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읽기15/서울 아이/박영란/우리학교/2023
언젠가 옆방 누나가 호강에는 돈 호강과 마음 호강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둘 중 한 가지만 있어도 사람은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지만, 대부분 한 가지도 못 가지기 마련이라고 했다.(20)
마음호강은 사랑이잖니, 사랑 받는 일, 사랑하는 일, 그것보다 더 한 호강이 어디 있겠니.(21)
아무리 자유롭게 사는 게 좋아도 엄마나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광장으로 달려 나갔다. 광장을 한바탕 쏘다닌 후에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나는 형한테 조른다.(32)
형은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이라고 했다. 선의의 거짓말이 나쁜 이유는 실제를 보지 못하게 가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은 끝에 가서는 완전한 절망을 맛보게 하기 때문에 ‘더 지랄맞은 거’라고 했다.(40)
우리 넷은 오 년 동안 함께 살았다. 형은 그 시간을 오 년의 경험치라고 했다. 형이 엄마 아버지와 함께 산 시간은 나보다 더 길어서 십삼 년의 경험치가 있다. 아무튼, 형에 따르면 오 년이라는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인생에서 굉장한 일이라고 했다. 왜 굉장하냐면, ‘오 넌’이라는 시간은 이후엔 한 번도 함께 살지 않았고 앞으로도 함께 살 확률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굉장하다는 거였다. (107)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개다리춤을 춰라. 그러면 사람들을 웃길 수 있고, 그러면 위험한 상황에서 빠져나올 틈이 생기는 거다.(194)
일 생기면 와라!
목소리가 골목 저 끝으로 멀어져 갔다. 왠지 힘이 없었다. 사람들이 나한테 뭔가를 주려고 한다는 사실이 더 힘 빠지게 했다. 그건 내가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는 뜻이다. 형이 있을 땐 사람들이 먹을 걸 주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형 친구나 형이 알바하는 식당 주인아저씨가 뭘 준 적은 없다. 그런데 형과 나를 아는 사람들이 자꾸 뭘 줬다.(199)
---화자인 나는 열 살이고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이다. 이름은 타인이 불러주는 것인데 여기서는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다. 외로움과 그리움과 기다림에 지쳐 있는 화자는 결말에 가서야 스스로 이름을 밝힌다. 광장에서 아이언맨을 기다린다. ‘희망’이의 아이언맨은 형 ‘진우’이고 형의 아이언맨은 아빠다. 이야기가 밀도있게 전개된다. 부모없이 사는 형과 나, 그리고 이웃인 옆집 누나, 귀차니 아줌마가 있다. 부양이 아닌 호강의 의미가 옆집 누나의 입을 통해 나올 때 먹먹하다. 담담하게 자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10살의 눈으로 그려내기에는 밀도감이 있어 작가의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어린이 책에 노숙의 생활을 그린 작가가 처음 아닌가 생각된다. 생생하고 구체적인 내면과 타자의 묘사는 소설적 경향이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문자로 시각화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거리에서 혼자 생존해야 하는 희망이는 동물적 감각으로 감정과 행동을 절제한다. 이를 너무 일찍 터득한 아이는 ‘이거 별거 아니야’ 하며 뚜벅뚜벅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