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에 드리는 인사
내일부터 추석과 개천절을 포함해 6일간의 황금연휴가 이어지네요. 여러분 모두 즐겁고 뜻깊은 명절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설이나 추석이나 같은 명절이지만 추석은 풍요로우면서도 조상을 위하는 전통과 함께 가을이 지니는 계절적인 정서가 담겨있어 뭔가 경건하면서도 사색의 깊이를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제게는 유달리 가을을 타듯 추석 때가 되면 마음이 허전해지곤 했는데 성격 탓도 있겠으나 총각 시절 홀로 지낸 환경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들은 다 명절을 준비해서 가족들과 더불어 즐거운 시간을 갖는데 끼니를 해결하러 음식점을 찾아도 대부분 문을 닫고 휴업 중이니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가 없어 쫄쫄 굶은 채 처량하게 잠자리에 드는 심정을요.
이런 경험이 축적된 탓인지 저는 명절이 되면 즐겁게 지내는 분들보다 어렵게 지내는 분들을 더 생각하곤 합니다. 극소수겠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어도 건강이나 가족들 문제, 또는 개인적인 고민으로 명절을 명절답게 보내지 못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번 추석에 이런 어려움이 있는 분들도 어떤 형태로든지 마음의 위안을 얻으며 명절을 명절답게 보내실 수 있기를 간절히 빌며 홍콩에서 지낼 때 2002년 월드컵이 열리던 해의 추석에 썼던 <귀향과 귀성 그리고 망향>을 올립니다.
귀향(歸鄕)과 귀성(歸省), 그리고 망향(望鄕)
◇이번 추석에 남한의 4,700만 인구 중 3,800만 명이 고향을 찾거나 친인척을 찾아 나들이할 것이라고 한다. 전체인구의 약 80%가 움직이는 셈이다. 또 한 차례 나라가 발칵 뒤집히는 소동이 아닐 수 없다. 우리야 해마다 두 차례씩 일상으로 겪어야 하는 피치 못할 관례니까 어쩔 수 없겠지만 외국인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대단한 열성이요 극성이라고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살펴보아도 전체 국민의 절반 이상이 동시에 같은 목적으로 움직이는 일을 연례적으로 하는 나라는 어느 구석에도 없다. 이러한 민족의 대이동은 아마도 6.25 전란이 가져온 인구의 인위적인 이동과 경제성장에 따른 산업화과정에서의 도시화 현상에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이번 추석은 예년과는 달리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즐겁고 풍요로워야 할 한가위 명절이지만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피해를 입은 분들을 생각하면 즐거울 수만은 없는 게 이번 추석인 것 같다. 경제적인 피해도 사상 최대이거니와 복구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 곳도 있어 불편을 겪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예년에 비해 가을이 채 영글기도 전에 절기가 일찍 찾아왔고 연휴 기간도 가장 짧다. 제수를 마련하는 일이나 추석빔, 인사를 드려야 할 곳에 보낼 작은 정성이 담긴 선물을 마련하는 일도 만만치만은 않을 것이고 가고 오는 길의 교통 혼잡도 단단히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래저래 서민들이 마음 편히 지내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만은 않은 근자에 보기 드문 추석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명절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하던 바로 그 한가위가 아닌가? 사정이 어렵다고 마음마저 위축이 되어 명절을 암울하게 보낼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금년에는 신나는 일도 있었지 않은가? 월드컵의 열기에 열광하던 우리가 태풍 하나에 기가 꺾이고 주눅이 들어 주저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피해를 입은 수재민들은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를 갖고 피해가 없는 사람들은 마음을 나누어 이웃을 돌아보며, 조금 검소하게나마 명절은 명절답게 보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린 시절, 가난한 살림에 철모르는 아이들이 명절이라고 좋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천진한 꿈을 차마 깨뜨릴 수 없어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절기를 차리시던 그 깊은 정이 담긴 어버이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그때 보았던 잔잔한 웃음, 흐뭇해하시던 모습이 실인즉 무거운 한숨과 덜어지지 않는 근심 걱정을 감추고 계시던 어지신 마음이었음을.
지금 우리는 고향을 등진 채 너도나도 도시의 물결 속에 출렁이며 살고 있다. 우리가 떠나온 고향은 아직도 그 고향을 버리지 못한 우리의 어버이들에 의해 힘겹게 지켜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꿈과 추억이 젖어있는 어린 시절의 그 고향은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있을 것인가?
이미 우리의 어린 시절은 꿈같이 흘러가 버렸고 그 시절의 정다웠던 소꿉친구들은 지금은 누구의 어미 되고 아비 되어 이 나라 저 도시의 어느 구석에 안주하면서 더러는 낯선 나라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 향수를 잊지 못해 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 내 영혼이 느끼고 있는 이 외로움도 그 근원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세계 4대 교향곡 중에 신세계 교향곡이 있다. 원제(原題)는 ‘Symphony from the New World'로 드보르자크의 9개의 교향곡 중 제 9번 작품이다. 1892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국립음악원 원장으로 취임한 그는 객지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심한 노스탤지어(nostalgia-homesick)에 빠져 고생하던 가운데 이듬해인 1893년 이 곡을 작곡하여 그해 12월 15일 카네기 홀에서 뉴욕 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초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전체 4악장 가운데 호른으로 연주되는 제2악장 라르고의 선율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단독으로도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귀향(Going Home)이 바로 이 곡인데 가사 또한 우리 내면에 잠재해 있는 귀소본능을 자극하여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감미로운 내용으로 되어있다. 당시 신세계로 불리던 미국으로 건너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Going home, going home, I'm going home)’으로 시작되는 이 곡을 눈물을 흘리며 불렀을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잠시 생각해 볼 것은 귀향(歸鄕)과 귀성(歸省)이란 단어의 의미이다. 우리나라의 매스미디어에서는 예외 없이 고향을 찾는 사람들을 귀성객(歸省客)으로 표현하지 귀향객(歸鄕客)이라고 하지 않는다. 국어사전에는 귀향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으로 표기하고 있고 귀성은 ‘고향에 돌아가 어버이를 뵘’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영어로는 귀향은 ’Going Home'으로, 귀성은 ‘Coming Home'으로 표현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일년에 두 차례씩 온 나라가 들썩거리도록 요란한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이나 산업화(도시화)에 의한 인구이동의 원인도 있겠으나 즐거운 명절에 부모님을 비롯한 웃어른들과 친지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고자 하는 경로효친(敬老孝親) 사상이 아직도 이 땅에 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귀향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회귀본능에 의한 ‘고향찾기’라면 귀성이란 단어는 보다 인간적이며 가족적인 의미를 내포한 ‘고향의 품으로 돌아옴’으로, 우리가 명절에 고향을 찾는 사람들을 귀성객이라고 차별화해서 표현하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자랑할 만한 미풍양속이라고 단정해도 아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비록 혼잡하고 번거로운 행차가 되더라도 고향과 부모형제를 찾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번 설에 귀성객들이 아무 사고 없이 즐겁고 평안한 마음으로 고향에 다녀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잊지 않고 배려해야 할 것이 있다. 이번 추석에도 돌아갈 고향이 없는 실향민들의 심정이 어떠할 것인가 생각해보는 일이다. 고향이 없을 리야 없겠지만 타율에 의해 갈 수 없는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누구나 경험해본 일이겠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꼭 성공해서 돌아가야지’ 하면서 이를 악물고 버티며 견뎌냈던 어려운 고비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향은 그만큼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마음의 후원자요 절망의 늪에서 우리를 위로하며 거기서 헤어 나오도록 손을 잡아 이끌어준 인도자였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고향을 등진 것도 서러운데, 갈 수 없는 고향이라니.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심정은 다른 어떤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이요 아픔일 것이다. 남들은 조상의 묘를 찾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제사를 올리며 경건하면서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생사를 모르는 부모 형제들에 대해 제사를 올려야 하는지 올려서는 안 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과 애끓는 그리움을 무엇으로 다 표현하겠는가? 아직도 우리 곁에 풀어야 할 민족의 과제가 생생하게 버티고 있음을 보면서 이미 소식이 없는 채로 이승을 하직했을지도 모를 가족들에 대한 한 맺힌 그리움을 언젠가 고향 땅이라도 밟아보는 한풀이로나마 살아생전에 이루어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Sep 18(Wed), 2002.
홍콩에서
첫댓글 모두 행복한 명절이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회장님 댁내 두루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갖는 명절이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