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평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이나 바로 만인의 이야기
수필문학] 11월 호를 읽고
오경자
(수필가·평론가)
11월은 가을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달이다. 신변의 이야기가 주된 글감인 수필을 쓰고 즐기는 수필가들은 가을이면 할 말이 유난히 많은 것 같다. 11월 호의 테마수필이 가을의 사유로서 그런지 편집자의 주문대로 가을에 대한 관념적 접근이 많은 것 같다.
박수민은 가을을 걸으며」라는 수필에서 가을에 대한 상념을 가을 구름에 얹어 주제를 형상화 시키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시간의 흐름을 타고 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존재라는 평범한 진리를 가을 구름을 보면서 깨닫는다. 그리고 영원과 그 나라를 상상해 본다. 가을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하고 마음에 풍성한 위로를 얻게 하는 좋은 계절이다.
최현숙은 11월의 이야기」에서 가을의 이모저모를 그려내면서 11월의 풍경은 맑고 선명한 수채화 물감을 붓끝에 찍어 섬세하고 곱게 그린 풍경화라고 표현하여 사경적 표현의 진수를 보여 주고 있다.
김순자는 이제는 잊혀 가는 새 쫓기의 회상을 통해서 가을을 생각한다. 그의「훠이 훠이는 6.25전쟁 중에 부모와 떨어져 할아버지 댁에서 지난 가을의 새 쫓기를 회고하는 평범한 이야기인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힘들지만 새벽 일찍부터 어른을 따라 나가 새를 쫓다가 보니 목소리가 커지고 소리를 지를 수 있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어느 날 인민군이삼촌을 잡으러 왔고 소꿉놀이하던 자신에게 삼촌의 행방을 묻자 놀라큰 소리로 울어 버림으로써 삼촌을 피신할 수 있게 해서 결국 삼촌을위기에서 구한 지난날을 회고하는 글의 구성이 정교하다.
인생 후반기를 살고 있는 지금도 곡식이 익어갈 무렵이면 ‘훠이 훠이' 새쫓던 어린 꼬마 아이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오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왜일까?
전쟁의 공포 부모님과 떨어져 할아버지 댁에서 지내는 것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 같은 것을 행간에 잘 녹여 넣어 독자를 애잔한 감상에 젖게 한다. 삼촌의 위기라는 반전으로 긴장감을 주고 또 극적 위기 극복의반전을 무리 없이 잘 엮어낸 회고담이 위의 결말에서 인생의 결실이라는 거대담론을 화두로 던지는 것으로 주제를 형상화한 점이 주목되는작품이다.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되 공감을 얻는 글이어야 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 수필은 문학작품이면서도 사회성이 강한글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자신의 체험을 글감으로 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또 한 편으로는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애환을대변하는 역할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영승은 자식으로부터 해방되기」에서 바로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도 가슴 촉촉한 작품을 빚어내는 데 성공했다. 가족이 변하고 전통적 가족관이나 역할, 관계 등이 급격하게 변화되고 무너지면서 엄청난혼란을 겪고 있는 요즘 세태를 잘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수필은 문제를 지적하거나 문제점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딱딱한 글이아니라 변하는 시대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해 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그려 나가고 있다. 명절이나 가족이 모여야 하는 날 예전의 풍습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상에서 젊은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태도는 바로 수필의 역지사지를 잘 살려주는 요소가 되어 주고 있다. 작가의 생각은 이런 것이 꼭 아랫사람을 배려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들도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자식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함이라는 표현으로 심지 깊은 주제를 잘 형상화시키고 있다.
헤어지기 전에 아내와 논의된 사항을 깜짝 공개했다. ‘다가오는 추석은 연휴가 길고 만난 지도 얼마 안 되니 우리 집에는 오지 않아도 좋다. 여행을 가든 처가에 가든 자유롭게 보내라.' 예상치 못한 선언에 어안이 벙벙했는지 아들딸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교 문화가 깊은 안동 지방의 우리 집안 정서에는 허용되지 않지만 설에도 기회 봐서 부부가 해외여행을 한 번 떠날 예정이다. 이 또한 자식들 편하게 해 주기 위함만은 아니며 그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하나의 묘안일 따름이다. 자신들의 생일이 든 주말에 콘도를 빌려서 자식들을 불러 모아 거기서 잔치를 하고 손주들의 재롱도 마음껏 즐기고 난 후 기막힌 선물까지 안겨 주면서 끝맺는 멋진 시아버지의 모습이다. 그 속에서 지금의 노년 세대는 깊은 울림을 경험한다. 이런 것이 수필의 아취라 하겠다.
100세 시대를 노래하는 요즘에는 어떻게 사느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어떻게 늙느냐 하는 일인 것 같다. 잘 늙는다는 것은 바로 잘 사는 일의 첩경이 된 지 오래인 것 같기도 하다. 한혜정은 오케스트라와 만나다」라는 수필에서 바로 그 해답을 자신의 체험으로 그려내고 있다.
평생 교직에 몸담아 오는 동안에도 열정적으로 여러 가지 학생 지도와 어머니 교실 운영 등으로 생활의 폭을 넓게 지닌 작가는 노년에 글쓰기와 만나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일에 만족하면서도 또 음악에 빠져들어드디어 오케스트라에 합류하게 되는 과정을 진솔하게 써 내려가고 있다.
이 수필은 작가의 체험을 그대로 쓴 내용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나도 해야겠다는 강한 의욕을 이끌어 내고 있다. 수필이 주는 유익성을 잘 감당하고 있는 작품이다. 재치 있는 문장과 강한 호소력을 지닌 한혜정의 필치가 노년 세대의 독자들에게 어떻게 여생을 살아갈 것인가의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젊은 시절에 교사 합창반주, 웨딩마치 등을 했던 그 실력이 다시 나오기를 바라면서 아코디언에 올인해서 당당한 실력을 키우고 싶다. ‘노력해서 안 되는 것은 없다.’는 것이 나의 신조다. 열심히 연습하여 ‘송년음악회 아코디언 오케스트라’에 자신 있는 모습으로 연주하고 싶다.아코디언 오케스트라와 만나게 됨은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을 것이다. 선택과 집중의 소용돌이에서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 놓친다.’는 속담같이 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혜정은 결말에서 노년을 활기차게 보내는 의의와 하던 일을 놓치면 안 된다고 하는 경구를 못 박음으로써 깊은 성찰을 함께 주제에 형상화시키고 있다. 수필의 요체 중에 역지사지는 매우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체험을 주된 글감으로 쓰는 글이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깊은 배려가 없으면 글이 메마르고 교만해지기 쉬워서 그렇다.
신영애의 어느 봄날의 기억은 바로 이 역지사지를 참 아름답게 은근히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산책 중에 우연히 만난 한 어린아이와의 이야기를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작가 역시 동심으로 돌아가 펼쳐내는 이야기는 마치 아름다운 동화 한 토막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할 정도로 감동적이다. 정감 있게 펼쳐나가는 문장이 유려하다.
박찬숙의 세 자매와 동행」은 요즘 가족관계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는 모계 중심의 새로운 가족관계가 주축이 되어가는 모습을 잘 보여 준수필이다.
수필은 내 이야기를 쓰는 것이지만 바로 만인의 이야기를 대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책장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