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조차도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에스라 9:13-15
1. 들어가는 말
기원전 586년(BC 586),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King Nebuchadnezzar of Babylon)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잡혀 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자기들의 두고 온 고향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시편 137편(Psalms 137)을 통해서 우리 귀에 들려오는 망향 자들(nostalgist, homesickers)의 노래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도다
(By the rivers of Babylon we sat and wept, when we remembered Zion)."
이렇게 두고 온 고향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지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이 지난 뒤에 드디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스룹바벨(Zerubbabel)이 인도하는 42,260명이 첫 번째로 70년만에 고향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이 후 58년이 지난 뒤 제사장 에스라(priest Ezra)가 인도하는 약 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고향 예루살렘에 돌아온 제사장 에스라가, 58년 전에 제일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보니, 이건 말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참담하고(terrible) 끔찍한 일은 이스라엘 외부로부터의 도전이나 침략(invasion)이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로부터의 종교적 부패(religious corruption)였습니다.
먼저 도착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르는 종교적 범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점 멀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타락한 백성(depraved people)'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범한 종교적 범죄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로 금한 이방 백성들(gentile or polluted people)과의 결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벌써 오래 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들과 딸을 우상(idol)을 섬기는 자들의 자녀들과 결혼시키지 말라"고 출애굽기(Exodus) 34:16에서 말씀하셨는데,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고, 그들의 자녀가 우상들을 섬기는 사람들의 자녀와 결혼하게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녀가 이방인들의 자녀와의 결혼을 금지하셨는가?
물론 이방인들과의 결혼 자체가 절대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걱정하셨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결혼을 하게 되면, 이방인들이 섬겼던 나쁜 우상들이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오염(pollution)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솔로몬 왕이(King Solomon) 많은 이방 여인들을 자신의 아내와 첩으로 받아 들여졌을 때, 단지 여자들만 이스라엘에 들어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섬겼던 이방 신들(idol)인 아스다롯(Ashtoreth), 몰렉(Milech), 그리고 바알(Baal) 신들도 함께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하나님의 땅인 시온(Zion)과 성전을 더럽혔었습니다.
오늘 말씀인 에스라 9:1을 보시면, 제사장 에스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하였기에 온갖 이방의 신들(gods)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집마다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북 이스라엘이나(North Israel), 남쪽 유다(Judah)가 멸망한 가장 큰 원인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 신을 섬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제사장은, 이 엄청난 사실에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3절을 보시면 에스라는 "자기의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아 있었다
(When I heard this, I tore my tunic and cloak, pulled hair from my head and beard and sat down appalled)"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13-15절의 말씀은 이렇게 또 다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회개의 기도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범죄를 회개하는 에스라의 기도를 통하여, 벌을 주시면서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 몸 말
(1) 우리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14절, 15절)
에스라 선지자는 오늘 말씀 끝인 14절 끝을 통해서 하나님께 이렇게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심각성(seriousness of Sin)에 대하여 고백했습니다. "이제 주께서 분노하셔서,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없애 버리신다고 해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Would you not be angry enough with us to destroy us, leaving us no remnant or survivor?)"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얼마나 무섭고 큰지, 하나님께서 우리들 모두를 다 죽이신다고 해도, 저희는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에스라는 15절의 마지막에서도 또 이렇게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가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Here we are before you in our guilt, though because of it not one of us can stand in your presence.)."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 함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치명적인 죄(fatal sin)'라는 말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된 상태는,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국한된(제한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범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5:12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death through sin, and in this way death came to all men, because all sinned)"고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범죄하여, 누구도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선악과(the fruit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를 따먹었을 때, 비로소 아담과 하와(Eve)는 자기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리고 자기들의 벗은 몸과,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죄를 범하여 두려움에 떠는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Where are you? Adam!)"(창세기 3:9) 부르셨을 때에 아담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I was afraid, so I hid)."
하나님께 범죄한 사실을 죄를 지은 후에야 알게 되었고, 그 이유로 하나님으로부터의 벌을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아담의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 모든 인간이 필연적으로(inevitably) 가질 수밖에 없는 마음입니다.
에스라 제사장은 바로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회개를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상태가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모든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면 우리는 아담처럼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두려우므로, 숨었습니다(I am afraid, so I hid)." 바로 아담의 대답이며, 에스라 제사장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대답이며 고백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죄된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인간들의 최후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의 운명(destiny)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지난 날 저질렀던 죄에 대하여 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며 숨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우리를 지옥에 보내셔서, 영원한 죽음의 늪에 빠뜨리셔도 입이 있어도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유구무언(有口無言)'의 죄인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2) 형벌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13잘)
이런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tragic destiny)'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벌하셨습니까?
지옥에 보내시거나, 단 한 사람 남겨놓지 않고 우리를 몰살시키셔도 할 말이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오늘 13절에서 이런 비극적 운명의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에스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당한 일은 모두 우리가 지은 죄와 우리가 저지른 크나 큰 잘못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주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지은 죄에 비하여 '가벼운 벌'을 내리셔서, 우리 백성을 이만큼이나마 살아 남게 하셨습니다
(What has happened to us is a result of our evil deeds and our great guilt, and yet, our God,
you have punished us less than our sins have deserved and have given us a remnant like this)."
내가 지은 죄는 엄청나지만, 하나님은 내가 지은 그 엄청난 죄에 비하여 너무나 적은 벌을 내리셨다는 말이지요.
작년 성탄절 전에 26살 된 한국 여자가 송년 모임에서 술을 마시고는 2번 Freeway를 운전하다가 다른 차를 들이받아서 세 대의 차가 사고가 났고, 그 차들에서 불이나 두 명이 숨지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속도로 경찰인 CHP는 그 여자와 뒤 쫓아 온 남편까지를 음주 운전 혐의로 현장에서 구속했고, 그 여자는 무기 징역까지를 구형할 수 잇는 1급 살인죄(1st degree murder)와 100만 달러의 보석금(bail bond)을 책정해서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다행히 그 다음날 그 여자는 1급 살인혐의가 과실치사로 낮춰졌고, 보석금도 30만 달러로 낮아졌습니다. 아마도 그 여인은 자신의 혐의가 감형된 것에 무척이나 기뻐했을 것입니다. 형량이 낮춰 진 것에 대해서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낸 여인이 감사한 것 같이 제사장 에스라도 감사했습니다. "우리 전부를 죽이실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우리를 남겨 놓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정작 에스라 제사장이 더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형량을 낮춰 주신 것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벌을 받은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벌을 아주 없애 주시지 않고, 징계를 아주 없이 해 주시지 않고, 조금이라도 벌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않도록 깨우쳐 주셨습니다"라고 14절 첫 부분에서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완전히 용서해 주시기는 하지만, 가벼운 벌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다시는 그와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지 않도록 해 주시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죄의 경각심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God's concern for the awareness of sin)'라고 할 수 있습니다.
2년 전에 음주 사고로 다른 사람에게 큰 부상을 입혔던 한국 사람이 판사로부터 감옥 가는 것 대신 시체 안치소에서 6개월간 봉사 생활을 하라고 판결(verdict)을 받았던 일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 분은 감옥을 안가고 시체 안치소로 가는 것에 대해서 안심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벌금형이나 가볍게 그 사고를 수습하게 되지 않은 것에 만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매일 카운티 시체 안치소에 들어오는 수많은 죽은 사람들을 6개월 동안 보면서, 그 일을 마칠 때 이렇게 결심했다고 합니다. "이제 다시는 술 마시고 운전을 하지 않겠다." 6개월 동안 사고로 죽어 들어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비로소 술을 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만일 판사가 그 사람을 벌금형 정도로 처리를 했다면, 그 사람은 음주 운전이 얼마나 무서운지,그리고 죽음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지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옛날 버릇을 완전히 청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분은 마지막 글에서 자신에게 카운티 시체 안치소에서 일하도록 판결을 내린 판사에 감사하다는 말을 적었습니다.
에스라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가벼운 벌, 그렇지만 죄와 심판의 심각성을 기억하고, 죄와 심판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을 괴롭게 하는 여러 질병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불필요한(unnecessary disease)입니다. 그런데 이런 병들 중에서 특별히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 병이 있는데, 그것은 '몸살(fatigue)'입니다. 몸살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만일 몸살이라는 병이 없다면 우리 몸이 탈진(exhaustion)되는지, 소진(burn out) 되는 지도 알지 못한 채 일만하다가, 치명적이고 다시 회복(recover)될 수 없는 상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살은 우리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몸의 균형(balance)이 깨어지고 있다는 일종의 '신호(signal)'이기 때문에, 몸살로 인해서 우리 몸이 혹사(abuse)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가벼운 벌을 감사했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들이 더 나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적당한 벌로,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징계(discipline)'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서 12:11절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좋은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No discipline seems pleasant at the time, but painful. Later on, however,
it produces a harvest of righteousness and peace for those who have been trained by it)."
3. 맺 는 말
성경을 통해서도,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도, 그리고 인생의 한 부분을 우리 모두 함께 나누는 저희 교회의 성도님들의 인생 여정을 조명해 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다양한 방법으로 저희들 인생 속에 스며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아름답고 좋고, 귀하고 값진 것으로도 주어질 수 있습니다. 명예, 건강, 물질과 직장에서의 승진, 자녀들의 바른 성장과 좋은 학교로의 진학 등의 방법 등도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때로 하나님은 당신의 독특한 방법(unique way)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다가 오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저희들은 하나님의 형벌조차도, 하나님의 징계조차도 은혜로 받을 수밖에 없고,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멀게 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게 하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징계의 방법으로 우리를 벌하십니다. 때로는 가난으로, 수치로, 질병으로, 실패로, 가정의 환난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월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등으로 우리를 벌하십니다.
당장에는 그것이 아프고, 절망스럽고, 수치스럽고, 때로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들게 하지만, 우리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그렇게 절망하고 아파하며,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하소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죄로부터 멀어지고, 지옥으로부터 멀어지고,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영화배우 Martin Sheen은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라는 영화를 찍기 위해서 필리핀에 갔습니다. 베트남 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마틴은 육군 첩보 기관의 장교인 벤 윌라드(Cap. Ben WIllard, an Army intelligence officer) 역을 맡아 필리핀에서 6개월간 머물렀습니다. 장기간 외국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을 필리핀으로 불러 함께 지냈습니다.
그런데 촬영을 시작하면서 그 자신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벤 윌라드로 점차 빠져들고 변신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멋 대로였고, 비정하고, 술고래(hard-drinker)가 되어갔고, 자기 중심적이며 외골수(single-purposed)로 되어 갔습니다.
아내는 점차 변해 가는 남편을 걱정했고, 많은 대화와 다양한 방법으로 가족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남편을 돌아오게 하려 했지만, 마틴 자신은 자기 역할(role)에 충실할 뿐, 변해진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아이들은 아버지로부터,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고 미국으로 돌아올 결심을 하야 촬영장을 떠나 마닐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을 떠나 보내고 혼자 영화촬영으로 지친 몸을 가지고 잠을 청한 마틴은 한 밤중에 갑자기 숨이 막혀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탈진할 정도로 많은 땀을 흘리면서, 고통은 계속되었지만, 그는 뭐가 잘못되었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그의 가슴과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고통을 느꼈고, 그 고통 중에도 마틴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어서 방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그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심지어 두 형들마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밖에는 열대 태풍이 불어 세찬 폭우에 강한 바람까지 불기에 누구도 밖에 나온 사람이 없었는데, 마틴은 죽을힘을 다해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우리 부모님, 형들처럼 나도 이 필리핀에서 심장마비로 죽는구나"고 생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그 때, 바로 그 순간에 그는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들과 함께 나간 교회를 20대 영화배우의 꿈을 안고 활동하던 시기까지는 잘 나갔지만, 출세를 위해 기꺼이 신앙을 포기했던 그였지만, 마틴은 생의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with all his might) "하나님 도와주세요"하고 힘없이 외치고는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에는 미국으로 떠난 줄 알았던 아내 Janet이 환한 미소로 병실을 지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내로부터 자신이 하나님을 부른 후 지금까지 있었던 신비한 일들에 대하여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마틴이 심장마비로 쓰러진 그 순간에 영화 촬영장을 지키던 경비원(security guards)들이 새벽에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폭풍우 속을 뚫고 배우들의 숙소를 다니다가 쓰러져 있던 마틴을 발견하였고, 부근에 큰 병원이 없어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영화 촬영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헬리콥터 조종사가 그 폭풍을 뚫고 마닐라의 병원까지 날아 왔다는 것입니다
. 아내와 아이들 또한 미국 행 비행기를 타려 했지만, 갑작스러운 폭풍으로 비행이 취소되어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남편의 사고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병원으로 달려 왔습니다.
마틴은 그 날밤의 일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날 밤, 내 안에 있던 고집쟁이며 이기적인 윌라드는 죽었습니다.
나만을 위해서 살았던 마틴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내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하나님과, 내게 새로운 사랑을 허락한 남편과 아버지만 남아 있습니다."
심장마비와 사고가 한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는 했지만, 저희들은 그 안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징계와 아픔 속에서도 기뻐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신앙생활은 기쁨일 수밖에 없습니다. 징계가 그 당시에는 아픔과 고통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지만, 그 징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수가 있기에, 하나님 안에서는 "징계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인줄로 믿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