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위치: 유럽중부
인구: 84,204,033명 (2022년 추계)
수도: 베를린
면적: 357,104㎢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독일 연방 공화국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기후: 대륙성기후, 해양성기후
민족 구성: 게르만족(92%), 터키인(2%), 기타
언어: 독일어
정부/의회형태: 연방공화제 / 다당제&양원제
종교: 로마가톨릭(34%), 개신교(34%), 이슬람교
화폐: 유로 (€) 환율계산기
국화: 수레국화
대륙: 유럽
국가번호: 49
GDP: USD 4,211,635,000,000
인구밀도: 235명/km²
전압: 230V / 50Hz
도메인: .de
독일과 한국과의 관계
▶ 외교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교류·교민 현황
요약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가운데 하나. 자동차와 철·강철 제품을 수출한다. 1871년 비스마르크가 통일 독일제국을 건설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패배 후 많은 영토와 모든 식민지를 잃었다. 히틀러가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유발되었다. 히틀러는 600만 명의 사람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다. 1949년 동서로 분할되었다가 1990년에 통일되었다. 현재 EU 회원국 간의 결속을 통해 서유럽과의 정치적·경제적 통합을 지향하고 있다.
수도는 베를린이다. 국민의 대다수는 게르만계이다. 공식 언어는 독일어이고, 종교는 그리스도교(프로테스탄트교, 로마 가톨릭교도 이외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가 있다. 통화 단위는 유로(#128/€)이다.
영토의 북쪽은 대개 평평하고, 동쪽과 중부지역은 구릉지대이다. 남쪽 지방은 바이에른 알프스 산맥이 솟아 있다. 라인강 분지가 독일의 중부와 서부 지역을 차지한다. 그 외 엘베 강과 다뉴브 강, 그리고 오데르 강이 있다. 독일은 주로 서비스업과 제조업에 기반한 발전된 자유 시장경제 체제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자동차와 철·강철 제품을 수출한다.
국가의 수반은 대통령이고, 정부 수반은 수상이다. 상하 양원 의회는 연방제도의 중심이다.
게르만 부족들은 켈트족을 몰아내면서 BC 2세기경에 독일로 들어왔다. 로마인들은 그 지역을 정복하는 데 실패하였고, 그 지역은 AD 9세기에 카롤링거 왕조의 분할로 정치적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이 군주국가의 통치력은 약했고, 정치 권력은 점점 더 귀족들에게 이양되었으며, 봉건국가 형태로 조직되었다.
군주제는 10세기에 색슨족이 지배하면서 다시 부활되었다. 그리고 게르만과 이탈리아 북부에 중심을 둔 신성로마제국이 되살아났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로마 가톨릭교 교황 사이의 계속된 갈등은 결국 제국의 멸망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것의 해체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의해 가속되었다.
종교개혁은 독일과 유럽을 프로테스탄트와 로마가톨릭 지역으로 분리되게 하였고, 30년 전쟁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독일의 인구와 국경은 대폭 줄어들었고, 많은 봉건 제후들은 사실상 완전한 통치권을 얻었다. 1862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러시아에서 권력을 잡고, 1871년에 독일을 통일하여 독일제국을 건설했다. 독일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1918년에 해체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독일은 많은 영토와 모든 식민지를 빼앗겼다. 독일은 독일제국 당시의 많은 영토와 모든 식민지를 잃었다.
1933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가 되었다. 그는 나치 당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국가인 제3제국을 설립하였다. 히틀러는 전세계를 제2차 세계대전에 휩쓸리게 하면서 1939년에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그는 600만 명의 유대인과 수백만의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하였던 홀로코스트에 대해 책임이 있었다.
1945년 전쟁의 패배에 따라 연합국은 독일을 4개로 분할하여 점령지역을 통치했다. 독일의 재통합에 대한 소비에트 연방과의 의견 불일치로 인해, 독일은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주의공화국(동독)의 분단국가가 되었다. 전 수도였던 베를린은 분리된 채로 남았다. 서독은 경제적 번영을 이룬 의회민주주의 국가가 되었고, 동독은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는 1당 체제 국가가 되었다. 1952년 독일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ECSC)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고, ECSC는 유럽연합(European Union/EU)의 전신이 되었다.
동독 공산주의 정부는 1989년에 평화롭게 무너졌고, 독일은 1990년에 재통일되었다. 통일에 대한 초기 행복감이 사라진 후, 전 동독을 정치적·경제적으로 연방공화국에 통합시키기 위해 부유했던 이전 서독 사람들은 무거운 재정적 부담을 감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은 EU 회원국 간의 결속을 통해 서유럽과의 더욱 깊은 정치적·경제적 통합을 향한 움직임을 계속했다.
자연환경
남북 최대 거리는 북위 47∼55°사이의 약 850km이고, 독일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동서 최대 거리는 동경 6∼15°사이의 약 640km이다. 동·서로 접한 이웃 국가들처럼 북쪽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높아지는 지형학적 특징을 보인다. 지리학적으로 북독일평야·독일중앙고원·남부산악지방 등 3지역으로 구분된다. 독일의 북쪽 1/3 정도를 차지하는 북독일평야는 북쪽 해안에서 시작해 오레 산맥까지 펼쳐져 있다.
이 지역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브레멘·함부르크·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 이외에도 베를린·작센안할트·브란덴부르크·니더작센 주의 대부분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서북부로 이루어졌다. 대체로 빙하시대 동안 빙하가 녹으면서 형성된 이 지역은 거대하게 뻗어 있는 해안 평야로부터 완만하게 기복이 진 구릉지대, 수림지, 호수 습지, 황무지 등으로 이어지는 지형적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 지역의 평균고도는 해발 100m가 채 되지 않는다.(빙하작용)
또한 이전에는 철이 많았으나 현재는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이와 같은 조건들은 이곳의 많은 강·운하와 함께 이 지역의 부를 이루는 데 기여했다. 엘베 강과 베저 강이 내륙 해항인 함부르크와 브레멘을 통과하여 흐르며, 유럽 최대의 내륙수로인 라인 강은 인구가 밀집되고 고도로 공업화된 루르 지방에서 바다로 나가는 통로가 된다.
국민
독일어를 쓰는 민족들은 민족적 기원이나 정치적·문화적 유산 면에서 서로 매우 이질적이다. 1871년 최초로 통일된 독일 국가인 독일제국이 수립되기 전까지는 여러 가지 방언을 가진 언어, 약간의 문화적 유사성, 혼란스러운 정치적 제휴 등으로 매우 느슨하게 결속된 형태에 불과했다. 이때에는 어떤 의미로든 독립국가의 지위 혹은 국민적 의식을 형성할 만한 동족간의 결속 정도는 아주 미약한 수준이어서 분명히 프랑스나 영국 같은 형태의 단일민족 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늘날의 독일은 대체로 독일제국의 핵심이었던 로마 제국의 게르마니아와 카롤링거 왕조 하의 동프랑크 왕국의 영토 대부분에 걸쳐 있지만 민족적·언어적 하위구분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경계선을 초월하게 된다.
로마 시대와 중세 초기부터 6개의 주요 독일 민족집단이 역사적으로 각각의 지역을 고수해왔다. 이 6개의 민족에는 서남부의 바덴·슈바벤 지역의 알마만족, 남부의 바이에른족(티롤족이 그 지파에 속함), 중부의 오버프랑크족, 현재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니더프랑크족, 현재의 튀링겐·작센·작센안할트 주의 작센족, 유틀란트 해안 근처의 섬들과 니더작센 주의 프리지아인 등이 있다.
9세기에 서쪽의 식민지화가 시작되면서 생겨난 민족집단은 메클렌부르크족·오버작센족·브란덴부르크족·슐레지엔족·포메른족·프로이센족, 발트 해 독일인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소수민족 집단은 중세 초부터 독일 서부에 거주해온 유대인과 엘베 강 동쪽의 식민지화된 지역에 원래 살고 있던 슬라브인, 그리고 17세기 말엽 프랑스에서 개신교도들을 박해하여 독일 땅으로 들어오게 된 위그노들이다. 비교적 근대에 독일로 들어온 소수민족 집단으로는 폴란드인, 10월 혁명 후에 이민 온 러시아인, 동유럽에서 온 수많은 '난민',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발칸인 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입된 이민 노동자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독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는 와중에서 노동력 수요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터키, 발칸 반도,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출신의 이민 노동자가 대거 유입되었다. 독일 통일 전 동독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외국인 노동자의 영구 이민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표면상 교육 및 훈련 목적으로 약 9만 명의 노동자가 베트남·앙골라·쿠바·모잠비크 등지에서 입국했다.
현재 독일내의 이민 노동자는 독일 전체 인구의 약 6%를 점하면서 실질적인 비독일계 소수민족 집단을 이루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 내 그리고 동·서독간 독일계 민족의 이주사도 특기할 사실이다(인구이동). 전후 중유럽·동유럽 각국에서 1,200만 명이 넘는 독일계 민족이 추방되어 독일로 밀려들어왔으며, 연합국에 의해 동·서독으로 분단된 후 수년 동안 동독 주민 약 200만 명이 서독으로 이주해 서독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동독 주민의 서독 이주는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생기면서 중단되었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1990년 독일이 통일되면서 동독 주민들이 더 잘 사는 서독 지역으로 대거 이주했다.
2015년 이후 이주해 온 100만 명이 넘는 난민이 독일의 노동력에 통합되고 있으나, 이는 난민정책 찬반 등과 맞물려 독일사회에서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독일의 인구는 저출산과 고령화 등의 영향으로 2002년 이후 줄곧 내리막을 걷다가 2011년부터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여 2017년 까지 많은 수의 인구가 증가했다. 인구는 2023년 기준 8,446만 7,586명이고 인구밀도는 240명/㎢이다. 이는 독일 정부에서 추진한 난민수용 정책으로 인해 약 100만 명이 넘는 외부 인구가 유입된 결과이기도 하다. 15세 이하 인구가 전체의 13%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체 인구의 75%가 도시 거주자이다.
언어
독일의 방언 구분은 한때 각 방언들이 시사했던 민족적·문화적 구별을 위해 매우 중요했다. 대중교육과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방언간의 차이가 표준화·균일화되고, 독일에서의 국내 이동과 함께 잘 교육받고 사회적 지위 이동이 빠른 젊은 계층에서 '사투리 어조가 없는' 표준 독일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지만 각 방언은 지금까지 계속 남아 있다. 현재 방언들은 농촌지역 인구와 도시의 토박이 거주자들 사이에서 사용된다.
표준 독일어는 기원으로 보아 일종의 혼종어로서,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방언 요소에서 파생되었으면서 북부 독일 지역에서 우세한 방언들의 음성적 특성을 갖고 있다. 표준 독일어의 발음은 사실 사람들이 임의로 절충하여 쓰게 되면서 19세기 후반에는 보편적으로 통용되었다.
3가지 주요 방언 지역은 북독일평야, 독일중앙고원, 남부산악지방 등으로 분류되는 주요 지형학적 지역과 거의 동일하다. 각 지역의 방언은 북쪽으로부터 순서대로 저지 독일어, 중앙 독일어, 고지 독일어 등으로 알려져 있으며 각각 다시 수많은 지역 방언들로 세분된다.
문화와 예술
동·서독으로의 정치적 분단기에도 독일의 문화적 예술적 전통은 동질적이었다. 독일어권 국가들에서 작가나 화가·작곡가·극작가는 동독 여권을 갖고 있든 서독 여권을 갖고 있든 같은 독일인일 따름이었다. 문학·예술에서 '도이치'라는 형용사는 지금도 정치적 국경과 전혀 무관하다. 같은 독일 문화의 전통 속에 있으므로 이를테면 오스트리아인 구스타프 말러도 '독일' 작곡가이고, 스위스인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도 '독일' 극작가인 것이다. 그러나 40년간의 분단으로 동·서독 두 지역의 문화생활에 어느 정도의 차이가 불가피하게 생겨났다.
두 지역 모두 독일 전통 문화의 길을 걸었지만,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영향을 보다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던 서독이 더 세계화되었다. 그러나 동독은 놀라울 정도로 전통 문화를 잘 보존하는 한편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분단기에 동·서독간에 음악 분야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고 문학·연극에서는 약간 다른 반면 건축과 조형 분야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 것은 주목할 만하다. 독일문학의 전통은 8세기 이전에 시작되었다.
훗날까지 큰 영향을 미친 초기 설화문학에는 〈니벨룽겐의 노래 Nibelungenlied〉(1200∼10경)와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파르치팔 Parzival〉(1200∼10경)이 있다. 일반적으로 18세기의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를 독일문학의 전성기로 꼽는데,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한 고트프리드 폰 헤르더, 프리드리히 실러 등이 이 시기의 주요 작가들이다. 그후의 작가들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아르투르 슈니츨러, 토마스 만, 프란츠 카프카, 베르톨트 브레히트, 헤르만 헤세 등도 세계 문학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분단 독일에서의 전후문학 역시 중요한데,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로 하인리히 뵐, 귄터 그라스, 야코프 렌츠, 우베 욘존, 지그프리트 렌츠, 안나 제거스, 아르놀트 츠바이크, 크리스타 볼프 등이 있다.
또한 독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와 작곡가들도 많이 배출했다. 바흐 가문, 루트비히 판 베토벤, 요하네스 브람스, 리하르트 바그너 등이 이들에 속한다. 주목할 만한 현대 작곡가로는 한스 베르너 헨체, 고트프리트 폰 아이넴,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등이 있다.
베를린 교향악단, 뮌헨 교향악단, 밤베르크 교향관현악단, 슈투트가르트 실내관현악단 등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주단이다. 라이프치히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라이프치히에 있는 장크트토마스 합창단, 테너 성악가 페터 슈라이어 등의 음악적 명성은 세계적으로 높다. 공연예술에서는 뷔르템베르크 주립극장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세계적으로 돋보이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 발레단은 남아프리카 태생의 존 크랑코의 지도하에 세계적인 명망을 얻었으며, 1973년 그가 죽은 후에도 마르시아 하이데의 지도하에서 명성은 계속되었다. 안무가 피나 바우슈의 〈춤의 무대 Tanztheater〉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무용이 부퍼탈에서 시작되었고, 함부르크 발레단은 세계 발레의 활기찬 구심점이 되고 있다.
뛰어난 시각예술의 전통은 15, 16세기의 알브레히트 뒤러, 대(大)루카스 크라나흐, 홀바인가(家) 등으로부터 막스 베크만, 게오르크 그로츠 등의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과 요제프 보이스, 안젤름 키퍼 등으로 이어진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오늘날의 독일 건축의 많은 부분은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바우하우스 학파의 창작품으로서, 발터 그로피우스와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인물들과 관련되어 있다.
장식성에 대한 강한 경멸은 물론 스타일과 기능의 엄밀한 조화와 소재의 내적 미를 고집하는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현대 도시 건축에서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독일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1919∼33) 시대에 황금기를 맞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서독이 자신의 장기를 영화에서 찾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20∼30년대 초에 독일 영화를 이끌었던 프리츠 랑, 에른스트 루비치, F. W. 무르나우, G. W. 파프스트 등의 거장들에 이어, 제3제국(나치 독일) 치하에서 깊이 빨려 들어간 진부함의 수렁에서 독일 영화를 구해낼 만한 거장이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으며, 1917∼45년에 독일 영화의 제작 중심지로서 포츠담 교외의 바벨스베르크에 있었던 거대한 영화제작소인 우니베르줌영화사(UFA)도 동·서독의 분단으로 동독에 떨어졌다.
마침내 1960년대 후반에 알렉산더 클루게, 폴커 슐뢴도르프,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 베르너 헤르초크, 빔 벤더스와 같은 젊은 영화 감독·제작자들이 나타나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상업적으로도 성공함으로써 독일에 영화 강국이라는 명성을 다시 안겨주기 시작했다. 독일의 겉과 속을 조망하는 열기를 낳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비상한 작품 세계는 그가 1982년 요절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한편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 마리안네 로젠바움, 헬마 잔더스 브람스 등의 여성 감독이 현대 독일 영화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
박물관은 약 2,000개에 이르며, 전시품들은 회화·조각이나 고고학·과학 분야의 세계적인 소장품에서부터 슈투트가르트의 카드놀이 박물관에 있는 카드와 같은 소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주목할 만한 박물관·미술관으로는 베를린의 프로이센 문화재단이 운영하는 것으로 슈프레 강의 '박물관 섬'에 있으며 엄청난 양의 고전·중동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을 비롯해, 알테스('옛') 박물관, 노이에스('새') 박물관, 국립미술관, 보데 박물관 등이 있다.
또한 드레스덴의 츠빙거 박물관 및 고트프리트 젬퍼가 설립한 회화미술관, 뮌헨의 알테('옛') 피나코테크, 노이에('새') 피나코테크 및 독일박물관, 뉘른베르크의 게르만 국립박물관, 마인츠의 로마게르만 중앙박물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젠켄베르크 자연과학박물관, 슈투트가르트의 주립 화랑이 유명하다.
독일에서 레크리에이션은 하나의 산업을 이룰 정도는 아니더라도 독일인의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전통적인 종교 축제일과 공휴일의 휴무, 40시간이 채 안되는 주당 평균 노동시간, 3∼6주의 유급 휴가 등으로 독일인들은 서유럽의 어느 나라 국민들보다 많은 여가를 누린다. 레크리에이션의 형태에서는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공존하는 특징을 보인다. 놀랍게도 고도로 공업화된 국가임에도 로마 가톨릭교 지역과 개신교 지역을 가릴 것 없이 옛 축제나 풍습이 지금도 광범위하게 남아 있다. 남부지역의 '파싱'과 라인란트의 '카르네발'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부활절·성탄절·오순절(모두 국가공휴일임)과 로마 가톨릭교 지역의 성체성혈대축일·성모승천대축일 등의 종교 축제일 외에도, 지역마다 포도주 축제, 맥주 축제, 추수 축제, 사냥 축제와 같은 오랜 역사를 지닌 민속제가 널리 행해진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매년 9월에 열리는 뮌헨의 '10월 축제'이다. 이처럼 전통에 충실한 한편으로 독일인들은 보다 현대적인 레크리에이션과 오락, 휴식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고, 여행이 으뜸가는 소일거리로 등장했다.
적어도 연중 한 번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성인의 절반을 넘고, 연중 몇 차례나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아주 많다. 노인들은 공휴일 여행 외에도 흔히 휴식과 건강 회복을 위해 온천으로 요양을 떠난다. 여행의 즐거움을 위해 해외로 떠나는 독일인들도 나날이 늘고 있다. 서독 지역에서는 여가 활동비가 가구당 소득의 약 1/5에 이르며, 정부와 학교·교회·기업이 여가 선용에 필요한 시설을 제공하고 자극을 준다.
현재 여가 활동은 교육·직업훈련·주택·건강보험·장애보험·연금과 마찬가지로 사회복지 정책의 중요한 요소로 여겨지고 있다.
역사
게르만족은 북유럽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서 가장 늦게 자리 잡아 로마 이전 청동기 시대에 처음 문명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세기에 게르만족은 남부 스칸디나비아와 북독일에서 남쪽, 동쪽, 서쪽으로 진출하여 동유럽의 이란인, 발트족, 슬라브족을 비롯하여 갈리아의 켈트족과 만나게 되었다. 게르만족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이들과 접촉한 로마 제국에서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고, 어원론이나 고고학상의 발굴을 통해서도 관련된 자료들이 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의 푸블리우스 큉크틸리우스 바루스 장군이 게르마니아(로마인들은 대체로 라인강에서 우랄 산맥에 이르는 영토를 이렇게 불렀다.)를 침략하였는데, 이 시기에 게르만족은 부족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로마식 전술에도 익숙해졌다. 서기 9년에 바루스가 이끄는 3개 로마 군단이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케루스키족 족장 아르미니우스(헤르만)에게 전멸 당하였다. 이로써 라인강에서 도나우강에 이르는 오늘날의 독일 땅은 로마 제국의 지배권에 편입되지 않았다.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를 쓴 100년경에 게르만족은 라인강에서 도나우강에 이르는 선을 따라 모여 살았는데, 이들이 살던 땅은 오늘날의 독일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남부 바이에른, 서부 라인란트 지방에서는 로마 속주가 설치되었다. 3세기에는 알라마니족, 프랑크족, 카티족, 작센족, 프리지아족, 시캄브리족, 투링기족 등 규모가 큰 서부 게르만 부족이 나타났다. 260년경에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 국경와 다뉴브강 국경선을 넘어 로마 영토 안으로 들어왔다.
800년 12월 25일에 샤를마뉴는 카롤링거 제국을 세웠으나, 843년의 베르됭 조약으로 나라는 세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그 가운데 한 부분인 동프랑크 왕국이 962년에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져 1806년까지 존속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는 북쪽의 아이더 강에서 남쪽의 지중해 해안에 이르렀다.
오토 왕가의 치세(919년 ~ 1024년)에 로타링기아 공국, 작센 공국, 프랑켄 공국, 슈바벤 공국, 튀링엔 공국, 바이에른 공국이 합방하였으며, 962년에 독일 왕이 이들 지역을 지배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잘리어 왕가 치세(1024년 ~ 1125년)에 신성 로마 제국은 북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 지방을 흡수하였으나, 서임권 분쟁으로 말미암아 잘리어 왕가의 황제들은 권력을 잃었다. 호엔슈타우펜 왕가 치세(1138년 ~ 1254년)에 독일의 제후들은 슬라브족이 사는 남쪽과 동쪽 지방으로 영향력을 넓혔는데, 전부터 이들 지방과 동방 식민지(오스트지들룽)에는 독일의 정착지가 있었다. 북독일의 도시들은 한자 동맹의 일원이 되어 번영하였다. 1315년의 대기근이 일어나고 뒤이어 1348년 ~ 1350년 사이에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독일의 인구는 급감하였다.
마르틴 루터
1356년에 나온 금인칙서는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할 때까지 제국의 기본 헌법이 되었다. 금인칙서에서는 강력한 공국이나 주교령을 다스리는 선거후 일곱 사람이 황제를 선출하도록 규정하였다. 15세기부터 제국에서 선출된 황제 제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독차지하였다.
1517년에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출간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관습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마르틴 루터의 파문, 보름스 국회 심문, 농민전쟁, 에라스뮈스와의 ‘자유 의지론’을 둘러싼 논쟁을 통한 인문주의와의 결별 등을 거쳐 분리된 루터교회는 1530년 이후 독일 내 여러 나라들의 공식적 교회가 되었다.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종교 분쟁으로 30년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독일은 황폐화되었다. 독일에 있던 나라들의 인구는 30% 정도 줄어들었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독일의 종교 전쟁은 종식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수많은 독립 공국으로 갈라졌다. 1740년부터 합스부르크 제국와 프로이센 왕국간의 대립이 독일 역사의 주요 양상으로 나타난다. 1806년에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하였다.
독일 연방 1815–1866.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하고 1815년에 빈 회의가 소집되었으며, 39개 주권국의 느슨한 연맹체인 독일 연방이 성립하였다. 왕정 복고를 놓고 이견이 나타나면서, 통합과 자유를 요구하는 자유주의 운동이 발흥하는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메테르니히는 이러한 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하였다. 독일 관세 동맹(Zollverein)은 독일 내 여러 나라들의 경제 통합을 크게 진전시켰다. 이 시기에 여러 독일인들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경도되었으며 민족주의가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당초 검은색, 붉은색, 황금색은 독일 민족주의 운동의 상징이었으나, 나중에 독일 국기의 색이 된다.
유럽의 1848년 혁명으로 프랑스에서 공화정이 성립하자, 독일의 지식인들과 평민들도 혁명을 일으켰다. 처음에 군주들은 혁명주의자들의 자유주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황제 칭호를 받았으나 권력을 잃자 왕위를 거부하고 헌법을 제한하여 일시적으로 혁명 운동에 제동을 걸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와 자유주의 세력이 강해진 의회는 1862년에 군제 개혁을 놓고 갈등하였다. 왕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프로이센의 총리로 임명하였다. 비스마르크는 1864년에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덴마크를 무찔렀다. 1866년에는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하여 비스마르크는 북독일 연방을 창설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과거 독일의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여타 독일 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게 되었다.
비스마르크
1871년에 독일 제국이 사상 최초로 독일의 통일을 이룬 근대 국가가 되었는데, 이 가운데 프로이센 왕국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무찌르면서 1871년 1월 18일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가가 독일 제국 전체의 황제를 겸임했으며, 수도는 베를린이었다. 독일 제국은 오스트리아 외의 독일의 모든 지방을 통일하였다. (소독일주의) 1884년부터 독일은 유럽 바깥 지역에 식민지를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의 통일 이후 그륀더차이트 시대(창설 시대)에 독일 제국은 수상 비스마르크의 지도로 타 열강들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중 삼중의 비밀 외교로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독일은 영국, 프랑스 등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해외 식민지 쟁탈 경쟁에도 뛰어들지 않았다. 대신 독일은 "식민지 대신 화학을"이라는 슬로건처럼 뒤늦게 산업 혁명을 추진하여 산업 국가로 거듭났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독일은 내부 모순 및 문제에 직면했으며 이 내부 문제는 노동조합과 독일 사회민주당을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활발한 운동으로 표면화되었다. 뒤이어 황제로 등극한 빌헬름 2세는 유럽의 다른 열강처럼 제국주의 정책을 내세워 이웃 나라들과 마찰을 빚었다. 이 때문에 이전에 독일이 맺고 있던 거의 대부분의 동맹이 갱신되지 않았으며, 새로운 동맹에서는 독일이 빠졌다. 특히 프랑스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영국)과 영국 협상(Entente Cordiale)을 맺고 러시아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확보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관계를 맺은 것 외에 독일은 점차 고립되었다.
독일은 자국 영내를 벗어나 유럽 열강들이 벌이고 있던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를 나눠가지기로 합의하였다. 독일은 독일령 동아프리카, 독일령 남서부 아프리카, 카메룬, 토골란드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여러 영토를 확보하였다. 아프리카 쟁탈전으로 열강 사이에 긴장 상황이 벌어졌으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데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914년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살해당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동맹국 측에 섰던 독일은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손꼽히는 이 전쟁에서 연합국에 패배하였다. 전쟁 중 독일군 전사자는 2백만 명에 이른다.[6] 1918년 11월에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빌헬름 2세와 독일의 모든 제후가 폐위되었다. 그해 11월 11일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이 끝났으며, 독일은 1919년 6월에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전통적인 전후 외교 방식과 달리 당시 협상에서는 패전국인 동맹국이 배제되었다. 독일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이 다른 수단을 통한 치욕스러운 전쟁의 연속으로 여겨졌으며, 조약에서 규정한 가혹한 조건 때문에 이후 나치즘이 발흥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은 공화국으로 선포되고 왕정이 무너졌다. 그러나 권력 투쟁은 이어졌는데 급진 좌익세력이 바이에른에서 권력을 잡았지만, 독일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독일 혁명은 1919년 8월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공식 출범하면서 끝을 맺는다. 1919년 8월 11일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이 바이마르 헌법에 서명하면서 헌법이 발효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가혹한 화의 조건을 강요받은데다 마침 대공황까지 닥쳤으며, 불안정한 정부들이 세워지고 무너지기를 거듭하자 독일 사람들은 점차 의회 민주주의 정치 체체와 주류 정당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극우 세력(카톨릭, 국가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까닭은 정부 전복을 원하는 자들 때문이라는 소위 등 뒤의 칼 찌르기 이야기(Dolchstoßlegende)를 퍼뜨리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바이마르 정부의 수뇌부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독일 민족을 배신하였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스파르타쿠스단과 같은 급진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평의회 공산주의(Räterepublik)를 지지하며 "자본주의 지배"를 철폐하기 위한 혁명을 원하였다.
새 바이마르 정부에 대한 불만 때문에 독일 공산당이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여러 보수주의자들은 반동적이거나 혁명적인 극우로 쏠렸는데, 그 가운데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있었다. 1932년에 공산당과 나치가 의회 다수(1932년 7월 기준으로 총 296석)를 차지하였다. 여러 내각이 실패를 거듭한 끝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별다른 대안이 없음을 알고 우익 고문들의 압박으로 1933년 1월 30일에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한다는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이 불길에 휩싸였으며 뒤를 이은 비상 법령으로 시민 기본권이 폐지되었다. 의회에서 수권법이 통과되면서 히틀러는 무제한적인 입법권을 부여받았다. 이때 사회민주당만이 반대표를 던졌는데, 독일 공산당 의원들은 이미 투옥된 상황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으로 모든 반대 세력을 무너뜨리고 몇 달도 안되어 중앙집권적인 전체주의 국가를 세웠다. 군사 재무장에 역점을 두어 산업이 회생하였다. 베르사유 조약 당시 독일은 자르와 라인란트를 잃었는데, 1935년에 독일은 국제 연맹이 관리하던 자르 지방을 되찾았으며 1936년에는 라인란트 팔츠를 군대로 장악하였다.
히틀러
군사 재무장과 더불어 독일의 외교 정책은 더욱 공격적이고 확장적인 방향을 취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독일은 1938년과 1939년에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각각 점령하였으며,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였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 1939년 9월 1일, 독일 국방군은 폴란드에 9월 작전을 개시하여 폴란드는 순식간에 독일과 소련의 붉은 군대에 점령당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독일과 여타 추축국은 유럽 대륙의 상당 지역을 장악하였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였다. 같은 해에 일본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기습하였으며, 일본과 동맹을 맺은 독일은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독일 군대는 소련 영내로 신속히 진군하였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황이 뒤집혔다. 이후 독일군은 동부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1943년 9월에 독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독일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하면서 독일은 새로운 전선을 감당해야 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역시 서부 전선을 열면서 2차 대전의 전환점이 되었는데, 독일은 얼마 안되어 패배하였다. 1945년 5월 8일, 붉은 군대가 베를린을 점령한 뒤 독일군이 항복하였다. 이 전쟁에서 독일인 군인 및 민간인(중앙유럽의 독일계 인구도 포함하여) 7백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7]
독일 제3제국은 나중에 '홀로코스트'라고 불린 대학살을 통하여 수많은 반대 세력과 소수 집단을 직접 탄압하기 위한 정책을 실행하였다. 홀로코스트로 1,700만 명이 살해당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유대인 600만 명, 집시와 폴란드인, 소련의 전쟁 포로를 비롯한 러시아인,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적 반대 세력 상당수도 있었다.[8]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의 학살로 유럽에서 죽은 사람의 수가 4천여 만 명이 넘는다.[9] 전후 나치의 전쟁 범죄를 심판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다.
1945년의 분할 점령된 독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수많은 독일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독일은 오데르-나이세선 동쪽 영토를 잃고 옛 동부 영토와 다른 지역에서 독일인 1,500만 명이 추방되었으며, 독일 여성 2백만 명 이상이 강간당하고, 여러 주요 도시가 파괴되었다. 남은 영토와 베를린은 연합국이 4개 군사 점령 지구로 분할하였다.
1949년 5월 23일에 독일 영토 가운데 프랑스, 영국, 미국이 통제하는 서방측 지구가 통합하여 서독이 들어섰으며, 같은 해 10월 7일에 소련측 지구는 독일 민주 공화국이 되었다. 주로 두 나라를 각각 '서독'과 '동독'으로 칭하였으며, 베를린 역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갈라졌다. 동독은 동베를린을 수도로 삼았으며, 서독의 경우는 본이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서독은 두 나라로 갈라진 당시 상태가 언젠가는 종식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으므로 수도 본의 지위를 임시적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서독은 "사회 시장 경제" 체제와 더불어 연방제 의회 공화국 체제를 수립하였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1950년대 초부터 서독은 장기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1955년에 서독은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였으며, 1957년에는 유럽 경제 공동체에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동독은 동구권에 속한 나라로 바르샤바 조약과 붉은 군대 점령군을 통하여 소련의 정치/군사적 통제를 받았다. 동독은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긴 하였으나 권력은 공산주의 세력인 독일 통일사회당(SED)의 정치국원들이 독점하였다. 이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거대한 비밀 정보 기관인 슈타지와 그 밖의 여러 통일사회당 하부 조직을 통해 사회 전반을 통제하였다. 그 대신 국가는 싼 값에 대중의 기초 생활 필수 재화를 제공하였다. 동독은 소련식 계획 경제 체제를 세웠으나 나중에는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에 가입하였다. 동독에서는 주로 동독의 사회 보장 제도의 이익과 더불어 서독이 언제든 침공할지 모른다는 내용을 선전하였으나, 동독 시민 절대다수는 서방의 정치 자유와 경제 번영을 부러워하였다. 동독인이 서독으로 월경하지 못하게끔 막고자 1961년에 건설한 베를린 장벽은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
1981년 될른제에서 동독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를 만난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 1970년대 초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동서독간의 대립이 어느 정도 완화되었는데, 이 정책에는 독일이 2차 대전에서 영토를 잃은 사실을 사실상 인정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1974년 FIFA 월드컵에서 서독과 동독이 동반진출한 바도 있었다.
1989년 5월 2일, 헝가리가 철의 장막을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8월 23일에 국경을 개방하자 9월 11일에 동독인 수천 명이 헝가리 국경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하였다. 이 사건이 동독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동독 당국은 11월에 뜻밖에도 국경 제한을 해제하여 동독 시민들이 서방을 다녀갔다. 당초 동독은 자신이 국가로서 계속 존속할 수 있게끔 통제 정도만 조절하기 위한 의도로 국경 개방 조치를 단행하였으나, 이 일로 말미암아 동독에서 벤데 개혁이 가속화되었으나 결국 1년 뒤인 1990년 9월 12일에 2+4 조약으로 귀결되어 전후 당시 독일을 점령하던 4개국은 항복 문서에 따른 자신들의 권리를 폐기하고 독일에 완전한 주권을 돌려주었다. 덕분에 1990년 10월 3일에 독일은 재통일을 이루었으며, 옛 동독에서 새로이 편성된 다섯 주가 독일 연방공화국에 귀속되었다.
1994년 3월 10일에 의회에서 가결한 본-베를린 법에 의거하여 베를린은 통일 독일의 수도로 지정되었으며, 본은 연방 도시(Bundesstadt)라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고 일부 연방 부서가 이 곳에 남았다. 정부 기관 재배치는 1999년에 완료되었다.
그러나 통일 이후 고물가, 실업 증가, 시장경제 환경으로 인하여 옛 동독 사람들의 부적응과 같은 여러 문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재통일 이후 독일은 유럽 연합과 북대서양 조약기구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독일은 발칸반도에 평화 유지군을 파병하고,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일원으로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이러한 파병을 놓고 논란이 일어났는데 전후 독일은 국내법에 따라 국방 기능을 위해서만 군대를 운용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외 파병은 이러한 국방 제한 규정에 저촉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 사안에 관하여 의회에서는 표결을 통해 평화 유지를 위한 참전을 합법화하였다.
종교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개신교가 탄생한 곳이기도 한 독일은, 개신교도가 전체 인구의 약 1/2에 이른다. 로마 가톨릭교도는 인구의 약 1/3을 차지하고 있다. 라인란트팔츠·바이에른 주에서는 로마 가톨릭이 우세한 반면 북부의 경우 대부분이 프로테스탄트이다. 이슬람교와 동방정교회 교도들도 약간 있다.
독일과 한국과의 관계
외교
한국과 독일의 공식 외교관계는 1883년 11월 26일 한· 독수호조약 13관(款)과 선후속약(善後續約)의 체결로 시작되었다. 1880년대는 조선이 서구 열강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시기로 독일은 경제적인 필요에 따라 조선과 유대관계를 쌓아나갔다. 이 무렵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이홍장의 추천으로 해관(海關) 및 외교 고문으로 등용되었고, 1896년 4월에는 독일무역상사 세창 양행이 금성·당현의 광산채굴권을 허가 받았으며, 1898년 9월에는 독일어를 교육기관인 관립 덕어학교가 설립되었다.
한·독수호조약 체결 이후 점차 발전한 양국 관계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독일공사관이 폐쇄되면서 공식적으로는 단절되었다. 그러나 비공식 교류는 계속 이어져 1927년 영친왕이 유럽 여행길에 힌덴부르크 원수를 접견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회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했고 적지 않은 한국 학생들이 유학차 독일로 건너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동·서 냉전은 독일과 한국 모두에게 민족 분단의 시련을 안겨주었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의 통일이 선포되기 이전의 한·독 관계는 분단 국가가 가지는 국제 정치적인 조건과 제약 속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1949년 11월 동독과 북한이, 1955년 12월 서독과 남한이 각각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서독과 한국의 우호관계는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으로 이어졌고, 1967년 3월에는 서독의 뤼브케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4개월이 조금 지난 7월 8일 중앙정보부가 흔히 '동백림(東白林) 사건'으로 불리는 이른바 '동베를린 거점 북한 대남공작단 사건'을 발표하면서 양국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어갔다. 이 사건의 처리를 둘러싸고 한국 정부의 안보 우선주의와 서독 정부의 인권 중시 태도가 충돌해 양국 사이에 상당한 긴장과 반목이 조성되었으며,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한국에 대한 인식이 크게 악화되었다.
양국간에 의견차가 쉽사리 좁혀지지 않자 서독은 정경 분리의 원칙에 입각하여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이후 양국은 특사 교환을 통해 1969년 2월부터 1970년 8월 사이에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석방하거나 감형하기로 의견을 일치시켜 예정되어 있었던 차관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한편 1970년 2월에는 신태환 통일원 장관이 독일을 방문해 동·서독의 분단상과 통일 노력을 시찰했고, 1972년 11월에는 <한·독 비자면제협정>과 <한·독 재정원조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독일이 한국에 3,500만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했다.
한편 남·북한간 외교전은 남·북한 국가 원수의 독일 방문에서도 나타나, 북한 김일성 주석의 동독 방문(1984. 5. 29∼6. 2)에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이 각각 1986년, 1989년에 서독을 공식 방문했다.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이 참석해 50년 만의 여야간 정권교체를 축하했으며, 같은 해 9월 15일에는 로만 헤어초크 독일 대통령이 방한해 김대중 대통령과 한·독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 관계가 '최상의 협력 관계'임을 확인하는 한편, 한국 정부의 개혁 추진과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독일의 지원과 협력을 다짐했다.
2000년대에는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하여 양국의 우호협력관계 증진 및 문화외교를 수행했으며, 2011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방문하여 투자, 교역, 신재생에너지, 남북문제, FTA 등 양국 간 협력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2011년 11월에는 한-독 통일자문위원회가 창립되었고, 2014년 9월에는 한-독 통일외교정책자문위원회 설립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2017년 7월에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참가하여 공식 방문하고 메르켈 총리와 북핵을 둘러싼 한반도 주변 상황과 양국 간 우호 관계에 대해 집중 논의했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독일은 한국의 14위 수출국이며,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 내에서는 2위 수출국이자 1위 수입국이다. 2011년 한국과 유럽 연합의 FTA가 잠정 발효된 후 대독일 수입이 꾸준히 증가해왔다. 한국의 대독일 주요 수출품 중 하나는 선박이었으나, 선박 시장의 불황으로 인해 한동안 수주 가뭄을 겪어야 했다. 2021년 기준 한국의 대독일 수출품으로는 자동차, 건전지 및 축전지, 반도체, 자동차부품, 합성수지 등이며, 수입품으로는 자동차, 농약 및 의약품, 계측제어분석기, 자동차부품, 정밀화학원료, 기계요소 등이다. 2021년 기준 한국의 대독일 수출액은 111억 989만 달러이며 수입액은 219억 9,634만 달러이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독일과 한국의 관계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매우 이채롭다. 일찍이 초대 주독 명예영사를 지냈으며 홍콩에 상사를 설립하고 1884년 제물포에 세창 양행을 설치한 E. 마이어는 상사를 통하여 한국 물품을 수집해 1889년 함부르크 산업박람회에 전시했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일반적인 이름이 된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분도회 총원장 N. 베버의 저서명이며, 같은 분도회 선교사로 1908∼29년 한국에 머물렀던 A. 에카르트는 <한국어 문법 (Koreanische Konversationsgrammatik)>, <한국 미술사(Geschichte der koreanische Kunst)>, <한국의 음악(Koreanische Musik)> 등을 펴내고 뮌헨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침으로써 독일 내 한국학 연구의 초석을 놓았다.
일제강점기에 독일은 비자 없이도 유학할 수 있는 나라였으므로 많은 한국 학생들이 독일에 체류하며 연구활동을 벌였다. 그들은 대개 자연과학/철학/예술 등을 전공했기 때문에 우리 문화나 역사를 본격적으로 소개할 수는 없었으나, 유학 기간 동안의 생활 속에서 한국 문화의 면면을 전해주었음은 충분히 짐작된다. 이의경의 경우는 특기할 만한데, 1928년 뮌헨대학교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이내 문필활동에 들어가 한국을 배경으로 한 다수의 작품들을 발표했으며, 만년에는 한학과 한국 문학을 강의하며 바우어 같은 우수한 동양학자들을 육성하기도 했다. 1946년 출판된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sst)>는 지금도 독일 교과서에 실려 있는 독일 문단의 가작이다.
한편, 1968년 설립된 주한 독일문화원 (Goethe-Institut) 에서는 독일과 독일의 문화, 고전음악과 문학을 알리고 양국 간의 문화교류를 지원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독일과 한국의 100여 대학들은 파트너쉽이 체결되어 있어 학술교류도 활발하다. 2021년 기준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재외동포는 4만 7,428명이며,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독일 국적의 등록외국인은 2,404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