 시어머니의 상태를 확인하고, 어제보다 나아지지 않은 오늘에 한숨을 삼키며 돌아가는 발걸음이 반복되고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퇴근하고 병원에 들른 내게 남편은 충격적인 말을 해 주었다. 그것은 결국 나를 격정적으로 오열하게 만들었다.
간병 경력이 오래된 간병인 여사님이 자기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람의 사망징후를 알려주었다. 즉,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은 대장에 있는 모든 대소변을 다 쏟아내 장을 깨끗이 비운 다음, 며칠 안에 죽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시어머니가 오늘 낮에 보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어렸을 적에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동네에 사는 친척 어른이 죽기 2~3일 전에 갑자기 많은 양의 대소변을 쏟아내고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다. 먼저 알고 있던 머릿속 지식은 나중에 바른 지식을 통해 그것이 틀렸음을 알게 될지라도 처음 것이 더 신빙성 있게 느껴지는 사람의 심리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렇게 먼저 알고 있던 죽음의 징후는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의사의 말보다도 더 신빙성 있게 느껴졌다. 그 순간 내 맘속에는 ‘아~! 우리 어머니가 이제 진짜로 돌아가시려나 보다’ 하며 커다란 슬픔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그 순간 나는 의식 없는 어머니의 가녀린 목을 껴안고 “어머니~, 어머니이~!”를 외치며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어머니는 시내에 있는 요양원에서 말끔한 몸단장과 깨끗한 침구 속에서 아들, 며느리와 면회를 하고 있다. 머리카락이 숭숭 빠지고, 반창고에 피부가 뜯길 정도로 형편없는 영양상태와, 장작개비처럼 마르고 굳어진 몸으로 침상에 얹어진 채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누워계셨는데, 지금은 많이 호전되어 비록 눈을 뜨지 못하고 사지를 맘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며 비위관을 삽입한 채로 누워만 계시지만, 잘 계셨냐고 묻는 아들의 목소리에 대답하듯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웅얼거리신다. ‘곧 돌아가실 거라’는 의사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회복된 상태를 유지하고 계신다. ‘이대로라면 올해 안에 치유되어 집으로 가실 수도 있겠다’라는 일말의 희망을 갖게 한다.
우리 어머니는 병상에 눕기 전부터 대단한 의지를 지닌 분이셨다. 자식들에게 늘 당부하기를 “나는 죽어도 집에서 죽을 것이니 절대로 요양원에 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셨다. 하지만 자녀들은 어머니가 고령인데다가 악액질로 기력이 없으시고 자주 낙상을 입는 탓에 어머니를 집에 혼자 계시게 할 수 없었다. 요양보호사 선생님을 네다섯 번 바꿔야 했을 만큼 집에 낯선 사람이 오는 것을 너무 싫어하셨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로서는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실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면회 오는 자식들에게 집에 가자고 통사정을 하셨으나 어느 누구도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불효막심한 후레자식들 그 자체였다.
그러다가 불굴의 의지를 지닌 우리 어머니 박여사는 구순이 훌쩍 넘은 고령의 나이에, 또한 겨울날 잎이 다 떨어진 말라빠진 나뭇가지 같은 그 팔다리를 부들부들 떨어가면서 근력을 키우기 위해 일어서고 걸음마 떼기를 반복하셨다. 기어이 너희 자식놈들아 이것 봐라는 듯이 다리에 힘을 태워 자기 오물을 스스로 해결하시기도 했다. 그러니 아들 며느리는 모두 다 어머니의 대단한 귀가 본능에 혀를 내두르며 집으로 다시 모셔 올 수밖에 없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유머 중에는 명절 즈음해서는 ‘시’자 들어가는 시금치도 안 먹는다는 유머가 다시 유행하고 있다. 유머처럼 시댁과 관계가 편하지 않는 갈등은 내 주변 사람들을 봐도 이 시대의 며느리들에게 일반적인 일이라 하겠다. 나 역시도 그런 일반적인 며느리들 중의 하나이다. 시댁 식구들과 얽히고 설킨 사연도 많다.
딸이 없는 시어머니는 다섯 며느리 중에 유독 나를 “니가 꼬~옥 내 딸 맹키다”하시면서 다른 아들, 며느리에게는 쉽게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시고, 다른 며느리는 어려워서 시키지 못하는 힘든 농사일도 나에게는 곧잘 부탁하셨다. 나는 스무살 어린 나이에 시부모님을 만나 마냥 어렵기도 하였거니와 내 성미 상 어른들이 시키는 일에 토를 달지도 못했다. 그러니 처음부터 나는 스스로 여러 며느리 중에 가장 만만한 며느리가 되었다.
채소밭에 나가 어머니의 일손을 거들 때나, 순천역전에 장이 서는 날이면 새벽 두 시에 일어나 시부모님과 함께 채소를 실어 나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너무도 심통이 나서 스트레스를 술 취해 들어오는 남편에게 혹독하게 쏟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한해, 한해가 다르고 자신의 몸도 추스르기 힘들어지는 낡고 쇠한 시어머니의 육신은 나를 철들게 했고, 철없었던 젊은 날의 서운함을 어느 정도 날려버리게 했다.
내가 서른 여덟 나이에 늦깎이 만학도의 길을 간다고 했을 때, 시어머니는 한참 돈을 벌 어야 할 시기에 대학에 다닌다고 탐탁치 않으셨을 텐데, 부러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셨다. 학과에서 두 번째로 성적이 좋아 반액 장학금을 탔을 때는 “아이고 내 딸이야 잘했다, 잘했어~!”라고 하시며 누구보다도 기뻐해 주셨다. 우리는 어머니 댁과 오분 거리에 살았다. 집을 지어 입주할 때에 어머니는 보일러 사는데 보태라며 곰팡이 피고 군내 나는 꾸깃한 만원 권을 여러 장 건네주시고, 우리 집에 오실 때면 영락없이 자잘한 채소거리나 간식거리를 가져다 무심한 듯 던져 주고 가셨다.
어머니의 몸이 안 좋을 때면 영양주사를 사다가 놔 드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내가 거부해도 기꺼이 주사비용보다 더 많은 돈을 내 바짓춤에 기어이 찔러 넣어주셨다. 어머니는 내가 며느리임에도 매사 공짜로 받기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손주들에게는 늘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 들어가라”, 며느리들에게는 언제나 “돈 애껴 써라. 벌기보다 쓰는 것을 애껴야 된다”, 아들들에게는 늘 “술 쪼끔만 마셔라, 몸 축 난다” 등의 이야기를 남발하는 귀한 어머니셨다.
집 안 구석구석에 쳐진 거미줄을 걷어내고, 빗자루질을 하고 젖은 걸래로 이방저방 닦아내었다. 내 눈길 닿는 곳마다 시어머니와 함께한 추억들은 나를 그날 그 시간들로 되돌려 놓았다.
어머니와 나는 방안에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마루에서 빨래를 개기도 했다. 밥을 먹을 때면 “젊었을 때는 밥을 많이 묵어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고춧가루가 묻은 당신의 숟가락으로 밥을 크게 한술 푹 떠서 내 그릇에 옮겨 주셨다. 뜰방에서 열무를 다듬던 모습, 마당에서 개밥을 주던 모습, 보행기를 밀고 마당에서 원을 그리며 걸음마 운동하는 어머니의 모습 등은 걸레를 잡은 나의 손이 가는 곳마다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어머니는 “집이 더러우면 남부끄럽다”라고 하시며 손에 항상 걸레와 빗자루를 들고 계셨다. 자식들에게 뭐 하나라도 더 못 주셔서 안달 나신 우리 어머니,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뼈마디마디가 다 휘어지고 삐쩍 마른 손을 가진 우리 어머니, “요즘은 토~옹 입맛이 없다”라고 하시며 당신 좋아하시는 음식을 자녀들이 사 들고 찾아오게 만드는 꾀쟁이 우리 어머니의 일상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
어머니를 생각하느라 걸레질하는 이의 숨소리는 거칠어지고, 등짝에는 스멀스멀 땀이 베어 나지만 그런 줄을 느끼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