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아름다운 꽃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아름답게 꽃 피워야 하고, 세상을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아름답게 물들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곱게 물이 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曺東和는 “나 하나 꽃 피어”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누구나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달랑 나 하나 달라진다고 해서 거대한 해일海溢처럼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 시류時流를 거꾸로 되돌려놓을 수는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나 하나 겨우 꽃 피운다고 해서 풀밭이 꽃밭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는 오히려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나” 하나가 중요합니다. “나 하나”라고 말하지 말아야합니다. “나 하나 밖에”라고 말하지 말아야합니다.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다른 방식으로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변화는 그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동기를 불러일으킵니다. 또 하나의 변화를 부릅니다. 또 하나의 꽃을 피웁니다. 물론, 변화의 시작은 눈 여겨 보지 않으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작습니다. 그렇지만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고, 넷이 여덟이 되면 다릅니다. 변화는 하루가 다르게 빨라집니다. 풀밭은 마침내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찬 꽃밭으로 변합니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됩니다. 살맛나는 세상이 됩니다. 그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맞습니다. 나 하나 물든다고 산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산 역시 나 하나가 물들면서부터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나부터 물들어야합니다.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마침내 온 산이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변화는 크기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측량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 와 비교할 때 아예 없는 것 같을 정도로 지극히 작은 존재에 불과한 내가 꽃피면서부터, 내가 물들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렇게 나 한 사람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羅泰柱는 “멀리서 빈다”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
그렇습니다. 눈부신 아침은 나도 모르는 곳에서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사람 때문에 다시 한 번 더 시작됩니다. 고요한 저녁은 너도 모르는 곳에서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사람 때문에 다시 한 번 더 옵니다. 너는 더없이 소중합니다. 나 역시 더없이 소중합니다. 더 없이 소중한 너를 아무렇게나 취급하지 말아야합니다. 더 없이 소중한 나를 아무렇게나 취급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들 때문에 눈부신 아침이 한 번 더 시작되고, 고요한 저녁이 한 번 더 찾아듭니다. 그金鍾海는 “그대 앞에 봄이 있다”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인생은 고해입니다. 늘 파도치는 날입니다. 늘 바람 부는 날입니다. 한두 번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언제나, 늘, 항상 이어집니다. 살아내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꼭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느냐는 고백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올 정도로 어렵고 또 어렵습니다.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파도치고 바람 부는 날은 조용히 닻을 내려야합니다. 일을 잠시 접어 두어야합니다. 묻어두어야 합니다. 억지로 꽃을 피우려고 하지 말아야합니다. 억지로 물들려고 하지 말아야합니다. 답답해도 할 수 없습니다. 잦아들 때까지는 참고 또 참아야합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합니다.
...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드디어 태산같이 밀려오던 파도가 잔잔해졌습니다. 거대하고 뚜렷한 눈을 가진 강력한 태풍처럼 불어오던 바람이 고요해졌습니다. 혹독하게 추웠던 겨울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다 지나갔습니다. 마침내 꽃을 피워야할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물들여야할 차례가 도래하였습니다. 파도와 바람과 겨울이 쉬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는데 그래서 낙심하고 무너질 때가 많았었는데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다보니 마침내 때가 주어졌습니다. 한편,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王淇은 “늦봄 작은 정원에서 노닐며暮春游小園”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매화 시들고 나니
해당화 새빨갛게 물이 들었네
들장미 피고 나면 꽃 다 피는가 하였더니
찔레꽃 가닥가닥 담장을 넘어 오네
그렇습니다. 꽃들은 서로 먼저 피려고 앞을 다투지 않습니다. 한꺼번에 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무던히도 끈질기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립니다. 같은 지역에서도, 같은 나무에서도, 심지어 같은 가지에서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면 조금도 지체하지 않습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망울을 내밀고 있었던 동백이 먼저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나면, 매화, 산수유,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 라일락, 이팝나무, 조팝나무, 철쭉 등이 뒤를 이어서 꽃을 피웁니다. 봄에 피는 꽃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 계절 꽃들이 모두 다 그렇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수만 가지 종류의 들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담은 또 표현할 수 있는 꽃을 피웁니다. 비교할 대상이 전혀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꽃을 피웁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아름다운 꽃들을 빠짐없이 모두 다 감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시사철 더 없이 좋은 선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는 시에 담겨 있는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라는 구절이 유독 마음에 와 닿습니다.
집채만 한 파도가 쉬지 않고 몰려오던 날들을 이를 악물고 견뎌냈습니다. 거센 바람이 사납게 휘몰아치던 날들을 피눈물을 흘리면서 견뎌냈습니다. 전혀 원하지 않았던 상처를 받아야만 했던 날들을 아픈 가슴을 후려쳐가면서 견뎌냈습니다. 혹독한 추위가 사정없이 몰아쳤던 겨울까지도 부들부들 떨면서 견뎌냈습니다. 그 날들은 한두 번 정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시로 다가왔습니다. 잊어버릴 만하면 다가왔습니다. 겨우 한 숨 돌리려고 할 때 다가왔습니다. 이만하면 그래도 살만하게 되었다고 고백할 때 다가왔습니다. 견디고 또 견뎌도 끝나지 않고 다가왔습니다.
새털같이 많았던 그 날들을 견디고 또 견뎌냈습니다. 그랬더니 마침내 꼭꼭 감춰져 있었던 아름다운 꽃을 활짝 피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꽃 피울 차례가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오히려 그리스인이라는 이유로 당할 수밖에 없는 고난을 잘 참고 견디셨습니까?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꽃필 준비를 끝내 놓으셨습니까? 아니 오늘 활짝 꽃 피우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로가 위중한 상태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곧 당신이 영광을 받게 될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평소와는 완전히 다르게 반응하시는 주님이 이상하다고만 여겼습니다. 마르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오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시다는 장소를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았습니다. 오라비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왜 오지 않으셨느냐고 외쳤습니다. 그랬었다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정작 필요할 때는 냉정하게 외면하시더니 다 늦어버린 이제 서야 비로소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의미였습니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께 왜 그래야 했는지 이유를 설명할 시간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대답 또는 변명할 시간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주님 말씀을 아예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말만 쏟아놓았습니다. 계속해서 지금이라도 구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지금이라도 오라비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는, 죽은 오라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다면 무엇이든 좋으니 해 달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가장 좋은 것은 살려주는 것이니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어서 빨리 해달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죽어 장사지내러 가던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신 일이 있으셨습니다. 무엇이든지 해달라고 했으면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이치입니다. 마르다는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11:23)라는 주님의 대답마저도 귓등으로 흘려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나사로를 살려주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어서 썩은 냄새까지 풍기고 있던 나사로를 무덤으로부터 불러내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 날에 있을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마지막 부활의 때가 도래하게 되면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것쯤은 자기도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맞장구쳤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b-26)라고 선포하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덤 문을 열라는 말씀에는 “주여!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어 냄새까지 나고 있습니다.”(요11:39b)라고 대답했습니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대답했지만 실제로는 아니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믿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누구보다 친밀하게 지냈던 마르다가 보인 반응이었다고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11:32b)라는 증거에 따르면, 마리아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정작 중요한 때는, 필요한 때는 믿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구별하여 세우셨던 제자들은 물론 특별히 아끼고 돌보셨던 마르다와 마리아도 믿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은 아예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믿지 않았습니다. 뿌리 깊은 불신앙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환호하며 영접할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의 농간弄奸에 놀아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돌아서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기는커녕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죽이라고 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소중하게 여기며 귀담아 듣거나 믿음으로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섬처럼 혼자이셨습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홀로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유대인이 가장 큰 명절로 구별하여 지키는 유월절이 다가왔습니다.
백성들은 저마다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하여 미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습니다. 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번 명절에 참여할 것인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잡을 수 있도록 보는 즉시 신고해 달라고 미리 강하게 을러 두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종려 주일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끔찍한 고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고난 주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잡아 죽이려는 그들의 계획에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린 나귀 하나를 빌리셨습니다.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입고 있었던 겉옷을 벗었습니다. 나뭇가지들과 함께 바닥에 깔았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양을 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막11:10)라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을 로마의 강력한 압제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오신 메시아라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높은 보좌를 버리고 세상에 나타나신 목적을 자기들 멋대로 왜곡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목적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왜곡했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곧 교회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정도로 생각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부리려고 합니다. 지도자들 가운데는 자신의 억지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을 팔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주객이 완전히 전도顚倒되어 있습니다.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돈벌이에 정신이 팔려 있던 상인들을 보셨습니다. 그들을 팔고 있던 양과 소와 함께 성전 밖으로 몰아내셨습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땅에 쏟아버리셨습니다. 상을 뒤집어엎어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거룩한 장소를 어떻게 장사꾼들의 사리사욕이나 채워주는 더러운 집 곧 강도들의 소굴로 바꿔놓을 수 있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성전 장사를 통해서 천문학적인 재물을 끌어 모으고 있었던 종교 장사치들의 심기를 건드리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만 최소 육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사두개인들까지 합친다면 훨씬 많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과 단신單身으로 맞장 뜨셨습니다. 화요일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감람산 강화를 통해 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에 대한 비유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재림의 징조에 대해서 예언해주셨습니다. 과부의 헌금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동행 하셨지만, 여전히 홀로 타락한 세상과 맞장 떠야하셨습니다. 수요일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베다니의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한 여인이 조용히 다가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와 발에 값비싼 기름을 부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같이 몹시 분하게 여겼습니다. 특히, 유다는 왜 기름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았느냐며 누구보다 강하게 따졌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날 저녁, 어둠이 깊어지자 은밀하게 산헤드린을 찾았습니다.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을 만났습니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을 방법에 대해서 의논했습니다. 기회를 노리다가 찾으면 즉시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주기로 합의했습니다. 미리 은 30을 챙겼습니다.
돌아온 다음에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뻔뻔한 얼굴로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곧 배반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사도는 “이는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요13:11a)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밀하게 진행된 그날의 행적들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다 알고 계셨다고 증거 합니다. 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해 주셨다.”(요13:1)라고 증거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다고 증거 합니다. 사랑해 주셨다고 증거 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렇습니다. 영원히 변함없습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저와 여러분을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목요일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먹을 마지막 만찬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셨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서로의 발을 씻어주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서로 섬기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만찬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대놓고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13:21b)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찬물을 끼얹어 버리셨습니다.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드셨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이미 은 30을 받아든 유다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저마다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동시에 유다가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낯빛 하나 붉히지 않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물어볼 수 있었을까요? 사탄에게 붙잡히지 않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는 그렇게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건네준 빵을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 길로 산헤드린 공회를 찾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줄 날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마지막 당부와 함께 만찬을 마무리하셨습니다. 평소 습관처럼 찾았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창세전부터 당신을 위해서 예비 되어 있었던 엄청난 고난과 고통 앞에서 초죽음에 이르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다른 방법은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묻고 또 물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한 마디 대답도 없이 철저히 침묵하시자 거대한 해일처럼 한꺼번에 다가올 무지막지한 고난과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빌라도가 공개적으로 죄가 없다고 선언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사용된 도구Instruments of the Passion는 여러 가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매단 십자가였습니다. 사납게 매질하기 위해서 묶어둔 기둥이었습니다.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살점이 뚝뚝 떨어져나가고 선지피가 하늘 높이 솟구쳐오를 정도로 매서운 채찍이었습니다. 인정사정 보지 않고 눌러 씌웠던 가시 면류관이었습니다. 두 손과 두 발을 십자가에 고정하기 위해서 사용했었던 세 개의 녹슨 못과 망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사 여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 깊숙이 찔렀던 긴 창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도구들로 저와 여러분은 감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끔찍한 고난과 수치와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인류 곧 저와 여러분의 허물과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를 완벽하게 만족시키셨습니다. 때가 이르자,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지옥 불구덩이를 산산조각 내버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구원과 생명의 꽃으로 피어나셨습니다. 이 사명을 완전히 이루어내기 위하여 무수히 많은 고난의 순간들을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견디셨습니다. 이 한 송이 꽃은 열두 송이로, 백이십 송이로, 오백 송이로, 삼천 송이로, 오천 송이로 늘어났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었던 저와 여러분도 역시 꽃피워 주셨습니다.
풀밭에 불과했던 세상을 아름다룬 꽃들로 가득 찬 꽃밭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먼저 꽃피는 복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깨달아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일깨워주는 복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꽃피워주는 복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허락하신 삶의 현장이라는 풀밭을 아름다운 꽃들로 만발滿發한 꽃밭으로 가꾸는 복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Shiva Ryu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자신의 잠언 시집에 수록된 “당신에게 달린 일”이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한 곡의 노래가 순간에 활기를 불어 넣을 수 있다
한 송이 꽃이 꿈을 일깨울 수 있다
한 그루 나무가 숲의 시작일 수 있고
한 마리 새가 봄을 알릴 수 있다
한 번의 악수가 영혼에 기운을 줄 수 있다
한 개의 별이 바다에서 배를 인도할 수 있다
한 줄기 햇살이 방을 비출 수 있다
한 자루의 촛불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고
한 번의 웃음이 우울함을 날려 보낼 수 있다
한 걸음이 모든 여행의 시작이다
한 단어가 모든 기도의 시작이다
한 가지 희망이 당신의 정신을 새롭게 하고
한 번의 손길이 당신의 마음을 보여 줄 수 있다
한 사람의 가슴이 무엇이 진실인가를 알 수 있고
한 사람의 인생이 세상에 차이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린 일이다
그는 한 곡의 노래, 한 송이 꽃, 한 그루 나무, 한 마리 새, 한 번의 악수, 한 개의 별, 한 줄기 햇살, 한 자루의 촛불, 한 번의 웃음, 한 걸음, 한 단어, 한 가지 희망, 한 번의 손길, 한 사람의 가슴, 한 사람의 인생이 중요하다고 외쳤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저와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고 노래했습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겔22:30)라는 외침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도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용서와 회복을 위하여 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Nehemiah는 예전에 누렸던 영화의 흔적을 조금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망해버린 나라와 민족을 단 하루도 잊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예루살렘을 다녀왔다는 소식만 들려오면 지체 없이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의 형편과 사정은 어떤지 물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았습니다.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서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보다 더 간절하게 예루살렘의 회복을 바라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하여 일하실 때 자신을 도구들 가운데 하나로 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도래했습니다.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이 내렸습니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느2:8b)라는 증거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습니다. 꿈속에서도 사모하며 그리워했었던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성벽은 여전히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현실은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지 모를 정도로 암담했습니다. “나 하나 나선다고 해서 암담한 현실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라는 부정적인 질문이 수없이 고개를 치켜들고 올라왔습니다. 그렇다고 손을 아주 놓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도 모르게 예루살렘을 돌아보았습니다. 형편을 정확하게 살폈습니다.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성벽이 완벽하게 재건될 때까지의 52일 동안, 무수히 많은 내적 외적 반대가 있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었던 핍박이 있었습니다. 은밀한 살해 위협까지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셨다면 자칫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지켜보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 둘 힘을 보태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무너져 있던 여호와에 대한 신앙도 개혁할 수 있었습니다.
그Bob Pierce는 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나에게도 고통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가난과 분쟁 속에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리게 되는 나약한 어린아이들을 향해서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국제 협력기구World Vision를 세웠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아동과 가정과 지역 사회가 극한 빈곤과 불평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변화와 개혁은 언제나 깨어 있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먼저입니다. 나 하나부터 먼저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나 하나부터 먼저 아름답게 물들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꽃피우고 물들여주시는 하나님의 탁월한 섭리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허락해 주신 너까지도 아름답게 꽃 피우고 물들이는 복된 삶, 세상을 아름다운 꽃들로 만발한 꽃밭으로 만드는 복된 삶,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복된 삶, 무엇보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 이끌어주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