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어릴 적 살던 우리집보다 더 얄궂은 쪽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다.
일출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기에 천천히 바다로 나가본다.
해는 이미 떠올라 있고, 카메라를 든 몇몇 사람들은 열심히 바다를 찍고 있다.
몸은 뻐근하고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비록 남루하기 짝이 없는 샤워장이지만, 얼른 세면을 하고 출발을 서두른다.
아침 6시30분. 어제보다는 출발이 다소 늦어진다.
다리를 건너 언덕을 오르자 신라의 신문왕이 부친인 문무대왕을 위해 감은사와 더불어 지었다는 이견대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용이 나타나 옥대와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마도 신문왕은 효심이 지극한 임금이었나 보다.
전 날에 이어 둘째 날도 날씨가 참 좋다. 부처님이 좋은 날 오신 것 같다. 지나가다 점심 때쯤엔 어느 사찰에라도 들려서 요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지나는 길마다 절 표지판이 눈에 자주 띈다. 동해안길은 교회보다는 사찰들의 길인가 보다.
해안선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며 힘은 들지만, 바다는 갈수록 짙고 투명한 에머랄드색으로 빛난다. 기암괴석과 더불어 아름다운 물빛 덕분에 입에서는 단내가 나도 마음은 흐뭇하기만 하다. 감포 해변이라는 이정표가 몇 차례 나타나지만, 가 볼 생각은 못하고 길을 따라 그냥 북쪽으로 향한다. 자전거길은 가끔씩 해변 안쪽으로 들어가서 항구와 마을을 지나게 하곤 한다.
몇 군데의 마을과 해변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드디어 과메기로 유명한 구룡포항이 나타난다. 항구 안쪽으로 인도하는 자전거길을 무시하고 지름길을 택해 가다 보니 항구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된 게 아닌가 조금은 후회스럽다. 항구 맞은 편에는 ‘구룡포 근대 문화 역사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구룡포 개발에 간여한 일본인들에 대한 내용과 이후 이를 극복하려 한 우리 역사를 재현하려 한 듯하다.
동해안 자전거길은 국토종주길이나 4대강길처럼 잘 닦여진 자전거 전용도로가 아니라 기존 도로에 자전거 표시나 푸른색 라인만 그어 놓은 게 대부분이다. 그마저 지자체별로 관심도에 따라 그 양상이 다르다. 또한 그 명칭도 해파랑길로 통일되어야 할 텐데, 강원도에서는 낭만가도로 영덕에서는 블루로드로 표기되는 등 이름이 제 각각이다. 게다가 자전거길이 별도로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큰 도로로 나가야만 하는 상황도 자주 일어난다. 큰 도로를 따라 라이딩하다 보면 자동차들이 굉음을 내며 지나갈 때마다 움찔할 때가 여러 차례 있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해 보면, 동해안 자전거길 완공은 아직은 시기상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모처럼 구룡포를 지나 어느 해변에 다다르니 해안을 따라 목재데크로 조성된 멋진 자전거길이 있어 잠시 쉬어 간다.
동해안의 땅끝 대보마을을 지나 호미곶에 도착한다. 나는 여태까지 호미를 농기구로 생각해 왔는데, 여기에서 들어 보니 호미는 ‘호랑이 꼬리’라는 뜻이라 한다. 항상 우리 나라 지도를 볼 때면 이 지역의 모양이 독특하다 생각했는데, 마침내 이곳에 오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새천년기념관이라는 커다란 건물과 더불어 바다와 육지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손바닥 조형물 ‘相生의 손’이 신기하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국립 등대 박물관’에 들러 구경도 하고 배터리 보충도 해 본다. 마음같아선 이곳에서 푹 쉬고 싶은 생각이다. 업힐과 다운힐을 반복하며 몇 개의 항구와 해변을 지난다. 지나는 길에 ‘장군바위’도 보이고, 멸치 말리는 모습도 보인다. 부산을 지나 어느 마을에서 멸치 작업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기장의 특산물이 멸치라고 한다. 그런데 멸치 작업하는 사람들을 보고 사진을 찍었더니, 어느 아저씨가 ‘사람 찍지 마소’해서 참 인심 사납다고 생각했다.
멀리 포항 공단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공단이 가까워 올수록 해변의 모습이 왠지 안쓰럽다. 드디어 대한민국 발전의 심장 ‘포스코’가 보인다. 전날 충전기 이상으로 배터리와 GPS를 충전하지 못해 답답하다. 그래서 근처 할인마트로 가서 충전기와 케이블을 구입하고, 점심도 해결한다. 포항 자전거길은 시원스럽게 잘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바로 옆이 바다. 음주 라이딩은 철인 3종경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조심해야지. 포항 송도해변(영일대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영일대와 해변은 인파들로 북적인다. 도심에 이렇게 시원스런 해변이 있다니 부럽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해수욕은 거의 하지 않는 곳이라 한다. 포항하면 죽도시장이 유명하기에 들러보기로 하고 방향을 시내쪽으로 돌린다. 죽도시장을 지나다 보니 KTX개통기념으로 20% 세일한다는 횟집이 보인다. 그래서 당연히 여기로 입장. 물회를 시켜 먹어 본다. 처음 먹어 보는 것이지만, 뭐 먹을 만하다.
영일만에 있는 산업단지를 지나니 시원스러운 해변길이 다시 나타난다. 칠포에서 월포 가는 흥해의 바닷길은 지금까지 본 바다의 아름다움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아름답고 예쁘다. 동해안 자전거 여행을 다시 하고 싶을 만큼이나 말이다. 칠포와 월포 사이에 있는 오도리와 이가리의 해변의 멋진 풍광을 기억하기 위해 따로 메모를 해 둔다. 대게의 고장답게 이 일대에는 도로나 조형물에 게가 많이 등장한다. 화진해수욕장 근처의 가게에 들러 그곳 주인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과 몸의 갈증을 해결한다. 여기가 포항의 마지막 해변인 듯하다. 포항을 지나 이후론 목적지인 영덕 강구항으로 가기 위해 열심히 페달링... 더 갈 수도 있지만, 강구항에서 둘째 날 밤을 보내기로 한다. 강구교 앞에 있는 모텔을 지나가는데, 대게를 먹으면 숙박비를 할인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그냥 지나쳤어야 했는데,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저지른다. 사실 난 대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만 숙소를 정해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에 쉽게 결정한 것이다. 앞으론 느긋하게 일정을 잡아 마지막에 숙소나 먹거리는 여유롭게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어제보다 훨씬 커다란 방에서 샤워도 빨래도 마치고 그 유명한 대게를 먹는다. 혼자서 여덟 끼 분량 이상의 식사비를 들여가며······.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형세가 되고 만다. 강구교를 건너 주민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가 본다. 역시 관광지보다 이런 현지 주민들이 사는 곳을 찾아야 좀더 알찬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