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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38년 된 병자 치유 이적 및 안식일 논쟁과 예수의 신성에 대한 자기 증거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예수께서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절대 신성(神性)을 가지신 존재였으나 하나님이 태초부터 세우신 구속의 법에 따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임을 입증함으로써 결국 예수의 그리스도 직과 예수 안에서의 우리의 구원의 절대성을 확증하기 위하여 기록된 요한복음의 전반부에서 먼저 예수 공생애의 여러 사건 중에서도 이상의 사실을 잘 입증하는 여러 자료들 곧 예수의 관련자들의 증언들과 예수 자신이 행한 표적들과 자기 계시를 제시하는 1:19-12:50까지 일련 기사의 연속부분이다. 1:19-12:50은 예수의 공생애 개시 기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공식 입성하시어 이제 곧 십자가 수난을 당하기 전날 밤인 최후의 만찬 직전까지의 사건 중 이상의 진리를 입증할 수 있는 주요 기사들을 대략 연대순으로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요한은 주로 예수의 공생애 초기의 사역, 즉 제 1차 갈릴리 사역을 막 개시한 A.D. 27년 전반기와(1:1-3:6) 그리고 후반기(4:1-54) 사건들을 중심으로 기록했었다(4:35). 그러나 비록 본장의 사건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 사건은 4장의 사건으로부터 약 4개월 이상이 지난 때(요 14:53)에, 즉 A.D. 28년 초반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처럼 본장과 이어지는 제 6장은 계수에 대한 유대인의 배척이 고조되기 시작한 때 곧 공생애 중반기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문맥에서 본장의 내용을 개략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본장은 전체적으로 예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치유한 그리스도의 제 3의 표적(1-9절)을 계기로 하여 유대인들의 안식일 문제 제기와 예수의 응답(10-18절), 안식일 문제를 계기로 한 신성에 관한 예수의 자기 증거(17-47절) 등으로 그 내용의 깊이를 점차적으로 더해가고 있다.
안식일 논쟁은 본장뿐만 아니라 공관 복음서에서도 자주 제기되었던 문제이다(마 12:1-14; 막 2:23-3:6). 안식일 논쟁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은 마 12장 구속사적 개관을 참조토록 하고 여기서는 안식일에 노동을 금지하고 있는 구약 율법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구약의 안식일 노동 금지 규례(출 20:10)는 형식주의적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노동 금지에 전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6일간의 창조 사역 후 제 7일째에 여호와께서 안식하셨다는 것도 여호와가 6일 간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시지 않고 완전히 버려두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안식일에 일하셨기 때문에 나도 일한다(17절)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여호와께서 6일간의 창조 사역을 완성하신 후 제 7일 안식일에는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시고 다스리시는 섭리(providence)의 사역을 계속하셨음을 암시 한다. 그리고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구속사역을 이와 같은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교훈하고 계신다.
즉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성육신하신 제 2위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천지 창조 후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에 오염되어 창조 당시의 모습을 상실한 것을 회복시키는 섭리 사역의 일환인 재창조(再創造) 사역이라는 것이다. 재창조에 관한 세부 설명은 요 3장의 구속사적 개관과 사 43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그리고 이러한 재창조 사역의 핵심은 바로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주어진 육체의 온갖 질병들과 죽음까지 제거하는 것이며, 이 같은 재창조 사역의 완성은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성육신 초림하여 이 땅에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 승천하셨다가 다시 재림하시는 제 2위 성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최초 천지창조 당시처럼 하나님과 인간간의 온전한 교제 관계가 회복되는 때이다(19-29절). 이처럼 성경의 규례(規例)는 모두 구속사(救贖史)의 각 단계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와 사역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된 것들이다. 따라서 어떤 규례든지 형식보다 거기에 담긴 목적과 원리가 더욱 중요한 것이므로 그 제정 목적과 원리를 생각하며 지켜야 한다.
그리고 끝으로 30-47절에서는 위에서 언급한바 비단 안식일 노동 금지 규례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구약의 모세 율법의 전부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신약의 시발점이신 예수의 선구자가 된 세례인 요한의 증거까지도 이와 같이 제 2위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며, 그 증거들을 인본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편협된 관점에서 왜곡되게 받아들이지만 않는다면 그 증거들을 통해 참 생명과 영생에 이르게 되리라는 말씀으로 일차적으로는 당시의 유대인들을 향하여, 궁극적으로는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구속사적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깨달을 것을 촉구하시는 주님의 교훈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 올바른 구속사적 관점을 갖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더 나아가 참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데 있어 절대 요청됨을 깨닫는다. 그리고 를 계기로 하여 우리는 창조주이심과 동시에 죄로 말미암아 창조 당시의 본래 모습을 상실한 인간과 온 우주 만물을 회복케 하시는 재창조 사역의 주역(主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구원과 영생에 대한 소망과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해야 할 것이다.
외울 말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제 3표적 38년 된 병자 치유 이적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〇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안식일 논쟁과 유대인의 배척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신성에 대한 예수의 자기 증거
19 〇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30 〇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32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35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본문 & 자료노트
지도-5:1, 예수의 갈릴리와 예루살렘 왕래
보감-5:8, 주님의 직분과 관련 핵심 교훈
근본 하나님의 아들시며 그리스도이신 주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행하시는 여러 사역들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님의 여러 직분들을 발견하게 된다.
말씀
1. 구주: 내게 오라(마 11:28)
2. 교사: 내게 배우라(마 11:28)
3. 목자: 나를 따르라(요 10:27)
4. 왕;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5. 의원: 일어나 걸으라(요 5:8)
6. 주인: 올 때까지 장사하라(눅 19:13)
7. 친구: 함께 먹으라(계 3:20)
지리 배경-5:2-9 베데스다 못
본문에는 천사가 가끔 내려와 연못의 물을 동하게 할 때 가장 먼저 연못 속으로 들어가는 자는 치유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던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예수의 치유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베데스다 못의 위치와 그 유적 및 성경상에서 우리에게 상징하는 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위치
베데스다 못(Bethesda Pool)은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던 못으로서 예루살렘 성의 동쪽 스데반 문에서 약 80m 성 안으로 들어온 곳에 위치했다. 본래 이 못은 길이가 120m나 되는 긴 못으로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흙으로 메워져 있고, 북쪽 못의 한 부분에서 약간의 물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현재 이 못의 주위에는 성 안네교회(The Church of st. Ann리가 세워져 있다.
2. 유적 및 고고학
예수님 당시 이 못 둘레에는 다섯 행각이 있었다. 이에 대해 A.D. 333년 보르도의 한 순례자는 베데스다에 못 두 곳과 행각이 다섯 있었다고 진술했다. 또한 1888년 예루살렘 동북부의 발굴에서 성 안네교회의 서북쪽 위치에 행각 다섯이 있던 못이 발견되었는데, 그 행각의 퇴색한 프레스코 벽화에는 천사와 뭇이 그려져 있다.
3. 영적 교훈 및 상징적 의미
베데스다는 '은혜' 또는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집은 바로 베데스다와 같은 은혜와 자비의 집이며, 그곳에는 연못의 물과 같이 영혼이 병든 자를 치유하는 구원의 샘물이 있다.
한편 베데스다에는 그 치유의 능력으로 인해 항상 병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38년 된 병 자도 치유받기 위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고, 결국 병으로부터 구원받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의 집.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세워진 집은 남녀노소 병든 자, 연약한 자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머무르기에 적합하고, 누구나 구원의 샘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다(겔 47:1; 계 7:17). 다만 영혼의 질병이 낫기를 소망하고, 세상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는 수고를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요 5:2-9).
원어 연구-5:10, 옳지 아니하니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우크 엑세스틴'이다. 여기서 '우크'는 절대 부정을 나타내는 부사로서 뒤에 나오는 '엑세스틴'의 의미를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먼저 '엑세스틴'은 원형 '엑세이미의 3인칭 단수에 해당한다. 그리고 원형 '엑세이미'는 '~로 부터'(마 1:5; 요 1:16)라는 뜻의 '에크'와 '나는 ~이다'에 해당하는 '에이미'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엑세스틴'의 문자적인 의미는 '내가 밖으로 나가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다'가 된다. 이는 자신의 떳떳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인다는 의미를 가진다. '엑세스틴'은 성경에서 주로 '옳다'(마 12:10; 눅 6:9), '합당하다'(눅 14:3), '가하다'(고전 6:12; 10:23) 등의 동사적인 의미와 '권리'(authority; 요 18:31)를 뜻하는 명사로서도 쓰인다.
이들 동사 및 명사 의미들은 모두 어떤 법적인 기준에 근거하여 어떤 사실이나 행위가 잘못이 없고 합법적이며 정당한 것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아울러 어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권리가 법에 어긋남이 없이 합법적임을 나타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본절의 '옳지 아니하니라'는 말은 '법적으로 정당하지 않으며 가(可)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것은 문맥을 통하여 살펴볼 때 예수께 고침을 받은 병자가 자기가 누웠던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곧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노동 금지법(렘 17:21,22)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또 '엑세스틴'의 앞에 절대 부정 부사인 '우크'가 있기 때문에 그 의미는 한층 더 강한 부정을 나타내어 '법에 절대로 어긋나며 그릇된 행위다'라는 뜻을 갖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 병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을 기뻐하기 보다는 구약 율법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외적으로 율법을 준수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문제로 시비함으로써 백성들에게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게 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커다란 오류의 한 단면을 발견한다.
주요 주제-5:10-18 바리새인과 예수의 안식일 논쟁
마 12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5:19,20 주님의 사역 방법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수행 · 성취하셨다. 그리고 성경에는 주님께서 당신의 구속 사역을 어떠한 방법으로 수행하셨는가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이에 주님의 사역 방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결국 모든 사역자들의 귀감이 될 것이다.
1. 하나님의 뜻대로(마 26:39)
2. 기도하심으로(막 1:35)
3. 성령의 능력을 받음으로(요 3:34)
4. 자신을 부인하심으로(요 5:19)
5. 하나님의 권세로(요 10:18)
6. 하나님 영광만을 목적으로(요 17:4)
7. 하나님 말씀을 증거함으로(요 17:8)
8. 하나님의 이름으로(요 17:11)
도표-5:17-29 예수의 신성에 대한 자기 증거
1.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심(5:17,18)
2.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5:18)
3.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처럼 자신도 행하심(5:19)
4. 하나님같이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심(5:21)
5. 온 세상에 대한 심판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말씀하심(5:22,27)
6.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게 경배 받을 자라고 말씀하심(5:23)
7.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증거하심(6:46)
8. 성부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신다고 말씀하심(10:15)
9. 성부 하나님과 자신이 일체이심을 말씀하심(10:38)
10. 자기를 보는 것이 성부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 말씀하심(12:45)
11. 자신이 다시 성부 하나님께로 가실 것이라 말씀하심(16:28)
12. 창세 전부터 성부와 함께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심(17:5)
신학용어-5:19, 진실로 진실로
요 6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 -5:36,39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증인, 혹은 증거들
1. 시므온(눅 2:29-32)
2. 안나(눅 2:36-38)
3. 세례 요한(요 1:7,8,15,29-34)
4. 수가 성 여인(요 4:28-30)
5. 예수님의 역사(요 5:36)
6. 성경(요 5:39)
7. 성부 하나님(요 8:18)
8. 예수님 자신(요 8:18)
9. 예수님이 고쳐주신 한 소경(요 9:17)
10. 성령(요 15:26)
11. 예수님의 제자들(요 15:27)
12. 선지자들(행 10:43)
13. 스데반(행 22:20)
14. 바울(행 26:22,23)
15. 안디바(계 2:13)
도표 -5:19, 20성부와 성자에 대한 본서의 관계 묘사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구
1. 보이시는 자 보이는대로 행하는 자 5:19
2. 맡기시는 위탁받은 자 5:22
3. 주는 자 받는 자 5:26
4. 증거하시는 자 증거하심을 받은 자 5:37
5. 정하시는 자 성취하는 자 10:28
6. 거룩케 하신 보내는 자 거룩해진 자 10:36
7. 들으시는 자 말씀드리는 자 11:41,42
8. 영광주시는 자 영광받은 자 17:1
9. 사랑하시는 자 사랑받은 자 17:23
도표-5:30-47 예수의 신성에 대한 5대 증거
1. 세례 요한의 그리스도 증거(33-35절)
2. 아버지 하나님의 증거(36,37절)
3. 예수 자신의 역사를 통한 증거(36절)
4. 성경의 그리스도 증거(38-47절)
5. 모세의 그리스도 증거(46,47절)
보감 -5:40-47 영생을 얻지 못할 자들
1.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마 7:13)
2. 죄를 단호히 끊지 않는 자(마 18:8,9)
3. 주를 위해 세상 것을 버리지 않는 자(마 19:27-29)
4. 예수께 오기를 원하지 않는 자(요 5:40)
5.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지 못한 자(요 5:42)
6. 예수를 영접지 않는 자(요 5:43)
7. 세상 영광은 구하되 하나님께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는 자(요 5:44)
8. 성경을 믿지 않는 자(요 5:47)
9.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요 12:25)
10. 주의 시험을 참지 못하는 자(약 1:12)
5:1-9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
앞장 마지막 단락에서는 예수의 초기 갈릴리 사역과 관련,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의 두 번째 표적을 살펴보았다(요 4:46-54). 이제 본장은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그 밖의 행적(마 8,9장; 막 1,2장; 눅 4,5장)을 과감히 생략한 채 곧바로 예루살렘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본장에 언급되는 내용은 공관복음서에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차이점은 예수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온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공관복음 기자가 소홀히 다룬,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을 중심으로 본서를 기록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던 38년 된 병자(1-5절)를 고쳐주신 사건(6-9a절)을 소개한다. 이는 본서에 기록된 7대 표적 가운데 세 번째 표적으로, 예수님이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주관하시는 생명의 주이시자 동시에 권능의 주이심을 드러낸 사건이다(요 2장 연구자료, '요한복음의 7대 표적과 7대 선언' 참조). 그런데 이 사건이 행해진 날은 안식일이었다(9b절) 따라서 이 사건은 다음 단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로부터 극심한 반감을 초래한다(10-18절). 하지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행위는 매우 의도적인 것으로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마 12:8; 막 2:28; 눅 6:5).
그러므로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① 예수 그리스도를 접하지 못한 자들은 스스로 아무리 노력하여도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38년 된 병자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부질없는 희망에 사로잡혀 엉뚱한 시도를 반복했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났을 때 그의 모든 문제는 단번에 해결된 것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만이 오직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전능자시라는 점이다. 사실 절망 속에 빠져 있던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를 향해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고 말씀하신 것은 단지 육체적 질병으로부터의 해방뿐만 아니라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구원을 얻으라고 한 생명의 선언이었다. 그러므로 본문 역시 예수께서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결국에는 영원한 죽음의 자리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인간들(롬 3:10-18)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요 1:14)요 생명의 구주(39,40절)이심을 명백히 증거해 준다.
5:1 그 후에. - '메타 타우타'라는 표현은 요한에게 있어 복수나(14절, 요 3:22; 6:11; 7:
1; 19:38; 21:1) 단수 형태로('타우타' 대신, '투토'로, 요 2:12; 11:7,11; 19:28) 자주 등장하는 시간을 표시하는 부사구이다. 단수의 경우는 시간 간격이 짧고, 복수일 때는 보다 긴 시간을 가리킨다는 견해(Bernard)가 있으나 이보다는 의미의 차이 없이 변형이나 유사한 단어를 교차 사용하는 요한의 일반적 문체(Literaly style)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Bultmann. Morris). 즉 이 부사구는 앞 사건 이후 다소 시간이 흘렀음과 아울러 장면의 전환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 4장의 사마리아 전도 때가 추수하기 4개월 전이었으므로(요 4:35)이 절기가 추수와 관련된 오순절이라고(신 16:9-12 참조) 보는 견해를 비롯하여(Calvin, Bengel) 유월절(Lightgfoot, Luther. Morris), 나팔절(Westcott), 초막절(Ewald), 부림절(Meyer, Lange)등 유대인의 명절이란 명절은 거의 다 거론된다. 그러나 웨스트콧(Westcott)의 주장대로 성경 본문 자체에 명확한 언급이 없으므로 이 절기를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본서에서 '유대인의 명절'이라는 표현을 유월절(요 6:4)이나 초막절(요 7:2)에 적용하고 있으며 본절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는 묘사가 순례 명절 중 하나일 것이라는 암시를 고려할 때 그 양자 중 하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근래의 학자들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연대를 재구성 하는 과정 에서 ① 사마리아 전도(12월~1월) ② 본절의 부림절(3월) ③ 6:4의 유월절(4월)의 시간적 배열이 문맥상 자연스럽다고 본다. 왜냐하면 다른 견해를 취하면 예수의 생애는 이 견해를 취한 것보다 일 년 늘어나 4장과 6장 사이에 일 년의 기간이 내재되어 있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따라서 확실치는 않으나 이 명절을 하만의 모략에서 구원받은 사건의 기록인 에스더서에 배경을 둔 축하 절기인 부림절로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울 듯하다(에 9:26-32).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 명절에 예루살렘에 모이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라 예수께서도 상경(上京)하셨다. 만약 이 명절을 부림절로 본다면 의무의 조항으로 주어진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신 16:16) 등의 명절도 예루살렘에서 보내시는 모범을 보이신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올라가시니라'가 단수로 기록된 것은 제자들의 동행을 배제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문체인 듯하다(요 2:13 참조).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 예루살렘 성의 북편에 위치한 문으로 아마도 제물로 사응되기 위한 양들이 많이 들어갔던 문이거나(느 3:1,32; 12:39) 이 문 주변에 제물을 팔고 사기 위한 양 시장이 있었기에(KJV의 'Sheep Market' 참조)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한편 본문에서 '있는'(에스틴)이 현재형으로 사용된 데 대해 요한이 본서를 기록할 당시에도 이 양문이 존재했다는 표현으로 보아 이는 예루살렘 멸망(A.D. 70년) 이전에 본서가 기록된 하나의 증거일 수도 있다는 견해가 있다(Morris). 그러나 과거를 현재형으로 기록하는 것이나(Westcott), 미래를 부정과거나 완료형으로까지 표현하는 용법이(요 17:1,19) 요한에게 일반적이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무지스러운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즉 그 시대를 다 살아온 한 노인이 자신이 잘 알던 지역을 회상하며, 성문과 성벽이 무너진 멸망 후에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 분명한 연못을 염두에 두고, '있는'(is)이라고 현재형으로 표현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 '히브리 말로'란 표현은 히브리어를 알지 못하는 헬라 서기관들이 추가한 표현이라고 보는 견해(Morris) 보다는 요한 자신이 복음서의 청중들이 히브리어에 익숙지 못한 상황을 고려해 사용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편 '베데스다'란 명칭의 정확한 히브리어가 무엇인가에 따라 그 명칭의 뜻이 다음과 같이 달라진다. 즉 이는 ① 올리브의 집(Bethzatha, 벳사다) ② 어부의 집(Bethsaida, 벳세이다) ③ 긍휼의 집(Bethesda, 베데스다) 등으로 다양하게 읽힐 수 있으나 사본의 증거 등을 고려할 때 뜨거 베데스다가 가장 적합한 독법일 듯하다(Jeremiad, Morris).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 '행각'이란 지붕이 딸린 정자(亭子)를 말한다. 오늘날 발굴된 이곳에는 쌍둥이 연못이 있고, 그 둘레와 중앙에는 행각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5:3,4 그 안에는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의 누워(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 '많은 병자'에서 '병자'는 '연약하다', '무력하다'(아스데네오)에서 유래한 말로 이어 나오는 외형적 병세를 가진 사람들과는 달리 전반적으로 병약한 내적 질환을 앓고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또한 '혈기 마른 자'란 '크세론'( )으로서 문자적으로는 '말라버린'의 뜻이므로 마비증으로 인해 수족이 오그라든 환자를 가리키는 듯하다. 헨드릭슨(Hendriksen)은 삼십팔 년 된 병자가 바로 이 혈기 마른 자들 중에 하나였을 것으로 본다.
이는 천사들이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물의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이든지 낫게 됨이러라.) - 개역성경이 괄호로 묶는 이 부분은 사본들 중 알렉산드리아 사본(A), 레기우스 사본(L) 등 소수의 사본에만 포함되어 있고 바티칸 사본(B), 에브라임 사본(C), 베자 사본(D) 등 오래되고 권위 있는 사본들과 시리아역 (Synacs), 콥틱 역(Coptics). 라틴역(Vulgates) 등 중요한 역본들에는 생략되어 있다. 비록 터툴리안(Tertullian)이나 칼빈(Calvin)은 이 구절을 원본으로 생각하고 주석하지만 대부분의 권위 있는 학자들은 이 구절이 본래 원본에 있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일반 민중들의 전설이나(Godet) 병자의 신념을 서기관들이 해설적으로 부기(附記)한 난외주가(Hendriksen) 필사를 계속하면서 일부 본문 속에 삽입된 것으로 본다(Brown, Bernard. Morris. Robertson). 그러나 이 부분은 당시 병자들이 연못가에 머물고 있었던 까닭을 보여 주어 본문의 이해를 돕는 것이므로 굳이 삭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5: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 '삼십팔 년'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우화적(allegorical) 해석(Wright)은 38년을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정착하기 이전인 광야 유랑기를 비유한 것으로 (신 2:14)보며 당시 이스라엘이 오래 동안 병에 시달린 이 병자처럼 영적 활력을 잃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보다는 이 수치는 그 병자가 실제로 투병한 기간을 말한다고 봄이 보다 타당하다. 그 정확한 투병 연수에 대해서는 요한이 주변 사람들에게서 전해 들었을 수도 있고 예수의 전지(全知)하신 신적 통찰력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6절). 또한 요한이 이 기간을 의도적으로 밝힌 것은 당시 이 병자의 절망적 상황과 더불어 이를 해결하신 예수의 신적 능력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는 이 병자를 고치신 표적으로 인해 발생한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고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과 동일한 능력으로 예수 자신도 전능하심을 보이신다는 점과 그 의미가 통한다. 동일하게 요한은 요 9:1의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의 치유, 요 11:17의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자의 부활 등을 통해서도 그리스도가 가진 바로 이러한 신적 능력을 묘사해 준다. 한편 이 사람의 '병명'에 대해서는 정확한 제시가 없지만 거동이 불편하고(7절) '자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마 9:6; 막 2:11; 눅 5:18) '혈기 마른 자'이거나(3절 주석 참조) '중풍병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 '아시고'(그누스)가 부정과거형으로 쓰인 것은 현재적인 지각(知覺)에 의해서 그 무엇을 파악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본성 가운데 내재한 그리스도의 본래적인 전지성(全知性)을 의미한다(요 2:24; 4:18).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이 질문은 고대 근동의 걸인들이 치료되면 타인의 동정을 얻을 수 없게 됨에 따라 구걸 행위를 통한 생계 수단을 잃어버릴까 염려하기도 하므로 먼저 병자의 뜻을 물어보신 것이란 주장이 있다(Findlay).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동의를 구하거나 그에게 낫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낫고자 하면 나를 의지하라는 믿음에의 요구도 담겨져 있다. 이는 모든 이적의 궁극적인 목적이 믿음을 통한 구원의 확실성을 보여주는 것이란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 본절은 다시 한 번 베데스다 연못과 관련된 당시의 대중적인 전설이, 3절 하반절과 4절의 내용이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치유의 기회는 늘 첫 번째로 못에 내려가는 병자에게만 주어졌다. 따라서 38 년 된 환자가 '자기'를 강조하는 것같이('에고'로서 강조형이 사용됨) 이 못에는 저마다 '자기만을 위해서'라는 이기적 '불문율'이 횡행하였다. 이 병자가 투병 기간 38년 동안 내내 이곳에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오랜 세월 그곳에 있었을 것인데, 그 연못은 이 중환자를 위한 배려가 전혀 없는 인생의 치열한 격전장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 병자는 예수가 자신을 연못으로 넣어줄 조력자가 되기를 바랬다. 즉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힘을 빌리지 않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 본절은 네 명의 친구들에 의해 인도된 중풍 병자에 대한 묘사(막 2:1-12)와 거의 일치한다. 명령하시는 말씀의 내용도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까지는 막 2:11과 완전히 일치하고 최종 명령인 '걸어가라'(페리파테이)만은 '집으로 가라'(휘파게)와 차이 난다. 여기서 '걸어가라'는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서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걸어가라 란 의미이다. 즉 이 명령은 그 병자의 완전하며 지속적인 치유를 보여 준다. '자리'에 해당하는 '크라바톤'도 마가의 표현과 일치하는데 이 용어는 가난한 자들이 침상 대용으로 사용하던(Moulton) 얇은 메트리스를 말한다.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 '곧'(유데오스)은 마가가 애용하는 '유뒤스'와 동의어로 예수의 치료 사역이 '즉각적으로' 효력을 발휘했음을 강조한다. 병자는 예수의 도움을 받아 천사가 물을 동하게 하는 능력을 힘입어 고침 받고자 했으나, 예수께서는 친히 말씀 한 마디로 그 병자를 치유하심으로써 천사보다 더욱 뛰어난 신적 능력을 지니신 존재임을 입증하셨다.
이 날은 안식일이니. - 병자 치유의 날짜를 밝히는 것은 이것이 추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복음서들은 예수와 대적자들 간의 논쟁과 갈등을 여러 각도로 묘사하는데, 그 중 이 안식일 문제가 중요한 항목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뿐만 아니라 갈릴리 지방에까지 예수를 추적하여(막 3:22; 7:1)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이 부분이 첫 번째 제기되는 안식일 문제임과 동시에 대적들의 공개적 적대감의 첫 번째 표출이다. 하지만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자세는 일관된 것이었기에 결국 유대의 당국자들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다. '바리새인과 예수의 안식일 논쟁'은 마 12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5:10-18 안식일 논쟁
본문은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앞 단락의 사건(19절)이 계기가 되어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시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즉 유대인들은 38년 동안이나 중병으로 신음하던 사람이 드디어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된 사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으며, 다만 안식일에 율법을 위반하고 병자를 고쳤다는 이유로 예수님께 항의하며 분노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태도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망각한 채 형식주의와 외식주의에 철저히 물들어 버린 유대 종교를 맹종한 결과였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만물을 보존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 사역'에 따라 자신도 쉬지 않고 일하신다고 말씀하심으로써(17절), 자신이 성자 하나님이심을 증거함과 아울러 (18절)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만이 율법을 올바로 준수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교훈하셨다. 즉 안식일을 올바로 성수한다는 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을 적극 실천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의 참정신은 도외시한 채 예수께서 안식일에 일한 것에만 집착하여 문제 삼는 전도된 가치관을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거듭되었던 안식일 논쟁에 대하여는 마 12장 자료노트 '바리새인과 예수의 안식일 논쟁'을 참조하라.
한편 예수께서 안식일에 38년 병자를 고치신 일은 유대인들의 거센 반발과 분노를 자아내었을 뿐 아니라 더욱이 문제를 제기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께서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로 칭하시면서, 그분의 계속적 창조 사역에 따라 자신도 사역할 뿐이라고 대답하신 것 (17절)은 더욱더 사태를 악화시켰다. 즉 그러한 예수님의 자기 선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하나님을 동격으로 여긴 신성 모독을 범한 자로 정죄하며, 아예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기에 이른 것이다(18절). 이는 곧 앞으로 계속될 예수 핍박의 성격을 예시해 주는데 실제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결국 이를 부인한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요 19:6-30).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주일 성수의 개념을 율법적으로 이해하여 해야 할 일도 바로 행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주일을 지키는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 안식일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실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마 12:9-13). 물론 본문에서 얘기하는 바는 단지 안식일과 관련된 교훈인 것만은 아니고 이를 통해 바른 성경의 이해를 촉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전체의 모든 부문에서 율법의 근본정신을 구현해 나가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성도의 본분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참된 교사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주시고자 한 교훈의 핵심이다.
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 문자적 의미대로 유대 지방 사람이나 유대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요한은 이 단어를 일반적으로 유대교의 교직자들, 즉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그의 추종세력을 가리키는데 사용하고 있다(15절 요 9: 22:18; 3,12,28-31).
병 나은. - '나은'(토 테데라퓨메노)은 완료 수동태이므로 이제 병이 완전히 나아진 상태에 있음을 보여 준다.
안식일 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이 옳지 아니 하더라 아니하니라. - 유대인의 장로의 유전을 집대성한 미쉬나 중 '사바드' 편 72 에는 안식일에 금하는 39가지의 일이 나오는데, 그 마지막 금령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물건을 옮기는 것'이다. 이는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라는 안식일을 규정하는 제 4계명을 문자적으로 확대 해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짐을 지지 않는 것을 생활화했다(느 13:19; 렘 17:21). 한편 '사바드' 10:5에는 '산 사람을 행상(行床)에 실어 운반할 경우에는 그 행상이 2차적 의미를 갖기에 관계없다'는 구절이 있는데(Morris), 그렇다면 본절에서 유대인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사람이 타지 아니한상을 ‘들고'간 데 그 원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8년이나 병상에 누워 있었던 불쌍하고 가난한 자가 보잘것 없는 침상을 ‘들고'걸어갈 수 있었다는 기쁨에 동참하기 이전에, 이 행위를 안식일 노동의 죄로 보는 유대인들의 시각은 영육 간에 안식을 부여하고 천국에서 누릴 완전한 안식을 예표하는 안식일의 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안식일은 축복과 기쁨의 날이었으나(C. Montefiore) 세속화하려는 경향을 막기 위한 노력으로 여러 금령들이 제정된 것은 이해가 되지만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본래의 의미를 망각하고 형식에 비중을 두는 것에 있다. 이제 이들 유대인들과 충돌하시는 예수의 의(意中)에는 유대인들이 왜곡하고 있는 안식일의 본 의미를 찾아 주려 함이었다.
5:11 대답하되 너희가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한대. - 고침 받은 자가 자기를 고친 예수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단지 예수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그'(에케이노스) 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사람이 예수를 알지 못한 것은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께서 그 자리를 피하셨기(13절)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추궁도 그렇고 이 사람의 변명도 모두 '자리를 들고 걸어간' 안식일 준수법 위반 여부에 쏠려 있는 것은 이 사건의 진정한 본질을 호도 (塗)하는 것이요, 인간의 영적 지각 능력이 너무나 낮음을 보여 준다(Bown). 들은 이 질문 보다는 '누가 너를 낫게 했느냐'고 물어야 했다(Grotius).
5: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이아데이스'는 10절의 ‘병 나은 사람'과는 조금 다르게 단 회적으로 치료받은 사실을 강조한다. 이 사람이 예수를 알지 못했던 것은 예수의 명령에 따라 자리를 들고 걸어갔을 때 놀란 군중의 환호성이 있었으며 예수가 몸을 피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많으므로 피하셨음이라. '피하셨음이라'에 해당하는 '엑세뉴센'은 70인 역을(삿 18:26; 왕하 2:24; 23:16; 마카비 3서 3:22) 제외하고는 신약에서는 단 한번 사용된 단어로서 '머리를 돌려 버리다', '몸을 빼내다'란 뜻이며 도망하는 행위가 아닌 자의적(自意的)인 물러남을 표현한다(Bernard). 또한 '사람이 많으므로'(오클루 온토스)라는 절(節)에서 '오클류'는 '군중'이란 뜻을 지닌 '오클로스'의 절대 소유격으로서 ① 예수께서 피신한 방법, 즉 예수께서 군중 속으로 피해 들어가신 것. ② 피신하신 이유, 즉 사람들이 많아서 피해 가심. 양자로 다 해석이 가능하다(Morris). 즉 예수께서는 이적을 목격한 자들의 성가신 질문이나 추정을 피하시기 위해 군중들 사이로 몸을 숨기신 듯하다.
5:14 그 후에. - 1절 주석 참조.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 후에 소경이었던 사람의 경우와 같이(요 9:35) 예수께서 능동적으로 그 사람을 찾으셨다. 이는 그 사람의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시는 세심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그 사람이 성전에 있었다는 묘사를 병에서 놓임 받은 그가 성전에서 감사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 그곳에 갔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으나(Morris, Bernard, 막 1:44; 눅 17:14) 여기서 '성전'에 사용된 헬라어 '히에로'는 제사를 드리는 '성소'라기보다는 사람들이 모이는 성전 뜰 경내를 가리키는 단어이므로 이런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 유대인들의 문제 제기(안식일 문제)를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한편 '네가 나았으니'라고 말씀하시며 이적의 본래적인 목적에 관심을 두신다. '네가 나았으니'(휘기네스 게고나스)는 완료형으로 치료하신 당사자인 신적 능력을 지니신 예수께서 보증하시는 치유의 완전성을 표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물이 동할 때에 고침 받은 사람이 있었더라도 그들 중에는 재발하는 사람이 있었을 터이지만, 예수님의 신적 능력으로 고침 받은 이 사람에게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Morris). 따라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죄를 지으면 다시금 발병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에 38년간 육체를 괴롭히던 병은 완전히 치유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그 사람이 과거에도 죄를 지었고 현재도 계속 죄를 짓고 있으나 이 시점(즉 그 사람이 완전히 나은 시점에서 예수의 강조점은 이제 더 이상 죄된 생활을 하지 말고(sinno longer) '죄를 포기하라'(Good Speed, Morris)는 원리론적이고 교훈적인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죄 때문에 결코 불행이 오지 않는다는 말씀은 아니다. 즉 문맥상으로 볼 때 죄를 짓게 되면 과거의 질병 보다 더한 질병이나 영혼의 상함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병에서 놓임 받은 즐거움으로 인하여 과거의 죄나 현재의 과오를 간과하지 말고 영혼의 구원과 성결을 위해 더욱 힘쓰라는 권고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 자신을 낫게 한 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11절)하기에 안식일에 물건을 옮기는 일을 했다는 유일한 죄명을 가진 이 사람은 설령 안식일을 범한 범죄자로 처벌을 받을 위기에 놓여있었다는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예수'라는 이름을 알자마자 곧바로 고발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지만 안식일 준수법을 어긴 범법 사실에 신경이 곤두선 유대인들이(10절)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라 호칭한 것과는(12절) 달리 이 사람은 자신이 치유 받은 더 근본적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를 '자기를 고친 이'로 호칭한 것으로 보아 예수를 모함하려는 악의는(Lange) 아닌 단순히 안식일 법 저촉의 책임을 회피하려는(Godet)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요 9장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자의 확신에 찬 행동에는 미치지 못하는 신앙의 나약함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 여기서 '이러한 일'(타우타)은 복수형이므로 예수께서는 단순히 38년 된 병자 치유 사건 외에도 본서에 기록되지 않은 안식일에 행하신 다른 일도 있는 듯하다. 또한 '행하신다'(에포이에이)는 표현 역시 미완료 시제로서 계속 행하고 계심을 암시한다. 이로 보아 본절은 당시 유대 교권주의자들이 ① 예수께서 이 사건 외에도 안식일 준수법을 자주 어기셨으며(C. Williams) ② 예수의 행위가 상습적이라는 내용으로 예수를 고발한 듯하다(Marris). 또한 '핍박하게'라는 동사 '에디오'도 '철저히 추적하다', '몰아 수렁에 콘' 빠뜨리다'란 뜻이 있는 '디오코'의 미완료 과거이다. 이는 유대교권주의자들이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추적하듯이 집요하고 지속적으로 예수를 핍박함을 가리킨다.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 '이르시되'(아페크리나토)는 제 1부정과거 중간태로서 19절의 '이르시되'와 더불어 본서에 78회 나오는 '아포크리노마이' 동사 중에서(Morris) 독특한 중간태의 형태를 지닌다. 이러한 용어는 유대인들의 고소나 박해(16절)에 대한 자기 변호적인 성격이 강한 '법적인 공식 답변'을 말한다(Abbott, Bernard).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행위가 정당함을 중심적으로 선언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마 27:12; 막 14:61; 눅 23:9의 유사한 예를 참조하고 요 12:23; 13:38; 18:34과 비교할 때 더욱 분명해 진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 공관복음에 나오는 안식일 논쟁 기록은 대개 두 가지 정도의 논거를 가지고 있다. ① 선행과 생명에 대한 사랑의 우월성(마 12:11;막 3:4; 눅 6:9; 13:15) ② 구약적 계율을 넘어서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논리(마 12:38; 막 2:25-28; 눅 6:3-5). 그러나 요한은 공관복음 기자들의 논리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안식일 문제를 접근한다. '내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독생자만이 쓰실 수 있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에서도 암시되듯이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께만 특징 지워지는 고유한 안식일 권한을(출 15:11; 시 89:8; 사 46:5) 자신에게도 적용하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의 이 말씀을 듣고 놀란 점은 ①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므로 신성모독 하였다는 것과 ② 6일간의 창조 사역 이후 제 7일에 쉬신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신다는 생소한 논리로 안식일 법에 저촉된 행위를 합리화 한다는 것이었다. 보통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나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표현했고 그 외의 경우에 이러한 표현은 있을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고 함으로써 아버지와 자신이 동일한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언명하셨다(Lenski). 또한 아버지의 활동이 지금도 계속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창조 사역의 6일 이후에도 지금까지 계속해서 모든 존재들을 생존케 하며 우주를 운행하시는 일을 계속하고 계심을 분명히 하셨다. 이러한 논리로써 예수께서는 성부와 동등하신 성자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사역을 하시는 것은 당연함을 논증하셨다.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 -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로 주장하는 심각한 도전적인 말씀을 율법을 자구적으로만 이해하는 유대인들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안식일 법과 보다 더한 신성모독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편 하나님과 '동등으로'(이디온) 삼았다는 표현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을 '내'(무) 아버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17절). 이러한 예수의 말을 유대의 교권주의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여겼으며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아담의 죄악된 시도(창 3:5,6)와 유사한 교만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 하에 예수의 안식일 범과는 하나님과 같다는 그릇된 사고에 대한 한 가지 증거에 불과한 것으로 유대인은 생각했을 것이다. '범할'(엘뤼엔)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안식일 규례를 '위반하는' 정도의 행위라기보다는 안식일 자체를 파괴하고', '묵살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W. Bauer). 따라서 이러한 신성모독이 결부된 안식일 범과의 포착 이후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결정적인 모의로 사건을 몰아갔다(레 24:11-16 참조). 유대인들의 이러한 모의와 비난은 예수께서 스스로에 대하여 또 다른 오해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메시야'라는 직접적인 칭호의 사용을 꺼려하시면서 대중적인 정치적 이미지의 확대를 억제하시는 하나의 원인으로도 작용했을 것이다(A. Robertson). 한편 A.D. 5세기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에 대항하여 아다나시우스(Athanasius)를 중심한 정통 교리는 이 구절을 근거하여 '성자는 신성에 있어 아버지와 동등하시다'는 교리를 확립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아버지와의 동등성을 강조하신 예수께서는 요 14:28에서는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 간의 존재론적인 동일성(essential equality)과 아울러 기능적인 종속성(functional subordination)을 동시에 강조하는 요한의 독특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묘사에 기인한다.
5:19-29 하나님과 동등됨을 선언한 예수
앞 단락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일은 형식적인 율법 준수만을 고집했던 유대인들의 거센 반발과 분노를 자아내었다(10-16절). 더욱이 이러한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께서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로 칭하시면서, '그분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계속적 창조사역에 따라 자신도 사역할 뿐이라고 대답하신 것(17절)은 더욱더 사태를 악화시켰다. 즉, 그러한 예수님의 자기 선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하나님을 동격으로 여긴 신성 모독을 범한 자로 정죄하며, 아예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기에 이른 것이다(18절). 이는 공생애 기간 동안 계속될 예수 핍박의 성격을 예시해 주는데, 실상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결국 이를 부인하고 자신들의 왜곡된 가치관과 기득권을 지키려던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요 19:6-16).
이와 같은 상황 하에 이제 본문은 예수께서 성난 유대인들을 향해 성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명확하게 증거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즉,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神性)을 지니고 계신다는 사실이 4가지 이유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되고 있다. ① 하나님과 예수 사이에는 전혀 비밀이 없으시다(19,20절). ② 하나님과 예수님은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는 부활 사역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21절). ③ 하나님과 예수님은 심판 사역에도 함께 동참하시되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심판의 권세를 위임하셨고(22절)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심판의 권세를 행사하신다(30절). ④ 하나님과 예수님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함께 경배를 받으신다(23절). 결국 이와 같은 본문의 내용은 비록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사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빌 2:6-8).
그리고 자신과 하나님의 동등됨을 선언하신 예수님께서는 곧이어, 누구든 자신의 말씀을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에 참예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는 자는 심판의 부활에 처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4-29절). 이는 곧 아무리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자처하는 유대인들이라 할지라도,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최후 심판의 권세를 위임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는 결코 구원과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경고이다. 이처럼 본서는 예수의 하나님 아들되심과 그를 믿는 결과가 영생이란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기록되었는 바(요 20:31)이 부분도 이러한 기록 목적에 충실을 기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도 자기 수련이나 선행을 따라 영생과 심판이 결정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자체가 바로 영생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지 않는 것은 영벌임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이 일로 핑계할 수 있는 자가 전혀 없으니 때가 더 늦기 전에 누구든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이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벧후 3:9).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 17절 주석 참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요 1:51 주석과 21:18 주석을 참조하라.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 이후부터 본장 전체는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되심을 스스로 증거하며 그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긴 강화(discourse)가 이어진다. 비록 이 위대한 변증이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을 감화시켜 그들을 돌이키지는 못했지만(47절 참조), 그들의 생각의 한계를 밝히시며 침묵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이를 위해 먼저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를 대항하는 아들이 아니고 철저히 종속되어 있음을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긴다는 유대인들의 편향된 시각을 일축하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말이 아들이 아버지께 비굴하게 굴종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Morris). 예수께서는 스스로 오신 것도 아니요(요7:28; 8:42)그 자신의 말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요 3:34; 8:26; 12:49)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신'(20절)다는 사실이 전제됨으로 인하여 필연코 요 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결론을 유도케 한다. 따라서 본절은 결과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하게 소유한 본질과 능력의 원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J. Giblet).
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 아들이 아버지와 동등하신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원문에서는 '왜냐하면'(가르)이란 접속사가 선행한다. 한편 '사랑하사'에 대해 요한은 이에 해당하는 가장 보편적 용어인 '아가파오'와 '필레오'를 거의 의미 구별 없이 교차적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 사용된 '필레오'는 요한이 다루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사랑에 적용된 유일한 경우라는 사실에 중요성을 부여해야 할 듯하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 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신적·희생적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파오'를 여섯 번이나 적용하는 요한이(Brown) 유독 이곳에만 혈육 간에 따뜻하며 정열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필레오'를 사용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예수 자신의 말씀을 통해 증거하는 것이다(Bernard). 한편 '자기의 행하시는 것'이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계획을 말한다. 특히 이 상황에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을 직접적으로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인 인간의 영적 구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범위를 좁힌다면 21절에 제시된 죽은 자들을 일으키는 기적을 말한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병자를 낫게 하실 뿐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구주로서 육체는 물론 영혼의 생명까지 부여하시는 분이시다.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치료의 이적은 영생(eternal life)의 능력의 한 표시(a sign)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능력을 보게 될 때 그 외적인 현상만을 보고도 크게 놀랄 것이다. 한편 '너희'(휘메이스)가 강조형으로 나타나 그들의 충격이 남다를 것임을 표현해 준다.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살리심 같이. -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에게 다시 소생하는 생명을 주신다는 사상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나타난다(신 32:39; 삼상 2:6; 왕상 17:17-24; 왕하 4:31-37; 5:7). 따라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사람들도 그리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Morris). 다만 이 말에 뒤이어 '같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예수 자신이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의 주가 되심을 밝히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신성 모독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권능을 가지셨다는 사실은 나사로를 살리심,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을 통해 분명히 입증되었다(막 5:35-43; 눅 7:12-15; 요 11:39-44). 그러나 본절은 예수께서 육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 장차 영생을 누리게 하는 권능을 소유하셨음을 뜻한다. 한편 불트만(Bultmann)은 21-23절을 아버지께서 종말론적 심판을 예수에게 위임한 사실에 관한 기록이라고 주장한다. 즉 본절은 예수가 심판의 자리에서 택함 받은 자에게 생명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을 단순히 그리스도 재림 이후에 있을 심판과 관련된 일회적 사실에만 적용시키는 것은 본서의 저자 요한이 이미 요 4:46-5:9에 희망 없는 육신들에게 생명의 활기를 불어 넣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예수의 구속적인 사역이 인류에게 영생을 주려는 것이라는(요 3:16) 포괄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을 간과한 결과로 나타난 오해이다(Murray). 즉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할 때 그리스도의 살리시는 사역은 과거·현재·미래에 계속 이어지는 구속자 그리스도의 고유한 사역이다.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아버지께서 보이시는 두 번째 '더 큰 일'(20절)은 바로 '심판'에 관한 일이다. 본래 '심판권'은 창조주되신 하나님의 독창적인 것이지만(신 1:17)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 3:35) 하나님의 심판권 역시 성자되신 예수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행 17:31). 이 심판권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를 부활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멸하신 마지막 대 심판 이후 다시 성부 하나님께 돌려질 것이다(고전 15:23-28). 한편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심같이' 자신이 따라 하신다는 일면 피동적인 어조로 말씀하셨으나 본절에서는 성자의 권위를 한층 강조함으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신성을 보다 강조적으로 드러내신다(Morris).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이미 그가 신성모독의 혐의를 덮어 쓰고 있는데 대한(18절) 변호의 역할을 하는 발언이기도 하다(Bernard). 한편 그리스도의 심판이 인간의 그것과 구분되는 차이에 대해서는 8:15 주석을 참조하라.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 본절에 4번 반복되는 '공경하다'란 단어는(티마오) '명예롭게 하다', '영광스럽게 하다'라는 뜻이다. 결국 성부의 영광과 동일한 영광을 가진 성자에 대한 본절의 증거는 생명을 주시고(21절) 심판권을 가진(22절) 성자에게 인간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지를 설명하여 주는 것이다(J. Bligh. R. Brown). 성자의 영광은 생명을 주시고 심판하시는 성부로부터 흘러나온다. 따라서 신적 기원을 지닌 그리스도에 대해 인간이 공경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를 거부했다. 여기서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느니라'는 구절은 공관복음서에서도 발견되며 (마 10:40; 눅 10:16) 본서에나(23절) 요한 서신에(요일 2:23) 일관되게 나타나는 사상이다. 아마도 이러한 정형화(定型化)된 표현은 초대 교회 당시 성자에게 하나님의 합당한 신성을 부여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변증의 목적'으로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인 듯하다(Brown). 동시에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게 공경을 받아야 하며 이것을 거부한 자는 결국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성부께 영광 돌리는 것을 거부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 '변증'은 오늘날 성자에게 합당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과 같은 이단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빌 2:5-11).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요 1:51; 21:18 주석 참조.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들음'은 '믿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롬 10:17 주석 참조). '나 보내신 자'를 온전히 믿기 위해서는 계시의 주체되시는 그리스도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듣다'(아쿠오)는 히브리어 '쉐마'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청취한다는 뜻뿐만 아니라 들을 바를 이해하고 이를 실천에 옮긴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영생을 얻었고. - 성자되신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순종하며 성부 하나님을 믿는 자가 결과적으로 얻게 되는 것이 영생이다. 한편 이어 나오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함과 생명으로의 옮김은 이 영생의 실질적 내용에 대한 부가적 설명이다. 또한 본문에서 '얻었고'(에코)가 현재형으로 쓰인 것은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는 순간부터 영생을 가지게 됨을 보여 준다(요 1:4; 3:15; 요일 3 :18)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 범죄한 자마다 의로우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죄악 가운데 삶으로써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며 결국 그리스도 재림 이후 마지막 심판을 통하여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믿는 자에게 정죄함이 사라지므로(롬 8:1)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설 수 있다(히 4:16).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옮기다'(메타바이노)는 상태의 변화를 가리키는 말로서 이전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상황 가운데 있음을 말한다. 특히 본문에서는 이 말이 현재완료형으로 사용됨으로써 믿음을 통해 생명을 얻음이 믿는 순간 완료되었으며, 그 후에도 생명의 상태가 계속 지속됨을 명확히 한다. 즉 믿음으로 얻은 생명은 상실됨이 없다 영생하는 데 이르는 것이다(요일3:14).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 '죽은 자들'(호이 네크로이)이란 본래 그리스도의 말씀의 영역 안에 있지 않아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Bernard) 일반적이었지만(엡 2:15; 5:4) 이곳에서는 육체적 죽은 자들에 대한 개념도 포함되어 있다(26-30절). 즉 세상 끝 날에는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도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살아난다(살전 4:16). 그러나 본절은 이와 더불어 현재에 영적으로 죽은 자들도 또한 예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때 생명을 얻는다는 이중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하나님의 아들'은 요한이 즐겨 기록하는 예수의 자칭호로서(요 10:36; 11:4) 자신의 신성을 나타내기 위해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여기서도 자신과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쓰고 있다.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 '이 때'(뉜 에스틴)란 '죽은 자들'의 의미가 이중적이듯이 이 용어도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의미를 다 가지고 있다. 예수의 말씀으로 인해 영적으로 죽었던 자들이 살게 되는 현재와 후일 예수의 재림 시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는 미래적인 때를 가리키기도 한다. 한편 '들을 때'에서 '때'와 같이 '때'(호라)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그가 예수의 생애와 연관해서 말하는 '때'는 통상적으로 두 가지로 구분된다. ① 아직 이르지 않았거나 오고 있는 시간(요 2:4; 4:21,23; 7:30; 8:20; 16:25,32). ② 이미 이루어진 시간(요 12:23,27; 13:1; 17:1)이 그것이다. 여기서도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이때'는 예수의 복음을 듣는 현재와 장차 재림과 관계된 미래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 생명의 원천은 창조주 하나님에게 있다(창 2:7; 시 36:9). 따라서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심과 지속케 하심에 따라 존재한다(시 66:9). 그런데 본질을 문맥에 따라 이해한다면 예수님의 생명도 하나님이 부여하셨으며 따라서 예수님 역시 피조물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질은 A.D. 4세기의 아리우스(Arius)에 의해 '성자가 최초의 피조물'이라는 교리의 증거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본절은 본서의 서론 부분에서도 밝힌 바대로(요 1:34) 아버지 안에 생명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들(휘오스) 안에서도 동일한 생명이 있다는 것이 전제된 상황 하에서 쓰여진 것이다. 더구나 본절의 '생명'은 아리우스(Arius)의 관심과 같은 삼위일체의 내적인 존재론적 생명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인간들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권세를 표현하는 것이다(Brown). 그리스도 안에는 원래 자존성(自存性)을 지닌 생명이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고 계신 예수께서 영생을 인간에게 주신 것은 당연하다(요일 5:11; 계 1:18).
5: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 '인자'에 대해서는 눅 12장 자료 노트 '인자의 이해'와 요 1:51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본절의 '인자'는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관사가 사용되지 않는 형태인데(휘오스 안드로푸), 이 독특함 때문에 본절의 '인자'는 예수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man)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자되심이 예언적으로 언급되는 단 7:13에서도 관사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이러한 주장은 신빙성을 잃는다. 더구나 본절에서 '인자'란 칭호를 사용하신 예수의 관점은 여타 다른 문맥에서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므로 사본의 필사자가 실수로 관사를 빠뜨린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또한 '인자'란 칭호, 즉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을 부각시키는 이러한 명칭이 본문에서와 같이 심판자로 묘사되는 관점은 요한뿐만 아니라(요 17:2) 공관복음서 기자들에게도 일반적인 것이었다(마 13:41; 25:31; 막 13:26; 눅 21:36). 이러한 사실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완전한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가 요구되었듯이(히 2:14,15)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인간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Keil, Meyer, Bernard).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 여기서 '이를'(투토)은 자신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며 또한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묘사한 25-27절의 내용을 가리킨다. 즉 본문은 당시 유대인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것이지만 이는 본절 하반절과 29절에 나오는 부활과 심판이 실증될 때 모두 사라지게 됨을 보여 주고 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들을 때가 오나니. - 혹자는 이 구절도 25절과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죽은 상태에 있는 자도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알아볼 수 있는 날이 온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나(Weiss, Luthardt) 보다 분명한 것은 예수 재림의 날에 육체적으로 죽은 자도 부활을 경험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29절에 부활에 뒤이어 있을 심판이 언급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명백하다.
5:29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과 부활로 악한 일을 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부활하여 그들의 행적에 따라 상이나 벌을 받는다는 사상은 요한뿐만 아니라 바울이나(롬 2:6-8) 공관 복음서기자들에게도(마 25:31-46; 막 16:16) 공통적인 사상이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행한 자' 혹은 '악한 일을 행한 자'라는 표현은 도덕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24절에 언급된 대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것에 그 기준이 있다. 즉 믿음이 영생과 영벌의 최종적 기준이 되는 것이다.
5:30-47 예수의 자기 증거
자신과 하나님의 동등 됨을 앞 단락(19-29절)에서 증거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그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본문에서 자신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한 또 다른 증거들을 제시하고 계신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앞길을 예비한 자인 '세례 요한의 증거'(요 1:19-34; 3:22-36)에 대하여서도 간과하지 않으셨다(33-35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비록 세례 요한의 증거가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신성(Deity)을 증거해 주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증거들을 갖고 계셨다. 즉 ①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성자 예수님에 대해 증거해 주시며(32,37,38절), ② 예수님 자신의 사역이 스스로를 증거해 줄 뿐만 아니라(36절), ③ 성경 말씀이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39,40절).
그런데 이와 같은 세 가지 증거 가운데서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대표자격인 모세에게는 최대의 존경심을 나타내었으나 정작 모세의 율법이 성육신하사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인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있음은 미처 깨닫지 못하여 예수님에 대해 불순종과 배척으로 일관했다(41-47절).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그릇된 신앙 형태를 책망하시면서, 그들이 존경하는 모세가 도리어 하나님께 그들을 고소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45절).
마찬가지로 만약 오늘날의 성도들 중에도 풍부한 성경지식과 폭넓은 신학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모든 지식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결여된 자가 있다면, 오히려 그러한 성경 지식과 신학 지식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죄하는 도구로 작용할 것이다. 즉 유대인들의 잘못된 선민의식(選民意識)이 그들의 정죄 요인이 된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보다 다른 것들을(지식, 부, 지위) 앞세운다면 하나님께 합당한 믿음의 자세는 되지 못한다(마 10:37).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 본절은 심판에 있어서 마치 예수의 제한성을 보여 주는 듯하여 22절의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는 말씀과 배치되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본절의 관심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예수의 자발적인 순종하심에 있다(19절 참조).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서야 무엇이든 하시는 예수께서는 심판의 때에도 듣는 대로 즉, 아버지의 뜻에 따라 완전히 복종하심을 보여 준다.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찬양을 받을 수 있는 절대적 의를 지니셨다. 따라서 우주 만물을 의로써 통치하시며(사 32:1) 의로써 심판하신다(롬 2:5).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심판도 의로울 수밖에 없다.
5:32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 유대인의 전통적인 재판법에 있어서 스스로의 진술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2,3인 이상의 성실한 증인의 증언이 요구되었다(민 35:30; 17:6; 19:15).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두 사람 이상이 증인이 되는 율법의 조항을 자주 말씀하셨으며 그것이 초대교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도 응용되었다(마 18:16; 고후 13:1; 딤전 5:19; 히 10:28).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여기서도 자신 외에 다른 참된 증거자를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말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바 증인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혹자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를 세례 요한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Chrysostom) 그러할 가능성은 없다. 왜냐하면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에서 '증거'(마르튀론)의 시제가 현재분사인 것이 지속적인 증거를 말하기 때문이다. 즉 세례 요한이 예수의 메시야 되심에 대해 증거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영속되는 것은 아니며 당시의 시점에서는 헤롯에 의해 감옥에 갖혀 증거할 수 없는 여건 가운데 있었다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이 증거자는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Bernard). 또한 예수 자신이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도(34절) 성부 하나님이 이 경우 가장 타당하다(요 8:17,18). 이처럼 절대 의로우신 하나님의 증거를 받았으므로 그리스도의 자신에 대한 지금까지의 증거는 절대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5: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 자신을 위해 친히 증거하시는 하나님 외에 예수께서는 또 다른 성실한 증인을 소개하신다. 본절은 과거 세례 요한에게 조사단을 파송하여 요한의 정체를 알고자 했던 유대인들에게 요한이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라는 사실과 더불어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소개했던 사실(요 1:19-28,36)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시는 것이다. 한편 요한에게 적용된 '증거하였느니라'(메마르튀레켄)의 시제가 완료인 것은 그 증거가 과거의 사실이었다는 점과 더불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신빙성이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Brown). 하지만 이곳에서 예수께서 강조하시고자 하는 바는 요한이 그렇게도 가치있는 증거를 하였건만 유대인들이 그것을 거절한 사실에 있는 것이다.
5:34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데 있어 요한의 증거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바는 아니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그 자신 혹은 친히 증거해 주시는 아버지의 증거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신성을 입증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신성은 자존성(自存性)이므로 어쩌면 그러한 증거가 없어도 충분히 드러난다(26절 주석 참조).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그러나 세례 요한의 증거는 예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그 증거 즉, 그리스도에 관한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나 효용성을 지닌다(요 10:40,41).
5:35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 등불 이미지(image of lamp)는 이를 다윗에게 적용시키는 구약의 삼하 21:17; 시 132:17,18에서 간접적으로 발견할 수 있으며(G. Besaley, F. Neuagebauer) 더 직접적으로는 외경 집회서 48:1의 엘리야에 관한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엘리야가 불과 같이 일어났으니,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는 표현으로서 이 세상에 만연한 영적ㆍ도덕적 어두움을 제거하고 진리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종의 사역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엘리야와 세례 요한이 모두 불로 비유되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엘리야와 비교하시는 증거와도 조화를 이룬다(마 17:12,13).
너희가 일시에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 부패하고 형식적인 종교에 식상해 있었던 당시 유대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요한의 말을 기쁘게 여기고(막 6:20) 요한에게 큰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요한의 메시지의 핵심이었던 그리스도의 도래와 그리스도의 증거를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성실성은 없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르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 앞절에서 세례 요한에게 적용된 '등불'(뤼크노스)은 예수 자신에게 적용되는 '빛'(포스, 요 1:5)과는 다르다. 후자가 스스로 비취는 발광체로서 모든 빛의 근원이 됨과 대조적으로 전자는 인위적인 방법에 의해 빛을 발하는 등불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어두운 밤에는 큰 효용성을 지니나 이보다 더 밝은 태양빛이(말 4:2) 비침에 따라서 그 효력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유적으로 요한의 증거보다 예수의 증거는 크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증언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 1:23)로서 만족하여야 했고 '그는(예수는) 흥하여 하겠고 나는(세례 요한) 쇠하여야'(요 3:30)했다. 한편 본문에 나오는 '역사'(에르가)란 본서에 자주 나타나는 '표적'(세메이온)이라는 단어 대신에 예수께서 스스로 언급하신 표현이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의 눈에는 표적으로 보이는 일들이 성부 하나님이나(요 4:34) 성자이신 예수 자신에게는 모두 '일'(works)인 것이다. 즉 이 말은 예수의 일상생활 자체가 그분의 하나님되심과 메시야되심을 강력히 증거하는 것이란 사실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예수께서도 하신다는 사실은 니고데모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하시는 증거'이며 (요 3:2)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사실을 인정케 하는 도장(印)이었다(30절; 요 1:6; 3:34).
5: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도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 32절에 이어서 다시 한 번 성부 하나님의 증거가 제시된다. 이처럼 '나를 보내신… 증거하셨느니라'는 말씀은 요 8:18에서 다시 반복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을 명시적으로 나타낸다는 것이 본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예수를 인정하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는 ① 세례 받으실 때(마 3:16,17)나 변화 산(마 17:5)에서 들린 하나님의 음성(Godet, Chrysostom) ② 선지자 등의 증거를 통한 구약의 말씀(Calvin, Westcott, Bultmann, Shlatter, Hoskyns, G. Beasley)이라는 견해들이 있으나 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38,39절과의 연관을 고려하면 본절에서 예수의 의도는 유대인들을 질책하려는데 있기 때문이다. 한편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특권에 대해 대단한 자긍심(pride)을 가지고 있었다(출 19:16-25; 신 4:11,12,33). 하지만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그 말씀에 대한 긍지를 거부하시는 것이다(38절, G. Beasley). 왜냐하면 그들 유대인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셨고 성경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예수 자신을 거절함으로 인해 과거 시편 기자가 가졌던 진정한 말씀의 경험(시 119:11)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브라운(Brown)은 본절의 '음성'과 '형용'이라는 표현들이 출애굽 시 시내 산에서의 이스라엘인들의 경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증거한다(출 19:9,11; 신 5:23-27). 그리고 본절과 같이 예수 자신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사상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하기 위한 요한의 일관된 관점이다(요 1:18; 6:46; 요일 4:12).
5: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믿지 아니함이니라. - 본절의 문두(頭)에 나오는 접속사 '카이'는 '그러나'(and yet)라는 의미로 쓰였는데(Bernard), 이러한 예는 본서에 자주 나타난다(40절; 요 1:10). 따라서 37절과 연결되는 본절의 사상의 추이는 '아버지께서 입증하신 증거의 말씀이 유대인들에게는 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를 용납하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는 자는 믿는 자라는 사상이 15:7에 다시금 반복된다.
5:39 너희가. - 예수를 하나님과 동등된 분으로 보기를 거부하는 유대인들(18절)을 보다 강력하게 지적하기 위해 2인칭 복수 대명사 '휘메이스' (upeis )를 독립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 '상고하거니와'에 해당하는 '도케이테'는 성경을 연구하는 의미를 가진 구약의 전문적 히브리어 '다라쉬'에 상응하는 헬라어 용어이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그것의 준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신앙행습이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점은 율법의 외형적 준수만으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다는 생각이었다(신 30:15-20). 한편 고대의 몇몇 교부들(Origen, Tertullian, Irenaeus)과 A.D. 4세기의 라틴어 번역 성경인 벌게이트역(Vulgate)은 본 구절의 동사(도케오)를 명령형으로 본다. 하지만 문맥을 고려하여 대부분의 현대 주석가들은 개역 성경과 같이 서술형으로 보고 있다. 즉 사본의 전통을 좇아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고 보나 전자가 보다 자연스럽다. ① 너희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을 상고한다. ② 너희가 생명을 얻으려면 성경을 상고하라(M. E. Boismard).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 성경의 모든 내용이 예수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루터의 견해는 '레드 레터리즘'(red letterism; 예수님의 말씀을 붉은색으로 인쇄한 성경을 염두에 두고 모든 성경이 붉은 글자가 될 것이라고 비꼬는 표현)이라는 비평을 들을 만하지만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구약을 인용해 자신을 증거하신 모습을 본다면(눅 24:27) 본 구절의 말씀의 근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성경은 여러 시대 여러 저자에 의해 쓰여 졌으며 그 세부적인 주제도 각기 다르나 그 근본적인 내용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기록이며 결국 이는 이를 완전히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에게 집중된다.
5:40 그러나. - 28절 주석 참조.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네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도다. - 완고한 유대인들이 성경을 통해서 영생을 얻으려 하면서도 생명의 주이신 예수를 알지 못하는 것은 영적 우둔함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사랑하려는 열의를 가지셨으나(눅 13:34) 유대인들은 율법 조문만을 이해하려는 성경에 대한 왜곡된 사상으로 인해 복음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그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을 혼동하였기 때문이다(G.Beasley).
5: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 예수께서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신성(神性)을 드러내시며 길게 말씀하신 것은(19-40절) 유대인들로부터 38년 된 병자를 고친 이적에 대한 칭찬을 듣기 위함이 아니었다(34절 참조). 왜냐하면 본래 하나님되신 성자 예수는 스스로 신적 영광을 지니셨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지 못하시더라도 성부께서는 예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시기 때문이다(요 17:1,5).
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 예수께서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바로 그들(유대인)에게 진정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개역성경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번역하는 헬라어는 '아가펜 투 데우'로서 소유격이 사용되었으므로 일차적인 번역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나 헬라어에서 소유격은 소유의 의미와 더불어, 문맥에 따라서는 목적의 의미도 지닌다. 따라서 본문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① 소유의 의미: 즉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La Sainte Bible). ② 목적의 의미: 즉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Bernard, Barrett, Bultmann, Lightfoot). 만약 전자의 의미로 본문을 본다면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사랑이 없으며 인위적인 율법 준수의 의무감만 있다는 의미가 되나 문맥상 유대인에게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후자가 더 적당하다(개역성경,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새번역, 표준신약전서, TEV).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 히브리적 사고에 있어서 '이름'은 그 사람이나 사물의 인격이나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므로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는 것은 당신의 오심이 하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씀이다(Bernard). 하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음으로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 되었다.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 '다른 사람'(알로스)이란 표현을 고후 1:14의 '다른 예수'(알론 예순)와 관련시키는 학자도 있다(Abbott). 왜냐하면 그들 적그리스도들은 하나님의 이름(본질)이 아닌 자기 이름으로 와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영적으로 우둔한 자들로 그 이름을 영접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혹자는 이 표현을 제 2차 유대 폭동(Second Judea Revolt, A.D. 132-135)을 일으켜 많은 유대인들을 열광케 했던 시몬 바르 코흐바(Simin Bar-Kochba)를 특별하게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P.W. Schmiedel). 그러나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면 요한복음은 A.D. 2세기 중반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 '다른 사람'이란 표현은 공관복음의 용례와 같이 매우 일반적인 표현이므로(마 24:5,24; 막 13:6,22) 특별한 개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 보다는 앞으로 등장할 거짓 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Bernard).
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 하나님의 택함 받은 유대인에게 반드시 요청되는 하나님 영광을 위하는 삶이(사 43:21) 오히려 자기의 영광을 위하는 삶으로 타락했음을 밝힌다. 즉 당시 교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율법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 이 일을 하였으며 하나님께 헌신을 다짐하기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건을 드러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남이 보는 앞에서 길게 기도했다. 이러한 형식주의적인 삶은 하나님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생각한 가증한 행위로서 일종의 신성모독이라 볼 수도 있다.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 모든 영광의 원천은 창조주 하나님이므로 인간이 돌리는 모든 영광도 결국에는 하나님에게 귀결되어야 한다.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과 교류할 때 얻게 되는 영광만이 영원한 것이며 인간적 기원을 갖는 영광은 아침 이슬같이 곧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은 가시적인 인간의 영광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방법에 따른다. 그러나 인간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인간적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인 바 이러한 의무를 잘 감당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믿음과 영광을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5:45 내가 너희를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 바라는 자 모세니라. - 본절에는 '법정에서의 고소'를 의미하는 전문용어인 '카테고레오'가 두 번 사용되는데, 각각 미래 시제와 현재분사가 사용되었다. 특히 후자의 현재분사는 본서의 저자 요한이 모세의 고소가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 고소가 계속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케 한다. 한편 39절에서 유대인들의 율법 연구에 대한 자부심을 공격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모세에 대한 긍지를 비판하신다. 유대인들은 예수와 대적하면 모세가 자신들을 변호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요 9:28) 오히려 예수께서는 모세가 그들을 고소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로 대표되는 율법의 완전한 준수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율법은 항상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 수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구원으로 이르는 길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뿐임을 암시한다.
5:46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 모세가 쓴 모세 오경에는 수많은 메시야 예언들(창 3:15; 9:26; 민 21:4-9; 24:17; 신 18:15-18 등)이 나타난다. 따라서 진정으로 모세를 존경하고 모세 오경을 믿는 자들이라면 예수를 부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Godet).
5: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 본절은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가진 허위 의식에 대한 말씀을 마감하면서 던지시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이중적인 대조가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A. T. Robertson), 즉 ① 그(모세) -나(예수) ② 글-말의 구조이다. 유대인들은 기록된 말씀, 즉 토라를 지고(至高)의 권위로 여기고 있으며, 모세 또한 가장 존경할 자로 여긴다(45절). 따라서 모세의 글을 믿지 않으면서, 모세보다 열등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는(요 9:28 참조) 예수의 '말'을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글'과 '말'의 헬라어는 각각 '그라마신', '레마신'으로서 유사한 끝 발음을 통해 대조의 효과를 보다 높이는 언어유희(word play)가 나타난다.
연구자료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B.C. 1003년 다윗에 의해 선민 이스라엘의 수도가 된 이래 A.D. 70년 성전 함락을 기해 선민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할 때까지 실로 가장 중요한 성경 역사의 무대였다.
물론 우리 주 예수에 이르러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한 구약이 세계 만민을 중심으로 한 신약으로 대체되어 이제 예루살렘이 선민 역사, 즉 구속사의 현장으로서 갖는 실제적 의의는 감소되었다. 그러나 구약 선민의 불완전한 지상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은 하늘 천국의 수도를 상징하게 되어 그 영적 의의는 계속 간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 ․ 구약 성경 모두에서 예루살렘 (the Jerusalem)은 택한 백성의 거할 처소의 원형으로서 직 ․ 간접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모든 고대 도시가 다 그렇듯이 예루살렘도 맨 처음에는 아주 작은 도시였다가 점차 확대되었다. 아래 그림 1은 간략한 예루살렘 성의 시대별 확대 과정을, 그림 2는 신약시대 예루살렘의 기본적 도심 배치와 각 장소별 주요 사건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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