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구례 여행 -나눔과 온정 되새기는 운조루 고택, 천은사 상생의 길- 2023. 12. 23. 토.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기사
따스했다. 한겨울의 구례는. 2023. 12. 13(수). 전국에 한파가 몰아치기 전이었지만, 구례는 당장 노란 산수유꽃이 피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봄날 같았다. 구례가 더 따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온기 어린 오랜 미담들 때문일 것이다. 가진 자의 도리를 일깨워주는 [구례 운조루(雲鳥樓) 고택] 이야기부터 [함께]와 [나눔]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천은사 상생의 길]까지, 한겨울 추위도 녹일 만큼 훈훈한 이야기와 풍경이 기다리는 전남 구례로 떠났다.
◇250년 고택의 프롤로그
[아이~ 이게 뭐야? 쌀 뒤주 아냐?] [이게 굴뚝이라고? 축대 밑에 숨은 굴뚝은 처음 봤네!] 250년 고택의 내력을 잘 모르고 찾은 중년 여성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집 안을 구석구석 둘러본다. 토지면 오미마을 구례 운조루 고택(이하 운조루 고택)의 현 주인이자 문화 류씨 곤산군파 귀만와 종가의 9대 종부인 이길순(91)씨는 탐방객들의 이런 반응에 [편히 보라]는 듯 느린 걸음으로 자리를 비켜준다.
그의 뒤를 따라 옛날 부엌을 지나니 [ㅁ] 자 모양 안채의 네모난 마당에 아침 볕이 그득했다. 꽃잎이 다 떨어져 뼈만 남은 앙상한 목련 나무에도, 키가 들쑥날쑥한 장독대에도, 대청마루에 걸터앉은 종부의 얼굴에도 한겨울 귀한 볕이 들었다. 이웃 마을 양갓집 규수로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이 대가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는 종부는 어느덧 아흔 넘은 노인이 되어 이 큰 집을 지키고 있다.
[처음 시집왔을 적엔 시엄니랑 시누이는 이짝 따수운 안방에, 새색시인 나는 뜨시지도 않은 이 웃방에, 둘째네는 저그 저 끝방에 살았다]고 운을 뗀 이씨는 [난 잘 모르는디~]로 시작했지만, [6·25 때는 이 집의 도움을 받은 이웃들이 {여기는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막아줘서 다행히 집은 불타지 않았다]며 조선 시대부터 근현대사를 거쳐온 묵은 집 이야기를 쉬엄쉬엄 들려줬다.
■ 운조루의 상징이 된 뒤주
조선 시대 낙안군수를 지낸 류이주가 명당 중 명당 자리에 1776년에 완공했다는 구례 운조루 고택은 [경주 최부잣집] 등 몇몇 종가와 함께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즉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다. [들어오지 마시오] [하지 마시오] 등 [마시오(禁)]가 난무하는 요즘 세상에 너그러이 [해도 된다(能)]는 가르침을 담은 쌀 뒤주는 이 집의 상징과도 같다.
[다른 사람이 열어도 된다], 바꿔 말해 [누구나 쌀을 가져가도 된다]는 뜻의 [타인능해(他人能解)]라 쓰인 쌀 뒤주는 그 옛날 가난하고 굶주린 이웃들을 위한 [쌀 저금통]이나 다름없었다. 대대로 집주인은 쌀 두 가마니 반을 1년 365일 마를 날 없이 채워놓았고 쌀이 필요한 이웃은 누구든 뒤주를 열어 가져갈 수 있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1년에 36가마니가 넘는, 한 해 수확량의 20%쯤 되는 양이 이 뒤주를 통해 누군가에게 전달됐다. 뒤주는 어쩔 수 없이 쌀을 가져가야 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려 안채와 곳간 사이쯤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놓았다.
그러다 이 집 뒤주도 차츰 비어간다. 일제강점기 토지조사 사업으로 토지 대부분을 빼앗기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길순씨는 [집안 어른들 얘기로는 (하인을 둘 수 없는 시대가 되면서(신분제가 사라지며)) 하인들에게 땅을 일부 나눠주어 출가시키기도 했다]고 했다. 이웃을 지키고, 이 집을 지켜준 타인능해 뒤주는 현재 고택 부근 [운조루 유물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 숨겨진 굴뚝 찾기
고택은 처음에 70여 칸으로 지어졌다. 지금은 화재와 소실로 축소돼 60여 칸이 남아 있다. 운조루는 당호로 쓰이지만, 엄밀하게는 사랑채 누대의 이름이다. 중국의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 [구름(雲) 속에 새(鳥)처럼 숨어 사는 누대(樓)]란 뜻을 지닌 운조루에 앉으면 이 집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 오봉산이 기와 너머에 걸린다. 집 관리를 도맡은 막내아들 류정수씨가 찾아온 손님들에게 이따금 차 대접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아내 곽영숙씨는 [아침에 출근해 저녁까지 남편은 이곳에서 산다]며 핀잔을 주지만 이내 [이게 종손의 운명]이라고 했다.
뒤주와 함께 또 하나 찾아볼 만한 것은 집의 굴뚝이다. 축대 아래 구멍만 내어 놓았거나 집 뒤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어 일부러 찾아보아야 겨우 눈에 들어오는 숨겨진 굴뚝은 밥 짓는 냄새가 가난한 주변에 퍼지지 않도록 한 배려였다. 숨은 공간이 또 하나 있다.
류씨에 따르면 안채 깊숙한 곳에 있는 다락방은 바깥출입이 쉽지 않았던 시대에 집 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여인들을 위한 숨구멍 같은 힐링 공간이었다. 류정수씨 부부는 지금은 형편에 맞춰 시대에 맞는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일반 탐방객은 입구에 놓인 함에 입장료 1000원을 내면 누구나 집 안 곳곳을 둘러볼 수 있도록 사시사철 개방한다. 1000원은 노모인 이길순씨의 사탕 값. 이씨는 사탕을 사서 다시 소쿠리에 담아 탐방객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기도 한다.
류씨와 동선이 겹칠 땐 운조루에서 차 대접도 받을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월·수·목요일엔 한자·붓글씨와 논어·주역·불경 등 인문학 강의가 열리는데 대관료를 받지 않고 장소를 내어준다.
[고택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좋은 취지로 빌리는 것이라면 대관료를 받지 않는다]는 게 류씨의 설명. 운조루 고택 옆 한옥 마을에서 한옥 스테이를 운영하며 구례 문화관광 해설사로 활동 중인 부인 곽씨는 [어머님이 늘 넘(남)한테 베풀고 살라고 하시는데, 저희로선 베풀 수 있는 게 이 공간(운조루 고택)밖에 없으니 많이들 찾아주시라]고 했다.
■ 쌍산재 선비의 재능 기부
운조루 고택이 있는 오미마을엔 [곡전재]가, 차로 5분 거리 상사마을엔 [쌍산재]가 있다. 구례 3대 전통 가옥들이다. 운조루 고택이 세월에 그대로 녹아든 고택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면, 쌍산재는 잘 가꾼 정원을 품고 방문객을 맞이한다. 처마에 주렁주렁 매달려 겨울 볕에 말라가는 감, 곡식 널어놓은 채반, 소담스러운 무늬의 자수 방석 등이 눈을 즐겁게 한다.
종영된 예능 프로그램 [윤스테이] 촬영지로 널리 알려진 쌍산재에도 구휼미를 넣어두던 쌀 뒤주가 존재한다. 해주 오씨 문양공 성균 진사공파 26대손이자 현재 쌍산재의 주인 오경영 대표는 안채 한쪽의 뒤주를 보여주며 [운조루 뒤주처럼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선대 어르신들은 이곳 뒤주의 쌀을 누구든 빌려갈 수 있게 했다.
다만 [빌려갈 수 있게 했다]는 전제는 빌려가는 이의 자존심을 지켜주려는 것일 뿐, 갚는 이도 거의 없었고, 갚지 않아도 됐기에 결국 나눔을 위한 것이었다]라고 했다.
서당채의 이름인 쌍산재(雙山齋)는 그의 고조부인 오형순의 아호다. 오 대표는 [쌍산은 벼슬을 하지 않고 이곳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집안 자제들뿐 아니라 마을 아이들에게도 글을 가르치며 (재능 기부)를 한 인물)이라고 했다. 쌍산재 역시 격동의 세월에도 이웃들의 호위로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면 고즈넉한 운치와 함께 포근함이 묻어난다. 까치밥으로 놓아둔 대봉감 하나에도 인정이 스며 있다. 겨울에도 푸릇한 대숲을 지나 후문인 [영벽문]으로 가까이 가면 [사도리 저수지]가 네모난 문틀 너머로 차츰 들어온다. 서당채인 쌍산재도 좋지만, 최고의 힐링 명소를 꼽으라면 [경암당]이다.
쌍산재를 눈앞에 두고 대청마루에 앉아 편한 숨을 실컷 쉴 수 있는 공간. 입장료 1만원을 내면 커피나 매실차·생강차를 한 잔 내어준다. 알싸한 생강차 한잔을 들고 여유롭게 고택 구석구석을 둘러보거나 편히 앉아 쉬다 보면 시간을 잊게 된다. 한옥 숙박 체험도 가능하다.
■ 혼자보단 둘이 좋은 [상생의 길]
[상생의 길]이 있는 천은사도 가볼 만하다. 이름만 그럴싸한 게 아니다. 2020년 12월 11일 천은사와 환경부, 국립공원공단, 전라남도 등 8개 관계기관의 업무 협력 끝에 천은사 문화재 입장료 징수 폐지를 기념해 조성됐다. 천은사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제주도 [황지사]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곳.
지리산국립공원전남사무소 측은 [전국 최초 사찰과의 상생협력을 통한 불법 입장료 폐지 사례로 전국 사찰 문화재 입장료 징수 폐지의 단초를 제공한 의의를 기념하는 길]이라고 했다. 천은사 입구 소나무숲부터 천은저수지(천은제) 둘레길 등 총 3.3㎞는 코스에 따라 [나눔길] [보듬길] [누림길]이란 이름을 붙였다. 소나무향을 실어나르는 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수변길에 진입한다.
누림길은 무장애 탐방로로 조성돼 남녀노소 걷기 좋다. 거울 같은 저수지에 산그늘이 내려와 담기면 한 폭의 데칼코마니 작품이 따로없다. [이 길은 혼자보다는 둘이 좋다]고 속삭이듯 이따금 원앙 한 쌍이 날아와 풍경에 운치를 더한다.
■ 사성암 그리고 섬진강 대숲길
천은사와 함께 지리산을 품은 구례에는 화엄사, 연곡사 등 명찰이 포진해 있지만, 포기할 수 없는 구례 전망을 보려면 사성암으로 갈 일이다. 종교를 떠나 구례 여행에서 지나칠 수 없는 명소. 지리산 노고단 등산이 부담스러운 한겨울에 큰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탁 트인 전망과 마주할 수 있다. 주차장에서 셔틀(왕복 3400원)을 이용해 절 초입까지 닿는다.
의상·원효·도선·진각이 수도했다 해 사성암이라 불리는 암자는 기암절벽에 아슬아슬 기대어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전망대는 산신각인 [산왕전] 부근. 섬진강과 구례 평야, 지리산 주봉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섬진강을 두고 이 고장과 작별하기엔 아쉽기에 해 지기 전 서둘러 섬진강 대숲길로 간다. 대나무로 둘러싸인 벤치에 앉아 이른바 [죽(竹)멍]을 때리며 달려온 시간을 돌이켜본다. 문득 불어온 찬 바람에 주머니로 손을 쑤셔넣었다. 운조루 고택의 종부가 건네준 알사탕 하나가 동그랗게 말을 걸어온다. 잘살고 있느냐고.
■ 구례 먹거리-[퐅죽 먹을까? 조단해장국 먹을까? ] 구례5일시장 맛집
매월 3·8일로 끝나는 날이라면 [구례 5일 시장] 코스를 더하자. 구례 5일 시장 장날은 인구 2만4354명(11월 기준) 작은 고장의 이벤트와 같은 날이다. 이날만큼은 시장 내 상설 점포 157개가 대부분 문 열고, 구례군민으로 이뤄진 97개 노점상이 더해진다. 좌판엔 지리산 건나물과 월동 채소들이 깔린다. 여기에 2023. 5. 8개의 청년 점포가 개점됐다. 김선정 구례 5일 시장 상인회 사무장은 [먹을거리가 취약했던 구례 5일 시장에 청년 점포가 합세하면서 시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고 했다.
메뉴는 국수, 도넛, 호떡, 해장국, 닭 꼬치, 샌드위치, 핫도그, 산수유청 에이드, 새우튀김과 어묵 등 특별할 게 없어 보이지만, 김 사무장은 구례군민들 사이에선 대단한 이슈라며 연휴가 끼어 있을 땐 개점 2시간도 안 돼 재료가 동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그중 [조단해장국]은 개업과 동시에 구례 젊은 층 사이에서 [해장국 성지]로 단숨에 떠올랐다는 곳. 제주에서 8년 살고 온 젊은 부부가 소고기, 선지, 고사리 등을 넣어 끓인 제주식 해장국(일반 1만원)과 마라해장국(일반 1만2000원)을 선보인다.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 해장국의 양은 적당한 편. 육개장 같은 얼큰한 제주식 해장국 국물이 추위를 잊게 한다. [조단]은 주인이 그저 미국의 농구 황제 [마이클 조단(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을 좋아해서 붙인 이름.
상설 점포 중에선 [장터퐅죽]이 단골이 많다. [퐅죽]은 [팥죽]의 구례 사투리. 동지퐅죽(8000원)은 진한 팥죽에 새알 옹심이가 푸짐하게 들어간다. 뜨끈한 수제비(6000원)와 칼국수(6000원)도 이 집의 스테디셀러다. 장터에서 식사할 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할 것! 무장해제하고 있다간 여기저기서 터지는 [뻥튀기] 소리에 놀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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