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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위치: 아라비아반도 북동부
인구: 42,530,884명 (2023년 추계)
수도: 바그다드
면적: 434,128㎢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이라크 공화국 (Republic of Iraq)
기후: 사막건조성기후
민족 구성: 아랍인(75%), 쿠르드인(15%), 터키인
언어: 아랍어
정부/의회형태: 과도정권 / 단원제
종교: 이슬람교(97%), 그리스도교(3%)
화폐: 이라크 디나르 (ID)
국화: 장미
대륙: 중동
국가번호: 964
GDP: USD 223,258,000,000
인구밀도: 90명/㎢
전압: 220~230V / 50Hz
도메인: .iq
이라크와 한국과의 관계
▶ 외교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 교류·교민 현황
요약
아시아 서남부 지역에 있는 국가. 지형은 중부·남동부에 걸쳐 있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충적평원지대, 북부의 알자지라 고원지대, 서부·남부의 사막지대, 북동부의 고원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국민은 아랍계와 소수의 쿠르드족으로 구성되며,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공용어는 아랍어이고 화폐 단위는 이라크디나르이다. 세계 2위의 석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 1932년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했으며, 현대에 들어 주변 열강의 세력 다툼과 쿠웨이트를 비롯한 인접 국가들과의 갈등,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수도는 바그다드이다. 국민은 대다수 아랍계와 소수의 쿠르드족으로 구성된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종교는 이슬람교 가운데 시아파가 대다수를 이루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있다. 화폐 단위는 디나르(dinar)이다.
이라크는 지형적으로 크게 4개 지역으로 나뉜다. 중부 남동부 지역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충적평원지역,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북쪽에 위치한 알자지라 고원지대, 전 국토의 40%가량을 차지하는 서부 및 남부의 사막지대, 북동부의 고원지대이다.
세계 2위의 석유 매장량을 보유한 국가이며, 천연가스도 상당량 매장되어 있다. 농업 또한 이라크 경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단원제의 과도정부이고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다.
고대에는 메소포타미아로 불린 이 지역은 수메르, 아카드, 바빌론을 포함하는 세계 최초의 문명 발상지이다. BC 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었다. 그 후 이 지역은 파르티아와 로마, 그 다음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7세기에 아랍 이슬람교도들에게 정복되었고, 1258년 몽골족이 정복할 때까지 여러 이슬람 왕조들이 통치했다. 오스만 제국이 16세기에 정복하여 통치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 점령(1914~18)당했다. 영국은 1921년에 이라크 왕국을 건설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다시 점령했다(1939~45). 전쟁 후 군주제가 부활되었으나 1958년 혁명이 발발하여 다시 무너졌다. 군사 쿠데타가 계속되다가, 1968년 사담 후세인이 이끌던 사회주의 바트당이 정권을 잡고 전체주의 통치를 시작했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과 1990~91년의 페르시아 만 전쟁은 여러 도시들의 파괴와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1990년대 이라크에 취해진 유엔의 금수조치로 경제는 쇠약해졌다. 21세기에 들어서는 금수조치의 효과가 퇴색되었고, 이라크 전쟁 중이던 2003년 바트당은 정권을 잃었다.
자연환경
주로 저지대로 이루어진 이라크는 고도가 300m를 넘는 경우가 드물고, 450m를 넘는 지역은 전국토면적의 15%가 채 안 된다. 지형적으로는 이라크 중부와 남동부에 걸쳐 있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충적평원지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북부에 자리잡은 알자지라 고원지대, 서부와 남부의 사막지대, 북동부의 고원지대 등 4개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국토의 거의 1/3을 차지하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충적평원지대는 기복이 적으며, 자연 배수가 잘 안 되어 소택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평원 북쪽의 메마른 고원지대 알자지라에는 높이가 1,500m 이상인 신자르 산맥이 있다. 이라크 서부와 남부 지역은 전체가 광대한 사막지대로, 국토면적의 2/5를 차지한다. 서부 사막은 와디야라고 하며, 고도는 485m를 넘어선다. 남부 사막의 서쪽에는 와디·언덕·침강지대 등이 있으며, 동쪽에는 덤불식물로 뒤덮인 모래사막이 있다. 국토의 약 1/5을 차지하는 북동부 고원지대는 대부분 산악지대와 저지대 사이의 점이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강수 유형도 지형과 마찬가지로 북서부 유형과 남동부 유형으로 나누어져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연간강우량이 약 400㎜에 이르는 반면, 남서부 사막은 100㎜ 미만에 그친다. 고원지대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곳은 연간 강우량이 1,000㎜가량 된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은 여름에 매우 더우며, 강 부근 지역은 다습한 기후를 나타낸다. 삼림지대는 무제한적인 방목과 집중적인 벌목으로 전국토면적의 1/20로 줄어들어 대부분 강 주변에 있다. 산악지대 남서쪽에는 다년생 덤불과 키 작은 관목으로 이루어진 스텝 지대가 있으며, 건조지대로 갈수록 가시나무나 다른 내염성 식물들이 눈에 띈다. 강 하류 부근의 알쿠르나 아래쪽에 있는 소택지에는 갈대, 키 큰 목초, 사초 등이 우거져 있다.
이라크는 석유매장량이 세계 제2위의 국가로 이란-이라크 전쟁과 페르시아 만 전쟁(1990∼91) 전인 1980년에는 세계에서 제2위를 차지하는 석유수출국이었다. 페르시아 만 부근에도 유전이 있지만 주요유전은 북부지역에 위치하며, 천연 가스도 상당량 매장되어 있다.
국민
아랍인과 아랍화된 주민들이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은 전체 인구의 3/4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소수민족 중 인구가 가장 많은 쿠르드족은 이라크 전인구의 1/5가량으로, 여전히 자신들의 고유 언어를 사용하며 북동부 고지대에서 거주하고 있다. 터키인들과 투르크멘족들은 지역 아랍인들과의 혼혈로 인해 아랍화되고 있다.
공식어는 아랍어이지만, 쿠르드어와 터키 투르크멘 등의 방언들도 같이 쓰인다. 이슬람교도가 인구의 95% 이상을 차지하는데, 이슬람교도 가운데서도 시아파가 대다수를 이룬다. 이라크는 중동에서 시아파가 대다수를 이루는 유일한 나라이다. 이라크의 시아파는 아랍인과 소수의 투르크멘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슬람계 주민 가운데 나머지를 흡수하는 수니파는 아랍인·터키인·투르크멘족·쿠르드족으로 이루어진다. 그밖에 그리스도교·야지디교·만다야교·유대교·바하이교 같은 종파도 있다.
2023년 기준 이라크의 인구수는 4,253만 884명이고, 인구밀도는 93명/㎢이다. 전체 인구 중 40% 이상이 15세 미만이며, 15-64세는 56%, 65세 이상이 4%로 분포한다. 인구의 약 7/10이 도시에 거주한다. 출생률은 중동에서도 높은 편인 반면 사망률은 비교적 낮다.
언어
이라크의 공용어는 아랍어와 쿠르드어이다. 미국의 영향 아래 제정된 2005년 이라크 헌법 제4조(언어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의회, 내각회의, 법정 등에서는 아랍어 또는 쿠르드어로 이를 진행하여야 한다. 공보는 반드시 아랍어와 쿠르드어로 함께 출판해야 하며, 지폐, 여권 및 우표도 두 언어를 병기(倂記)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규정이 아랍어 사용 지역에서 반드시 쿠르드어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공용어로서 쿠르드어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쿠르드 자치구에서는 반드시 양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 "투르크멘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는 그 사용인구가 다수인 지역에서 아랍어와 쿠르드어에 추가하여 공식적 언어이다."라는 규정과 "지방자치단체는 주민투표를 거쳐 지자체 내에서 다른 공용어를 추가할 수 있다."는 규정도 있다.
즉, 아랍어와 쿠르드어는 공식적인 차원(공보, 지폐, 여권, 우표)에서 대등한 공용어이지만, 쿠르드어를 공용어로 한 주된 목적은 쿠르드 자치구 내에서 쿠르드어 사용을 금지해 쿠르드인을 탄압하던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에 있다. 또, 그 밖의 소수 언어(투르크멘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 등)도 지역 내 다수가 사용하면 그 언어의 사용을 금지하지 않고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데에 2005년 제정 이라크 헌법의 취지가 있다.
영어도 사용한다.
문화
13세기 건축물로는 아바시드 궁(宮)과 1234년 칼리프 알무스탄시르가 세운 이슬람법과대학 무스탄시리아 학교가 남아 있다. 수백 년가량 된 모스크와 미나레트가 상당수 있으며, 한때 이슬람 왕국을 창립했던 파이살 1세의 왕릉도 유명한 유적지이다. 문화생활의 많은 부분은 수니파와 시아파 이슬람교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바그다드대학교(1957)와 역사·민속 박물관이 몇 군데 있고 이슬람-아랍 역사서와 문학서를 소장한 알아우카프도서관(1928)과 바그다드대학교의 중앙도서관이 있다. 3개의 국영 간선철도가 교차하며, 시리아를 가로지르는 이스탄불행 철도편으로 유럽과 이어진다. 다마스쿠스나 이라크의 다른 주요도시들과는 간선도로를 통해 연결되며 국제공항도 하나 있다.
역사
오랫동안 메소포타미아로 알려져온 이라크는 세계 최초로 문자기록 및 도시형성이 시작된 4대 고대 문명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기름진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그 역사는 고대 문명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도시국가
수메르인들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삼각주 지역에 나타난 시기는 BC 3500년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메르인들은 설형문자를 개발하고, 우르·우루크·라가시·키시 등을 포함하는 도시국가연합을 형성했다. 이 도시국가들은 BC 2350년경 아카드 군주인 사르곤의 통치를 받는 제국이 되었다가 아카드인들이 쇠퇴하면서 2개의 새로운 중심세력, 즉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로 나누어져 발전했다.
아시리아인들은 BC 7세기에 고대 중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대한 제국을 세웠으나, BC 609년에 무너졌고, 그후 칼데아인을 중심으로 신(新)바빌로니아가 일어났으나, BC 550년경 이들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전체가 페르시아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페르시아인들은 BC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었으며, 그의 사후(BC 323)에는 BC 141년까지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아바스 칼리프 왕조 수립
그후 파르티아와 로마, 곧이어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 사이의 전쟁으로 시달렸으며, 계속된 전쟁으로 쇠약해진 사산조 페르시아가 AD 7세기에 침략해온 아랍 이슬람교도들에게 오래 버티지 못하고 정복되면서 이슬람 제국의 치하에 들어갔다.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이후에는 칼리프 자리를 놓고 싸우는 여러 세력들간의 싸움으로 다시 전쟁터가 되었다.
8세기에 아바스 칼리프 왕조가 수립되면서 바그다드가 수도이자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나, 1258년 아바스 왕조가 몽골족에게 멸망하면서 함께 붕괴되었다. 이라크는 16세기에 오스만인들에게 넘어가 1917년까지 여러 세기 동안 지배를 받았는데, 이 기간에 내부적인 반란과 이란을 비롯한 외부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오스만 제국). 17세기 중반에 페르시아 만 지역과 유럽의 교역이 시작되었는데, 19세기에 들어와 그 교역량이 더욱 늘었다.
1899년 오스만인들이 독일인들에게 내준 철도부설권에 자극받은 영국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중 이라크를 점령했다. 1921년 영국의 보호를 받는 군주국이 세워졌고, 1925년 헌법이 승인되었으며, 1932년에 이라크 하심 왕국으로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중 친(親)독일정책을 고수해 1941년 영국에 재점령되었으며, 대전 후에는 정치 소요가 계속되었다.
사담 후세인의 통치
이라크의 당원, 정치인이다. 1977년부터는 이라크의 부통령이었고, 1979년 7월 16일부터 2003년 4월 9일까지 이라크를 통치한 대통령이었다.
이라크 하심 왕국은 1958년 군부 쿠데타를 통해 붕괴되었고 공화정을 택한 이라크 공화국(Republic of Iraq)이 수립되었다. 1968년 무렵 사회주의 바트당이 정권을 잡았으며, 1970년대부터는 바트당 지도자인 사담 후세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는 국가의 산업화와 사회복지 개선에 막대한 석유 세입을 사용했으나, 1980년에 이란을 침공하면서 이란과 진퇴양난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1988년 휴전으로 중단되었다.
곧이어 1990년 8월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이듬해 1월 시작된 페르시아 만 전쟁에서 이라크는 국제연합(UN)의 지원을 받은 반(反)이라크 연합군에 패했다. 전쟁의 포화로 이라크 내의 여러 도시들이 파괴되었으며, 이라크군도 막대한 전력손실을 입었다. 패전 후 이라크 내 쿠르드족·시아파 등 주요 소수민족과 종교집단들의 분리주의 운동이 거세게 달아올랐으나, 연합군의 철수로 여력을 회복한 이라크 정부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이라크 전쟁
2001년 9월 미국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대한 테러 사건이 발생한 후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이라크가 미국에 반감을 갖고 대량살상무기(WMD)를 제조×보유하려고 하며, 테러 단체를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UN 안전보장이사회는 2002년 11월 이라크에게 무기사찰단 입국을 허용하고 이전의 모든 결의안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 1441호를 발표했다. 이라크는 무기사찰단을 받아들였지만, 부시와 블레어는 이라크가 계속해서 금지된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UN의 결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2003년 3월 20일 미국과 영국의 주도로 이라크에 대한 공습이 시작되었다. 4월 9일 수도 바그다드가 점령당했고 4월 말에 주요 전투가 끝났다. 바트당이 붕괴한 후, 이라크의 통치는 미국의 고위 외교관을 수반으로 한 연합군 임시행정처(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CPA)가 맡게 되었다. CPA가 임명한 이라크 통치위원회는 한정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사담 후세인은 2003년 12월 13일 티크리트 근방에서 숨어 지내다 붙잡혔다.
종교
이라크 주민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를 믿으며, 이 중 시아파가 64%, 수니파가 30%이다. 소수 종교로는 기독교와 야지디교 등 이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3% 내외이다. 이라크 기독교인들은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 예배 허용 등 일정 부분 종교적 자유를 존중받았지만, 기묘하게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직후부터 아랍 민족주의가 격해지면서 극우 무슬림들의 공격 표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와 술을 먹지 않지만 라마단 기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종교 문제
이라크의 민족융합은 다양한 종교만큼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아랍인 외의 다른 민족은 오스만 튀르크 제국 시대에 주로 들어왔는데 가장 최근에 이민온 노동자들은 모리셔스, 이집트, 수단으로부터 온 민족이 다수를 점한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8년 동안 일어난 이란-이라크 전쟁 때에는 외국 기술자의 수가 2백만 명을 넘을 정도로 많았으며, 이 수치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1백만 명으로 감소했다. 대다수는 침공 1년 동안 떠났었는데, 그 이유는 이라크와 이집트 간의 관계악화와 10여 년이나 지속된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한 이라크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1991년 걸프전 종전 당시 시아파 반란세력이 이란 등 인접 시아파 국가의 지원 없이 수니파인 당시 사담 후세인 대통령에 대항해 봉기하였으나, 정부군에 의해 진압됐다. 약 20만 명에 달하던 시아파 반란세력은 이라크 정부군에 몰려 탱크와 지상군의 접근이 어려운 이라크 남부의 늪지대로 도주하였는데, 후세인은 늪 외곽 지대에 군병력을 집결시키고 이 지역에 도로를 건설하기 위한 대규모 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걸프전 후 유엔은 이라크가 군사적 비행과 국민들에 대한 탄압을 하지 못하도록 여러 금지 규정을 두었으나, 당시 이라크 정부는 이러한 금지 규정을 무시하고 이 지역의 시아파 마을과 난민 거주지에 폭격을 가하였다.
2003년에 미국의 침략으로 일어난 이라크 전쟁 이후로는 반미 테러가 격화되었다.
이라크와 한국과의 관계
외교
한국과 이라크는 1981년 7월 바그다드에 한국의 총영사관을 설치하면서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시작하게 되었다. 1989년 7월 9일에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주 이라크 대한민국 대사관을 개설했다. 그러나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국제적인 제재조치가 내려진 가운데, 이듬해 1991년 1월 한국 정부는 이라크 내 공관을 잠정폐쇄했다. 1994년 5월 주한 이라크 대사관도 잠정폐쇄되었다. 2000년대에는 2004년 6월 김선일 피살사건으로 인해 한국 정부는 이라크 입국을 규제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한국 기업의 이라크 진출과 프로젝트 수행에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후 2006년 8월부터 쿠르드 지역에 한해 단기 방문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게 되었고 2007년 2월 이후로는 기업 진출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여권법을 개정하고, 입국 제한을 완화했다. 그러나 2014년부터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S, 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 반군이 이라크 서북부를 점령하여 치안이 불안정해지자 한국에서는 여행허가를 보수적으로 운용하게 되었다. 2017년 이라크 반군 사태가 안정화 되면서 여행허가 발급을 개시했고, 기업들의 진출도 재개되었다. 한편, 이라크와 북한은 1968년 1월 30일 수교했으나,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북한이 이란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1980년 10월 단교했다.
경제· 통상· 주요 협정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라크는 한국의 비중 있는 해외건설시장으로 평가 받아왔으며, 1977년 3월 한국 건설업체의 진출이 시작된 이래 대형 공사들이 잇따라 한국인의 기술로 완성되어왔다. 현대건설, GS건설, 한화건설, 대우건설 등이 이라크에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의 대이라크 주요 수출품은 보일러 및 기계류와 부품, 전기 및 전자기기와 부품, 철강제품, 자동차와 부품, 무기 및 총포탄과 부품 등이다. 주요 수입품으로는 원유 및 석유가 98%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6년 기준 한국의 대이라크 수출액은 14억 3,961만 달러이며, 수입액은 50억 3,621만 달러이다. 이라크와 한국의 주요 협정으로는 무역 및 경제 기술 과학협정(1983. 3), 항공운수협정(1985. 5), 문화협정(1985. 9), 외교공관 부지교환협정(1987. 6)이 있다.
문화 교류· 교민 현황
2000년대에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을 통해 이라크의 주요 TV방송매체인 알수마리아 TV 관계 직원들과 언론인들을 각각 초대하여 한국 문화를 알리고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한 바 있다. 또한 2013년 5월부터 한국 드라마 <허준>이 국영 이라키야 방송국을 통해 1년여간 방영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2016년 기준 이라크에는 1,033명의 재외동포가 거주하고 있으며, 2017년 기준 한국에 거주중인 이라크 국적의 등록외국인은 325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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