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파괴 적응기
단체방 카톡을 보면서 어리둥절할 때가 있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왜 꼬아서 표현하고 반토막 말을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하는지 알 수가 없다. 오타인 줄 알고 고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도 하고 경박한 생각이 들어 얼굴이 달아 오르기도 한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섬세하게 다듬어야 했던 우리의 언어가 이제는 이상한 반토막 말들로 <국어사전>을 바꿔야 할 판이다. “넹” “ㅋㅋ 축하해유!” “있어서리.” “이 기회에 잘 됐당.” “어맛!” “전해 주세용!” “ㅇㅋ~~” 마치 암호 같다. 빨간 볼펜으로 체크해야 할 단어 투성이다. 지하철을 공짜로 탈 나이가 됐으면서 부끄럽지도 않나? 한 글자, 한 단어에 목청을 올렸던 그들이 이 지경이니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세종대왕이 살아계셨으면 노발대발할 것 같은 표현과 단어들이 즐비하다. <우리말본>의 저자이며 국어학자인 외솔 최현배 선생님(1894~1974)도 떠오르고, 원칙이 무너지면 불같이 역정을 내던 ‘목근통신’의 저자 김소운 선생님(1907~1981) 같은 대가들도 생각난다. 그들은 뭐라고 하셨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난 내 사랑하는 후배들과 한배를 타고 있다. 그들과 보조를 맞추려면 거리 조절이 필수다. 인간관계의 거리 조절은 한 걸음 다가가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할 때도 있다. 이 거리는 스스로 조절해야 할 미묘한 줄다리기다. 상대의 얘기를 편견 없이 들어주고 손벽 쳐 주는 것만으로는 소통이 어렵다. 먹는 얘기, 건강 얘기, 젊어지는 비결, 여행 얘기, 자식 자랑, 손주 자랑, 재산 자랑... 두서없이 잘난 체해도 필터 없이 받아줘야 소통이 이루어진다.
내가 존경하는 감수환 추기경은 신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유행가를 성가처럼 함께 불렀고, 은퇴 후 지리산 골짜기에 들어가 풀숲을 가꾸면서 누구든지 묵상하고 짐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드신 강영구 신부님은 마을 사람들의 이것저것을 도와주면서 산골살이를 즐겁게 하고 있다. 자신만을 위한 길이었으면 포기했을 거라는 멋쟁이 신부님이다.
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산다. 각자의 성격과 습관이 달라 부딪힐 때도 있지만 적당한 거리 조절을 위해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억제하며 발맞추기를 해야 소통이 가능하다.
화려한 화술로 가끔 나를 놀라게 하는 후배가 어느 날 문자를 보내왔다.
“얼마 전에 ‘인쇼’에서 원두 샀는데 선배 좀 갖다 드려요? ‘아아’로 마시니 끝내 주네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평생 ‘원칙’을 기본 가치로 알고 살았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가 힘이 든다.
“무슨 말이야? 똑바로 말해!”
답답해서 전화를 했더니 재밌다는 듯 까르르 웃으며 장난기에 발동이 걸렸는지 한마디 더 한다.
“나 여행 갔다가 어제 왔어요. 공항에서 김 선배 만났는데 ‘공패’ 끝내주던데요.”
언어파괴를 거침없이 하고 있다.
“나 이제 그대하고 인연 끊어야겠다. 무슨 말인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거든.”
“왜 그러세요. 나도 방금 손녀딸에게 배운 말인데 내가 가르쳐 드릴 테니 사용해 보세요. 훨씬 활기가 생겨요.”
“난 싫은데...”
“화나셨구나. 우리가 늙었어도 젊은이들과 같이 어울리려면 알아들을 수는 있어야죠. ‘아아’는 아이스커피고, ‘인쇼’는 인터넷 쇼핑이래요. ‘공패’는 공항 패션이구요.”
이런 언어파괴를 받아들이기가 힘이 든다. 하지만 젊은 세대와 공생하려면 ‘현대 언어’와 ‘전통 언어’를 비교 분석하여 편리성과 실용성을 따져보고 우세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라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두 달에 한 번 모이는 우리 단체방의 분위기는 밝고 젊다. 아직 현직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있어서인지 사위, 며느리를 맞았어도 사고가 신선하고 대화가 톡톡 튄다. 그들도 저희들 보다 더 젊은 친구들과 소통하느라고 어려움을 겪겠지만 난 그룹 멤버들과 보조를 맞추느라고 나름 버겁다.
인간관계의 거리 조절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불만이 없다. ’원칙‘이라는 틀로 안정감을 찾았던 나로서는 의외적인 상황에 부딪혔을 때 난감하지만 그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내 나름의 노력을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이모티콘을 횔용하기로 했다. “무슨 말이야?” 하고 묻고 싶을 때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생각하는 포즈의 그림을 보내고, ’ㅋ,ㅋ,ㅋ‘ 대신 배를 잡고 웃는 그림을 찾아 보낸다. 그러면 내가 반토막 단어를 쓰지 않아도 즉각적인 반응이 온다.
소통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렇게 생각을 바꿨더니 젊은 세대와의 소통을 위해 현대적인 소통 방법을 받아들이기로 하자는 후배 주장에 공감이 간다. 카톡이 울린다. 4월 17일 선후배들이 인사동에서 모인다고 한다. 나는 활짝 웃는 이모티콘 하나를 찾아 보낸다.
(202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