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통신] 테이트모던 개관 14년 만에 222년 국립미술관 제친 이유

[黑面書生]

2014. 11. 14

영국 런던의 3대 관광지를 들라면 런던탑, 영국박물관이 꼭 들어간다. 또 하나의 관광지로는 14년 전에 문을 연 테이트모던 미술관을 꼽는 사람이 늘고 있다. 222년 역사의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을 제치고 테이트모던이 런던의 명소로 꼽힌다는 건 놀랍다. 테이트모던을 찾은 사람은 지금까지 4000만명 선. 연 관람객은 500만명 정도다. 이는 세계 주요 미술관, 박물관 중 6위의 기록이다. 테이트모던에 앞서는 1위부터 5위까지의 역사를 보면 테이트모던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더욱 돋보인다. 1위 프랑스 루브르미술관(222년), 2위 영국박물관(261년), 3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144년), 4위 영국 국립미술관(190년), 5위 바티칸미술관(508년)이다.

테이트모던이 승승장구하는 비결을 우선 후원자들로부터 찾아보자. 테이트모던은 10만5000명의 개인 후원자를 비롯해 600여개의 후원기업을 갖고 있다. 세계 어떤 미술관도 따라올 수 없는 숫자다. 개인 후원자 중에는 재벌도 있지만 대다수가 테이트모던을 사랑하는 평범한 개인이다. 테이트모던의 웹사이트는 후원자 명단을 게재하고 있다. 가장 먼저 나오는 주요 기업 후원자 16개 중에는 현대자동차와 한진해운이 들어가 있다. 그 다음의 31개의 기업 회원에는 현대카드가 있다. 그런데 개인과 기관 회원 99개 중에는 한국인 이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10쪽에 달하는 1500명의 개인 후원자(기부·선물·유산·협찬 형태 모두 포함)로 명단을 넓혀 보면 한국인이 분명한 이름(Mr. Chang-Il Kim, Young-Ju Kim, Mr. Hyung-Teh, Mr. Hyung-The Do, Ms Yung Hee Kim, Woong Yeul Lee) 몇 개는 찾을 수 있다. 그중에서 ‘Mr. Chang-Il Kim’은 아라리오미술관 김창일 회장, ‘Woong Yeul Lee’는 코오롱그룹의 이웅렬 회장이라는 심증은 가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런 후원에 힘입어 테이트모던의 자립도는 개관 당시에 비해 좋아졌다. 2000년 개관 당시에는 80% 이상의 예산을 정부로부터 보조받았다. 그러나 13년 뒤인 지난해 정부 보조 비율은 30%대로 떨어졌다. 연중 몇 번 있는 특별 전시를 제외하고 입장료를 전혀 받지 않는 미술관인데, 대단한 재정 자립도이다.

테이트모던은 개관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오일쇼크를 계기로 문을 닫은 화력발전소 건물을 미술관으로 재활용했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었다.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저렴하게 건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폐건물을 부수지 않고 개축하는 방법은 모든 일에 얄미울 정도로 현실적인 영국인 입맛에 딱 맞았다. 공사기간도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1996년에 현재의 입지가 결정된 후 대지를 구입하고 시공한 지 4년 만인 2000년 개관했다. 영국 기준으로 봐서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을 정도의 속도였다. 이를 계기로 옛 건물을 재활용해서 문화공간으로 쓰는 붐이 세계적으로 일기도 했다.

그 어떤 것보다도 테이트모던의 성공을 잘 설명하는 비밀은 ‘터바인홀 프로젝트(Turbine Hall Project)’에 있다. 오늘날 테이트모던이 있기까지 터바인홀 프로젝트가 기여한 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터바인홀은 테이트모던 건물의 전신인 화력발전소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발전기 터빈(turbine)이 있던 공간이다. 사전 지식 없이 정문을 들어서면 ‘헉!’ 하고 잠시 숨을 멈출 만큼 큰 공간(높이 35m, 넓이 155×22m)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 공간을 테이트모던은 기가 막히게 이용했다. 매년 10월부터 다음해 3월 사이에 이 홀을 가득 채우는 예술작품이 전시되는데 이를 일러 ‘터바인홀 프로젝트’라고 불렀다. 이 터바인홀 프로젝트는 매년 공전의 히트를 쳤다. 실내에 이만한 공간을 가진 미술관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데 그 공간을 이용해 어마어마한 크기의 예술품을 전시해 놓으니 관객이 안 몰려들고는 못 배긴 것이다.

▲ 테이트모던 미술관. 공사 중인 건물은 신관.

첫 시리즈는 세계적인 소비자 생활제품 회사 유니레버가 후원했다. 개관하던 2000년에 시작해 13년간 13명의 세계 최고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개인적으로 13개의 작품을 거의 다 보는 행운을 누렸다. 물론 비범한 작가들을 선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작품도 범상하지 않았다. 설치 작품에 대한 공부를 미리 안 하고 홀에 들어선 관객들은 우선 홀을 가득 채운 작품 크기에 압도되기 일쑤다. 정신을 차려 작품을 살피다 보면 작품 그 자체에 다시 경악하게 된다. 작품 모두가 결코 상식적이지 않고 특이하다 못해 기발하다고 해야 할 정도다. 9m짜리 기둥 3개와 큰 거울 위에 거대한 거미가 설치된 첫 작품(루이스 부르주아)부터 그랬다. 이어 세 번째 작품(아니쉬 카푸어)은 거대한 자주색 나팔이 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네 번째 작품(올라푸르 엘리아슨)은 석양을 연상시키는 엄청난 크기의 오렌지색 등이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11번째는 자기로 만들어진 실물 크기의 해바라기씨 1억개가 터바인홀 바닥에 깔렸다. 이는 중국인 아이 웨이웨이의 작품이었다.

이렇게 해서 항상 터바인홀 설치 작품은 세간의 화제가 되었고 이를 보려고 사람들은 주말이면 홀 앞에 줄을 길게 서곤 했다. 분명 이 시리즈는 테이트모던을 단숨에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으로 만들어 버리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터바인홀은 프로젝트가 전시되지 않는 기간 동안에도 공연, 퍼포먼스, 무용, 영화 등 다양한 살아 있는 예술이 관객들과 만나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현재는 1차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 현충일(11월 11일)을 즈음해서 미국 작가 리처드 터틀의 개양귀비를 연상시키는 거대한(2500㎡) 붉은 실크 천으로 된 작품이 홀을 메우고 있다. 개양귀비는 1차대전 전몰자를 기리는 상징이다.

이 터바인홀 프로젝트가 우리에게 각별하게 다가왔다. 테이트모던이 현대자동차와 글로벌 마케팅 파트너십을 맺고 2012년에 끝난 이 터바인홀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 11년간 계속될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전이 2015년 10월부터 6개월간 열릴 예정이다. 정확한 후원 금액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500만파운드(약 86억원)라고 알려져 있다. 테이트모던의 발표에 의하면 영국 내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기업과 맺은 후원액으로는 최대 금액이고 기간이 가장 긴 후원사업이라고 한다. 한국 기업이 세계 여러 곳에서 하는 각종 후원사업이나 문화사업 중에서도 이만한 크기와 비중을 가진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기존에 영국 내에서 이뤄진 한국 기업들의 후원은 삼성그룹이 지원한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박물관(V&A)의 한국관, 대한항공의 영국박물관 멀티미디어 서비스 후원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의 후원은 ‘체면치레’로 하는 후원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평이 많다. 터바인홀 프로젝트의 명성과 영향력 자체가 다른 어떤 전시회나 전시물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테이트모던을 드나드는 수백만 명의 관람객이 앞으로 정문 바로 안에 있는 터바인홀에서 현대차의 이름을 단 엄청난 크기의 작품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상상하면 제대로 된 문화사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현대 커미션(Hyundai Commission) 시리즈’는 첫 작품이 공개될 내년 가을쯤이면 테이트모던을 방문할 한국인들 누구나 자부심을 느끼게 할 대상으로 떠오를 것이다. 본격적인 시리즈 시작 전에 테이트모던은 현대자동차의 후원으로 현재 백남준 비디오아트 작품 9점을 구매해 백남준 특별전을 하고 있다. 테이트모던이 드디어 백남준의 작품을 영구 소장하게 된 것이다. 백남준전이 2011년 테이트 리버풀에서 열린 적이 있다. 당시 90점이 전시되어 백남준의 작품을 영국에 알렸다.

한국 작가들과 테이트모던과의 인연은 드물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2년에는 한국 작가 박서보·이우환·김창열·정창섭·윤형근·이강소 6인의 모노크롬 회화 특별전이 테이트 리버풀에서 열린 적이 있다. 영국의 한국 작가전으로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2012년 7월에는 테이트모던 지하의 대형 유류저장고 공간을 새로운 영상, 설치미술과 퍼포먼스 전시장(The Tanks)으로 만들었는데, 당시 개관전으로 한국의 비디오아티스트 김성환의 영상물을 소더비 경매장의 후원으로 내놓은 적도 있다. 같은 전시회의 일환으로 양해규 비디오아티스트의 ‘드레스 비히클(Dress Vehicles)’이라는 바퀴가 달린 구조물(wheeled structure) 작품이 전시되기도 했다. 2012년에는 설치미술가 서도호의 ‘집’ 시리즈가 전시되었다. 올해에는 원로작가 이승택의 ‘고드렛 돌’(1958년작)이 전시됐다. 테이트모던은 지난해 이 작품을 구입 소장해 지금까지 전시하고 있다. 이 전시회는 테이트모던의 한국인 큐레이터인 이숙경씨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 현대차가 후원하는 테이트모던의 백남준 특별전시 작품.

테이트모던 건물 외관은 교회 건물과 비슷하다. 장방형 건물 중간에 99m 높이의 굴뚝이 서 있고 세로로 된 긴 일자(一字) 창문이 나 있다. 여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리버풀 성당을 설계한 당대 최고의 건축가 자일 길버트 스코트의 깊은 철학이 들어 있다. 현대의 파워하우스를 과거의 파워하우스(과거에는 교회가 왕과 함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양식으로 만든 것이다. 이 발전소는 템스강 건너에 있는 거대한 세인트폴 성당과 어울리는 양식으로 지어졌다. 템스강을 중간에 두고 250년 차이의 신구 성당 건물이 마주 보고 선 모양새다. 시대적 차이와 건축 양식, 건물 용도의 신비스러운 대비를 교묘하게 만들어 냈다. 테이트모던과 세인트폴 성당을 가로지르는 템스 강변에 서서 두 건물을 비교해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이제 그 발전소를 미술관으로 개조한 사람들(스위스 건축가 자크 헤르조그와 피에르 드 뫼롱)의 철학도 한번 살펴보자. 이들은 종교 파워하우스 건너편의 산업 파워하우스를 현대의 신전으로 만들어 놓았다. 옛 사람들은 성당에 신을 모셨다. 그러나 현대인은 예술을 신으로 모신다. 그래서 과거의 신전 건너편에 현대의 신전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헤르조그와 뫼롱은 여느 신전과 다르게 만들었다. 특히 입구가 그렇다. 세계의 거의 모든 미술관 건물은, 고대 신전이나 교회 건물처럼 엄청나게 화려한 입구를 계단을 밟으며 올라가서 거창한 문으로 들어가는 구조이다. 신을 만나러 가는 길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와 반대로 테이트모던의 입구는 낡고 초라하다. 더욱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낮게 내려간다. 멀리서 보면 몸을 낮춰야만 통과할 수 있을 것처럼 낮고 좁은 문을 통해서 들어가게 만들었다. 과거의 신전과 현대의 신전 사이에 묘한 대비를 만든 것이다. 테이트모던 개축 설계의 철학이 바로 여기에 있다. 미술관은 외관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부의 전시예술품이 더 중요하므로 건물의 화려함과 거대함에 예술품이 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술관의 주인은 그림이지 그림을 담는 그릇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테이트모던의 급성장을 세계 미술관·박물관계는 기적이라고 얘기한다. 그 기적의 중심에 1988년부터 현재까지 26년째 테이트 미술관 그룹의 총관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니컬러스 세로타가 있다. 영국의 미술 잡지 ‘아트리뷰’는 지난 10월 말 세로타를 세계 현대미술계의 영향력 있는 100인 중 1위에 올려 놓았다. 세로타의 능력은 테이트모던을 꾸려가기 위한 자금조달에서 나타난다. 테이트모던은 분가 때 정부로부터 5200만파운드를 받았는데 결국 분가 비용으로 1억3500만파운드가 들었다. 그 차액을 세로타가 개인적 연분을 동원해 다 메웠다. 뿐만 아니다. 현재 2억1500만파운드를 들여 짓고 있는 신관(완공되면 현재 면적의 60%가 늘어나게 된다) 건설자금 조달에서도 세로타의 실력은 드러나고 있다. 테이트모던은 정부로부터는 신관 증축 예산의 겨우 20%에 해당하는 4300만파운드만 받았다. 이후 지난해 7월 테이트모던은 이스라엘 부호로부터 100만파운드의 기부를 받았다. 계속되는 기부 덕에 증축 비용 모금은 이제 필요액의 85%까지 이뤄졌다. 완공 예정인 2016년까지 100% 모금이 가능할 전망이다. 이런 놀라운 모금에는 유대인인 세로타의 유대인 커넥션이 역할을 하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1000여명의 직원을 이끌며 운영 자금은 물론 신축 자금 모금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세로타가 장기집권한다고 누가 흔들 수 있겠는가?

▲ 테이트모던 터바인홀에서 전시 중인 미국 작가 리처드 터틀의 거대한 붉은 실크 천 작품

세로타의 능력은 테이트 미술관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쉼 미술관에 대여해 준 터너 작품을 도난당했다가 도둑으로부터 돌려받는 과정에서도 빛났다. 1994년 도둑맞은 그림의 보상으로 테이트는 보험회사로부터 피해보상금(2400만 파운드)을 받았다. 물론 도둑들은 범행 즉시 잡혔지만 이미 그림은 사라졌고 범인들은 오랜 재판 끝에 11년형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그림의 소재지를 밝히지 않았다. 범인들도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그들이 그림을 넘긴 사람이 유고슬라비아 마피아 두목(별명 스테보)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경찰도 그런 정황을 알면서도 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스테보를 체포할 수가 없었다. 그림은 영원히 사라질 판이었다. 여기서 세로타의 기지가 발휘되었다. 세로타는 모험을 해서 그림의 법적 소유주가 된 보험회사(보상금이 지불되었으므로)로부터 도난 그림의 소유권을 보상금의 3분의 1 가격인 800만파운드에 사들인다. 테이트로 봐서는 큰 도박일 수밖에 없었다. 도둑으로부터 그림을 돌려받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테이트는 ‘코발트 작전’이라 명명된 도둑들과의 협상을 시작했다. 유명 변호사들을 중간에 끼고 협상을 통해 결국 370만파운드로 그림을 회수했다. 보험회사에 그림 소유권을 돌려받기 위해 지불한 800만파운드를 합하면 도합 1170만파운드를 들여 그림들을 회수한 것이다. 보상금으로 받은 2400만파운드에서 이같은 비용을 제하더라도 무려 1230만파운드의 이익을 낸 셈이다. 도둑과 협상을 하고 그들에게 돈을 준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세로타는 도둑에게 몸값(ransom)을 지불한 것이 아니라 그림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에 대한 정보의 대가를 지불했을 뿐이라고 했다. 영국인다운 말장난이고, 또 이익을 위해서는 부모의 살인자와도 거래를 한다는 영국인다운 거래이기도 했다. 테이트로 봐서는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라도 일단 그림을 찾고 거액의 돈도 남기게 되었으니 손해 나는 장사를 한 것이 아니다.

권석하 / IM컨설팅 대표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