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憤怒
검(劍).
검은 팔십 근 한철장검이었다.
그 검을 가슴에 품은 자세 그대로 운룡은 모래땅 위에 단정히 정좌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드물게도 무표정했다.
동공은 눈앞의 땅에 맞춰져 있으되 땅을 보고 있는 건지, 그와 땅 사이의 공간을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의 무심한 눈빛이었다
연비 등은 그의 뒤에서 걱정어린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너무 과묵해졌다.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화약처럼…… 대전을 앞 그의 사부 얘기를 한 것이 실수였던가?'
취심약과 사부의 얘기를 듣는 순간부터 운룡은 변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으며 죽음처럼 고요한 침묵 지키고 있었다.
지금, 대 위에선 제칠조 응조(鷹組)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었다.
청조각의 예소벽과 개화십강의 하나인 혈영문주(血影門主) 화월후(火月吼)의 대결이었다.
오늘은 모든 조가 이른 바 사강전(四强戰)을 치루었고, 그 결과가 나타났다.
제일조 용조(龍組)에선 곤륜의 운연과 구지마황(九指魔皇) 대해(大海)가 최우승자전에 올랐고, 제이조 호조(虎組)에서는 무애공 이환명과 선풍표리(旋風飄狸) 이개(李蓋)가 올랐다.
그리고 제삼조 표조(豹組)에서는 녹림총수 묵비향과 대도십팔채(大道十八寨)의 무적군자(無敵君子)가 올랐으며, 제사조 학조(鶴組)는 점창의 수일평(首一平)과 조북신마(朝北神魔)가 올랐다 ┸읒단사조(獅組)는 빙인 엽상의와 안남(安南) 무량신군(無亮神君 제육조 낭조(狼組)는 유일한 낙화십강 고수인 귀곡(鬼谷) 혈기자(血機子)와 대천신부(大天神斧) 종선(鍾旋) 등이 팔대고수의 보좌를 놓고 한판 승부를 겨루게 되었다.
또한, 제칠조 응조에서는 사천당문의 사자여래 당인이 이미 승리를 거두어, 지금 대 위에서 겨루고 있는 예소벽과 화월후 전의 승자와 마지막 보좌를 다투게 된 것이다.
대 위의 승부는 거의 막상막하였다.
예소벽은 한 자루의 종이처럼 얇은 연검(軟劍)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녀의 무예는 남해 특유의 빠른 검법에다가, 수없이 흩어진 남해열도(南海列島)의 수십 종 기학들을 한데 모은 장대한 검공(劍功)이었다.
반면에 화월후는 마치 불길이 치솟는 듯한 열화공(熱火功), 혈영신공(血影神功)을 서리서리 내뿜고 있었다.
대 위의 포목이 누렇게 눌어붙을 정도의 강렬한 화기(火氣)!
차가운 검공과 뜨거운 장공의 일대접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마치 가을날씨처럼 포근했던 기온이 어젯밤부터 급강하한 탓으로 사람들은 대부분 겉옷 위에 두터운 털옷들을 껴입고는 하얀 입김들을 내뿜고 있었다.
하나 워낙 대 위의 대결이 치열한 탓으로 사람들은 마치 넋을 잃은 듯했다.
조금 전에 막 열해마존(熱海魔尊)이란 사내를 묵사발내고 최우승자전에 오른 운연조차 절로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남해의 무예는 과연 뛰어나구나. 예매의 검법은 오대문파에 비해퐈 塤瑀하수(下手)가 아니다."
온 장내를 통틀어 비무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면 오직 운룡뿐이었다.
문득 그의 무심한 동공이 서쪽 차일을 파고들었다.
무엇인가가 보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주고받고 있는 두 남녀.
바로 혈독 혜공과 화독 혜혜였다.
운룡의 두 눈 깊숙이에서 한줄기 섬뜩한 인화(燐火)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나의 사부, 일생을 통틀어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그 불쌍한 양반을…… 때로는 너무 연민스러워 가슴이 아픈 적도 여러 번이었던 그 순수한 양반을…… 감히 너희들이 그 더러운 음모 속에, 그 시궁징 淡 끌어들였다는 말이냐?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없어도 풀 한 泄밟지 않던 양반이다. 갖은 천대 속에서도 우리 세 사형제를 이징 걀痴笭쵱천진한 영혼이다. 다른 것은 다 용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차라리 내 살을 베었다면 실력이 모자람으로 여겨 웃고 말았을 것이그런데 너희들이 그 사악한 손으로 내 사부를 더렵혔단 말이냐? 세상 조롱과 멸시 속에 내던졌단 말이냐…….'
"혈독 혜공, 절대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슈파팍―
슈욱!
다섯 줄기의 화염이었다.
그것은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사방의 퇴로를 차단하며 무서운 기세로 솟구쳐 오고 있었다.
순간 예소벽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한 자루 혜연보검(慧然寶劍)을 옥녀투사(玉女投梭)의 자세Y 곧추세우는가 싶더니, 이어 튀어오르는 용수철처럼 화염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치지직―
뜨거운 쇠가 찬물에 급속히 냉각되는 듯한 귀에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일순 보랏빛 용이 불바다를 꿰뚫고 치솟는 듯한 눈부신 검기(劍氣)가 섬전처럼 피어올랐다.
"저것은 어기분여전(馭氣奔如電)!"
연비가 놀란 외침을 터뜨렸다.
"신검합일(身劍合一)!"
"아아악!"
한소리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팔 하나가 피보라를 튀기며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운룡의 앞에 툭 떨어졌다.
혈영문주 화월후가 한쪽 손으로 잘려져 나간 팔을 감싸며 주춤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예소벽은 검을 비스듬히 늘어뜨린 자세로 창백하게 서 있었다.
진기를 과도하게 소모한 것일까?
그녀의 입가에는 한 줄기 가는 선혈이 맺혀 흐르고 있었다.
문득 누군가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신검합일의 신기(神技)를 보모 珏 세 소녀를 향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짝짝짝―그 소리는 이내 전 군웅의 손과 손으로 번져 갔으며, 하늘이 무너빨 뻗 듯한 열광적인 환호로 변했다.
우르르―
"최고다!"
무뚝뚝한 연비마저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운연이 황급히 예소벽을 마중해 나왔고, 무사 하나가 대 위의 혈흔 지우고 나자 사회인 심인노선사의 우렁찬 외침이 뒤를 이었다.
"청조각의 예여협(芮女俠)이 응조 차선(次選)에 진출하였소! 다음 뗍뗌텝순서이오! 먼저 생사선주 혈독 혜공과 무당파의 무불검 운룡 대협의 대결이오."
"핫하하……."순간 한소리 낭랑한 대소와 더불어 일점 혈영(血影)이 번쩍 대 위나타났다.
붉은 혈의와 바람막이 피풍(被風)을 멋들어지게 걸치고 허리에는 냅텝패옥(佩玉)을 두른 혈의미장부, 혈독 혜공.
다음 순간 생사선의 무리로 보이는 일단의 혈의인들이 장내가 떠내려갈 듯한 환호를 터뜨렸다.
"선주의 승리를!"
"무불검을 지옥으로!"
혈독 혜공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혤炘
반면에 운룡은 몹시 완만하게 몸을 일으켰다. 시선은 수중의 철검혤 銖堀채…….
온몸에서 폭사되는 자욱한 살기!
우연인지 그의 발이 싸움에서 패한 화월후의 팔을 짓밟고 있었다.
우두두둑―
뼈와 살이 뭉개지는 듯한 섬뜩한 둔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운연은 가벼운 비명을 터뜨렸고 연비는 검미를 짙게 찌푸렸다.
'무서운 살기로군…… 괜찮을까?'
이때 두자상이 근심어린 어조로 물어왔다.
"내색하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그의 걸음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소. 아무래도 아직 원기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게 아니겠소?"
연비는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취심약의 기운이 완전히 킵퓸駭鳴煮잔볼 수 없지…… 그의 중추기능이 덜 풀린 상태 같소. 싸움은 운룡에게는 몹시 불리한 싸움이 될 것이오. 저래서야 어찌 신법인들 펼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 신법을 펼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중추의 기능이다.
그 기능이 마비된다면 비단 자유자재로 몸을 날릴 수 없을 뿐 아니라, 몸을 비틀거나 하는 간단한 동작에도 많은 장애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때 중인들의 이러한 우려를 입증이라도 하겠다는 듯 막 대 위로 발을 디디던 운룡의 몸이 미미하게 휘청거렸다.
그는 급히 신형을 가눔으로써 그것을 감추려 했다.
순간 연비, 두자상, 운연, 그리고 운연의 품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 예소벽 등의 얼굴이 일제히 창백하게 변하고 말았다.
'큰일났구나! 저렇게 되면 이번 싸움에 대비하여 익혔던 신법이란 것은 아예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운룡이 대체 마도제일열공(魔道第一熱功)이라는 혈독 혜공의 혈사기공(血邪 功)을 무슨 수로 견디겠는가?'
* * *
휘이잉―
휘이―
그렇잖아도 잔뜩 흐린 하늘이었다.
산봉으로부터 휘몰아쳐 오는 섣달의 찬바람이 운룡의 한 겹 베옷 사이로 스산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운룡은 묵묵히 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흔한 눈도 한 번 내리지 않았군.'榴잔거의 감각이 없는 등허리 부분을 한차례 주무르고 난 후, 검벙 洲볕潤酋고쳐 잡았다.
한편, 혈독 혜공은 바람막이 피풍을 천천히 벗으며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취심약의 효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 그인지라…….
'운 좋게 해독은 했다만…… 네가 어디까지 나의 혈사기공을 피하는지 보겠다. 흐흐…… 아예 통구이로 만들어 주지.'
심인노선사의 간단한 주의말에 이어 그의 몸이 대 아래로 후르르 날아 내려가고 나자 장내엔 일시 자욱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혈독 혜공은 우수는 비스듬히 치켜들고, 좌수는 우수의 손등에 바밀착시킨 상태였다.
그러자 문득 그의 장심(掌心) 어림으로 한 줄기 밝고 투명한 홍점(紅點) 하나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그것은 혈사기공의 특유한 현상이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무심히 그것을 지켜보던 운룡이 천천히 혈독 혜공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검은 아예 밑으로 축 늘어뜨린 상태였다.
혈독 혜공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미친놈! 사정거리가 가까울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혈사기공이다. 네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느냐?'
그는 우선 운룡의 움직임을 측정해 보는 의미에서 혈사기공을 갈무리하지 않은 좌장을 슬쩍 흩날려 보았다.
슈욱―
팍!
슬쩍이라곤 했으나 그 속에 실린 힘은 못 되어도 이삼백 근(斤)은 족히 될 것이다.
그러나 운룡은 비단 그의 장력을 피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대로 맞았다.
그리고 그의 몸은 여전히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뿐인가? 느닷없이 그의 발 밑이 퍽퍽 꺼지며 청석(靑石) 가루들이 자욱하게 날렸다.
얼마나 발에 힘을 주고 있는지 대 전체가 우르르 우르르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운룡의 시선은 곧장 혈독 혜공을 향하고 있었고, 혈독 혜공은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의 무심한 눈길에는 오욕칠정(五慾七情)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 공포스럽기조차 했다.
인적없는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죽음 같은 정적 같기도 하고, 흑청 대해(大海)의 질식할 듯한 고요 같기도 한 운룡의 무심한 눈빛.
그 눈길은 소리없는 위압이 되어 혈독 혜공의 가슴을 짓눌러 왔다.
혈독 혜공은 한줄기 서늘한 감정이 가슴속을 휩쓸고 지나는 것 같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기분 나쁜 놈!'
돌연 그러한 감정을 떨치기라도 하듯 혈독 혜공은 발작적으로 우장 쭉 뻗었다.
"혈사기공!"
순간 한 줄기 자색기류가 번쩍 하고 운룡에게 쏘아졌다.
하나 운룡은 치명적인 살수가 덮쳐드는데도 전혀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펑!
치지직―
혈사기공은 정확히 그의 가슴팍 한복판에 작렬했다.
의복이 타는 매캐한 내음이 장내에 자욱이 번졌다.
그런데 보라! 티끌만한 미동도 없이 여전히 걸어나오고 있는 운룡퐈 凋응빨─
그에게 변한 것이 있다면 더욱더 무표정해진 얼굴과 팔십 근 한철검이 머리 위로 들려졌다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혈독 혜공 또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방금 펼친 무공은 팔성(八成)의 혈사기공이었다.
집채만한 호랑이라 해도 새까만 숯덩이로 변했을 것이다.
혈독 혜공은 기광을 서리서리 뿜으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좋아……."
순간 한소리 광소와 더불어 쭈욱 뻗어나가는 우장.
쌔애액―
이번에는 소리부터가 달랐다.
이것은 십성(十成)의 전 공력이 담긴 혈사기공이었다.
푸학!
화르르―
순식간에 대 위로 수백 개의 불꽃들이 불똥튀듯 번졌다.
그 불꽃의 일부는 이미 대 위의 포목을 화르륵 화르륵 태우고 있었다.
주위의 물건들이 순식간에 타오르는데 사람은 또 어떠하랴!
운룡의 가슴팍은 마치 인두로 지진 듯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피와 고름과 그을린 재의 자국!
살이 익어 들어가는 노린내가 대 아래까지 번졌다.
운연과 예소벽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두자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연비의 안색도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아예 수비가 없군. 도대체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놈이야."
하나 운룡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고 걸음 또한 멈추지 않았다.
저벅저벅―
이 발자국 소리는 비단 혈독 혜공뿐 아니라 대 아래 군웅들의 가슴까지도 무자비하게 짓밟아 오는 것 같았다.
죽음 같은 정적과 공포가 안개처럼 사위로 피어올랐다.
"어…… 어……."
혈독 혜공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완연했다.
그는 이 하늘 아래 혈사기공을 맨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곤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지는 혈독 혜공의 발길.
그러다 말고 돌연 그는 연거푸 십오장이나 혈사기공을 후려쳐댔다.
퍽! 푸학―
파팍! 퍽―
하지만 마지막 십오장째의 혈사기공을 후려치고 났을 때, 그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발은 대의 끝을 밟고 있었다.
그리고 운룡의 무표정한 얼굴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검(劍).
머리 위로 들어 올려진 운룡의 검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것은 이제 금방이라도 혈독 혜공의 머리를 향해 휘몰아쳐 올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피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는 것이다.
그때 문득 운룡이 고요하게 중얼거렸다.
"잘 가라, 혜공!"
슈악―
한 줄기 매서운 칼바람과 더불어 휙 내려쳐지는 한철검!
바로 그 순간, 찢어지는 듯한 외침이 대 아래에서 터졌다.
"안 돼요!"
동시에 불타는 듯한 혈영 하나가 운룡과 혜공이 있는 대 위로 달려와선 털썩 엎어졌다.
"제발……!"
혈영은 놀랍게도 혜공의 누이인 화독 혜혜였다.
옥 같은 얼굴은 흥건한 눈물로 온통 뒤범벅이었다.
운룡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를 향했다.
그의 검은 혜공의 머리와 반 치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있었다.
화독 혜혜가 이마를 땅에 처박으며 울부짖듯 외쳤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운대협! 제발 오라비를 살려 주세요!"
운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 마리 벌레를 보듯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
"나이 오 세에 부모를 잃고 세상의 온갖 설움과 박대 속에서 자란 남매예요! 추운 겨울날 만두 한 조각이 먹고 싶어 점소이 앞에 두 시진이나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얼음 조각 같은 찬물만 머리끝부샥 參”沮堞뒤집어쓰기도 했던 남매예요! 그 어린 마음으로 설움과 한(恨)을 밥처럼 씹으며 살아왔어요! 이제…… 이제 겨우 오빠와 나모 4娥農살려 합니다. 이제 겨우 굶주리지 않고 있어요. 대협…… 퐈 玲셀菽 제발…… 혜혜가 이렇게 두 손 모아 빌겠어요!"
말은 채 다 이어지지도 못했다.
그녀는 마침내 바닥에 엎어져 서러운 통곡을 터뜨렸다.
숙연한 장내.
일수일수(一授一受)의 괴상한 법규아래 신비의 유랑 도적떼로 알려 생사선주 남매에게 이처럼 우울한 과거가 있으리라고 누가 짐작인들 하였으랴?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대 위의 운룡을 향했다.
운룡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시선이 저 멀리 아득한 태산 연봉을 향하고 있었다.
문득 그의 입술이 침중하게 열렸다.
"살고 싶으냐, 혜공?"
혜공은 씁쓸하게 웃으며 한줄기 장탄식을 터뜨렸다.
"죽여 주시오……."
"너는 좋은 누이를 두었다."
마지막 말의 여운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운룡은 몸을 빙글 돌렸다
순간 장내에 있던 군웅들은 서로의 얼굴을 힐끗 마주보더니 우레와 같은 환호를 터뜨렸다.
"와아!"
"와……!"
연비와 두자상은 서로를 마주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고, 운연징 걔 웃으며 그를 향해 뛰어나갔다.
예소벽의 중얼거림이 그 뒤를 잇고 있었다.
"이제 알겠다…… 그의 매력은 바로 저 돌발성이다. 몸의 어느 구석에 숨어있다가 폭발적으로 나오곤 하는 힘과 정신! 저것이 사람슬프게 하고 여인들을 정신없이 열중시키는 것이다. 운룡…… 그는 묀 ┑珦멎사람이다……."
* * *
돈 열 냥.
현청노도사는 이 열 냥에 제자를 팔아먹었다.
제기랄! 산아래 주막에서 쓸쓸함을 달래느라고 마구 외상술을 들이켰던 것이 죄라면 죄일까…….
그렇잖아도 무당파의 건물들에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던 일대의 황부자(黃富者) 놈이 이 일에 끼어든 것이다.
그는 주모로부터 열 냥에 대한 인수증서를 양도받아서는 그것을 들 산으로 올라와 열흘 내로 돈을 갚든지, 아니면 무당파의 건물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던 것이다.
아무리 일자무식이요, 배움이 없는 현청노도사라 해도 그런 일만은 할 수 없었다.
돌아가신 가람노사부를 봐서라도 그분의 영령이 있는 도장을 어찌 내놓을 수 있겠는가?
한데, 밤을 세워 몸부림치며 고민하던 현청노도사의 앞에 어느 날 문득 내밀어진 은자 열 냥…….
그 묵직한 감촉에 정신을 잃은 것일까?
"정말이야…… 그 돈이 욕심났던 것도, 탐났던 것도 아니야. 그저 그것으로 빚을 갚으면 도관 하나는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어. 旅─ 현청아, 현청…… 네가 미쳤지. 그렇다고 앞길이 구만 리 모 粱훌륭한 놈을 네 손으로 매장시켰단 말이냐……."
잔뜩 흐린 하늘이더니 이윽고 눈이 내린다.
올해 들어 내리는 첫눈이었다.
현청노도사는 심산의 한 그루 고목 아래 옹색하게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차가운 냉기가 온몸을 파고드는 것도, 눈이 몸 위로 마구 덮이는 것도 그는 느끼지 못했다.
흐르던 눈물은 이미 볼 어림에서 얼어붙어 살갗을 조여오고 있었다
힘없이 눈이 감겨오고 있었다. 졸음과 번뇌가 노도사의 움츠린 어깨를 말없이 내리누르듯…….
같은 시각.
고목이 저만큼으로 바라다보이는 언덕빼기에서는 여러 사람이 묵묵 선 채 내리는 눈을 맞고 있었다.
운룡, 연비, 두자상, 운연, 그리고 예소벽이었다.
운룡은 오랫동안 자신의 사부를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문득 연비가 말했다.
"자네를 버린 사부이다.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산아래까지 모셔점 躍 渼裏"
운룡의 몸이 그 자리에 멈칫 섰다.
그는 히죽 웃으며 말을 꺼냈다.
"원하지 않느냐고요? 남들이 먹다 남은 밥 한 술을 주며 못난 사부 욕할 때 그 사부는 제자의 잠자리에 짚 한 올이라도 더 깔아주려고 겨울산을 헤매고 계셨소. 아무리 술이 취해도 술이 깨면 밥 먹었느냐 물어봐 주었고, 사십 평생을 무당파 일흔두 개 도관의 기왓장 하나까 지켜오신 분이오. 헐벗은 새끼를 지키듯 온몸으로 삶을 살아오셨소. 당신이 오늘 하루 잘못하셨다 해도…… 그것은 당신이 평생 동안 해오신 것에 비하자면 바다 속의 물 한 방울과 같은 것이오."
죽겠느니, 말겠느니 눈물을 펑펑 쏟으며 태산 연봉을 떠들썩하게 瘀두 사제의 얘기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오는 겨울날 무슨 먼모 獵鳴殷눈가를 찍어내린 사람들의 얘기는 생략하기로 하자.
중요한 것은 그날 밤 운룡이 쓰러졌다는 것이다.
현청노도사의 버둥대는 몸을 방안에 밀어넣고 난 직후, 그는 썩은 짚단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렇다. 혈사기공을 열일곱 차례나 정면으로 맞고도 멀쩡할 수 있사람이란 이 하늘 아래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운룡은 신(神)이 아니라 다만 참을성이 강한 한 사람에 불과했을 뿐이다.
* * *
"이젠 정말 어찌해 볼 도리가 없소. 심맥(心脈)이 크게 상했소. 콴主脈)이 두 개나 끊어졌을 뿐 아니라 대맥(大脈) 일곱 개가 크손상되었소. 도대체가 저런 몸으로 비무가 끝난 후 지금까지 어떻게 버티어 왔는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오."
두자상의 말에 좌중은 괴괴한 침묵을 지켰다.
연비, 운연, 예소벽, 혈독 혜공, 현청노도사 등이 장내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생사이독(生死二毒) 남매는 어젯밤 느닷없이 운룡의 처소를 찾아들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문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운룡의 하인이 되기를 간청했고, 그것을 말리다 못한 연비 일행이 의식을 잃고 있는 운룡의 상태를 가르쳐주자, 주춤걸음으로 운룡이 누워있는 침소까지 기어와모 球堧岵막涇종복(從僕)의 맹세를 했던 것이다.
"자고로 섬서인(陝西人)들은 그 마음 씀씀이가 불 같다더니, 이제나는 그 말뜻을 알았다."
두자상의 말마따나 생사이독 남매는 대단한 고집의 소유자들이었다
지금도 화독 혜혜는 의식을 잃고 있는 운룡의 옆에 꿇어앉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고, 혈독 혜공은 모든 사람들이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복의 신분임을 내세워 혼자 저만큼 한쪽 구석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운룡의 상태는 이를 데 없이 심각했다.
불과 이틀 앞으로 다가온 검회결선은 고사하고라도 그 목숨마저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지경인 것이다.
"사람이란 그 태어난 특성대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한계란 것이 있는 것인데 운룡은 수시로 그 한계를 넘나들었소. 오늘의 일만 해도 그는 자신이 신법을 펼칠 수 없는 몸임을 알고 그런 무리한 작전을 펴나간 것이오."
"……."
"사람의 인내를 초월하는 이러한 제반 일로 미루어 볼 때 지금과 같은 결과는 오히려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오."
연비의 탄식어린 말에 운연이 충혈된 눈을 한 채 물었다.
"그럼 그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요?"
"어딘가에는 있겠지……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청조각의 적룡환, 소림의 대환단, 그리고 무림의 신비문파인 신녀궁의 수모단(水母丹), 그 모두를 합쳐도 지금의 그를 고칠 수 없다는 것이오."
연비는 말을 맺고 나자 드물게도 허공을 바라보며 일성 장탄식을 터뜨렸다.
그런 그의 두 눈으로 한 줄기 뿌연 이슬이 차오르고 있었다.
'불쌍한 녀석…… 이렇게 되기 위해 너는 온 정열을 바쳐 여기까지 올라왔단 말이냐?'
바로 정상 그 자체라고 해도 좋았다.
아직 초검 백리천이라는 한 계단이 남아 있기는 했어도 여기 모인 사람들 중 누구 하나 운룡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그 동안 그가 보여왔던 불가사의한 집념과 강철 같은 의지, 그리고 초인적인 재질, 그 모두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혤 ㏏ 甄裏
운룡, 그는 패배를 모르는 불패(不敗)의 승부사라 해도 좋았다.
한데 그런 그가 지금에 이르러 이제까지 쌓아왔던 모든 공(功)을 한꺼번에 허물지도 모르는 중대한 위기에 봉착한 것이었으니…….
사내들은 탄식을 터뜨렸고 여인들은 눈물을 흘렸다.
사그라져 가는 거성(巨星)의 마지막 광채에 대한 안타까움이랄까?
이때 돌연 왈칵! 하며 방문이 거세게 열리는가 싶더니 한 사람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순간 사람들은 그 와중에도 해연히 놀란 빛을 떠올렸다.
낡은 초립(草笠), 초혜(草鞋), 그리고 허리춤에 한 개의 기이한 초검(草劍)을 매단 한 사내.
그는 바로 초검 백리천이었던 것이다.
혈독 혜공이 즉시 앞으로 나섰다.
"귀 공은 무슨 일로 오셨소?"
초검 백리천은 사람들을 쭉 둘러보더니 그 중 연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운대협의 상태는 어떻소? 그를 나에게 보여줄 수 있소?"
느닷없는 말.
그가 왜 운룡을 찾을까?
사람들의 의심에 찬 시선에도 불구하고 연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쪽으로……."
덜컥―
문이 열리자 침상 옆에 쪼그리고 있던 화독 혜혜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눈가는 퉁퉁 부어 있었다.
초검 백리천은 곧장 운룡이 누워있는 침상 앞으로 다가갔다.
운룡은 반듯한 자세로 고요히 누워 있었다.
얼굴이 유달리 창백한 것을 제외한다면 잠든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하나 그의 맥박과 심장은 몹시 느리게 뛰고 있었다.
"더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악화되지도 않는 상태이오."
연비의 말에 주의 깊게 운룡을 살피던 초검 백리천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두면 이레를 못 넘기고 죽소이다. 당신들은 어떤 유효한 방도라도 있소이까?"
"아무것도……."
"그러리라 짐작하고 있었소. 나도 오늘 하루종일 성내를 돌아다니징 役돋 모색해 보았소이다. 그러다가 귀에 박히는 말 하나를 들었소.
"어떤 말이오?""난난(蘭蘭), 바로 본 검회를 주최한 위경경의 딸인 그녀가 희대의 신녀(神女)라는 사실이오. 태산 일대에서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그녀는 비단 의학에 뛰어난 조예가 있을 뿐 아니라 세의 어떤 학문이든 달통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오. 그녀에게 이 의뢰해 보면 어떤 방도가 나올지도 모르겠소. 나는 이 말을 해주러 것이오."
일순 말을 맺기 무섭게 초검 백리천은 몸을 돌려 나갔다.
그때 연비가 급히 외쳤다.
"잠깐!"
"……."
"귀 공이 이 일에 이토록 관심을 보이는 까닭이 무엇이오?"
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궁금히 여기고 있는 문제가 아닌가?
초검 백리천의 초립 아래로 문득 눈처럼 흰 치아가 드러났다.
기이하도록 친밀한 그 웃음에 이어 백리천이 말했다.
"그가 좋기 때문이오. 투박하지만 잘 정제된 기품…… 불가사의한 흡인력…… 강한 승부의식…… 그 모두가……."
* * *
난난은 늘 백아와 어울려 논다.
그녀가 백아와 어울려 놀지 않는 시각이란 잠잘 때와 밥 먹을 때 정도일까?한데 연비 등이 운룡을 업고 그녀의 처소로 찾아왔을 때 그녀는 안 있던 백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운룡……!"
뿐인가? 그녀는 덮치듯 운룡을 향해 달려들었으며, 이어 그를 덥썩 안아 자신의 침상까지 운반하여 세밀하게 그의 증세를 진맥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평생 백아를 떨어뜨릴 정도로 다급해 하는 난난을 본 적이 없던 그녀의 시녀들은 고개를 갸우뚱했고, 연비 등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벼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소로부터 이곳까지 오는 동안 무려 서른두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매 관문마다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신분내력을 대고, 똑같은 대답한 끝에야 간신히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자상은 이렇게 해서 난난을 만난다 해도 그 지체높은 소녀가 과연 순순히 운룡을 진맥해 주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던 참이다.
비록 난난의 태도가 지나칠 정도로 운룡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긴 했지만,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정도로 다급했던 연비 등 그 사실을 이미 잊고 말았다.
어쨌든 난난은 거의 반 시진에 이르도록 오래 진맥한 후에야 탈진煉 Αㅐ막涇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시기에 당신이 이렇게 되다니……."
무슨 말인지…….
연비는 다급히 물었다.
"치료가 가능하오이까?"
난난은 그런 그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도대체 당신은 이 사람의 특수조련인이라면서 이 사람이 이렇게 점 沮堞무엇을 하고 있었죠? 지금 이게 산 사람인가요? 죽은 사람이"무슨 질책을 하여도 달게 받겠소. 다만 치료가 가능한지 알고 싶모炘
난난은 냉막한 얼굴로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이윽고 연비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나에게 하루의 시간을 줘요. 그때 가서 이 사람을 치료할지 안할지를 결정하겠어요. 내일 아침에 당신은 이곳으로 오세요. 그리퐈 》搔 보좌할 여자 한 사람이 필요해요."
순간 운연, 예소벽, 혜혜가 한꺼번에 나섰다.
"제가 하죠."
난난은 그녀들을 냉랭하게 쏘아보았다.
그리고 운연과 예소벽을 가리키며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아직 검회가 남았으니 안 돼요."
그러자니 남은 것은 혜혜뿐.
난난은 혜혜를 아래위로 유심히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만하면 되겠군요. 당신이 오도록 해요."
연비 일행은 얼떨결에 난난의 처소를 나오긴 했지만, 마치 여우에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운연은 내내 의혹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로군요. 난난, 그녀는 마치 우리 일행을 오래 전부터 殷있었던 것 같아요. 운룡을 대하는 태도도 낯선 사람을 대하는 점 틈耉解立─ 무엇보다도 그녀가 운룡에게 그토록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요?"
연비는 씁쓸하게 웃었다. 홀린 기분이기는 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문득, 며칠 전 비무대에서 자신들쪽을 향해 자주 눈길을 주던 위경경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그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작 신비로운 것은 바로 운룡 본인이오. 도대체 나이가 많건 적간에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여자란 아무도 없단 말이야……."
"내 잘못이다……."
어두운 방(房).
한쪽 침상에 운룡을 눕혀둔 채 난난은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가 앉아 있는 탁자에는 일견해 보기에도 수백 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서류 뭉치, 두루마리 등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무리 이 일이 중요하다 해도 운룡 오라버니부터 돌보았어야 했천룡금침요해(天龍金針要解)가 아니고서는 살릴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고 말았다니…… 난난, 큰 실수를 했구나……."
한소리 땅이 꺼질 듯한 탄식이 흘렀다.
오랜 침묵이 흐른 후에야 난난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창 틈으로 스산한 겨울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의 해맑은 옥용(玉容)으로도 달빛은 은가루처럼 묻어오고 있었
재녀(才女)!柳錫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일컬어 천 년에 하나 날까말까 재녀라고 했다.
적어도 대봉황천의 문인이나 태산 일대의 사람들 중에는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실 매우 많은 일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첫번째 것은 대백부(大伯父) 도남강에 관한 일이었다.
도남강.
그의 거동은 요 근래 들어 눈에 뜨일 정도로 점잖아졌다.
평소 성내의 모든 일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관여해온 그였모 데 그런 그가 대봉황천 개성(開城) 이후 최고의 행사라 할 수 있 사해대검회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이 사실이 난난의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대백부가 무엇인가 불만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고, 사람을 풀어 은밀히 그에 대한 조사를 해온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탁자 위에 쌓여 있는 두루마리 뭉치인 것이다
"그의 의도는 거의 확연해……."
천역(天逆).
부친을 거역하는 천역의 대음모(大陰謀)!
두루마리들은 말하고 있었다. 그의 휘하인 칠대군단(七大軍團)의 미묘한 움직임과 특수공격조 봉황무색오살(鳳凰無色五殺)의 기이한 행동을…….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외투 안에는 일급전시(一級戰時)가 아니면 쓰지 않는 중무기(重武器)들을 갈무리있었다.
그리고 거의 실시되지 않던 군단의 훈련도 요즘 들어 부쩍 강화되었다.
그래서 난난이 검회관람을 중지하고 자신의 처소에 틀어박혔던 것이다.
그녀는 우선, 노천주와 위경경에게 충성하고 있는 학천종과 그의 철기군단을 혈호 주위에 은밀하게 배치했다.
혈호의 안으로는 신녀군단을 갈무리했다.
연후 도남강 등이 꾸미고 있는 천역에 대한 치밀한 대응작전을 구상해 보았다.
하나 한마디로 마땅한 대응작전이 없었다.
저쪽의 힘은 너무 강대했고, 모든 음모는 도저히 손을 써볼 수도 없을 정도로 깊고 완벽하게 문인들의 속으로 침투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노천주는 자신의 몸도 돌볼 수 없는 마인인 상태.
그렇다면 도남강 등은 어떤 방법으로 이쪽을 죄어올 것인가?
첫째 목표는 노천주와 위경경, 학천종 등의 기존세력을 장악하는 것일 것이다.
둘째로는 검회에서 선발된 팔대고수를 제거하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꼭두각시를 금악(金嶽)에 보내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검회가 끝나고 모든 방계 고수들이 흩어져간 다혤 즈음이 될 것이다.
난난은 고민했다. 그리하여 우선, 노천주와 위경경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검회팔대고수를 재빨리 수렴하여 금악으로 보낸다는 기본전략을 수립한 것이 바로 오늘 낮의 일이었다.
한데 그 기본전략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운룡이 저런 꼴이 되어 그녀의 앞에 느닷없이 나타나다니…….
노천주를 만나고 그를 통하여 만룡가의 대임(大任)을 걸머져야 할 주역이 무대에서 쓰러진 것이다.
'어찌하나,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사해대검회는 바로 만룡가의 적통후계자를 뽑기 위해서 행해진 것이다.
노천주는 이 일에 있어 자신의 혈육을 배제하고 만천하인에게 균등 기회를 주었다.
피아를 막론하여 가장 재질이 뛰어난 자가 만룡가를 이어받고 나아가서 십사연방천하검회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 그 어른의 생각이었다.
그러니 만큼 반드시 운룡도 팔대고수의 대열에 끼어야만 했다.
비록 그가 친손자이긴 하나 팔대고수의 대열에서조차 탈락한 고수라면 그 어른은 얼굴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그 막중한 검회결선이 바로 내일…… 그 안에 운룡 오라버니를 치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날 밤, 난난은 밤새도록 단 한잠도 자지 않았다.
친혈육이기 이전에 그녀가 본 가장 훌륭한 재질의 무인(武人)에 대 심려였다.
그러나 무심한 시간은 번뇌로 뜬눈을 새는 그녀의 창에다 어김없이 아침햇살을 보내고 말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r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