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사는 친구 / 김규련
북구라파를 2주간 돌고 마지막으로 그룹 투어에서 빠져나와 Y가 있는 독일에 갔다.
42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Y는 독일로, 나는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그동안 서로서로 살기 바빠서 연락을 주고받지 못했다. 한 10년 전인가부터 서울의 동창과 연락이 닿아 2년 전 나를 찾아와서 잠시 있다 갔다. 무척이나 벼룬 여행인데 겨우 2박3일을 함께 하고 떠난 친구가 섭섭했는데, 작년에 한국에 가서 또 만나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독일남편 G와 우리 남편과도 꽤나 친한 사이가 되었고, 이번여행으로 3번째의 만남이 되었다.
Y는 대학교 때 독일어를 잘하더니 남편과 말하는데 독일 사람과 똑같이 대화하는 것을 보고 이제 이 친구는 완전한 독일인이구나. 확인이 되었다. 허긴 독일동네서 단 하나밖에 없는 동양인이니까. 독일 속에 묻혀 사는 사람이니 그럴 수밖에. 말뿐이 아니라 속사람도 독일인이었다. 자기태도가 분명하고 꽃을 사랑해서 정원이 꽃 천지였다. 정원사도 없단다. 그 작은 체구에 힘들어도 아침저녁으로 손수 물을 주는 것이었다. 무척이나 부지런하였다.
상추, 오이, 토마토, 케일 등 텃밭을 만들어 유기농 작물을 먹고 있었다. 겨울이 6개월이 넘는다는 북유럽 함부르에서 한 시간 떨어진 “빈진”이라는 곳에 살고 있다. 그는 3년 동안 열심이 학교를 다녀서 한의사를 하고 있었다. 자기 집에다 의료 실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진료를 하는 게 미국과는 달랐다.
Y가 사는 곳은 휘청휘청 키가 큰 밀밭과 바람에 휘날리는 보리밭으로 가득 찼다. 너무 넓어 끝이 보이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월, 수, 금 그곳을 1시간 반씩 걸은 지 13년이 된다고 한다. 동네 사람 6-7명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걷는단다. 마치 미국의 국립공원 같은 숲도 있고 빽빽하게 가득 찬 나무들이 있어 공기가 맑아 무공해지역이었다. 밀밭을 지나면 숲이 있고 또 숲을 지나면 밀밭이 나오는 그런 곳이었다. 하도 잘 걷는 나를 보고 남편 왈 “다리 아프다더니 잘도 걷네. 한다.” 여행의 묘미가 이런 것일까?
독일 사람은 근면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돈을 낼 때는 언제나 반씩 나눠 냈다. 일찍 이민 온 우리네들은 아직도 한국식인가보다. 굳이 우리가 내겠다는데, 각자 자기 몫을 내자고 더치페이를 고집한다. 또 독일인은 월급의 반은 세금으로 낸단다. 그리고 그것을 기쁘게 생각한단다. 자기의 노후를 정부가 보장해주기 때문에 기꺼이 낸다고 한다. 미국과 비교되는 점이다. 어떻게든지 세금을 속이고 자기 재산까지도 돌려놓고 가난을 자랑으로 알며 나라의 혜택을 바라는 우리네 이민 일세들과 너무나 다르다고 느꼈다.
며칠 전 언니가 운영하는 음식점에 친구랑 갔다. 언니는 보이지 않는데 손님이 많았다. 혼자 뛰는 웨이트레스를 돕는다고 주방장까지 나온 모습이 좋았다. 고기를 먹는데 된장이나 계란 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란다. 나는 이집은 우리 언니가 주인이니깐 된장과 계란찜을 반씩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주방장은 나를 쳐다보더니 동생같이 안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원칙대로 해야 한다고 했다. 내속으로는 “직원교육 하나는 잘 시켰네.” 생각했다. 그러나 섭섭함이 없지는 않았다.
친구 보는 앞에서 언니가 주인이니 글발을 부리고 싶었는데 말이 안 먹혀 들어갔다. 적당이 넘어가주고 뒤에서 봐주고 하는, 이 고칠 수없는 한국 사람들의 고질 병, 이래서 세월호 사고가 생겼구나. 한국 사람은 할 수 없어. “나도 똑 같아” 새삼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게 아닌 듯싶다.
독일 사람들은 정직하고 뒷거래를 모른단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단다. 남을 속이면 항상 마음이 편하지 않단다. 너무나 잘 아는 단순한 진리인데 우리네들은 왜 실천을 못할까 싶었다. 교육 문제 인듯하다. 나이를 먹었지만 내 생각과 상식을 크게 수술하고 원칙에 맞는 새로운 국민으로 실천하고, 새로 태어나는 내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