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요 내용
- 영상 감상 : 「봄이 오는 길목에서」(이해인)
- 수필 : 「선생님의 헌혈」(정순자)
- 시 :「봄을 기다리며」(권인찬), 「민들레cafe」(이희주)
○ 다음(3.18) 계획 : 자작 詩 / 글 발표 및 評
아직까지 꽃샘추위가 남아있지만,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는 이해인의 〈봄이 오는 길목에서〉를 감상하였습니다.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릭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엔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서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에도
아침부터 우리 집 뜰 안을 서성이는
까치의 가벼운 발걸음과 긴 꼬리에도
봄이 움직이고 있었구나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내 마음의 바위 틈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는 봄과 함께
내가 일어서는 봄 아침
내가 보는 사람들이
모두 새롭고 소중하여
고마움의 꽃망울이 터지는 봄
봄은 겨울에도 숨어서
나를 키우고 있었구나
학기가 시작되어 출석수업과 중간과제물 작성 등 학업에 대한 부담감이 있으시겠지만, 이 시를 같이 감상하면서 겨우내 얼었던 우리들의 마음에도 따뜻한 봄바람을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도 건강관리 잘 하시고 다음 주에 다시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담임선생님 헌혈로 살아난 제자
정순자
아들의 방을 청소해 주려고 들어갔었다. 지나친 관심도 병이런가, 공연히 궁금한 것이 많아서 이것저것 뒤척여 보며 책상 서랍도 열어보고 메모지도 읽어보았다. 맨 위에 서랍엔 아들이 여러 번 헌혈한 증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마음이 짠했지만, 아들이 아빠를 닮은 것 같았다. 아빠도 젊어서 헌혈을 서슴없이 했었다.
1972년 결혼하여 남편의 직장 부임지를 따라 태백 하장성 삼성초등학교 그곳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때는 태백에서 방을 구하기란 하늘에 별 따오기처럼 어려웠다. 다행히 낙동강 가변에 허접한 방 하나를 얻어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 당시 태백은 석탄 산업이 발달하여 노동력을 가진 젊은 인구가 나날이 급상승으로 늘어났다.
새카맣게 연탄 가루를 덮어쓰고 땅굴 속에 일하는 광부들이 3교대로 출근했다. 그들의 출근 시간에는 여성들이 밖을 나가지 않았다. 광부들 출근 때 앞길을 가로질러 가거나 혹 방해라도 하면 사고가 난다는 말이 있었다. 탄광 일이 워낙 위험하니 그런 비과학적인 말들이 먹혔던 그것 같다.
결혼 전에는 경상북도 봉화군 농가에 살다가 결혼하여 탄광촌으로 들어가 보니 참 생소한 것이 많았다. 태백은 마을마다 지명까지 생소했다. 일정시대에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 있을 때 자기 나라 지명을 본떠 (정목)이라 사용했다. 장성읍 화광동‘1정목’,‘계산동 1정목’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그 지명이 익숙해서 간혹 사용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처음에 가서 적응하는데 너무 힘들었다. 수시로 쓸고 닦아도 온 집안이 연탄 가루로 뒤덮였다. 비포장도로에 비가 오거나 하면 질퍽한 연탄 가루 중탕이라 발목이 푹푹 빠졌다. 사람들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신발이 없이 못 산다고 그랬다. 그 말들이 실감이 났다.
당시 태백 광산촌에 유행어가 많았다. 경기가 좋으니, 씀씀이가 헤퍼서 그랬는지 개들도 만 원짜리를 입에 물고 다닌다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또 태백, 정선, 일대의 ‘다방’ 종업원 월급이 군수 월급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소문났다. 탄광 현장에서 굴속 막장 숙련 갱부(사키야마)는 반짝 구두 아가씨 다섯 켤레가 매달려 먹여 살린다는 말이 돌고 돌았으니까 그 정도로 흥청망청 이었다.
태백은 높은 산이 첩첩으로 막혀 소 여물통 같은 협곡이다. 비탈진데 판자촌, 석탄공사 사택과 각종 상가까지 다닥다닥 따개비같이 붙어 있었다. 숨통이 막힐 정도로 복잡한 판자촌이라도 밤이면 전등 불빛이 별을 쏟아부어 놓은 듯했다.
젊은 인구가 증가하니 학생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태백에서 초등학교가 다섯 곳 되고 초등학교마다 선생님만 60~70여 명이나 된다고 들었다. 당시 태백 황지 중앙초등학교에 선생님만 70여 명이라고 들었다. 그와 같은 학교가 자꾸 늘어났다. 당시 교사 수효가 부족해서 교실이 터질 듯이 학생이 늘어났다.
비좁은 판자촌 비탈 골목마다 유흥업 술집이 즐비하게 있었다. 아이들은 놀이터가 없으니 술집유흥업소 앞이 놀이터였다. 아이들은 옆집 앞집이 창문만 열면 주로 막걸리파는 방석집들이기에 집에 들어가나 밖을 나오나 매일 숟가락 장단에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우리 집 들어오는 골목은 통행금지 시간까지 고래고래 고성으로 싸우고 골머리가 아팠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통행금지 시간 되면 쥐 죽은 듯했다.
한번에는 남편이 퇴근 시간이 지나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통행금지가 지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조바심하며 온갖 걱정으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아서 창백한 얼굴로 흐느적거리며 들어왔다. 그 모습에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편은 현기증이 난다며 물 한 대접을 먹고 푹 쓰러져 누워 말을 꺼냈다. 퇴근해서 오는 길인데 술집 골목을 지나오던 중에 아이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는데 갑자기 비명이 들려왔다는 것이다. 급하게 달려가서 보니 바로 제자 아이가 머리가 터져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옆에는 도끼가 있었다고 했다. 술집에서 싸움이 벌어져 도끼가 날아와 하필 거기서 놀던 제자 아이의 머리를 맞았다고 했다. 피로 범벅이 된 제자를 곧바로 ‘장성석탄공사’ 병원으로 데려갔다고 했다.
병원 응급실에서 아이 상태를 살핀 의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빨리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큰 병원으로 가야 살릴 수가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장성병원에는 보유한 혈액이 없어 머리 수술을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고 했다. 그 당시는 헌혈하는 게 지금처럼 일반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헌혈하는 것을 특별한 일로 여겨서 겁을 냈고 또 영양실조로 허약한 사람들도 많았던 시대였다.
응급실에 뒤늦어 달려온 아이의 부모님도 살려달라고 뒹굴며 애원했다. 부모님 모두 수혈을 해줄 수 있는 사정이 아니었다고 했다. 누구도 헌혈해 줄 사람이 하나 구할 수 없었다고 했다. 우리 남편의 혈액형이 마침 제자와 같아서 서슴없이 서둘러 팔을 내밀었고 큰 링거병 한가득하고 부족해서 더 뽑아서 헌혈하여 제자 수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밤을 새워 제자의 수술이 마무리한 것 보고 집에 돌아왔다. 남편은 수혈량이 많아서 그런지 축 늘어져 누워 어지럽다고 했다. 출근할 시간이 되니 부스스 일어나 억지로 밥과 국 한 그릇을 구겨 넣고 출근했다.
제자 아이는 오랜 기간 입원하여 치료 잘 받고 회복이 잘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공부에 열중했다. 얼마 지난 후 그 아이 부모님이 신문지에 뭔지 돌돌 말아서 들고 찾아왔다. 소고기 한 근을 들고 와서 “선생님 아들을 살려줘서 고맙습니다.”라고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 했다. 제자는 후유증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을 보고 얼마 후 남편은 직장 따라 태백을 떠나오게 되면서 그 제자와 연락이 끊어졌다.
요즘은 남편이 퇴직하고 나이가 들어 붙박이 장롱 같다. 남편이 늙어서 그런지 온갖 심통을 부리며 잔소리는 깨 방아 찧는 듯하며 내 속을 푹푹 썩이고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미웠지만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며, 특히 태백에서 제자에게 헌혈했던 그 젊은 시절을 떠올리면 슬그머니 화가 누그러진다.
지금 그 제자가 가끔 생각나고 그때 사고 당시 2학년이었다. 지금 기억으로 그 제자의 이름은 (이상0) 라고 불렀던 것 같고 지금은 60대 나이가 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제자는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그때 사경에 처한 목숨을 구해준 담임선생님을 기억하며 잘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 아들도 헌혈을 여러 차례 한 흔적을 확인하게 되니 아빠를 닮은 것 같았다. 누구를 위해 망설임 없이 피를 나뉘어 준 따뜻함을 가진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 제자가 기억한다면, 담임이 아름다운 삶을 살아왔을 것으로 생각해 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봄을 기다리며 - 권인찬
얼었던 대지 위에 눈 녹은 물 흐르니
길었던 겨울동안 숨었던 초록들이
슬며시 꿈틀거리며 일어서듯 내민다
민들레 cafe ㅡ 이정표
신촌 골 깊은 언덕에 올라
물들이 모여 사는 성채城砦를 바라본다
평생 지게를 내려놓지 못한
아버지 허리처럼
백운산 오르는 샛 길은
굽고 휘어진 제몸을 가누지 못해
소똥이 엎어진 복상밭 고랑에
철퍼득 누워 하늘을 본다
봐 줄 이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달려온 바람이 세상의 꿈을 주워
민들레 하얀 꽃대를 밀어냈고
우주의 바깥 그늘에서도
홑씨가 춤을 추는 걸 알게 되었다
계절이 절정으로 타오르지 않아도
숲속의 입술들이 푸릉푸릉 기척을 하는 날에는
하얀 옷 차려입은 나이 든 민들레가
시큼하고 쌉쓰름한 예가체프를 앞 세워
잔 가득 에티오피아를 담아
황홀한 대접을 하겠노라 문자가 날아왔다
물 담벼락 마주한 뒷 뜰
민들레 우뚝 서 장하게 머리 올린 곳에서
고향 떠나온 커피 콩들의 화려한 변심이
판부면 신촌리를 쉬지않고 들들 볶아대는 날
그대와 나 아직 남은 연정戀情을 시럽처럼 섞어
적당히 식은 초 저녁을 꼴딱 마셔도 보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