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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기적들을 행하심
1-3절, 예수님의 전도 사역과 여자들의 섬김
[1절]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하였고.
예수께서는 각 성과 촌에 두루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그의 전도 사역은 전도자들의 사역의 본이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설교의 중요 주제이었다(마 4:17; 행 1:3). 세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이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고 그의 뜻을 거슬러 우상을 섬기고 음란하고 부도덕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왕권 즉 통치권의 회복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사람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요 3:3, 5). 그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와 선만 행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약교회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장차 천국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때에 그 곳에는 죄와 죽음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전도 사역을 하셨을 때 열두 제자들이 그와 함께하였다. 제자들의 첫 번째 임무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막 3:14).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들과 행하신 일들을 듣고 보고 배워야 했다. 제자는 선생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그 행위를 본받는 자이다. 그들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들과 행하신 일들을 증거할 증인들이 될 것이다. 오늘날 주의 제자들은 성경적 교회에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연구하며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과 함께 있는 길이다.
[2-3절]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예수님을 따르며 그와 그 제자들을 섬긴 자들 중에는 귀신 들림과 병들의 고침 받은 여인들이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이었다. 또 그들 가운데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도 있었다.
그 여자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다. 그 여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필요한 음식과 물건을 공급했을 것이다. 그들은 전도 후원자들이었다. 사람은 가치 있는 일을 위해 돈을 쓴다. 헌금은 주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표시이다(고후 9:13; 8:8). 자신을 죄와 지옥 형벌에서 건져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사랑하는 자는 즐거이 헌금할 것이다. 헌금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열매이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빌 4:17-18). 예수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6:21). 먹고 마시는 일이나 입는 일 등에만 돈을 쓰는 자는 땅의 것만 생각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돈을 쓰는 자는 하나님과 천국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각 성과 촌에 널리 전하셨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세상의 모든 나라의 각 도시와 마을에 널리 전파되어야 한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의 통치하심이 온 세상에 이루어져야 한다.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마가복음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둘째로, 열두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였다. 주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불러 자기와 함께 있게 하셨다(막 3:14-15).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내가 부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선지자로 부르셨었다(사 6:8). 주께서는 오늘날 목사들을 불러 사용하신다. 로마서 10:13-1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전도자의 직무는 충성된 자들을 통해 계대된다. 디모데후서 2:2,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오늘날도 예수님의 전도의 사명을 계승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야 한다. 또 그들은 전도하기 전에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히 교제해야 한다.
셋째로, 병고침을 받은 여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물질로 섬겼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십일조 제도를 통하여 레위인들에게 의식주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민수기 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또 하나님께서는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일조를 저축하여 레위인들과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로 먹어 배부르게 하기를 원하셨다(신 14:28-29). 예수께서는 주의 작은 종 하나에게 주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자에게 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마 10:40-42).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준 선교헌금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했다(빌 4:15-19).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던 여인들처럼, 우리는 교회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신실한 전도자들을 도와야 한다. 이 일은 확실히 천국에 보화를 쌓는 일이다.
4-15절, 씨 뿌리는 자의 비유
[4-8절]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귀머거리 외에는 들을 귀는 누구에게나 다 있다. 그러나 듣는 것은 단지 말의 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고 말의 뜻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있지 않다.
[9-10절]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비밀’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만 이 진리를 깨닫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제자들에게만 허락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것은 선택의 진리를 보인다. 그 진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제한적임을 보인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또 선택의 진리는 우리의 구원이 값싼 것이 아니고 값비싼 것임을 증거한다. 구원의 값은 계산할 수 없이 크다. 영생과 천국의 구원은 돈이나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주신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만 얻을 수 있다.
[11절]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설명하셨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씨는 신기한 물체이다. 씨 속에는 생명이 있다. 죽은 것 같은 씨가 땅에 심길 때 그 속에서 싹이 나서 자란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며 죽은 영혼들을 살리는 말씀이다. 물론, 성경에 증거된 대로,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복음 진리만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이 복음, 이 바른 성경 교훈만 생명의 씨이다.
[12절]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으나 마귀가 와서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아서 그들로 그 말씀을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은 그것을 빼앗기는 것이다. 구원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 마귀에게 빼앗기는 것이고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13절]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이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기분적인 믿음을 가리킨다. 그런 믿음은 뿌리가 없다. 즉 복음 진리에 대한 바르고 확고한 지식과 믿음이 없는 것이다. 일시적 믿음은 환난이나 시험을 이기지 못한다. 일시적 믿음을 가진 자는 잘못된 생각이나 이해의 부족으로 마음이 동요하고 믿음으로 인한 환난과 핍박을 이기지 못한다(마 13:21).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믿음을 가진 자만 시험이나 환난을 이길 수 있다.
[14절]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財利)와 일락(逸樂)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으나 지내는 중 세상의 염려와 돈과 육신적 쾌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를 가리킨다. 세상의 염려와 돈 욕심과 육신적 쾌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못하게 막는 가시와 같다. 생활의 염려는 우리 마음을 복잡하게 하고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신앙의 방해물이다. 돈 욕심도 신앙의 큰 방해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 6:24). 육신의 쾌락도 신앙의 방해물이다. 육신의 죄악된 욕망에 이끌려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죄이며 참된 생명에 반대된다. 물론 육신의 즐거움들 중에는 음식이나 운동이나 결혼 등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한 것도 있으나(전 5:18; 9:9), 우리는 그것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범위 안에서 절제 있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15절]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이다. 씨가 좋은 땅에 심어진 경우는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으므로(렘 17:9),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 이것이 구원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죄인이 구원을 얻어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인격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을 말한다(갈 5:22-23; 딛 2:14). 또 인내로 결실한다는 말은 말씀의 실천에 인내가 필요함을 보인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믿은 자는 그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할 것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과거의 죄악된 행습을 다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인격으로 날마다 변화를 받으며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지만, 하나님과 그의 계명을 순종함으로 맺는 거룩하고 선한 행실은 성도가 구원을 얻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산 믿음은 선한 행위로 증거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씨가 뿌려지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구원 얻지 못한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로 행하다가 멸망에 이르는 자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행하여 영생과 천국의 복을 누리는 자들보다 많다(마 7:13-14).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열매 없는 나무 같은 인생의 실패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씨의 문제가 아니고 땅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지 못하는 것은 말씀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의 마음의 문제이다. 성경에 계시된 복음 진리, 생명의 진리는 불변적이다. 교회는 오직 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문제가 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마음은 여러 종류가 있다. 그의 마음이 심히 어둡고 길같이 딱딱하여 도무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자들이 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확신이 없는 자들도 있다. 그런 자들은 시험이나 환난이 오면 넘어질 것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고 확신도 하지만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세상의 염려와 돈 욕심과 쾌락 사랑 때문에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다 구원 얻지 못하고 실패하는 자들이다.
셋째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만 열매를 맺는다. 좋은 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고 확신하고 오래 참고 행하여 열매를 맺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인생의 성공자이다. 물론 좋은 땅은 사람이 만들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요 6:44). 참으로 죄를 회개하는 것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믿고 확신하고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인내하며 그 말씀을 힘써 실천해야 한다.
16-21절, 등불의 비유,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옴
[16절]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침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등잔대, 등잔걸이]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과 같다(시 119:105). 빛은 어두운 세계를 밝히는 유익을 준다. 밤에 빛이 꼭 필요하듯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도 인생의 목적도 알지 못하는 무지와 부도덕의 어두움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무지와 죄악으로부터 구원을 얻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은 이 어두운 세상에 구원을 준다. 성도는 그 구원을 얻은 자들이다.
[17절] [이는]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없음이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몇몇 사람들을 위하여 은밀히 전해지는 내용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 데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음을 보이는 말씀이다. 보배로운 진리를 짓밟기 때문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말씀이 있지만(마 7:6), 예수님의 말씀들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해졌고 가르쳐졌던 것들이다. 요한복음 18:20에 보면, 예수께서는 공회에서 대제사장에게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전파되어야 할 말씀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적으로 주신 교훈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장차 온 세상에 알려져야 할 내용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이 진리를 땅끝까지 널리 전파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며 가장 큰 임무이다.
[18절]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이는]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빼앗길 것임이니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주께로부터 듣고 배운 말씀의 내용과 그 참됨을 이해하고 확신해야 한다. 히브리서 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있는 자’와 ‘없는 자’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믿음과 그 말씀을 행함에 관계된다고 본다. ‘있는 자’ 곧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고 그것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더 많은 은혜를 받을 것이지만, ‘없는 자’ 곧 지식과 믿음과 행함이 없는 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조차도 빼앗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막연한 지식만 가져서는 안 되고 바로 알고 믿고 행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가 되고 그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9절] 예수[예수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그 동생들’은 예수님의 친동생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천주교 학자들은 마리아가 예수님 외에 다른 자녀들을 낳지 않았고 여기에 ‘그 동생들’은 그의 사촌들을 가리킬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매우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주장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맏아들이라고 증거하고(마 1:25 전통본문; 눅 2:7), 또 그의 동생들의 이름을 열거한다(마 13:55; 막 6:3). 복음서들의 제한된 지면들에 그의 사촌 동생들의 이름까지 열거했다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런 생각이다.
[20-21절)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어떤 이가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영적 가족을 더 중시하셨다. 육신의 가족을 잘 보살피고 돌보는 것은 사람의 기본적 의무이다(딤전 5:8). 그러나 우리는 ‘내 가족’, ‘내 식구’라는 육신적 가족의 한계를 넘어 온 세상의 모든 믿는 자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거대한 가족 개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구원 얻은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큰 가족, 영원한 가족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의 몇 가지 성격을 교훈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 빛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인생의 갈 길을 보인다. 그것은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이다. 이 말씀을 통해, 사람들은 무지와 죄와 슬픔과 죽음에서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에로 구원을 얻는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공개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은밀히 전해지는 내용이 아니고, 만인들을 위해 공개된 내용이다. 성경은 그것을 사모하고 연구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진 책이며 교회가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하고 가르쳐야 할 말씀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실천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자’ 곧 그 말씀을 믿고 행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의 말씀은 막연한 이론이나 지식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믿고 실천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다(마 7:21).
넷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적이다. 주 예수께서는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다(21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가족들이 된다. 그들이 바로 신약교회이다. 그들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서로 사랑해야 할 형제 자매들이다. 그들은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도 영원히 거룩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자들이다. 교회적 교제는 영원한 교제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행하고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해야 한다.
22-25절, 광풍을 잔잔케 하심
[22-23절]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어느 날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갈릴리 호수를 건너실 때 잠이 드셨다. 그는 잠이 부족하시도록 바쁜 하루 하루를 보내셨던 것 같다. 또 그것은 그가 사람이심을 증거한다. 물론 그는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대로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한 참으로 사람이셨다(요 1:14; 딤전 2:5).
그때에 마침 광풍이 호수에 불어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하였다. 광풍의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자연적 현상일 수도 있다. 바람은 때때로 이리 불기도 하고 저리 불기도 하며 때때로 약하게 불기도 하고 강하게 불기도 한다. 또 마귀의 장난으로 광풍이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가 마귀의 존재를 믿는다면 마귀의 장난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가능하다. 세상의 자연 현상들이나 마귀의 장난들은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만 일어난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본문에 나타난 한 사실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탔는데도 광풍을 만났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어려운 일들이 많으며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도 그런 일들이 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있었듯이, 구원 얻은 성도들의 삶 속에도 어려운 일들이 많다. 때로는 큰 광풍 같은 일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생기는 모든 어려운 일들은 언제나 유익을 준다. 고난은 성도들에게 믿음과 겸손함과 거룩함의 유익을 주는 것이다.
[24-25절]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예수께서 광풍을 잔잔케 하신 사건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분명히 사람이셨으나 그 이상이셨다. 잠을 주무시는 자는 분명히 사람이시지만,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는 자는 분명히 사람 이상이시다. 사람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바람과 파도를 향해 명령하여 복종케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것은 사람의 능력의 한계 밖에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만 바람과 파도를 통제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 그 일을 하셨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와 목적이다.
광풍과 파도를 대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믿음 없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주여’라고 번역된 원어(에피스타타)는 ‘선생님이여’라는 말이다(KJV, NASB, NIV). 그들은 아직 예수님을 선생님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가? 여하튼 그들은 심히 불안해 선생님을 야단스럽게 불렀다. 예수께서는 깨어 일어나셨고 바람과 물결을 잔잔케 하신 후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책망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아직 믿음이 부족했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당황하고 믿음 없는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환난 중에 믿음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바랐어야 했다. 우리는 환난을 만날 때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가만히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일을 보며 믿음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며 기다려야 한다(출 14:13-14; 시 62:1).
그러나 믿음 없는 모습으로이긴 하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운 것은 당면한 문제의 해결이 되었다. 그들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은 그들을 도우실 수 있는 주님이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제거하실 수 있는 분이셨다. 과연 그는 그렇게 하셨다. 그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극악한 위기의 상황은 그의 말씀 한마디로 즉시 평온한 환경으로 변화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우리를 도우시며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시 46:1; 50:15).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행선했는데도 광풍을 만났다. 우리는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만나며 죽음의 위험이 있는 위기 상황도 만난다. 우리는 성도들에게 그런 환난들이 있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허락된 것이며, 우리에게 결국 유익을 줄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땅에 떨어진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광풍을 잔잔케 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바람과 물결을 명하여 순종케 하신 분은 결코 단지 사람이실 수 없다. 그는 사람으로 세상에 탄생하셨지만, 그 이상이시다.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한다.
셋째로, 이 세상 사는 동안 만나는 시험과 환난의 광풍을 대처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광풍을 만났을 때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실지 생각하며 그의 구원하는 손길을 기다리며 기대해야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모든 것을 그에게 의탁해야 한다(빌 4:6-7).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우리는 환난 날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눅 11:8; 18:7).
26-39절,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심
[26-27절]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가다라인](전통본문)28)의 땅에 이르러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오래](전통본문)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가다라’라는 마을에 한 귀신 들린 자가 있었다. 그 귀신 들린 자의 특징들은, 첫째, 옷을 입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단정치 않았다. 둘째, 그는 집에 거하지 않았다. 즉 안정이 없었다. 사람의 삶에 있어서 집은 휴식의 장소인데, 그는 그런 안정된 가정의 삶을 저버렸다. 셋째, 그는 무덤 사이에 거했다. 그는 죽은 자들과 함께 사는 자와 같았다.
귀신 들린 것은 정신적 연약과 이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정상적인 사람은 그의 이성이 그의 감정과 의지를 어느 정도 통제한다. 그러므로 말과 행동이 상당히 절제된다. 그러나 귀신 들린 것은 그러한 조절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이다. 귀신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영이다. 그것은 성경책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것은 거짓말하며 시기 질투하고 남을 미워하고 음란하고 돈을 사랑하는 영이다. 그것은 사람으로 매우 비정상적인 삶을 살게 만든다.
[28-29절] 예수를[예수님을]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그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불렀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다. 또 그는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하고 그에게 간구하였다. 28절뿐 아니라, 31절과 32절에도 그가 예수님께 간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귀신들도 예수님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예수님을 믿지 않으며 구원을 얻지 못할 뿐이다.
그는 힘이 셌고 사람들이 통제하기 힘들었다. 마태복음 8:28은 그가 심히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였다고 말하고, 마가복음 5:5는 그가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고 감정에 따라 행하는 매우 비정상적이고 불쌍한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다. 그가 그렇게 명령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도 귀신에게 그런 명령을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그런 명령을 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귀신들도 통제하신다. 귀신들은 그의 권세와 능력을 알고 있었고 인정하고 있었다.
[30-31절]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군대’라는 원어(레게온)(전통본문)는 로마 군대의 한 단위를 가리켰다. 그것은 수백 명의 기병과 5, 6천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많은 귀신이 들렸기 때문이다. 그는 보통 귀신 들린 사람과 달랐고 그래서 그렇게 무덤에 살며 사람들이 통제할 수 없이 사나웠고 크게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그 귀신은 무저갱(無底坑)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였다. ‘무저갱’(無底坑)이라는 원어(아뷔쏘스 )는 ‘밑바닥이 없는 곳’(Thayer) 곧 지옥을 가리킨다(계 9:1, 11; 11:7; 17:8; 20:1, 3). 지옥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영한 불’이다(마 25:41). 귀신들이 무저갱에 던지울 것을 두려워한 것을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장차 거기에 던지울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32-36절] 마침 거기 많은 돼지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예수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귀신 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마침 거기 많은 돼지떼가 산에서 먹고 있었다. 마가복음 5:13은 거기에 ‘거의 2천 마리’의 돼지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귀신들은 그 돼지떼에게 들어가게 허락하시기를 간구하였다. 그가 허락하시자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에게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돼지떼는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공의로운 재앙을 통해 악한 자를 징책하시고 사람들에게 세상 재물이 헛됨을 깨우쳐주신다. 사람에게 물질적 큰 손실이 있어도, 물질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삶이 허무함을 깨닫는 큰 유익도 있다. 실상, 귀신 들린 한 사람의 가치는 그 돼지 2천 마리의 가치보다 더 크다.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마 16:26).
사람들은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귀신 들렸던 자가 구원받은 것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와서 그 일에 대해 말하였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기적들은 은밀한 곳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들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이루어졌다. 성경은 그것들을 본 증인들의 증언들이다. 우리는 성경의 이 진실한 증거적 성격을 깨닫고 성경의 모든 내용들을 다 믿어야 한다.
[37-39절] 거라사인[가다라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가다라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지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도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지 못했다. 그들 속에는 메시아에 대한 갈망, 구원에 대한 갈급함이 없었다. 그러나 귀신 나간 사람의 태도는 동네 사람들의 태도와 달랐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귀신 들린 사람은 옷을 입지 않았고 집에 거하지 않고 무덤 사이에 거했고 힘이 세고 사나웠고 제정신이 아니고 비정상적이었다. 그는 불쌍한 세상과 사람의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거기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변했고 악화되었다. 이것은 다 죄의 결과이다. 죄인들은 불쌍한 존재가 되었다.
둘째로, 귀신들은 자기들이 장차 무저갱의 지옥에 던지울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사탄과 악령들은 지옥에 던지울 존재이다. 장차 악인들이 들어갈 지옥은 일차적으로 사탄과 악령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가진 분이시다. 귀신들은 예수께서 누구신지 알고 있었고 그의 신적 권세와 능력을 인정하여 그에게 무엇을 간구하였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에게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셨고, 또 귀신들의 간구를 허락하셔서 그들이 그 돼지떼에 들어가게 하셨다. 이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예수님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곧 우리를 위한 신적 구주이시다.
넷째로, 많은 돼지떼가 몰사하였다. 마가복음은 그 수가 약 2천 마리나 된다고 했다. 비록 돼지 약 2천 마리의 손실은 컸지만, 그 귀신 들린 자가 고침을 받은 것은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 불쌍한 사람은 고침을 받아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다. 사람의 가치는 참으로 크다. 사람의 생명의 가치, 그것도 영원한 생명의 가치는 천하보다 귀하다.
40-56절, 두 가지 기적
[40-42절]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회당장’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던 곳인 회당에서 가장 중한 책임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마가복음은 그가 많이 간구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자기의 외동딸이 죽어가고 있었을 때, 그는 자신의 자존심이나 체면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겸손히 예수님 앞에 엎드려 많이 간구하였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딸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간구는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의 표현이었다. 예수께서는 무리에 둘러싸여 그 회당장의 집으로 가셨다.
[43-44절]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뤼시스 하이마토스)[피의 유출]으로 앓는 중에 [의사들에게 그 가산(家産)을 다 허비하였으되]29)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혈루증은 피가 멈추지 않는 병이다. 그는 열두 해나 병과 싸웠고 병고침을 위해 재산을 다 허비했으나 병세는 더 악화되었다. 마가복음은 그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왔다고 자세히 썼다(막 5:26). 그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마 심한 열등감과 좌절감 속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오랜 고난을 통해 세상을 의지하고 바라는 마음 대신 하나님의 긍휼만 구하며 의지하는 겸비한 심령이 되었던 것 같다. 그때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고 그를 믿었고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님의 뒤로 온 것은 그의 열등감과 수치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예수님 앞에 나올 용기조차 없었다. 그는 그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었다. 마태복음은 그가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생각했다고 증거한다. 예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의 출혈이 즉시 그친 것이었다. 마가복음은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말랐다고 말한다. 12년 동안 누구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던 그 몸의 출혈이 즉시 멈춘 것이다. 불치의 병이 놀랍게 치료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진 분이심을 증거했다.
[45-4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전통본문)30)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누가 나를 밀었다 하시나이까?]3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힘을 내라](전통본문),3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다른 기적들과 같이 이 기적 사건도 많은 사람 앞에서 이루어졌고 많은 사람 앞에서 확인되었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행하신 기적들은 항상 그러하였다. 기독교 복음의 성격 전반이 그러하였다. 그것은 공개적이다. 복음은 많은 증인들의 증언들에 근거한 것이다.
당시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이 여자처럼 예수님을 알고 믿고 의지한 자만 그에게 나올 수 있었고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구원의 이치는 비슷하다. 죄인인 인생은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의지하고 그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구원을 얻는다.
[49-53절]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는 죽음을 잔다고 표현하셨다. 그것은 그가 그를 깨우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활의 소망 때문에 죽음은 잔다고 표현된다.
[54-56절]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헤 파이스)[소녀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은 주께서 아람어로 “달리다 쿠미”(전통본문)라고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그러자 그의 영(靈)이 돌아와 그 소녀가 곧 일어났다. 사람의 죽음은 그의 영이 몸을 떠나는 것이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그 영이 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었다. 마치 그 죽은 그 열두 살 소녀가 “달리다 쿠미”라는 그의 음성을 듣듯이, 그가 그 말씀을 하시자 마자 그 아이가 살아났다. 그는 즉각적으로 살아났다. 사람들의 생각에 불가능해 보였던 생명의 회복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으로 즉시 이루어졌다.
예수께서 부모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의 병이나 고쳐주고 죽은 자들이나 살려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일, 즉 사람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 그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눅 5:32) 또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代贖物)로 주시기 위해(마 20:28) 오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세상의 불행한 일들과 그 원인인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통당하는 한 여인을 고쳐주셨고 회당장의 열두 살 외동딸을 살려주셨다. 이 일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증거한다. 세상에서, 인류 역사 속에서 신적 구주 예수님 외에는 이런 일을 한 자가 없었다.
둘째로, 이 두 가지 기적 사건은 믿음으로 구원 얻는 구원의 이치를 증거한다. 모든 불행한 일들의 근본적 원인은 죄요 그 결과는 죽음과 지옥 형벌이다. 그러나 열두 해 혈루증 환자와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신과 딸의 구원을 얻었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 롬 3:20-24). 사람은 종교적 고행이나 도덕적 선행으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엡 2:8-9).
셋째로,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 나아와 엎드려 많이 간구했고 열두 해 혈루병을 앓는 그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다. 그들은 다 그들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께로 나아와 간구하였다. 그들은 다 예수님을 믿었고 겸손히 그에게 간구하였고, 문제의 해결을 얻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 구하는 자들이 문제의 해결을 얻는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에게 기도하고 기도하는 자는 문제의 해결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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