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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시대에는 문학도 가벼워졌다
(1) 한국소설의 형성 과정
한국에서 소설의 기원은 패관 문학이다. 패관 문학은 통속문학이었고 성리학이 뿌리 깊었던 조선에선 그냥 공부나 가사 일을 할 시간에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 해서 좋은 대우를 못 받았다. 허무맹랑한 소설들이 해악을 끼친다고 하면서 사회적 문제거리로까지 여겼고, 실제 소설 내용도 진지하게 다루는 작품보다는 흥미본위 내용을 다룬 소설이 많았다. 재미로 읽는 인터넷 소설, 무협 소설, 라이트 노벨, 판타지 소설 같은 개념이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저술된 소설 가운데 작자가 미상인 경우가 많다.
당시 문맹률이 어마어마하게 높았고, 특히 한문의 경우 사대부 계층이나 사용할 수 있었다. 소설은 한문 소설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근간이 사대부 계층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식자층이어야 향유할 수 있는 유흥거리였다. 이후 '언패(언문 소설)'가 등장하면서 커트라인이 낮아지긴 하였으나, 언문도 배우지 못하는 평민들도 많았고, 책값이 일반인들에게 매우 부담이 가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소설책도 아무나 사서 읽지 못해서 시장판이나 길거리에서 전기수들이 낭독하는 소설을 듣기도 했다. 애당초 사대부 계층에서 시작된 것이니 사대부들도 당연히 봤었고, 사대부 여인들이 시간을 떼우기 위해서 소설책을 빌리는 일도 흔했다. 그리고 소설책을 대놓고 천시한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소설을 긍정적으로 본 고위층들도 적지는 않아서 영조는 소설책을 대놓고 즐겨보았고, 일부 사대부들도 손수 소설책을 창작하기도 했으며, 개중에서 용돈벌이용으로 소설을 창작한 경우도 종종 보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김시습과 김만중, 박지원이 있으며 세도정치의 문을 연 것으로 유명한 김조순도 소설책을 즐겨봐서 정조에게 혼이 났던 일화도 있다.
구한말 들어 신소설이라는 장르가 도입되면서 계몽성 소설들이 대거 출판되었고, 그 이후로 일제강점기와 8.15 광복, 6.25 전쟁, 군사독재정권 시기를 지나게 되면서 리얼리즘 소설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으며, 사회참여나 자기반성 등 심각한 의미를 담은 것들이 많았다. 사회에서 도피해서 개인적 일상과 소비문화를 즐긴다는 소설도 많았으나, 그런 소설들조차 암울한 식민지 현실 때문에 결국 그 내용이 우울하고 무거우며 죄책감의 정서를 잔뜩 담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광복 이후 독재정권이 이어지다 보니 사상 학문 언론 출판의 자유가 위축되고, 그나마 문학이 체제의 탄압과 간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되었다. 그래서 문학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중시하는 쪽으로 무겁게 변하게 되었다. 즉 지식인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학술과 언론이 아닌 소설을 통해 돌려 말하게 되고, 이에 따라 소설은 사회 담론을 형성하는 견인차가 된 것이었다. 세계적인 경향도 그러하거니와 이 때문에 문학이 사회적 주장을 담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하게 되고, 그 결과 현대에는 독자들이 대체로 문학이라는 것을 무겁고 어려운 것으로 느끼고 있다.
20세기를 풍미하던 영화산업과 융합하면서 서사문학이 어느 정도 호황을 누렸다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소설이 영상매체나 스마트 기기 등에 밀려 대중문화의 첨단에서 물러나고, 국민의 독서열조차 시들었다. 한국 독서시장에서 스릴러 SF 추리 등의 장르소설 분야에는 예전부터 일본 소설들이 지배력을 가진 상황이고, 할리우드 영화의 원작소설들이 인기를 누리는 등 영미권 소설들도 이에 가세하고 있는 상황이다. 2020년대는 팬데믹의 여건으로 인해 탈출구를 모색하느라 독서 인구가 늘고 문학적 관심이 증가했다고 할까.
(2) 스넥 컬쳐
스넥 컬쳐란 2007년 5월 미국의 트랜드 잡지인 <와이어드>에서 처음 만들어낸 단어로 10~15분 정도의 길이에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넣은 모든 것을 말한다. 과자를 먹듯 짧은 시간에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 즉 유튜브, 포털 뉴스 기사, 페이스북, 웹툰 등이 해당되며,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스넥 컬처는 거두절미하고 핵심만 담는 간결함을 무기로 세상에 퍼진다. 쓸데없는 서론은 생략하고 본론만 간결하게 담은 스넥 컬처는 시간이 모자라는 현대인에게 콘텐츠 소비의 시간을 줄여주는 크나큰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통설을 쉽게 수용하는 경향이 많아 킬링 타임용으로 쓰레기 취급을 받기도 한다.
이런 콘텐츠에 익숙하다 보면 생각이 가벼워져 텍스트 독해를 제대로 해낼 수 없게 되고, 미묘하게 작용하는 문장의 맥락을 알 수 없으니 관찰력을 발휘할 수도 깊은 사고를 하기가 어렵게 된다.
2. 구효서(이상문학상 수상작가)와 김동석(웹소설가)의 작품 비
두 소설가, 구효서와 김동석의 비교
(1) 2017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2017,문학사상사)
구효서의 「풍경소리」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라고 적으니 어딘지 머쓱.
성불사의 밤이 깊은 건 맞고, 풍경소리 들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윽한지는 모르겠다. 그윽하다는 게 뭔지도 잘 아, 갑자기 객수라는 말이 떠올랐다. 떠올라서 깜짝 놀랐다. 뭐지 이건? 갑자기 떠오르는 건? 한자는 모르겠다. 객수. 이런 말이 떠오르다니 참. 역시 달라진 건가. 슬슬 달라지는 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인데. 써먹은 적도 없는 말인 것 같은데, 객수. 성불사에 온 지 사흘이 지났다. 달라질 때도 된건가. 뭔가 달라질거라고 했다. 달라지고 싶으면 성불사에 가서 풍경소리를 들으라고 서경이가 말했다……
미와는 오늘도 노트에 슥삭슥삭 적었다. 풍경소리를, 들으라고. 서경이가 말했다………. 그렇게 슥삭슥삭요를 깔고 엎드려 이불로 등을 덮은 뒤 촛대를 노트 가까이 끌어당기고
형광등 켜고 써도 돼요. 얼마든지. 괜찮아.
낮에 주승이 말했다.
형광등요?
미와가 물었다.
방 천장에 달린 거 형광등이잖아요 그거.
아, 형광등,
형광등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있을진대 켜지 않을 까닭이 없잖아요. 응. 절이라고 밤에는 불 다 끄고 자고 그러지는 않아요. 안 그래도 돼요.
아.
그러니 얼마든지.
네. 저, 그런데, 쓰는 데는… 촛불이 좋아요. 네.
미와가 말했다. 형광등을 켜면 창살문에 바깥의 풍경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촛불을 켜면 창살문에 풍경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이 말을 미와는 하지 않았다.
그런가?
주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와도 끄덕였다.
솔바람이 불었다. 미와의 긴 머리카락이 날렸고 주승의 흰 눈썹 끝이 흔들렸다.
요즘은 다들 노트북컴퓨터던데, 응, 객실은 스프링 ………… 노트를 쓰네. 아, 수첩인가? 노트북컴퓨터가 없다면 모를까………… 있다면 써야지.
일반적인 노트보다는 작고 수첩보다는 큰 것을 미와는 갖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밤이고 낮이고 연필로 슥삭슥삭 조금씩 적었다. 주승은 미와를 객실이라고 불렀다.
노트북컴퓨터는… 네, 갖고 오지 않았어요.
그렇군.
얇은 나폴리 피자 도우 같길래, 에, 이걸 샀어요. 사 봤어요. 지질이 그렇잖나요?…아무래도 노트 쪽에 가깝지 않으려나 이거?
피자를 좋아하는구먼?
몹시 그렇긴 하지만 바라나시 차파티 같았더라도 샀을 걸요. 맛, 그런거 때문에 샀을 리가 없잖아요. 노튼데. 감촉 때문에 샀어요.
감촉?
종이 두께, 감촉, 에, 그런 거요. 연필로 쓰면 슥삭슥삭 작은 톱질할 때 나는 소리가 나고요.
그런가? 작은 톱….
주승이 또 고개를 끄덕였고,
에 아주 작은 톱. 그런 게 있다면요.
미와도 또 끄덕였다.
노트북컴퓨터라면, 그래, 슥삭슥삭 그런 소리가 나지 않겠지.
에,안나요.
주승은 요사채 툇마루에 미와와 나란히 앉아서 분황사탑을 바라보았다. 뾰족한 턱을 들고 바라보았다. 분황사탑 꼭대기는 푸르디푸른 하늘이었다.
수봉이 가사 없는 승복 차림으로 절 마당을 휘적휘적 가로지르다가 멈추었다. 주승과 미와를 바라보았다. 주승과 미외는 분황사탑 위 하늘만 바라보았다. 수봉은 건너던 절 마당을 마저 건넸다. 휘적 휘적.
하늘 가운데로 나 있는 흰 비행운 빗금을 올려다보다가 저것은 상처일지도 모르겠는 거야, 라고 미와는 노트에 적었다. 슥삭슥삭 적었다. 저 하늘은 어쩐지 짜릿한 데가 있잖아, 라고.
쓰르라미가 울었다. 미와와 주승은 한동안 쓰르라미 소리에 묻혀 있었다. 아까 갔던 방향과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그러나 언제나 같은 걸음걸이로 수봉이 절 마당을 가로질렀다. 휘적휘적. 주승이 턱을 내리고 미와에게 물었다.
사람… 죽여요?
네?
미와가 되물었다.
소설 같은거 쓰는 거 아닌가요?
주승은 소띠였고 80세였다. 목소리나 그런 것은 소심한 여덟 살.
글…쎄요.
미와는 서른두셋쯤 보였다.
소설? 소설이 아니라고 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소설을 알지 못했으니까. 소설이라니. 읽는 건 싫어하지 않았지만 쓸 줄 몰랐고, 쓸 엄두를 내지 않았고, 낼 필요가 없었고(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 소설이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몰랐다, 진짜. 그러니까 소설이 아니라고 말하려면, 그러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거지. 글쎄요, 라고 대답하길 참 잘했어. 응. 그런 생각을 하며,
하여튼 아, 안 죽여요, 사람. 네. 저는.
이라고 말해 버렸다. 말하고 나서는 더 할 말이 없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소설이 돼요? (중략)
▶ 살피기
이상문학상 수상작(2017)이다. 이 소설은 가을 산사의 풍경과 사찰을 찾아온 주인공의 내면세계를절묘하게 결합시켜놓은 중편소설이다. 여주인공 미와의 성격, 그곳 승려와 지내면서 자잘한 부딪침이 전부인 이 소설에서 눈에 띄는 것은 평화로우면서도 '나로 나타나는 주인물'의 내면에 쌓이는 긴장감이다. 이글은 꼼꼼하게 읽어야 그 서사를 즐길 수가 잇다. 독자는 서사적 현실과 내면세계의 간극을 잘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2) 웹소설 (2017년 요다출판사)
김동석의 「회색인간」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그들에게 있어 문화란 하등 쓸모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 한 대도시에서 만 명의 사람들이 하룻밤 새 증발하듯 사라져버렸다. 땅속 세상, 지저 세계 인간들의 소행이었다. 갑작스러운 납치로 혼란에 빠진 만 명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들은 말했다.
[보다시피 우리들은 지저 세계의 인간들이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지상 인류를 한순간에 멸망시킬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평화를 사랑한다.]
그 말에 참지 못하고 누군가 외쳤다.
“그럼 왜 우리를 납치한 겁니까!"
[지저 세계가 꽉 차버렸다. 우리가 살아갈 땅을 너희 손으로 파줘야겠다.]
"뭐야! 왜 우리가 네놈들 땅을 파줘야 하는데?"
[우리가 지상으로 진출하지 않는 대가다.]
"그게 무슨!"
[기뻐하라. 너희들이 아니었다면 지상 인류는 모두 멸망했을 것이다. 너희들의 노동력으로 인해 지상 인류가 구원받게 된 것이다. 너희들은 지상 인류의 영웅들이다.]
"무슨 개소리야!"
당연히 사람들은 반발했지만, 간단히 묵살당했다. 지저 인간들이 잠깐 허공에 웅얼거리는 것만으로, 만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머리를 감싸 안고 주저앉아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치 강철 압축기로 머리를 찍어 누르는 듯한 고통에 신음했다.
[지금 너희들이 겪었듯이,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지상의 인류를 간단히 멸망시킬 수도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인류를 위해 땅을 파라. 도시 하나만큼의 땅을 파내면, 너희들을 무사히 지상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만 명의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땅을 파야 했다. 처음, 사람들은 이것이 꿈이길 바랐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도피했다. 혹시, 지상의 인간들이 우리를 구해주러 오지 않을까, 하는 헛된 꿈을 꾸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헛된 기대를 버렸다. 그 대신, 반기를 꿈꿨다. 분노의 힘을 모아 지저 인간들을 죽여버리고 탈출하는 것을 꿈꿨다. 하지만 곧 자신들, 지상 인류의 무력함만을 맛보게 되었다. 반기를 꿈꾸고 달려든 사람들은 지저 인간의 손끝조차 건드려보지 못하고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나갔기 때문이다.
시간이 더 흐르자 사람들은 체념의 단계로 들어섰다. 강제 노동을 받아들였고, 인간 같지 않은 삶을 받아들였다. 그렇다. 말 그대로 정말, 인간 같지 않은 삶이었다. 지저 인간들이 사람들에게 준 것이라곤 땅을 팔 곡괭이뿐이었다. 숙소가 없어, 하루종일 일하다가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자야 했다. 화장실이 없어 아무 곳에서나 볼일을 봐야 했다. 몸을 씻을 물은커녕 마실 물조차 부족해 오줌을 받아 마셔야 했다. 생필품은 꿈 같은 소리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옷이 해지고 낡아 대다수 사람들이 발가벗고 다녔다. 그래도 아무도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곳에선 성욕조차 사치였다. 그 무엇보다 형편없었던 것은 먹을 것이었다. 지저 인간들이 제공한 음식은 진흙 맛이 나는 말라비틀어진 빵이었다. 사실 맛은 상관없었다. 그보다는 양이 문제였다. 음식량이 매번 턱없이 부족했다. 사람들은 단 한 번도 배가 불러본 적이 없었고, 단 한 순간도 배가 고프지 않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항상 지쳐 있었고, 항상 배고파 있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엔 웃음이 없었다. 눈물도 없었다. 분노도 없었다. 사랑도 없었고, 여유도 없었고, 서로를 향한 동정도 없었으며, 대화를 나눌 기력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마치, 회색이 된 듯했다. 그것이 흩날리는 돌가루 때문인지, 암울한 현실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무표정한 회색 얼굴로 하루하루를 억지로 살아가고 있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다쳐서 죽은 사람도 있었고, 병들어 죽은 사람도 있었고, 자살을 택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죽음은 배고픔 때문에 생겼다. 배가 고파 굶어 죽고, 진흙 빵 한 쪼가리를 두고 싸우다가 죽고, 어떤 자는 원 없이 배부르게 흙을 퍼 먹다가 죽기도 했다. 또 한번은 한 사내가 다른 사내를 곡괭이로 찍어 죽이기도 했다. 사내는 건조하게 말했다.
"이놈이 내 곡괭이 자루를 훔쳐 먹었소"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은 수긍하며 관심을 끊었다. 배가 너무나 고팠던 사람들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나무로 되어 있는 곡괭이의 자루 부분을 씹어 먹었다. 그것조차 쉽게 먹지 않았다. 아까워서, 정말로 아까워서, 정말 배가 고파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만 아껴서 조금씩 씹어 먹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곡괭이 자루는 모두 길이가 달랐다. 한 손아귀만큼 남은 사람도 있었고, 두 손아귀만큼 남은 사람도 있었다. 그런 소중한 곡괭이 자루를, 잠을 잘 때도 가슴에 품고 자는 곡괭이 자루를 훔쳐 먹었다니, 죽어도 쌌던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죽고 죽어,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르게 되었을 때, 만 명이던 사람 수는 절반 아래로 줄어 있었다. 그즈음 사람들 사이엔 암묵적인 룰이 정해졌다.
땅을 많이 판 사람이 우선적으로 빵을 먹는다.
그것은 바로 희망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놈의 희망. 지독한 희망이었다. 도시 하나만큼의 땅을 파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그 희망. 그만큼의 땅을 파낼 수 있을까? 상관없었다. 지저 인간들이 약속을 지킬까? 상관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땅속에서 그들이 버틸 수 있는 건 그 악마 같은 희망 하나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을 팠다. 사람이 죽어나가도 땅을 팠다. 몸이 후들거려도 죽기 직전까지 땅을 팠다. 나중에 와서는 그 희망이란 것도 너무나 희미하여 망각하게 되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땅을 팠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는 듯이.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어떻게 될까?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저 배고픔을 느끼는 몸뚱이 하나만 남을 뿐.
이곳의 인간들에게 삶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어나면 땅을 파고, 하루 종일 배고파하고, 지치면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면 땅을 팠다.
회색 인간들의 입은 말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았고, 귀는 듣지 못하는 듯했고, 눈은 그저 죽어 있는 것만 같았다. 인간들을 살아 있는 송장이라고 표현하기에도 아쉬웠다. 이곳을 무의미의 지옥이라고 부르기에도 아쉬웠다.
그런 이곳에서, 어느 날 한 여인이 따귀를 맞았다.
짝!
한 사내가 한 여인의 뺨을 때린 것이다. 힐끔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사내가 말했다.
“이 여자가 노래를 불렀소."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다니? 이곳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다. 미친 여자가 분명했다. 사내도 그래서 뺨을 때렸으리라.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뺨을 맞고 쓰러진 여자가 얼마 뒤 일어나 다시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이번엔 어디선가 돌이 날아왔다.
꺅!
짧은 비명과 함께 여인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동정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회색 얼굴로 땅을 팠을 뿐이다.(중략)
▶ 살피기
이 소설은 그냥 부담없이 읽힌다. 소설이 요구하는 인과율도 때로 생략한다. 무엇보다 재미를 우선으로 한다. 복잡한 생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웹소설은 스넥컬처다. 직관적이어야 하므로 은유를 하지 않는 것 비유가 많지 않을 것을 선호한다. 한 장면을 오래 끌지 않는다. 미사여구가 없는 짧은 문장을 쓴다. 자극적이다.
보통 웹상에서 요구하는 글은, 한 장면은 원고매수 10장 내외로 하고, 소설 한 편에 2-3개의 장면이 전환된다. 맞춤법이나 문법은 비교적 정확하며, 행간을 많이 갈라 눈의 피로도를 줄인다. 대화는 두 줄 이상을 넘지 않는다.
3. 우리를 창작세계로 이끄는 것들
창작의 욕구가 있는 사람들은 책, 기사, 기호, 음악, 그림, 사진, 동영상, 영화 등을 보고 들으면서 거기서 문학적 모티프를 얻는다. 여행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도 괜찮다. 다만 기억은 유한하여 늘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 좋다
(1) 기사를 보고 인상 깊은 이야기를 노트나 파일에 옮긴다.
6월22일 오전 8시30분, 유안씨는 평소처럼 대우조선해양 조선소로 출근했다. 1도크(선박을 만들어 바다로 내보내는 공간)에서 30만t급 원유 운반선을 만들고 있었다. 유씨는 원유를 저장하는 시설인 탱크톱 바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중간에 책상처럼 생긴 구조물이 있었다. 그몸을 숙여 그 안으로 들어갔다. 손에는 휘발성 물질인 시너가 든 통과 유언장이 들려 있었다.
유씨는 전날 준비해둔 철판 자재들로 입구를 막았다. 20여년 동안 용접 기술 하나로 버텨온 하청 노동자의 손놀림은 빠르고 꼼꼼했다. 사방이 다 막히자 그는 비로소 안도했다. 회사 측이 고용한 용역이 와도 자신을 끌어낼 수 없었다.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m밖에 되지 않는 좁디좁은 공간을 고른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용접하는 도중에 들키면 회사에서 전기를 내리고 저를 끄집어낼 거거든요."
함께 파업 중이던 동료들도 이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우리한테라도 미리 말하지 그랬느냐"라는 서운함 뒤에는 “몸을 펼 수 있는 공간이라도 만들어줬을 텐데"라는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 유최안씨의 키는 178㎝다. 동료들은 하나같이 안타까워했다. "그 친구가 몸이 커요, 하필이면." 1제곱미터에 불과한 공간에 갇혀있기에 더욱 크게 느껴지는 키였다.
동료 6명은 유씨가 있는 탱크톱 바닥으로부터 10m 위 난간에 올라가 고공 농성을 시작했다. 바닥에 자신을 가둔 유씨는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고 적은 종이를 밖으로 들어 보였다. 허공에 올라간 동료들은 "국민 여러분, 미안합니다. 지금처럼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고 적은 현수막을 내걸었다. 유씨가 고개를 꺾어서 위를 올려보면 고공 농성 중인 동료들이 그를 향해 소리치며 안부를 물었다. 무기한 점거 농성이 시작됐다. 지난 6월2일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이하 하청노조)가 노조활동 보장과 임금 30% 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간 지 21일 만이었다. 유최안씨는 하청노조 부지회장이기도 하다.
연일 폭염특보가 내려진 바닷가에선 덥고 습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건조 중인 선박에 깔린 철판도 열기에 달구어졌다. 유최안씨가 점거 중인 구역을 제외한 나머지 1도크에서는 여전히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람이 죽어도 일을 하는 곳이 조선소인데요, 뭐." 7월4일 오전 동료가 바꿔준 휴대전화 너머로 들리는 유최안씨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는 일부러 자신의 휴대전화를 놓고 들어왔다고 말했다. "가족들한테도 말하지 않았거든요. 알게 되면 전화해서 그러지 말라고 할 거니까." 그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점을 감안해 하루에 두 끼만 먹고, 기저귀에 용변을 보고, 한 시간마다 자세를 바꿔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직후인 1999년부터 용접 기술을 배웠다. 고향인 통영에서 조선소에 납품할 블록(조립된 철판)을 만드는 하청업체에서 일했다. 조선소 밖에 있는 하청업체들이 작은 블록을 만들어 조선소에 보내면, 조선소에서 이 블록들을 쌓아 큰 배를 만드는 식이었다. 당시에는 주문 물량도 많고 급여 수준도 만족스러웠다. 체감경기가 나빠진 건 2012년부터다. “작은 업체들이 문을 닫더라고요. 그때마다 임금을 떼였어요. 제가 옮겨 다니는 걸 안 좋아해서 계속 (같은 회사에서) 일했는데 결국에는 통영에 있는 웬만한 하청업체들이 다 문을 닫았어요." (기사 일부/출처/《시사IN》 2022.7.9. 거제·나경희 기자 didi@sisain.co.kr)
(2) 다양한 종류의 인문학 관련 책을 읽는다.
스피노자는 “이성의 지도에 따라 사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친교를 맺는 데 근거가 되는 욕망을 나는 덕성(hone-statem)이라고 부르며(…)친교를 맺는 일에 반하는 것을나는 부도덕(turpe)이라고 부른다."라고 말한다. 표면적으로 보기에 덕성이 지배하는 개인들 사이의 관계, 곧 적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이로운 관계는 진정한 친구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친밀감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스피노자의 유덕한 인간이 행하는 넓은 사회적 범위의 이성적 선의가 참된 우정의 형태가 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한 사람이 맺을 수 있는 친구의 수가 원칙적으로 꼭 적어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스피노자도 실제 자신이 말하는 관계의 확장에는 한계가 있고 모든 사람과 친구를 맺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한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그가 모든 사람과 친교로 결합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성에 따라 사는 사람이라면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진실하고 친밀한 친교를 맺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어쨌든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이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를 구축할 수 없는 사람들, 예를 들어 그럴 만한 지적, 물질적 자원이 없는 사람들(스피노자는 가난한 이들을 예로 든다.)의 경우, 그들의 삶을 개선하는 일은 “사회 전체의 몫"이 된다. 유덕한 개인의 관대함(도의심, 덕성)과 사회 전체가 수행하는 도움이나 자선 사이에 그런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스피노자식 친교에 실제로 더 깊고 친밀하며 개인적인 특징이 있음을 말해 준다.(스티븐 네들러 Think Least of Death 죽음은 최소한으로 생각하라, 민음사, 2022, p223)
(3) 체험을 꼼꼼하게 기록 정리한다
어릴 적부터 현재까지 살아온 장소(가정과 직장, 교회 등)를 중심으로 과거 행적 생각해본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과의 내용을 사건 중심으로 기록한다. 가능하면 육하원칙으로 현재까지 그렇게 정리한다. 여행 체험도 좋다.
(4) 가족이나 친구에 대해서 생각한다
트라우마나 무의식, 상처, 기쁨, 행복 등은 가족관계, 교우관계로부터 얻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찬찬히 살피는 것은 힐링의 유일한 길인 동시에 창작의 근원이다.
(5) 영화, 연극, 미술, 사진 등의 감상 기회가 있을 때 생기는 직감을 기억한다.
장르가 다르더라도 모든 예술의 창작품에는 주제에 대한 친연성이 있다. 이것을 감상할 때 직감되는 정서나 그 느낌을 적어두고 나중에 활용하면 좋다.
(6) 여러 사물의 존재 이유, 무수한 동식물의 삶에도 관심을 갖는다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모든 것에는 존재 이유가 있다. 동식물의 살아가는 것을 들여다보면 거기서도 인생이 보인다.
(7) 사람들의 언어에 관심을 기울인다
문학이 즐거움은 언어를 다루는 데에서 나온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언어를 통해 그들의 삶을 관찰하며 사유할 수 있다.
(8) 나는 이럴 때 창작 욕구가 일어난다.
4. 글의 형식과 행 가르기
시에서 산문과는 달리 율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관행이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서술문에서 볼 때 불필요한 행 가르기를 하죠. 현대시는 행 가르기를 포기한 산문 투의 시가 많습니다. 현대소설은 에세이적 방식을 많이 따릅니다. 산문이지만 분위기가 시문을 능가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같은 문장, 같은 내용일지라도 의도적으로 행을 바꿈으로써 형식이 다를 수 있습니다.
•시의 형식적인 모습을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 주로 행 가르기 연 가르기로 나타남. 문장 사이 내용의 간극이 큼
•수필의 형식은 어떤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행가르기를 하지 않음. 문장 사이 내용의 간극이 조멸한 편, 세부적인 장면묘사보다는 화자논평(화자의 사고, 인식의 세계) 을 중심을 하는 글.
•소설 형식은? 수필 형식과 비슷, 세부적인 장면 묘사에 집중. 화자는 서정이 아닌 서사행위에 초점을 맞춤.
행(行)과 연(聯)은 기본적으로 詩와 非詩를 구분하는 장르적 기준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행(行)과 연(聯)은 독자들로 하여금 어떤 하나의 언어뭉치가 시라는 장르로 인식하도록 하는 첫 번째 기준이 된다. 行과 聯이 있는 모든 언어형식은 詩라는 약속으로, 암호로 이해하도록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제시되는 이 언어의 뭉치는 시이니 시로 읽어 달라는 암묵적인 약속을 제공하는 것이 행과 연이라는 것이다.(이은봉-’행과 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 중에서)
※ 당부하는 말
이 수업과정이 지식이나 정보를 습득하는 시간이 되지 않게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수업과정은 여러분의 창작 생황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쓰지 않으면 여기서 얻을 것이 별로 없게 될 것입니다. 나보다 잘 쓰는 사람의 작품을 보고 배우려면 시중에 잘 팔리는 좋은 작품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할 일은 내가, 내 능력껏 써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보고 왜 잘 안되는지 이유를 찾아 고쳐나가는 것을 하는 겁니다. 그런 훈련의 과정을 몇 차례만 해도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하게 틀리고 고민할 겁니다만) 쓰는 일에 망설이지 마시고, 잘 쓰려고 너무 고민하지 마시고^^그냥 즐겁게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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