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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예수를 섬긴 여인들의 소개와 주의 두 비유 및 예수 가족의 방문, 풍랑을 잠잠케 하신 이적과 거라사의 축사,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의 치유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4:14-9:50까지 이어지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 기사 보도의 연속 부분이다. 본장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상당히 고조되었던 A.D. 28년 말의 주의 치유 사역과 이적과 교훈 등 주의 공생애의 여러 측면을 망라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먼저 전반부 1-3절은 예수의 전도 여행에 동행하면서 수종들며 재정 지원도 했던 여인들을 소개하면서 예수께서 이 전의 1차 갈릴리 전도사역에 이어 다시금 갈릴리 전역을 순회하시며 공생애 사역을 진행하셨음을 은연 중에 암시하여 이하 전개될 사건의 시간적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중반부 4-21절은 주로 예수의 교훈에 대한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4-15절은 천국 복음은 모든 자에게 동일하게 전파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자의 자세에 따라 각각 상이한 결과를 이야기할 것을 교훈하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이다. 그리고 16-18절은 연이어서 천국 복음을 등불에 비유하여 이것이 분명히 전파되고 있으며 또한 구원에 관한 계시를 분명히 담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동시에 천국 복음은 구원(Salvation)과 생명(Life)의 유일한 기준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자세 여부에 따라 그의 영육의 축복이 결정될 것이므로 복음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인 등불 비유를 소개한다. 다음 19-21절은 예수의 가족들의 방문 사건에 즈음하여 복음을 받아들이는 성도 모두에게까지 확장된 예수의 영적 가족관을 보여 주는 주의 가족들의 방문 기사이다.
한편 후반부 22-56절은 주로 예수의 이적들을 보도하고 있다. 이를 세분하자면 22-25절은 풍랑을 잠잠케 하신 이적을, 26-39절은 거라사 귀신들린 자의 축사를 통한 치유와 이에 즈음한 거라사(Gerasenes) 사람들의 예수 거부 사건을, 40-56절은 서로 연속해 발생한 회당장 야이로(Jairus)의 딸 소생 사건과 열두 해 동안 혈루증(hemorrhage)을 앓던 여인의 치유 이적을 보도한다.
이러한 문맥 하에 전개되는 본장 각 단락이 갖는 구속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먼저 1-3절은 예수께서 재차 갈릴리 전역을 순회하시기를 시작하였음을 보도하는 도중에 주의 사역에 여러 여성들이 물심양면으로 헌신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누가복음은 주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되시는 사실 중 예수께서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셨으나 성령을 통하여 동정녀 탄생을 하시어 인자가 되심으로, 죄로부터 순결한 유일한 인자가 되어 아담 이래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구속 희생하심으로써 회개하는 죄인(sinner)을 범죄 이전의 원래 상태로 회복시켜 결국 구원(salvation)을 주시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누가의 복음서에는 인간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관심이 높고 또한 인간의 여러 사회의 부류의 인간들이 어떤 자세로 유일한 인자이신 주께 나아갔는지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를 역으로 말하자면 누가는 인간으로서의 예수와 기타 많은 인간의 삶과 자세 그리고 그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다. 짧은 분량의 본문도 바로 이점을 반영하고 있다. 사실 대략 2000년 전인 고대 유대사회에서는 여성은 그 인격과 지위상 중요하지 못한 존재로 대우받았다. 그런데 누가는 이런 여인들도 예수께 구원받았으며 또한 예수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보조하였음을 본문을 통하여 강력히 제시하고 있다. 이는 결국 우리에게 우리를 구원한 유일하신 인자이신 예수 안에서만 이 땅과 저 천국에서 모든 인간이 다 온전한 인간의 삶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구속사적 교훈을 보여 준다.
중반부 4-21절의 두 비유와 예수의 가족관에 대한 개관 및 교훈은 해당 문단 강해를 참조하라.
특히 주의 비유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위해서는 마 13장의 연구자료 '예수 비유의 이해'를 참조하라.
후반부 22-56절의 역동적인 이적 기사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이들은 인자이신 주님은 그저 평범한 한 인자가 아니라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르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우리와 같은 인자가 되신 유일한 인자로서 전 우주에 대한 주권(主權)과 우리를 구원할 능력과 사랑을 가지셨음을 입증하여 주는 사례들로서 함께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문맥상으로는 앞서 여러 교훈을 주신 주님은 절대자요 구세주이심을 강조함으로써 그분의 교훈에는 절대 순종해야 함을 함께 역설해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이런 일련 이적 기사 각각을 보다 상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22-25절의 바다를 잠잠케 하신 이적은 결국 예수는 우주 만물을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삼위일체(Trinity) 하나님의 한 분으로서 우주 만물을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실 절대 주권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에게 우리는 절대 신앙을 가져야 하고 또 가질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 26-39절의 가다라 축사 사건은 예수께서는 영계(靈界)의 사탄과 그의 추종자인 악령들까지 제어하실 능력을 가지셨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동시에 이처럼 영계에 대하여 절대 주권을 가지신 예수님께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요청하기는커녕 당장의 육신의 안일 유지에만 급급한 나머지 거라사 사람들이 예수를 기피하는 모습에서 생명의 구주이신 예수의 실체를 바로 보지못하고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세속적 이해타산만 따진다면 마침내는 영원한 구원을 상실할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40-56절은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신 사건 및 그 과정 중에 혈루증을 열두 해 동안이나 앓던 여인을 치유하신 사건을 보도한다. 이 기사는 예수 안에서는 더욱 정확히는 예수께 믿음으로 나아가 그의 은혜 안에 거할 때에는 아무리 오래되고 불가능해 보이는 질고(疾苦)는 물론 인간의 궁극적 문제인 죽음까지도 극복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또한 예수 안에서 성도가 현 세상에서 누릴 영혼의 평안과 세상 끝날 부활할 것을(고전 15:20-24) 구속사적으로 예표한다 하겠다.
외울 말씀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눅 8:50)
예수께 봉사한 여인들
1 이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마 4:23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
4 〇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警喩)로 말씀하시되
5 씨를 뿌리는 가서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 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9 〇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 6:9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고후 2:11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이생의 염려와 재리(財利)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등불 비유
16 〇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예수의 가족
19 〇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광풍을 잠잠케 하심
22 〇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 지더라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거라사 축사 사건
26 〇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 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
35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 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 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회당장 야이로의 간청
40 〇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있어 죽어 감이러라 ○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혈루증 여인의 치유
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눅 6:19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사람 앞에서 고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49 〇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하거늘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1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靈)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막 5:32: 9:30하시니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8:3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올바른 자세
1. 맡겨진 직분에 최선을 다하며 섬김(민 18:7; 고전 4:2)
2.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계명을 지키며 섬김(수 22:5; 마 22:37)
3. 온전한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섬김(대상 28:9; 시 100:2)
4. 세상의 나를 어떤 다른 것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김(마 6:24; 눅 16:13)
5. 늘 기도하며 경건하게 섬김(눅 2:37)
6. 자신의 소유도 아낌없이 바치며 섬김(눅 8:3)
7. 마땅한 의무로 여기며 겸손하게 섬김(눅 17:7-10)
8. 하나님을 올바로 섬김을 방해하는 모든 시험을 참으며 섬김(행 20:19)
9. 부지런하며 열심을 다해 섬김(롬 12:11)
10. 다른 성도와 화합하며 한 마음으로 섬김(고전 7:35)
11.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받은 새사람의 모습으로 섬김(엡 4:24)
12. 자기 목숨까지도 아끼지 아니하며 섬김(빌 2:30)
주요 주제-8:1 하나님 나라의 이해
눅 서론 특별 자료 참조.
인물연구-8:3, 요안나(헌신적으로 예수를 섬긴 여 제자)
1. 인적 사항
① 요안나는 '여호와께서 은혜를 주신다'라는 뜻.
② 헤롯 안디바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눅 8:3).
③ 예수께 병 고침을 받은 후 전도자로서 삶(눅 8:2),
2. 시대적 배경
예수 당시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 B.C. 4-A.D. 39년)가 통치하던 갈
릴리 지역의 주민이었음.
3. 성품
① 병 고침을 받고 소유를 주께 드리며 평생을 전도자로 산 것으로 보아 감사할
줄 아는 헌신적인 여성(눅 8:3).
② 예수님 사후, 제자들조차도 도망간 상황에서 향유를 준비하여 무덤으로 찾아간 것으로 보아 용기 있고 실천적인 신앙을 소유한 자(눅 24:3).
③ 예수의 죽음에도 변절치 않고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며 무덤을 찾고, 또 예수의 부활을 맞아 사람들에게 그 기쁨을 증거할 정도로 지조 있고, 변치 않는 믿음을 소유한 자.
4. 주요 생애
치유 이전 | ||
출 생 | - | |
구사와 결후 | - | 눅 8:3 |
예수께 치유 받음 | A.D. 28년 | 눅 8:2 |
치유 이후 | ||
모든 소유로 주를 섬김 | A.D. 28-30년 | 눅 8:3 |
예수의 죽음 목격 | A.D. 30년 | 눅 23:44-49 |
향품과 향유를 갖고 예수의 무덤을 찾음 | A.D. 30년 | 눅 24:1 |
예수의 빈무덤 목격 | A.D. 30년 | 눅 24:3 |
사람들에게 예수 부활을 증거 | A.D. 30년 | 눅 24:9 |
죽음 | - | - |
5. 구속사적 지위
① 예수께 병 고침을 받은 후 헌신적으로 예수를 섬긴 여 제자.
② 예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증인들 중의 하나.
6. 평가 및 교훈
① 주님께 치유함을 받고 자기의 소유를 주께 드려 감사한 요안나의 갸륵한 마음씨는 구속의 은총을 입고도 이에 감사하기는커녕 불평과 원망이 습관화된 된 현대의 신앙인들에게 감사하는 삶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눅 8:3). 이에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받는 자들로서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어야 하겠다(살전 5:18).
② 요안나는 예수의 죽음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껴 모든 제자들이 도피한 가운데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주님의 무덤까지 찾아갔다(눅 24:3) 이는 오늘날 환경과 여건에 따라 쉽게 신앙과 불신앙의 탈을 번갈아 바꿔 쓰는 현대의 신자들에게 신앙의 정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이에 우리 성도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 10:28)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그리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신앙의 절개를 지킬 줄 아는 담대한 신앙인이 되자
③ 끝까지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요안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증인 중 하나가 되는 영광을 얻었다(눅 24:1-12). 이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는 자들 역시 마지막 날에 구원의 반열에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영광을 얻을 것이다.
7. 핵심 성구
“요안나와…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 8:3)
보감 - 8:2 막달라 마리아의 5대 특성
1.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예수께 치유 받은 자(눅 8:2)
2. 감사함으로 그리스도를 섬긴 자(눅 8:2,3; 막 15:41)
3. 충성되게 그리스도를 따른 자(막 15:40; 요 19:25)
4. 그리스도를 위하여 애곡한 자(막 15:47; 요 20:1,7,11-18)
5. 주의 부활을 전한 영예로운 사자(요 20:17,18; 막 16:10)
풍습-8:5-15, 씨 뿌리기
본문에는 복음 전파와 성도의 신앙 자세에 따른 결실의 차이에 대한 비유로서 씨뿌리는 과정과 그 후의 씨의 성장이 잘 설명되어 있다. 이에 본 비유의 바탕이 되는 바 고대 팔레스틴의 농사법의 한 과정인 씨뿌리기와 기타 관련 사항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씨뿌리기
고대 팔레스틴에서는 밀과 보리를 주로 농사지었는데, 씨를 뿌리기 위해서는 먼저 밭의 흙덩이를 부수고 지면을 평평히 했다. 그리고는 밭을 가는 과정에서 땅이 어느 정도 씨뿌리기에 적합하게 되었을 때 큰 자루에 밀과 보리의 씨를 담아 밭으로 나아갔다. 농부는 자기의 허리춤에 작은 주머니를 차거나 가죽 주머니를 끼고 밭갈이 한 땅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한 손으로 주머니 속의 씨를 땅 위에 골고루 흩어 뿌렸다. 그리고는 다시 쟁기를 가지고 씨를 뿌린 밭을 다니며 쟁기질로 흙을 덮었다. 이 경우 종이나 씨 뿌리는 사람 외에 가족 중 다른 사람이 씨뿌리는 사람을 곧바로 뒤따라 다니며 쟁기질을 하여 흙으로 씨를 덮었다. 이렇게 해서 밭에 뿌려진 씨는 땅 속에 들어가 강한 바람이나 새들로부터 보호되었고, 자연의 섭리에 따른 적당한 비와 햇빛을 통해 자라나게 된다.
2. 농토의 특성
고대 팔레스틴에서는 현대적 의미의 넓은 도로가 아닌 대부분 오솔길 형식의 좁은 길이 많았다. 그리고 농토 옆에도 사람이나 나귀, 낙타 등이 다닐 길에는 울타리나 담을 세우지 않았기에 농부가 씨를 흩어 뿌릴 때 바람에 날려 길가로도 씨가 뿌려질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씨는 지나가는 사람이나 동물에게 짓밟히거나 새의 먹이가 되었다.
또한 팔레스틴의 땅은 대단히 다양한 데, 아무래도 산지가 많기 때문에 기름진 옥토보다는 바위투성이의 밭이 대부분이었다. 이 돌들은 석회석, 대리석, 현무암 등이었는데, 식물 생장에 필요한 물을 보유할 수 없어 경작에 큰 장애요소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 손으로 호미질을 해서 농지를 다듬고 돌을 골라낼 수 있는 곳에서는 부지런히 일궈서 포도원을 만들기도 했다. 한편 이러한 돌투성이의 밭 외에도 밭 한가운데 자라나는 가시덤불과 가라지 등의 식물도 농부들을 애먹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들이 곡식이 자라는 데 필요한 양분을 빼앗아 취함으로써 곡식의 생장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농부들은 열심히 땅을 일궈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제하며 좋은 땅을 만들었을 때만 많은 결실을 기대할 수 있었다.
3. 의의
이상 성경시대 당시의 씨뿌리기에 관련된 풍습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풍습을 통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를 좀 더 생생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렇듯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생활을 바탕으로 계시된 것이라는 점에서 성경의 역사성을 재삼 확인케 된다.
보감 -8:18 말씀을 듣는 올바른 자세
1.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는 마음으로 들어야 함(수 1:8)
2. 주의를 집중하여 진지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함(사 34:16)
3. 기쁜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함(렘 15:16)
4. 편견이나 완악함을 버리고 마음을 활짝 열고 들어야 함(눅 8:18)
5. 올바른 동기와 올바른 목적에서 들어야 함(요 5:39)
6.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함(행 17:11)
7. 진리에 대한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들어야 함(딤후 2:15)
8. 어린 아이와 같이 순전한 마음으로 들어야 함(벧전 2:2,3)
주요주제 - 8:27-33 축사의 이해
막 9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8:27-29 귀신의 7대 활동
마 8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주제-8:4-15 예수의 비유의 이해
마 13장 연구 자료 참조
도표 8:33,34 그리스도 이적의 장소별 분류
이적 내용
1. 결혼식장: 물로 혼인 잔치용 포도주를 만드심(요 2:7-9)
2. 장례식장: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 살리심(눅 7:14)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아들을 살리심(눅 8:54)
3. 무 덤: 가다라(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심(눅 8:33)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키심(요 11:43,44)
4. 회 당: 가버나움의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눅 4:35)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심(눅 6:10)
18년 동안 앓던 여인을 고치심(눅 13:10-17)
5. 가 정: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심(눅 4:39)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온 중풍병자를 고치심(눅 5:20)
바리새인의 한 두령 집에서 고창병 든 자를 고치심(눅 14:4)
갈릴리 바다 위를 걸으심(요 6:19)
6. 바 닷 가: 베드로에게 많은 고기를 잡게 해주심(눅 5:5,6)
거친 바다를 잔잔케 하심(눅 8:24)
갈릴리 바다 위로 걸어오심(요 6:19)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많은 고기를 잡게하심(요 21:6)
7. 동 산: 대제사장의 하인 말고의 떨어진 귀를 회복시키심(요 18:10)
8. 연 못 가: 베데스다 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요 5:8)
실로암 못에서 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치심(요 9:7)
원어연구-8:29, 명하사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파랑겔로'(tapayyado )이며 이는 전치사 '파라'와 동사 '앙겔로'의 합성어이다.
먼저, '파라'는 '~가까이'(near) 또는 '~곁에'(beside)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동사 '앙겔로'는 '소식 따위를 가져 오다'(to bring tidings)라는 뜻을 지니며 이것의 명사형인 '앙겔로스'는 소식을 가져다주는 '사자'(눅 7:27; 계 1:20) 내지는 하늘의 전령자인 '천사'(마 4:11; 히 1:6)를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파랑겔로'의 본래 문자적 의미는 사자나 천사 따위가 '소식을 가까이 가져오다'가 된다. 이후에 이와 같은 문자적인 의미가 확장되어 권위를 가지고 '경계하다'(눅 8:56; 행 23:22), '분부하다' (행 16:23) 및 어떤 일을 못하도록 '엄금하다'(행 5:28; 10:42)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본절에서 이 단어는 시제 상 미완료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시제의 특성을 살려서 표현하면 '계속 반복해서 경계나 분부 및 엄금하고 계셨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여러 번 귀신에게 나올 것을 분부하시고 다시는 들어가지 않도록 엄금하신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예수께서 이처럼 반복해서 명하신 것은 거라사인에게 너무나 많은 귀신, 곧 군대 귀신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도표-8:28, 예수의 신분
막 8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8:39 신앙 가정이 힘쓸 일 10가지
1. 연합하여 생활함(창 45:24; 시 133:1)
2. 서로 용서하며 생활함(창 50:17-21; 마 18:21,22)
3.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움(신 4:9,10)
4.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힘씀(신 14:26; 살전 5:18)
5. 하나님을 떠나 범죄치 않도록 서로 돌봄(신 29:18)
6.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힘씀(삼상 1:3,4)
7. 속임과 거짓을 없게 함(시 101:7)
8. 부지런하여 가정의 일을 돌봄(잠 31:27; 딤전 3:4,5,12)
9. 이웃과 친척에게 복음을 전함(막 5:19,20)
10. 기도 생활에 힘씀(행 10:30)
주요주제 - 8:43-55 예수의 치유 사역 이해
요 9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8:41,42,49-56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
1. 겸손한 믿음(눅 8:41)
2. 전적 신뢰의 믿음(막 5:23)
3. 확실한 소망이 있는 믿음(막 5:23)
4. 필사적으로 간구한 믿음(막 5:23)
5. 예수의 능력을 인정한 믿음(눅 8:41)
6. 흔들리지 않는 믿음(눅 8:49,50)
7. 응답의 축복받은 믿음(눅 8:54-56)
주요주제-8:49-56 죽은 자의 부활에 있어서 성자 그리스도의 역할
요 11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주제 - 8:56 예수의 함구령
눅 9장 자료 노트 참조
8:1-3 제 2차 갈릴리 순회 전도
전장(눅 7장)에서 예수께서는 병, 죽음,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는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전개하셨는데, 이것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했던 예언의 성취였음을 보았다. 본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을 순회하시며 전도하는 제 2차 갈릴리 순회 전도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제 1차 갈릴리 순회 사역에서는 백성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시고 권능을 행하시는 장면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눅 4:14- 6:16) 반해, 제 2차 갈릴리 사역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순회 전도와 제자 훈련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한편 예수님의 제 1차 전도여행에서와는 달리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율법사 등 당시 종교 지도자의 배척과 반대가 심해짐에 따라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들이나 산 또는 바닷가 등 야외에서 가르치신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순회 전도 사역을 묘사하고 있는 본문은 갈릴리 2차 사역의 서론 및 요약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의 선교하는 모습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선교는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전한다는 목적 아래 여러 권능을 행하시고(2절) 비유를 통해 설교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조력하던 열 두 사도와 뒤에서 봉사하고 섬기던 여인들의 사역은 협력 선교(Team Mission)의 모범을 보여 주고 있다(1,3절). 이 전도 여행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재정적 지원 뿐 아니라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도움을 주었던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본서가 '여자의 복음'이라 불리는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것은 누가만의 특징으로, 이 여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십자가 수난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증인이 되었다. 당시 남녀 차별이 심했던 사회적 상황 하에서 경시받던 여인들의 역할을 기록한 것은 약하고 소외된 자를 위하여 인자로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비천하고 연약한 자라 할지라도 누구나 자신의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8:1 이후에. - 본장에서는 예수님의 본격적인 2차 갈릴리 전도 여행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언급되는 모든 내용들이 '하나님 나라' 라는 대의에 맞게 구성되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해당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이후에'라는 시간적 배경은 누가복음의 특징적인 용례인데(눅 7:11) 이는 구체적인 시간을 지적하기 보다는 대략적인 순서 정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눅 7:36-50의 사건이 있은 후에' 라는 의미를 갖는다.
각 성과 촌. - 이곳은 분명 갈릴리의 여러 지역들을 가리킨다. 보통 예수님께서 특정한 지역을 전도하실 때 회당을 이용하신 전례들(마 12:9-14; 막 6:1-6; 눅 4:15-30, 31-37; 6:6- 11; 요 18:20)과는 달리 여기서는 회당을 이용하신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전파가 점점 유대교와의 갈등을 심화시킨 결과 회당 사용을 금지당했기 때문인 것 같다.
두루 다니시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듀엔'은 '돌아다니다'라는 의미의 '디오듀오' 의 미완료 능동태로 계속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것을 가리킨다. 결국 본절은 예수께서 갈릴리 전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하셨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나라. - '하나님의 나라'(바실레이아투 데우)는 예수님의 선포의 중심이요 신약 성경의 핵심 주제로, 역동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킨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 3:2 주석과 본서 서론 특별자료 '하나님나라의 이해'를 참조하라.
열두 제자. - 눅 6:12-16에서 예수의 열두 사도로 공식 세움 받은 자들로, 지금까지는 이들의 행적이 나타나지 않았으나 여기서부터는 자주 나타난다. 이들은 예수와 함께 동행하며 예수로부터 장차 그들이 행해야 할 사역을 위해 훈련을 받게 된다. 행 서론 특별 자료 '12사도의 행적' 참조.
8:2 어떤 여자들. - 본 구절과 3절에 언급된 여인들은 예수님의 여 제자들로서, 대개 귀신과 병에서 치유 받은 것을 계기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던 것 같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인들은 어린 아이와 더불어 불완전한 인격으로 취급당했던 형편들을 고려해 볼 때,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사역과 초대 교회 당시, 주목할 만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당시 여인들을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랍비들과 쿰란 공동체와도 뚜렷한 대조를 보여 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죄인과 불경건한 자들 그리고 여인들과 같은 소외자들에게 구원의 좋은 소식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눅 5:27-32; 7:21,22).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 - 여기서 '막달라'는 갈릴리 호수 서쪽 항구인 디베랴의 북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그런데 본절의 마리아가 그의 출생 지명과 함께 언급되는 것은 예수의 모친 마리아나 베다니의 마리아 등과 구분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여튼 막달라 마리아는 한때 일곱 귀신이 들려 고생을 하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온전케 된 후 예수님께 헌신을 했던 대표적인 여인이었다. 특별히 그녀가 일곱 귀신에 들렸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태에 처해 있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그녀는 예수께 치유받자 그에게 전적인 헌신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다른 사람에 비해 독보적인 증인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녀의 행위를 일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현장에 참여했다(마 27:55,56; 막 15:40; 요 19:25). 이것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눅 22:54-60), 또한 유다가 그를 배반했을 뿐만 아니라(눅 22:48) 나머지 남성 제자들이 다 도망가 버린 사실(막 14:50)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② 예수의 주검이 안치된 무덤을 확인했다(마 27:61; 막 15:47; 눅 23:55). ③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려고 했다(마 28:1; 막 16:1; 눅 24:10). ④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제일 먼저 목격했다(막 16:9; 요 20:1-18).
8: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 요안나는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일 먼저 듣게 되는 여인들 중 한 사람인데(눅 24:10), 그녀의 이름이 '하나님의 은사', '하나님은 자비하시다'라는 뜻을 지녔다는 것 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녀의 남편이 당시 갈릴리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의 청지기라는 고위 관직을 맡았던 점을 미루어, 당시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이 고위 계층에도 두루 있었음을 보여 준다(요 4:46-53; 행 13:1). 요안나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수산나. - '백합' 이라는 뜻의 이름인데, 그 외에 달리 알 길이 없다.
다른 여러 여자. - 여기에는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막 15:40).
자기들의 소유로 섬기더라. - 이는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의 주요 업적인데, 이런 경제적 후원이 예수님의 사역에 매우 중요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여인들의 경제적 지원은 자발적인 봉사로서, 자신들이 받은 은혜에 대한 전적인 감사에서 비롯되었다 하겠다.
8:4-15 씨뿌리는 자의 비유
앞 단락(1-3절)에서는 예수의 제 2차 갈릴리 사역의 서론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지역을 순회하며 사역하는 모습이 소개되었다. 이어 본문에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소개한다. 이 비유는 공관복음서가 모두 언급하는 유일한 비유(마 13:1-23; 막 4:1-20)로 본서에 가장 간단하게 기록되었는데 먼저 비유로 말씀하시고(4-8절) 그 다음에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비유를 해석하여 주신다(9-15절).
이 비유는 신앙인들이 복음의 말씀을 영접한 후에 그것을 실천하는 생활에 있어서 영적인 진보와 결실을 맺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을 교훈해 준다. 즉, 씨 뿌리는 농부도 같은 인물이고 뿌려지는 씨앗도 동일한 것이지만 그 씨가 뿌려진 땅의 토양과 토질에 따라 결실과 수확이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주시지만 사람들이 영접하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구원의 여부가 결정되며, 복음의 확장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을 받는 인간의 마음 상태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비유되고 있다.
① 길 가 (5절) -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자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것을 처음부터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12절).
② 돌 밭(6절) -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자는 뿌리가 없어서 조그마한 시험에도 쉽게 무너져 말씀을 듣기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13절).
③ 가시떨기 밭(7절) - 이중적인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자는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염려와 재리와 일락으로 온전한 신앙인으로 성장하지는 못한다(14절). ④ 좋은 땅(8절) - 착하고 좋은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자는 어려운 역경 가운데서도 인내로 극복하며 믿음의 결실을 맺는다(15절). 여기서 누가는 특별히 복음을 듣는 자들이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15절). 이에 대해서는 본문의 해당 주석 및 마 13장 자료노트, 씨뿌리는 자의 비유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이유를 소개하고 있는데(10절), 그것은 어려운 영적 진리를 알아듣기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였고, 오랫동안 감추어졌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영접하는 자에게는 밝히 드러나는 생명의 진리가 되고 그것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계속 비밀로 감추인 바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사 6:9,10). 따라서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심은 이미 불신자와 신자를 나누는 심판이 진행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 10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그러므로 성도들은 복음을 듣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날마다 영적 성장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열매를 맺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요 15:2,3).
8:4 큰 무리를 이루니. - 이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교훈과 이적의 결과이다. 한편 본절에서 15절까지는 일명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 불리는 부분으로 마 13:1-23; 막 4:1-20과 병행을 이룬다. 그런데 본절에는 예수께서 본 비유를 말씀하신 시점과 장소가 언급되고 있지 않으나 마 13:1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그의 모친과 동생들이 그를 찾아온 날 해변가 배 위에서 본 비유를 가르치신 것으로 나타난다.
비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볼레'는 본래 한 사물과 다른 한 사물을 비교하기 쉽도록 나란히 배열한다는 뜻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어떤 사상, 감정, 진리 등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이와 유사성이 있는 어떤 상황이나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수사학적 기법이다. 예수께서는 주로 이러한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시곤 하셨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고자 하는 자들에게 쉽고 분명하게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② 깊고 심오한 진리를 구체적이고 회화적인 비유들을 사용하여 간결하고 명확하게 나타냄으로써 그의 가르침을 인상 깊게 하려는 것이었다. ③ 그의 교훈에 대해 무관심하고 멸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심오한 진리를 직접 노출하지 않음으로써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대해 마 13장 연구자료 예수의 비유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8:5 씨를 뿌리는 자. -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비유들의 가장 전형적인 것으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씨 뿌리는 자'란 농부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씨 뿌리는 자'란 ① 하나님(렘 31:27), ② 예수 자신(36,37절), ③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갖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시 126:5)이라는 세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본 비유에서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 관심을 가지신 것이 '씨 뿌리는 자'나 '씨 뿌리는 방법'이 아니라 씨가 뿌려지는 밭으로 비유된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 상태는 '길 가', '바위 위', '가시떨기 속', '좋은 땅' 등 네 가지로 비유되었다. 이러한 비유의 각각의 의미에 대해서는 마 13장 자료노트, '씨 뿌리는 자 비유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씨를…뿌릴새. - 이는 당시 농업 사회였던 이스라엘의 농부의 파종하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청중들에게는 매우 친근했던 장면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씨를 뿌리는 사람이 땅을 기경하기 전에 파종(播種)을 하는데, 이는 현재 농업 기술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당시 팔레스틴에서의 농업 방법은 파종을 한 후에 땅을 기경했는데, 이는 당시의 토지가 매우 척박했기 때문에 생겨났던 방법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길 가에 떨어지매. - 여기서 '길가'(파라 텐 호돈)는 '길을 따라'란 뜻으로서 밭과 밭 사이에 난 좁은 길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길은 사람들의 잦은 왕래에 의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때문에 이곳에는 비록 씨앗이 뿌려진다 해도 결코 그 씨앗이 뿌리를 내릴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길 가'란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아예 처음부터 배격하고 거부하는 자들의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밟히며 … 새들이 먹어 버렸고. - 길 가에 뿌려진 씨앗은 잦은 사람의 왕래로 인하여 발에 밟혀 뭉그러지기 십상이다. 설사 씨앗이 사람의 발에 밟혀 뭉그러지는 경우에서 면한다 할지라도, 결국 다른 곳에 떨어진 씨앗보다 눈에 더 잘 보이는 까닭에 새들의 먹이가 되고 만다. 따라서 길 가에 뿌려진 씨앗은 열매를 맺을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 하겠다. 특별히 여기서 '새'는 뿌려진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교만한 자들에게서 복음의 씨앗을 빼앗아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사단(공중권세 잡은 자)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8:6 바위 위. - 마 13:5과 막 4:5에는 '흙이 얇은 돌 밭'이라고 나타난다. 하여튼 팔레스틴은 대부분 암석으로 된 고지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밭을 일굴 경우 흙 밑의 바위가 표면 가까이 나와 흙의 두께가 얇은 지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곳에 씨앗이 뿌려지면 바위의 온기로 인해 싹은 빨리 나지만 뿌리가 성장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해가 나면 곧 시들고 만다. 따라서 돌밭으로 비유된 사람들은 복음을 단순하고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특별히 '흙이 얇은 돌 밭'은 겉은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부드러우나 속은 아직 채 깨어지지 않은 완악한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심성을 가진 자들은 복음을 받을 경우 일시적으로 기뻐하며 주를 위해 헌신할 것처럼 하지만 조그마한 시련과 역경만 닥쳐도 말씀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곧 신앙을 버리고 만다. 그러한 의미에서 '흙이 얇다'는 것은 위와 같은 자들의 신앙 인격과 경박성을 효과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성경에서 바울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후에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 데마(골 4:14; 딤후 4:10; 몬 1:24)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는 예수의 말씀에 대해 근심하면서 돌아간 부자 청년(마 19:16-22)이 이 부류에 속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8:7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 '가시 떨기'(아칸다)는 팔레스틴에서 사계절 볼 수 있는 잡초의 하나로, 주로 개간된 밭 주변에서 자란다. 그런데 농부가 씨를 뿌릴 때면 그 일부가 이러한 가시떨기가 자라는 곳으로 떨어져 가시떨기와 함께 자란다. 그런데 이러한 곳에서 자란 식물은 밭에 뿌려진 식물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엇비슷하게 자라기는 하나 결국에는 가시떨기의 그늘과 부족한 양분으로 인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만다. 그러한 의미에서 씨가 가시떨기 위에 뿌려졌다는 것은 복음을 받고 오랜 세월에 걸쳐 신앙생활을 했으나 의와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한 자들을 가리킨다 할 것이다. 특별히 성경에서 가시는 주로 악을 행하는 자(삼하 23:6; 미 7:4)로 자주 상징되는 바 가시떨기는 신앙적 장애 요소로서, 복음의 기운을 꺽어버리게 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적 장애 요소로, '이 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14절)을 말씀하셨다. 아무튼 '길 가'와 '돌 밭'이 밭의 내부, 곧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심성 상태와 관련된 문제였다면 '가시밭'은 밭 외부, 곧 신앙의 장애 요소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8:8 좋은 땅. - '좋은'(아가도스)은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도덕적으로 선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 비유에서 '좋은 땅'이란 식물이 자라기에 적합하도록 잘 개간되어 돌과 잡초가 제거되었을 뿐만 아니라 충분한 수분과 햇빛이 제공되는 옥토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예수께서 해석하신 바와 같이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15절)를 상징한다. 특별히 여기서 '착하고 좋은 마음'이란 길 가와는 달리 진리에 대한 흡수력이 강한 마음 상태를 나타내며, '지키고'란 돌 밭과는 달리 진리에 대한 파수력이 강한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또한 '인내로 결실한다'는 말은 가시떨기 밭과는 달리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백 배의 결실. - 요즘의 농업 기술로 보면 그리 많은 수확량이라고 할 수 없지만, 당시로서는 최고의 수확량이었을 것이다. 한편 마태나 마가는 '육십 배', '삼십 배'라는 말을 첨가하여 비록 옥토에 떨어진 씨앗이라도 그 열매 맺는 것에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나 여기서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백 배'의 결실을 하였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성경에서 '귀'는 종종 이해력과 아울러 순종하는 마음 자세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욥 29:11; 잠 20:12; 25:12; 렘 6:10). 따라서 여기서 '들을 귀 있는 자'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주의하여 듣고 깨달으며 순종하려는 마음 자세를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이유는 당신이 가르치는 비유에 대해 순종하려는 자에게는 그 의미가 분명히 나타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그 의미가 감춰질 것을 나타내고자 하심이었다. 따라서 본절에는 축복과 경고가 동시에 담겨 있다고 하겠다.
8:9 비유의 뜻을 물으니. - 마태복음에는 제자들이 예수께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물은 것으로 나타나며(마 13:10), 마가복음에는 비유들에 대해 물은 것으로 나타나나(막 4:10) 본서에서는 '비유의 뜻'을 물은 것으로 나타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의 심정이 보다 솔직하게 표현되고 있다.
8:10 하나님 나라의 비밀. - 여기서 '비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스테리온'은 '닫다', '덮어두다'의 뜻인 '뮈오'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비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소드의 반영이기도 한데 이 '소드'는 '하늘의 회의'를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비밀'이란 하나님의 '계획' 또는 '뜻'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란 결국, 하나님 나라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감추어져 있어서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 감춘 것을 보이실 때만 알 수 있음을 시사한다(계 1:20; 17:5,7). 한편 사도 바울은 이 '비밀' 이라는 말을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엡 3:3,4,9; 골 1:26), 유대인의 회심(롬 11:25),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엡 5:32), 일반적인 부활(고전 15:41,42) 등과 같은 드러난 비밀에 대하여 쓰고 있다.
이는 저희로 보아도…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사 6:9,10의 인용으로 이는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4절 주석 참조) 중 한 가지인데, 그것은 불신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은닉하기 위해서였다. 즉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 아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계시를 제자들에게 한정시키고, 그들을 의도적으로 제외시켜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도 하나님 나라 잔치의 초청장이 발부되었지만, 그들이 완악한 마음을 계속 견지하고, 진리를 거절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마 13:15).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의 무지 몽매한 상태를 방치하시고, 더욱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무감각하게 만드신 것이다. 따라서 비유로 말씀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은닉한 것은 불신자들의 영적무지에 대한 심판이라고 할 수 있다.
8:11 씨는 하나님의 말씀. - 본절에서 18절까지는 비유에 관한 예수님의 본격적인 해석이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일반적으로 복음을 뜻한다. 본절에서는 언급이 없지만 씨뿌리는 자는 인자 곧 예수님 자신이시다(마 13:37). 또한 여기서 밭은 사람의 마음으로 볼 수 있다(12절).
8:12 길 가에 있다는 것. - 이것은 5절에 대한 해석이다. 여기서 '길 가'에 해당하는 사람은 말씀의 효력이 미치기 전에 마귀의 방해를 받지만, 그전에 이미 사람들의 행보로 굳어진 길처럼 이들의 마음이 세상적인 요소들로 무디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마귀. - 이는 '악한 자'(마 13:19) 혹은 '사단'(막 4:15)과 동일한 존재로, 여기서 그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달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한편 '마귀'는 5절의 '새'에 대한 해석이다.
8: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 - 이는 6절의 해석인데,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매우 충동적인 마음의 소유자 라고 할 수 있다.
기쁨으로 받으나. - 마치 바위 위에 던져진 씨앗이 바위의 온기로 인해 더 빨리 발아하듯이 충동적인 사람은 복음에 매우 민감하고 열렬한 반응을 보인다.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 - 충동적인 사람은 복음에 매우 민감하며 처음에는 열정을 보이나 대개 이들의 경우는 시험을 당하게 되면, 믿음의 열정이 급속히 식어버려서, 결국 배교자가 되고 만다(약 1:12). 그러나 이들 역시 교회의 일원으로 속해있는데, 이런 자들의 믿음은 구원받지 못할 믿음으로서 가라지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마 13:30).
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 - 7절에 대한 해석이다. 이 경우의 사람은 앞의 두 경우와 구분이 되는데, 그가 가진 신앙의 모습이 전자에 비해 보다 점진적으로 드러난다는 데 있다고 하겠다. 하여튼 씨가 가시떨기 속에 뿌리웠다는 것은 자신의 내부적인 문제와 갈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위의 환경과 여건 등 외부적인 문제에 의해 세상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상태의 사람을 가리킨다. 즉 사람의 심성 자체는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상태이나 여러 세상 유혹에 사로잡혀 신앙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생의 염려. - 이는 다른 말로 '세상의 염려'이다(마 13:22; 막 4:19). 이것은 특별히 사람이 세상에서 생활하기 위한 생계 수단에 대해 근심하는 것을 말하는데(요일 2:16), 이는 삶의 목적보다 수단에 더 집착하는 양상이라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 의만 구할 것을 촉구했지만(눅 12:31). 이들의 마음은 생활의 수단인 의·식·주 해결을 위한 염려로만 가득 찼다.
재리. - 마태의 병행 구절에서는 '재리의 유혹'이라는 상세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이것은 부에 대한 무절제한 열망을 뜻하는데, 대개 이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전무하며, 세상에서 '부'가 최고의 신인양 생각하기에 이른다. 부자 청년 관원(눅 18:18-23)과 '어리석은 부자'(눅 12:13-21) 등은 이 경우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예들이 될 수 있다.
일락. - 마가는 이를 '기타 욕심'으로 표현하고 있다(막 4:19). 여기에 해당하는 것들은 도박이나 술 취함, 스포츠나 오락 등 다양하게 있는데, 이런 것들에 심취하는 것은 결국 세상의 노예가 된다는 것과 진배없다.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 - 8절에 대한 해석으로서, 여기서 '좋은 땅'은 마음이 부드럽고 겸비하여 복음을 민감하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복음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서 세상적인 유혹이나 욕심에도 이끌리지 않는 마음을 가리킨다.
착하고 좋은 마음. - 여기서 '착하고'와 '좋은'이라는 형용사는 엄밀한 구별이 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착하고'(아가도스)는 8절에서 '좋은'이라는 의미로서 호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복음을 선입관을 갖지 않고 받아들인 베뢰아 사람들의 열렸던 마음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행 17:10-12).
인내로 결실하는 자. - 인내는 시험과 역경에서 그 효력을 발생하는 바, 이는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 다른 세 종류의 땅과 같은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과 구분되는 점이라고 하겠다. 다 같이 복음을 듣지만,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소유한 사람을 제외한 다른 세 종류의 땅과 같은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복음을 믿기는 하지만 도중에 시험이 닥치면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배교해 버린다. 그러나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소유하여 복음을 겸손히 수용한 사람은 끝까지 인내하면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최후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8:16-18 등불의 비유
앞 단락 (4-15절)에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복음을 듣는 자의 마음 자세의 중요성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문에서는 등불의 비유를 통해 복음을 들은 자가 취해야 할 태도를 보여 준다. 이러한 본문은 세 가지의 격언 형태로 구성되었는데, 각각의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16절에서 '빛'은 '복음'을 의미하며 빛을 비추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복음을 들은 자가 이를 전해야 하는 당위성을 보여 준다.
둘째로 17절은 복음의 비밀이 완전히 드러나게 될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는 복음의 빛을 가리지 말고 낱낱이 전하라는 실천의 요구인 것이다.
셋째로 18절은 말씀을 듣는 자의 태도에 따라 받게 될 결과, 즉 영생의 법칙에 대한 언급이다. 즉, 겸손하여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더욱 풍성한 은혜를 받게 될 것이지만, 교만하여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있는 것까지도 빼앗김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가 소멸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인 것이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복음은 단순히 존귀히 여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전파하도록 주어졌으며 복음을 받은 자는 그것을 전할 마땅한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② 복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생명의 빛이지만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고후 4:3,4).
8: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 본절에서 18절까지는 흔히 '등불 비유' 라고 불리는 부분으로서, 이것은 세 가지 격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마 5:14-16 및 막 4 : 21-22와 병행을 이루는데 마태에서는 이 비유가제자도와 관련해서 언급된 반면 여기서는 복음의 역동성과 관련해서 언급되고 있다. 하여튼 여기서 '등불'은 세상을 밝히는 '복음'을 암시하는데(요 1:4-9), 빛을 비추어야 하는 것처럼 복음도 마땅히 전파해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 등경 위. 여기서 '등경'은 등을 올려놓거나 걸어두는 틀을 뜻하는데, 보통 집 안의 구석구석을 비출 수 있는 곳에 두는 것이 상례였다(이러한 풍습에 대해 마 5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그같이 복음은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전해져야 한다.
8: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 이는 당시에 통용되었던 격언이었는데, 성경에서 각각 약간 다른 취지로 자주 언급된다. 특별히 마 10:26에서는 예수께서 12제자를 파송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어 정당한 평가를 하실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셨고, 본절에서는 복음의 빛을 가리지 말고 낱낱이 전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눅 12:2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악행이 그것을 감추려는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8:18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빼앗기리라. - 이 구절 또한 복음서 여러 곳에 언급되는데(마 25:29; 눅 19:26), 여기서는 앞선 '씨 뿌리는 비유' 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씨 뿌리는 자인 예수님에 의해서 빛과 같이 급속히 세상에 전파될 것인데, 장차 올 종말에 복음을 믿음으로 끝까지 지키는 자에게는 더 풍성한 축복이 임할 것이지만,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는 있는 것까지도 수탈당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인 것이다.
8:19-21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혈육
앞 단락(16-18절)에서는 등불의 비유를 통해 복음을 들은 자는 마땅히 그의 들은 바를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함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에서는 그러한 자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특권을 소개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참된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여 준다. 이는 공관복음서가 다같이 언급하는 기사로(마 12:46-50; 막 3:31-35), 마태와 마가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가르치기 전에 언급하고 있으나 누가는 그 후에 언급한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4-18절)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예증하기 위해서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실행하는 사람들이 그의 참된 가족임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적인 부모 ․ 형제와의 혈연관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요 19:26,27). 그는 다만 그리스도의 영적인 가족 개념을 강조하신 것이다. 결국 이러한 본문은 믿음은 세상의 어떠한 것, 심지어 혈육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을 교훈해 준다.
8:19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 - 여기서 모친은 마리아일 것이고. 동생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으로 전해진다(마 13:55; 막 6:3). 이 동생들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즉 ① 예수 탄생 후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② 요셉의 전처의 자녀, ③ 예수의 사촌 등이 다. 여기서 ②,③ 견해는 성모 마리아의 영원 처녀성을 주장할 요량으로 취해진 견해인데, 예수의 친동생으로 보는 ①의 견해가 타당하다. 한편 여기서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감독이자(행 15:13), 야고보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8:20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들의 방문 목적에 관해서는 이설(異說)이 있다. ① 당시 이스라엘 선생들에게서 귀신들린 것으로 진단을 받은 예수를(막 3:21,22) 고향에 데려가 안식을 취하게 하기 위한 것. ② 당시 세인에게 명성을 떨치던 예수님을 보기 위한 것(요 7:5). 양쪽 의견은 각각 강조점이 있는데, ①의 견해는 평소 형제들 역시 예수의 구속주되심을 믿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하고 있다(요 7:3,4). 또한 병행구절인 막 3:31의 문맥이 이 견해를
지지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즉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렸다는 소식이 동기가 되어(막 3:30), 그를 찾아 나섰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②의 견해는 본문의 문맥이 이를 지지해 주고 있다. 본장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능력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가족들이 등장한다. 이를 계기로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구성원에 대한 교훈을 주시는 것이다. 결국 ②의 견해가 보다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8:21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 - 이 구절은 하나님 나라의 새 구성원의 자격 요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육적인 혈육 관계의 확대에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받아 결실을 맺는 옥토와 같은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라야 하는 것이다. 본절에 관해서는 마 12:50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8:22-25 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
지금까지 말씀을 통해 제자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신 예수(4-21절)께서는 이제 본절에서부터 본장 마지막 절까지에서 네 가지의 신적 권능을 통해 그의 그리스도 되심을 제자들로 확증케 하고 그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신다.
그 가운데 본문은 예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적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사건은 어느 날 예수와 제자들이 가버나움에서 거라사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면서 발생한다(22절). 이때 예수께서는 그도 인간이었던지라 그간의 오랜 사역의 피곤함으로 인하여 고물에서 자고 계셨다(막 4:38). 그런데 배가 어느 정도 행선할 즈음에 갑자기 광풍이 불어 배는 침몰 위기에 빠지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우왕좌왕하며 예수께 구원을 호소하고 나서기에 이른 것이다(23,24절). 갈릴리 바다에는 갈릴리 바다의 온난 기류와 헬몬 산의 한냉 기류가 만나면서 심한 돌풍이 자주 발생한다고 한다(막 4장, 자료노트, '갈릴리 바다' 참조).
하여튼 풍랑 가운데서도 초연하게 주무시는 예수의 모습과 풍랑으로 인하여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의 모습이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사실 제자들 가운데 몇 명은 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로서 이러한 현상에 익숙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다. 오히려 바다를 잘 알고 있었기에 더 두려워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근본적인 두려움은 예수님의 권능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서 비롯되었다. 즉 제자들은 그 동안 예수님을 따르면서 수많은 이적을 경험하고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배 워왔지만 결정적으로 위급한 순간에는 그런 믿음을 잊어버린 것이다(25절).
한편 제자들의 구원 호소에 잠에서 깨신 예수께서는 믿음 없는 제자들을 책망하시며 말씀으로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잠잠케 하셨는데, 이는 예수께서 모든 천지 만물의 창조자요 주관자이심을 증거한다(엡 1:22). 실로 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의 권위는 태초에 천지를 향해 '빛이 있으라'(창 1:3)고 명령하신 창조주의 권위였던 것이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성도들은 이 세상이 아무리 험한 세파라 할지라도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상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으며 담대하게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②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은 단 한 곳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의 끝부분이라도 주권을 행사하시며 당신의 섭리 가운데 두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시 103:19).
8:22 하루는. - 본절에서부터 25절까지는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건에 관한 기록으로 다른 공관복음서에도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마 8:23-27; 막 4:35-41). 한편 여기서 누가는 본 사건의 시간적 배경으로 단지 '하루는'이라는 막연한 때를 말하고 있으나 이 사건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 하셨던 날 저녁에 일어났다(막 4:35).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 여기서 호수는 갈릴리 바다를 가리킨다. 그리고 '호수 저편'이란 '거라사인의 땅'(26절)을 가리킨다. 한편 예수께서 이처럼 가다라 지방으로 가시고자 한 이유는 계속된 가르침으로 인해 상당한 피곤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예수께서는 무리를 떠나 휴식을 취하고자 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배에 올라 곧바로 잠드신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8:23 예수께서 잠이 드셨으니. -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비록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생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지만, 자신의 피곤한 인성을 신성의 능력으로 없이하려 하지 않으셨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딱딱한 배의 고물을 베게로 삼고 주무셨는데, 이는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는 말씀을 연상케 해 준다.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 여기서 광풍을 마태는 '큰 놀'(마 8:24)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돌풍을 동반한 폭풍을 가리킨다. 따라서 광풍이 호수를 친다는 말은 매우 사실적 표현이다. 이 같은 광풍은 주위의 높은 지형들로 말미암아 정체된 온난한 기류에 쌓여 있는 갈릴리 바다에 갑자기 높은 헬몬 산의 한냉 기류가 몰아닥쳐 더운 기류와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기상학적 현상으로 알려지고 있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 광풍으로 예수와 제자들이 탄 배가 침몰의 위기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제자들 가운데는 오랜 어부 생활로 노련했던 베드로와 요한도 있었을 것이지만 광풍의 기세에는 어찌할 수 없었던 것 같다.
8:24 깨워. - 이는 예수님께서 매우 깊은 잠에 드셨음을 보여 준다. 광풍으로 인해 배에 물이 들어오고, 침수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수면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제자들의 당황해 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이 그 중심에 있는 자의 평온함을 잘 보여 준다. 하여튼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운 것은 그들로서 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여‥‥우리가 죽겠나이다. - 이는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의 손길을 간구하는 제자들의 필사적인 외침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외침에서는 신앙적 요소와 불 신앙적 요소를 모두 발견하게 되는데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심을 알지 못하고 당황하며 예수를 깨운 것은 불 신앙적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부 출신의 그들이 목수 출신의 예수께 구원을 호소한 것은 그들에게 예수께 대한 믿음이 상당히 있었다는 것의 증거라 할 수 있다.
잠을 깨사. - 이는 제자들의 긴급함과는 매우 대조적인 예수님의 여유를 보여 준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근원적인 평온이라고 할 것이다. 꾸짖으시니. - 이것은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꾸짖으신 것과 같은 표현이다(눅 4:39). 이를 근거로 예수님께서 바다의 광풍을 배후에서 조정했던 사탄을 나무란 것이라는 주장이 없진 않지만, 예수께서 자연계를 마치 의인화된 대상으로 말하신 것은 비유적 어법 내지는 시적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시 19:5; 98:8; 106:9; 사 55:12). 이것은 마치 혼돈 상태에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셨던 '창조주의 위엄 있는 명령'과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창 1:3).
잔잔하여 지더라. - 이는 예수님의 자연에 대한 통치권을 잘 보여 주는 구절이다. 미친듯이 날뛰던 광풍이 예수님의 한 마디의 명령에 곧 순종하면서 잔잔해진 것은 예수님의 창조주되심에 대한 가시적인 증명이 되기에 충분하다.
8:25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꾸짖음이다. 마태는 이 꾸짖음이 광풍을 잠잠케하기 전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한 반면(마 8:25,26), 여기서는 그 이후에 하신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예수의 꾸짖음이 사실 두 번 있었고 이를 마태와 누가가 각각 한 번씩만 기록했기 때문인 듯하다.
두려워하고. - 성경에서의 '두려움'(fear)은 보통 자신보다 월등한 권위를 가진 사람(창 32:7; 46:3; 왕상 1:50,51; 욥 31:33,34; 렘 35:11; 마 14:5)이나 자연 세계(암 3:8) 또는 죽음(욥 3:25; 22:10)에 의해서 제기되는 위험에 직면할 때 느끼는 감정으로 나타난다. 또한 하나님의 현현과 한께 나타나는 영광과 위엄에 의해 사로잡히는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로도 사용 된다(출 3:6; 신 5:5; 합 3:16; 눅 2:9; 7:16; 9:34). 본절에서 제자들의 '두려움'도 여기에 해당하는데, 질풍 노도와 같은 폭풍에 맞서서 당당히 자신의 권세로 호령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제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경외감이 섞인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8:26-39 거라사의 축사 사건
본문은 예수님이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말해 주는 앞 단락(22-25절)에 이어 영적인 세계까지 주관하시는 예수님의 전능을 보여 준다. 즉 거라사의 군대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그의 구속주로서의 권능을 보이신 것이다. 이 기사 역시 공관복음서에 모두 언급되어 있다(마8:28-34; 막 5:1-20) 그런데 본문에서 특이한 사실은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귀신의 고백인데, 제자들도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신성을 귀신이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28절), 그러나 이런 귀신의 지식은 구원의 신앙과는 상관없는 단순한 지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된장 28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예수님의 권능을 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두려움을 느꼈는데. 이들의 두려움은 앞 단락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보고 느꼈던 것과 같은 경외심(敬畏心)이 아니었다(37절). 이는 다만 미신적인 두려움에 불과했다(37절 주석 참조). 따라서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됨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구원의 기회를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아무리 훌륭한 신학적 지식을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접목이 되지 않으면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② 미신적인 신앙은 하나님을 오히려 두려워하게 되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버리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③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어떠한 물질적 손실까지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마 5:29,30; 눅 9:25).
8:26 거라사인의 땅. - 본절에서부터 39절까지는 예수께서 군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신 사건에 관한 언급이다. 본 단락의 사건은 다른 공관 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는데(마 8:28-34; 막 5:1-20). 이는 전 단락의 사건, 즉 광풍을 잠잠케 했던 것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전 단락(22-25절)에서는 예수님의 신성이 자연적 통치로써 나타났다면, 여기서는 귀신을 축출하는 데서 현시(顯示)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거라사인의 땅'은 마 8:28에 '가다라 지방'으로 표기되었는데 이 차이에 대해서는 막 5:1 주석을 참조하라.
8:27 귀신들린 자 하나가. - 이는 마태가 '두 사람'으로 기록한 것과 차이점이 있다(마 8:28). 여기에 대해서, ① 둘 중의 하나가 특별히 그 증세가 심했는데 누가는 이에 강조점을 두었다는 의견(Calvin, Augustine)과 ② 둘 중 하나는 추종자이고 나머지는 인도자이기 때문에 누가는 인도자 한 사람만을 기록했다는 견해가 있다(Clark). 어떤 견해이든지 큰 문제점은 없다.
옷을 입지 아니하며‥‥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 군대귀신 들린 자의 특징적 현상이 세 가지로 나타나 있다. 마가는 여기에 덧붙여 그가 소리 지르며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일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막 5:5), 이로 미루어 보아 그의 증세는 매우 심각할 정도였던 것 같다.
8:28 그 앞에 엎드리어. - 이를 외견상 '경배'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귀신들린 자의 행위라는 점을 감안할 때, 단순한 두려움의 표시로밖에 볼 수 없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 예수님께 대한 귀신들린 자의 호칭이다. 예수님께 대한 이런 인식은 귀신이 꽤 정확한 신앙 지식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고백한 것에 비해 볼 때도(눅 9:20; 마 16:16; 요 6:69) 시기적으로 앞서고, 내용면에서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신학적 지식이 신앙일 수 없듯이 귀신이 예수님께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가 예수를 그의 '주'로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이것은 자기의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하는 완곡한 표현이다(삿 11:12; 왕상 17:18; 대하 35:21).
8:29 이는 예수께서‥‥나오라 하셨음이라. - 귀신이 부르짖은(28절) 이유이다. 즉 예수께서는 귀신들린 자를 보자마자 귀신에게 그에게서 나오기를 명하셨고 귀신은 예수께 자기 일에 관여하지 말도록 부르짖은 것이다.
8:30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이는 귀신들린 자를 향한 예수님의 질문인데, 그것은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자기 의식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의도되어 졌다고 볼 수 있다(Plummer).
군대라. - 귀신의 대답이다. '군대'(레기온)는 당시 6000명 규모의 로마 부대 단위였는데, 여기서는 많은 수의 마귀를 뜻한다. 거라사인의 경우는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2절)보다 더 심각했으며, 이것은 그의 광적인 행위와 괴력 그리고 자학성의 근본적인 동기가 되고 있다(29절).
8:31 무저갱.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뷔소스'는 밑도 없고 끝도 없이 깊은 곳(창 7:11; 사 51:10)을 가리키는 말로 이곳은 장차 귀신들이 영원한 멸망의 불로 떨어지기 이전에 잠시 갇힐 장소이다(계 19:20; 20:10). 여기서 귀신은 무저갱에 가지 않게 해 달라고 비는데,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심판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귀신이 아무리 큰 힘과 세력이 있다할지라도 예수님의 통치하에 있는 존재일 뿐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8:32 많은 돼지 떼‥‥허하심을 간구하니. - 이스라엘에서 돼지는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되어 희생 제사에 사용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레 11:7; 신 14:8) 먹을 수도 없었다. 따라서 본절의 돼지 떼는 이방인에 의해서 사육된 것으로 보이며, 만약 유대인이 돼지 떼의 주인이었다면, 그는 이방인에게 매매할 요량으로 사육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지금 군대 귀신이 자신들을 돼지 떼에 넣어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하고 있다. 이 또한 귀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전적으로 예수님의 통치하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한편 귀신이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기를 간구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의 견해가 있다. ① 귀신들이 육체적인 거처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② 하나님에 대한 증오심으로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에 들어가 해를 입혀서 복수를 하기 위해, ③ 돼지 떼를 몰살시킴으로 거라사인 지방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배척하게 하기 위해, ④ 귀신은 부정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네 견해 가운데 비교적 받아들일 만한 견해는 ③의 견해이다. 왜냐하면 37절에서 볼 수 있듯이 거라사인 지방 사람들이 이 일로 인하여 예수께 떠나기를 요청했고, 성경에는 종종 예수께 쫓겨난 귀신들의 난폭한 행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마 17:14-20; 막 9:14-29).
8:33 그 떼가‥‥몰사하거늘. - 돼지 떼의 숫자는 대략 2000마리 정도였다(막 5:13). 이 많은 수가 한꺼번에 호수를 향해 내리달려 몰사한 것이다. 귀신들의 난폭성이 뚜렷이 드러난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편 예수께서는 돼지 떼를 몰살시키려는 귀신의 의도를 분명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귀신의 요구를 들어주셨다. 이에 대해서는 과연 남의 재산을 함부로 손상시킬 수 있느냐는 도덕적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이 문제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결부시킬 때 쉽게 해결된다. 즉 예수께서는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한 영혼을 구하시기 위해 돼지 떼를 희생시키신 것이다. 특별히 돼지의 소유주가 유대인이라면 예수의 행위는 부정한 것을 척결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옳은 일이었으며, 돼지 떼가 비록 인간의 소유였다고는 하나 궁극적으로 천지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예수의 행위는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8:34 치던 자들이‥‥도망하여. - 이는 예수의 능력에 대한 놀라움과 치던 돼지의 죽음으로 인한 당혹감의 결과로, 이처럼 돼지 치던 자들이 도망한 것은 자신들로서는 이 사태에 대해 해결할 능력과 지위가 있지 않았던 까닭에 성으로 가서 이 사실을 주인에게 속히 알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8:35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 이는 거라사 주민들이 몰려와서 목도한 장면인데, 예전에 귀신들려 감히 접근하지도 못했던 사람이 이제는 정상인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예수의 발아래 앉은 것. - 이는 예전에 귀신의 사주를 받았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님의 권세에 순복했다는 상징적인 묘사이다. 그가 귀신이 들렸을 때는 괴상한 소리와 괴력으로 인해 사람들이 근처에 접근할 수 없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예수님 곁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권세와 위엄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8:36 저희에게 이르매. - 이 구절은 거라사인에게서 귀신이 떠난 과정이 가가이서 지켜 본 돼지 치던 자들의 증언으로 주민들에게 전해졌음을 뜻한다.
8:37 크게 두려워하여. - 예수의 축사 이적의 소식을 돼지 치는 자들로부터 들은 거라사 주민들의 반응이다. 여기서 '두려움'은 귀신을 축출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것으로서 경외하는 마음(25절 주석 참조)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이들은 예수님의 능력은 전해 들었지만 그를 믿는 신앙이 싹트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두려움은 단지 공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 이는 거라사 주민들의 요구인데, 물욕에 사로잡힌 채 진리를 수용하지 못하는 자들의 이기주의적인 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즉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의 형제인 거라사인이 귀신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과 이 일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신들의 경 제적인 손실만을 두려워한 것이다. 만약 이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을 구주로 볼 수만 있었더라면, 남편 다섯 둔 여인의 증거를 들은 사마리아인들처럼 그를 초청하였을 것이다(요 4:39-42).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재산 손실에만 연연하여 예수님을 경원시했던 것이다. 이들의 마음은 마치 길가에 단단하게 굳어진 밭처럼 복음의 씨앗이 뿌리도 내릴 수 없어 결국 사탄에게 복음을 빼앗기는 자들의 상태와 같다고 할 것이다(12절).
예수께서‥‥돌아가실새. - 예수께서는 거라사 사람들로부터 그곳을 떠나 달라는 요청에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 지방을 떠나셨다. 거라사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준비가 전혀 안되 있었던 것이다. 실로 하나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다(마 5:3).
8:38 함께 있기를. - 귀신 나간 사람의 청언은 예수님에게 떠나 줄 것을 요구한 거라사 주민들과는 대조적이다. 이 사람의 입장에서는 귀신에게서 해방을 시켜준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로서 받아들여졌고, 이를 계기로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소원했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일 것이다.
8:39 하나님이‥‥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기를 간청하는 귀신들렸던 자를 만류하여 그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대신에 예수께서는 그를 그가 받은 바 은혜를 전할 증인으로 세우셨다. 한편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그간 자신의 신적 능력을 전하는 것을 금하셨던 예수께서 여기서는 적극적으로 전할 것을 요구하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동일한 사실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취하신 것은 그가 이적을 행하신 장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예수께서 함구령을 내린 곳은 유대인 지역으로. 유내 종교 지도자들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함이었던 반면, 거라사는 이방인 지역으로 그러한 마찰 염려가 없었고 예수를 증거할 증인이 거의 전무했던 까닭이다. 예수께서 자기에게‥‥큰 일 하신 것. - 귀신이 나간 사람이 자기 지방의 사람들에게 전한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는 귀신 나간 자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하신 일'을 전하라 했던 반면 그는 '예수님의 큰 일'을 전했는데 이는 그가 예수와 하나님을 동일 선상에서 인식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한편 막 5:20에 의하면 이 사람은 '데가볼리' 지역에 복음을 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데가볼리에 대해서는 막 5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8:40-48 야이로의 간청과 혈루증걸린 여인 치유
갈릴리 바다의 동쪽 지방인 거라사에서 행하여진 귀신들린 자에 대한 치유의 이적을 소개한 바 있는 앞 단락(26-39절)의 내용과는 달리, 이제 다시 갈릴리 바다의 서쪽에 위치한 가버나움에서 행하여진 치유의 이적이 본문에 소개된다. 즉 예수님께서는 전도 사역의 중심지로 삼고 있던(마 9:1) 가버나움에 돌아 오시자마자, 회당장 야이로의 필사적인 간청에 직면하시게 되었는데(42절), 자기 딸이 죽음의 위기에 놓이자 야이로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스스로 무시한 채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간곡히 호소한 것이다(43절). 그리하여 야이로의 믿음과 겸손을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그의 집을 향해 떠나셨는데, 바로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발생한 사건이 본문에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혈루증 걸린 여인에 대한 치유 기사는 공관 복음서가 모두 언급하고 있다(마 9:20-22; 막 5:21-34; 눅 8:43-48). 하여튼 본문에는 혈루병에 걸린 여인이 자신의 질병을 고쳐보고자 애쓰나 전혀 소용이 없었던 절망적인 상황(43절)과, 그 한계적 상황에서 '예수'라는 복음을 접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극적으로 치유되는 과정(44절)이 잘 나타나 있다.
한편 여기서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무려 12년 동안이나 앓던 혈루증을 치유 받게된 가장 큰 요인은 먼저 그녀가 예수님께 나왔고, 또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라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를 만나기만 하면, 전혀 새로운 소망과 기쁨을 얻게 되는 법이다(요 3:16; 고후 5:17).
이러한 본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겸손하면서도 확신에 찬 태도로 간구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응답하신다. 회당장 야이로는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신분을 지니고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간구하는 겸손의 소유자였으며, 동시에 그는 자기 딸이 아무리 죽음 직전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손을 얹으시기만 하면 즉시 생명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고백하는 확신에 찬 신앙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심에 있어서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셨던 것이다(42절).
② 오직 믿음이 아닌 다른 수단을 통해서 인간들이 구원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히 10:39).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자신의 재산을 바쳐서라도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원들을 찾아 다녔으나, 결국 고침을 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병이 더 심해졌을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분의 옷에 손만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을 지니게 되었을 때, 드디어 그녀는 질고(疾苦)로부터 해방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가 구원을 얻은 것은 단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녀가 보인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 믿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8:40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 예수께서 돌아오신 곳이 어디인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나 이는 그의 선교의 전진 기지였던 가버나움이 틀림없다(막 5:21 주석 참조).
무리가 환영하니. - 이는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관용어구로서(눅 9:11; 행 2:41; 18:27; 21:17; 28:30).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여기서는 무리들이 거라사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26-39절)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절박한 사정으로 더 간절히 기다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8:41 회당장 야이로. - 회당장은 지방 회당의 최고관리자로서 회당과 관련된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배의 사회자로서(눅 13:14), 성경 봉독자와(눅 4:16,17) 기도자 그리고 설교자를(행 13:15) 임명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당시 회당을 중심으로 종교적 공동체로 형성된 이스라엘에서 회당장은 당연히 사회의 지도층에 속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눅 7:3,4). 한편 여기서 회당장인 야이로는 마태와 마가의 병행 구절 중(마 9:18-26; 막 5:22-43) 마태복음에는 그의 이름이 생략되어 있다. 때문에 혹자는 누가가 '깨어나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야이르'( )에 근거하여 '야이로'라는 이름을 지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 여기서 '엎드려'(페손)는 부정과거 시제로, 이는 즉각적이고 완벽한 굴복을 뜻한다. 따라서 본절은 회당장 야이로의 간절한 믿음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사실 야이로의 직책상 당시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 대부분이 배척했던 예수님께 무릎을 꿇는 행위는 매우 파격적인 사건으로 이는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야이로의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그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을 무릅쓰고 이런 행동을 하게 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 즉 이 분이 자신의 딸을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실한 신뢰가 없이는 있을 수 없었던 행위이고 보면, 그의 행위는 예수의 권위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할 것이다.
8:42 열두 살 먹은 외딸. - 누가만 밝히는 부분인데, 죽어가는 야이로의 자식은 12살 된 외동딸이었다. 따라서 회당장 야이로의 간절함은 더욱 배가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여인에게 열두 살은 결혼 적령기로서 소녀의 병은 그녀에게도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리가 옹위하더라. - 여기서 '옹위하더라'(쉬네프니곤)는 '함께 누르다'라는 의미의 '쉼프니고'의 미완료 능동태로 매우 붐비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절은 군대의 승전 행렬을 연상시켜 주는데, 이는 그동안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들었던 무리들이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의 병도 충분히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음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8:43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 혈루증(血淚凉)은 여자의 생식기에서 부정기적으로 피가 출혈되는 병인데, 주로 출혈성 자궁 내막염이나 자궁암으로 인해 생기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이 혈루증을 부정한 것으로 취급하여, 다른 사람과의 신체적 접촉을 불허했을 뿐만 아니라(레 15:25-30) 성전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등의 종교적 격리까지도 강요받았던 중대한 병이었다. 여기에다 그녀가 12년 동안 그 병으로 시달린 것은 그녀의 고통이 장구했음을 시사한다.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 여기서 '아무'는 의사들을 가리키는데, 혈루증 앓는 여인은 12년 동안 의사들의 엉터리 의술에 재산을 다 탕진해 버렸고, 이로 인해서 그녀의 심령은 더욱더 피폐되어 버린 듯하다(막 5:26). 이 구절에서 누가는 혈루증이 당시로서는 불치병이었다는 나름대로의 진단을 내렸는데, 이는 그가 의술에 밝았던 의사였음을 보여주고 있다(골 4:14).
8:44 예수의 뒤로 와서. - 이 구절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불행했던 처지를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다. 즉 그녀는 그녀의 병으로 인해 얻은 부정한 여인이라는 사회적 낙인으로 감히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무리 가운데 섞여서 몰래 예수님의 등 뒤로 접근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접근은 비록 예수님과 무리들의 시선을 피하고자 했던 은밀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유일한 희망이 예수님께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거의 필사적인 접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옷 가에 손을 대니. -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상기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겉옷의 네 귀에 술(민 15:38; 신 22:12)을 달았던 점을 감안할 때, 그녀가 접촉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술들 중 하나일 것이다. 하여튼 그녀가 예수님의 신체를 접촉하지 않고 옷만 만진 것은 자신의 부정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옷 끝만 만져도 자신의 병은 치유될 수 있다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그녀가 자신의 혈루증의 치유에 예수님과의 신체적 접촉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면, 그녀는 옷 끝이 아닌 예수님의 몸을 만지고자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예수님의 능력과 정체에 대한 정확한 인식으로 믿음이 생겼을 것이고, 이것이 예수님의 옷깃만 만져도 혈루증이 치유될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르게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막 5:28).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 이 구절 역시 의사였던 누가의 특성을 엿볼 수 있는 바, '그쳤더라'는 표현을 통해서 혈루증이란 병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아무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그녀의 믿음대로 응답을 받아 완전히 치유되었다. 이는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에게는 그녀의 염원이 성취되는, 일생에 있어서 최고의 순간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8:45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 예수께서는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아시고 그에게 손을 댄 자가 누구인지를 물으셨다. 그러나 이는 예수께서 그에게 손을 댄 자가 누구인지 몰라서 하신 질문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전지하심으로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의 옷 가에 손을 댄는지를 알고 계셨다. 다만 예수께서 이처럼 질문하신 것은 여인이 치유된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구원했다는 것과 그녀가 더 이상 천대받는 부정한 병을 가진 여인이 아님을 무리들에게 공표하기 위해 이와 같은 질문을 하신 것이었다.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 베드로의 대답이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이런 의도로 대답을 했는데(막 5:31), 이야기인즉 무리들이 앞 다투어 예수님을 밀고 당기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이 닿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항변조이다. 이는 제자들의 영적 무지들을 보여 주는데, 이들은 종종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 하고 곡해하기도 했었다(막 8:15,16; 요 2:19-22; 3:3-5; 4:10-15; 6:52; 8:56-58; 11:11-13).
8:46 이는‥‥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 여기서 예수께서는 무리들과 자신과 많은 신체적인 접촉이 있었지만, 특별히 혈루증을 치유한 믿음의 손이 있었음을 밝히고 계신다. 물론 예수께서는 전지하신 성자 하나님으로서 이미 혈루증 앓던 여인의 접근 이유와 접촉 사실을 알고, 그 믿음에 마땅한 반응을 하심으로써 혈루증을 치유하셨지만,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높임으로써 자신의 능력이 수동적으로 발휘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다. 한편 마가의 병행 구절에서는 이 말씀을 하신 후 무리 중에 있는 여인을 찾으시려 둘러보셨다고 적고 있다(막 5:32).
8:47 여자가‥‥떨며. - 이 구절에서 확인되는 여인의 두려움은 단지 자신의 은밀한 치유 사실이 탄로되었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물론 이 여인의 믿음에 예수님만이 유일한 의원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치유 사실을 숨길 수 있다고 믿는 등 다소 이율배반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의 두려움은 자신을 치료하신 분이 단지 능력만 있는 분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여기서 '떨며'에 해당하는 '트레무사'는 신앙적 경건에서 오는 두려움을 나타내는데(고전 2:3; 고후 7:15; 엡6:5; 빌 2:12). 이러한 사실은 위의 사실을 잘 뒷받침해 준다.
8:48 딸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가테르'는 아버지가 자신의 딸을 부르는 호칭으로서, 예수님께서 특별히 이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자신의 자녀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부성적 이미지를 고려하신 까닭일 것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 이것은 여인의 혈루증 치유가 옷깃을 만지면 나을 수도 있다는 미신적 호기심의 결과가 아닌 그녀의 믿음의 소산임을 밝히시는 예수님의 공식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막 5:27), 이 분이야말로 자신의 혈루증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믿었고, 그 결과 치유의 은혜를 받게 된 것이다.
평안히 가라. - 이 구절은 전장에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에게 주셨던 말씀과 동일한데(눅 7:50), 이는 그동안 혈루증으로 인해 겪었을 육체적 ․ 정신적 고통에 대한 치유와 아울러 종교적 사회의 냉대로 인한 종교적 격리 상태의 해제이자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일원임을 공식적으로 공포해 주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전설에 의하면 이 여인의 이름은 베로니카(Veronica)인데, 훗날 그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로 가시는 길에서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녀가 받았던 은혜의 감격을 짐작케 해 준다고 하겠다.
8:49-56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삽화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혈루병에 걸린 여인에 대한 치유 사건을 소개한 누가(43-48절)는 다시 야이로의 딸에게로 관심을 돌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예수의 신적 권능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이적은 눅 7:11-17의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적에 이어 두 번째 이적이다. 이러한 이적들은 예수께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생명의 주가 되심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하여튼 본문을 보면 아이의 소생을 예고하시는 생명의 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당당한 모습이 나타나는데(50절), 실로 예수께서는 마치 자는 아이를 깨우듯 '아이야 일어나라'(54절)는 말씀 한 마디로 아이의 생명을 회복시키셨다(55절). 특별히 예수께서는 아이를 위해 울며 통곡하는 사람들을 향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는데(52절), 이는 실제로 아이가 죽지 않은 까닭이 아니라 잠시 후에 소생할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즉 예수께서는 그 안에 있는 자의 육체적 죽음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며 지극히 잠시 잠간 잠을 자는 것과 같음을 상기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생명의 주가 되는 동시에 종말에는 그 안에 있는 모든 자가 생명의 부활로 다시 일어나제 될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요 5:29; 11:25,26). 요 11장 자료노트 참조.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괴로운 이 세상과의 단절일 뿐이며 더 나은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고전 15:52-55; 계 21:4).
②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영과 육을 구원하실 참 생명의 주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의 명령에 부합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요 14:6).
8:49 아직 말씀하실 때. - 열두 해 혈루증 앓은 여인의 치유 사건은 예수님께서 백부장 야이로의 외동딸을 치유하기 위해 가는 도중에 생긴 일인데, 이 일로 시간이 지체되는 동안 야이로의 딸은 이미 죽어버렸다. 따라서 '아직 말씀하실 때'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사건으로 인해 야이로의 딸이 예수의 도착 전에 죽게 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그래서 외형상 예수님께서는 열두 해 혈루증 앓는 여인을 치유하시는 대신 야이로의 딸을 포기한 결과를 초래한 듯하지만,
이것은 나사로의 사건에서처럼(요 11:4,6,21,32) 예수님의 의도된 지연(delay)으로 보아야 한 것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 이것은 야이로의 집에서 보냄을 받은 사람의 의견인데, 이는 그가 이미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확인한데서 온 체념의 말투이다. 이것은 나사로가 예수님의 도착 전 죽게 되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가 보였던 태도와 동일한 것이다(요 11:21,32). 이 같은 태도는 인간적인 견지에서 볼 때 매우 예의 바른 행위로 볼 수도 있겠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는 예수님의 정체와 그 권세를 충분히 믿지 못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얼마 전에 사경에서 헤메는 가버나움 백부장의 종을 치유한 사건과 죽어버린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전례(눅 7:1-17)를 생각해 볼 때, 이 전달자의 행위는 불신앙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8:50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 예수님의 이 위로의 말씀은 회당장 야이로에게 주신 것이다. 분명 야이로는 자신의 딸의 죽음 소식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전달자의 말대로 예수님조차도 손을 쓸 수 없는 형편으로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야이로가 자신을 믿었던 그 믿음의 내용과 정도가 약하여 지지않도록 격려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격려는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분이라고만 생각한 데에서 생명까지도 불어 넣을 수 있는 신적 권위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에까지 신앙의 눈이 넓혀지도록 의도하신 것으로 보인다.
8:51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 예수님의 12제자 중 대표적인 자들로, 이들은 변화산 사건(눅 9:28)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때(막 14:33)에도 참여하는 특권을 누렸다. 여기서도 이들은 부모를 제외한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현장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8:52 울지 말라. - 장례식 때 우는 풍습은 유대인의 관습이기도 하지만, 어떤 지역, 어느 민족이든지 사별로 인한 통곡은 공통적인 것이다. 여기서 우는 무리들은 직업적인 고용꾼(렘 9:17)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소녀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을 감안해 볼 때, 가족과 가까운 친족, 이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울지 말라'고 하신 금지 명령은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다스리시는 권세가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수용하는 자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가 되겠지만, 이에 무지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냉소적인 반응만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하겠다(53절).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혹자는 예수의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가사 상태에 빠진 것이라고 주장한다(Oslshausen). 그러나 '잔다'는 표현은 성경에서 성도의 죽음에 관해서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신 31:16; 단 12:2; 행 7:60; 고전 15:18; 살전 4:13). 또한 예수께서는 죽은 지 3일이나 되는 나사로를 향해서도 '잔다'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야이로의 딸은 실제로 죽은 상태였다. 다만 여기서 예수께서 '잔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권세가 죽음을 확실히 다스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이 소녀가 비록 영 ․ 육간의 분리라는 자연적 죽음에 이르렀을 때라도(눅 8:55),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자는 사람을 깨우는 것처럼 쉽게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무리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8:53 저희가‥‥비웃더라. - 이 조소는 예수님에 의해서 애곡하는 것을 금지 당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이들의 울음은 죽음의 확실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에 대한 조소도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다. 결국 이들은 예수께서 아이를 일으키는 이적을 보는 것에서 제외되었다(막 5:40).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적 능력을 경험하는 자리에서 추방하신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를 믿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된다.
8:54 아이야 일어나라. - 이 말은 원래 아람어 '달리다굼'으로서(막 5:41), 누가는 이를 헬라어로 번역하여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 말은 본래 어머니가 늦잠 자는 아이를 깨울 때 사용하는 다정다감한 말이었다. 이를 예수께서는 죽은 아이를 살리는 말로 사용하심으로써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완화시키고, 죽음이 소녀에게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함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처럼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죽음은 잠자는 것 이상 아무 것도 아니며 죽은 자들은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깨우실 때 모두 일어나게 될 것이다(살전 4:16). 한편 성도의 부활에 대하여 요 11장 자료 노트와 그랜드 종합 교리 '종말론'을 참조하라.
8:55 그 영이 돌아와. - 누가만의 표현으로서, 이는 이 소녀가 영과 육이 분리된 자연적 죽음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원상 복귀되었음을 보여 준다.
먹을 것을 주라. - 이것은 다시 소생한 딸을 보고 환희와 기쁨으로 인해 그 배고픔을 헤아리지 못한 부모에게 주신 말씀으로, 예수님의 섬세한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비록 그 소녀가 예수님의 초월적인 이적에 의해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소녀의 생활은 정상적인 세상의 법칙의 지배를 받아야 함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아이의 소생을 공식적으로 확증하는 말이기도 하다.
8:56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와 그의 아내에게 한 당부의 말씀인데, 사실 그 준행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부모가 아니더라도 이미 소녀가 죽었던 사실을 보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고, 이들이 이 놀라운 소식을 침묵만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예수님의 당부는 이적의 현상에 참여한 부모들이 이 사건의 참된 의미는 잃어버리고, 그 사실에만 매몰되어 버리는
경향을 염려하신 데서 주신 것이라고 하겠다.
연구자료
갈릴리 바다를 중심한 예수의 사역
예수의 약 3년 반 동안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A.D. 27년 초 유대 지역에서의 사역과 A.D. 29년 중반 이후부터 이루어진 유대와 예루살렘 지역에서의 사역을 제외한 약 1년 반 이상의 기간 동안 행해진 사역들이 대부분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대표적인 사역들을 예로 들어보면 네 제자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부르심(마 4:18-22; 막 1:16-20; 눅 5:1-11), 산상 수훈 선포(마 5:1), 풍랑을 잠잠케 하심(마 8:23-27; 막 4:35-41 ; 눅 8:22-25). 가버나움에서의 중풍병자 치유(마 9:1-8; 막 2:1-12; 눅 5:17-26). 천국 비유들을 가르치심(마 13:1), 오병이어의 이적과 물위를 걸으심(마 14:13-33; 막 6:30-52; 눅 9:10-17; 요 6:1-21), 칠병이어의 기적(마 15:32-38; 막 8:1-9), 가다라 지방에서의 귀신을 쫓으심(마 8:28-34; 막 5:1-20; 눅 8:26-39) 등이다.
갈릴리 바다의 지리적 배경과 특징에 대해서는 막 4장 자료노트를 참조하기도 하고 여기서는 갈릴리 바다 주변 지역의 조감도와 갈릴리 근경에서 행해진 주의 주요 사역들을 연결시켜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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