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문학>2020,여름호 평설
불확실성시대의 시조정신
野城 이도현
(한국시조협회 고문)
오늘날 우리는 예측불허의 불확실성시대에 살고 있다. 금년 봄처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고로나 감염병으로 인해 온 세계가 불안과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떨게 되었으니 어디 상상이나 하였으랴?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바벨탑 사건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받고 온 세상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고, 각각의 언어를 사용하여 소통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오만함을 다시 보시고, 제2의 바벨탑 재앙을 내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구촌엔 감염자들이 산같이 쌓이고, 나라마다 위축된 산업현장에 돈을 풀어 민생을 살리고 있다. 사람이 마스크를 꼭 써야하고, 사람이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비대면(非對面) 속에서 우리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도 <시조문학> 여름호가 건강하게 출간되어 우리를 기쁘게 한다. 필자는 이 여름호를 읽으면서 작품 속에 내재된 시조시인들의 건강한 ‘시조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천년을 전승해오는 청자정신, 까르르 웃음을 주는 우리말 한글정신, 보릿고개를 이겨낸 쑥의 정신, 징소리 울음 우는 은은한 백의정신, 아끼면서 술술 풀리는 두루마리정신 등이 작품에 나타난 시조정신이었다. 이러한 정신이 담긴 작품들을 함께 읽기로 하자.
봄바람 집배원은 향기마저 배달한다
그 흔한 안부 글씨 생략해도 가슴 환한
정향꽃 한 가방 챙겨 페달 연신 밟으며
-김정수의 <화산골(化山谷)우체국>전문
김정수 시인은 소시집에 단수 30수를 수록했다. 그중 <화산골 우체국>과 <새벽 풍경>을 뽑았다. 암울한 시대에 우리에게 긍정과 밝음을 선물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산골 우체국은 산간벽지에 있는 조그마한 우체국인가 보다. 빨간 가방을 멘 우체부 아저씨가 페달을 밟으며 우편물을 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모습을 봄바람 집배원이 향기를 배달한다 하였다. 얼마나 신선한가.
그 흔한 안부를 생략해도 가슴이 환한 정향꽃 한 가방을 챙긴 배달부 아저씨는 바쁜 모양이다. 연신 페달을 밟는다.
암울한 이 시대 독자에게 기쁨과 사랑을 안기는 밝은 작품이다.
귀촌 막 2년째인 경매시장 젊은 농부
과일 값 바닥 치자 생수 벌컥 들이키다
빈 트럭 털털대지만, 아침 환히 밝아온다.
-김정수의<새벽 풍경>전문
농촌의 새벽 풍경을 어쩌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과일 값 바닥치자 생수 벌컥 들이키다” 긴 말이 필요 없다 이 한마디로 새벽시장 경기를 들었다 놓는다. 귀촌한 지 2년째인 젊은 농부가 과일 시장에서 값이 바닥 치자 생수 벌컥 들이키는 참다운 심경을 읽자. 얼마나 속에 열이 붙으면 새벽에도 생수를 들이킬까. 독자를 긴장시키는 대목이다.
빈 트럭 털털대고 쓸쓸한 귀가지만 그래도 동녘에서 해가 솟는 밝은 아침이다. 작품은 긴장과 이완이 함께 할 때 분위기를 새롭게 환기시킨다. 김정수 시인은 위트와 해학을 겸한 시인이다.
말없이 소리 없이 예고 없이 찾아와
대뜸 하는 말이 목숨부터 내 놓으라
무법자 코로나 일구 보이는 게 없는 요물.
병사도 아니 뵈고 무기 하나 없는 대적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지구촌을 휩쓸었네
최첨단 의술도 약도 효용 없는 깜깜 처방.
들어야 말을 걸고 보여야 싸워보지
할 수 있는 방도라곤 의료인의 열과 정성
목숨을 담보한 사랑 죽음보다 강한 묘약.
-강성효의 <사랑 팬데믹>전문
신작특집의 첫 작품 강성효 시인의<사랑 팬데믹>전문이다.
‘팬데믹(pandemic)'은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하는 현상으로 세계보건기구(WHO)가 내리는 경보단계 중 최고 위험등급에 해당될 때 선포한다.
이러한 ‘위험 팬데믹’을 시인은 ‘사랑 팬데믹’이라 역설적으로 과감하게 제목을 달았다.
코로나 감염병은 아직까지 그 발병원을 찾지 못해 백신을 개발하지 못하여 첨단 의술이나 약도 효용 없이 깜깜 처방으로 오직 의료인의 열과 정성으로만 대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화자는 마지막 수 종장에서 “목숨을 담보한 사랑, 죽음보다 강한 묘약”이라 했다. 바로 이 종장 한 대목이 주제를 끌어 올리면서 작품 전체를 성공으로 이끈다. 팬데믹이란 용어가 사랑과 접목하여 묘한 뉘앙스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자기 목숨을 담보하면서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료인 모두와 관계하는 공무원 여러분께 감사로 보답하자.
한국은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코로나 감염을 신속히 진단하는 키트와 코로나 맵을 개발, 과학적으로 관리하고 대처하여 전 세계 ‘코로나 19’ 위기극복 일등 국가로 부상한다.
너도 나도 질까봐 목청 돋워 말 쏟더니
입마개가 정낭처럼 입마다 걸린 봄날
왜가리 모른척하며 홀로 구름 건지네.
발길 없는 거리에 구름 묻은 적막 뿐
작은 게 소중한 걸 모른 죄 이르면서
진달래 봄 숲에 숨어 꽃잎 벌줄 모르네.
-김영애의 <잃어버린 봄>전문
김영애 시인의 <잃어버린 봄> 전문이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 모두 봄을 빼앗겼기 때문이리라. 여름도 가을도 빼앗길까 걱정이다.
첫수에선 너도나도 질세라 목청을 돋워 소리쳤는데, 정낭처럼 입마개를 걸고 있는 봄날, 왜가리는 모르는 척 하고 유유히 물에 빠진 구름을 건진다 하였고, 둘째 수에선 인적이 없는 거리에 구름장만 내려앉았을 뿐, 작은 것이 소중함을 모른 죄로 진달래는 숲에 숨어서 꽃잎을 벌릴 줄 모른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한 인간의 적막, 고독, 두려움을 왜가리와 진달래를 객관적 상관물로 등장시켜 분위기를 새로운 정서로 환기 또는 사물화(事物化) 하고 있다.
여기서 “왜가리 모른척하며 홀로 구름 건지네”와 “진달래 봄 숲에 숨어 꽃잎 벌줄 모르네”의 종장 표현이 일품이다.
거울은 기억한다 내 인생 칠십년을
태고의 울음소리 첫 소식을 알린 후
시간에 바퀴 달고 뛰어온 바쁜 세월
얼룩진 거울 속 주름진 나를 본다
뒤안길로 숨어든 내 인생 한 평생
거울에 비친 노을 속에 나이 든 지친 얼굴.
-박영숙의 <거울>전문
박영숙 시인의 <거울>전문이다. 누가 처음으로 거울을 발명했을까. 거울이 없으면 자기의 모습을 알 수 없겠지.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먼저 거울을 본다. 밤사이 내 얼굴이 어떻게 변하지는 안했는지. 그러기에 거울은 자기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자화상(自畵像)이다.
시인은 지금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시간에 바퀴를 달고 뛰어 온 인생 칠십년의 세월을 돌아다본다. 어느새 얼룩진 거울 속 주름진 나! 노을 속에 나이 든 지친 얼굴을 보면서 가버린 세월을 아쉬워한다.
그러나 인생 칠십은 청춘이다. 아직 남아 있는 인생이 창창하기 때문이다. 인생 칠십을 공자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 했으니 하고 싶은 것 다 하시되 법도는 어기지 마시기를 당부 드린다.
첫수 종장 둘째 마디가 다섯 자에서 일곱 자까지 허용치인데 ‘바퀴 달고’ 넉자가 되었다. 아차! 실수인지 아니면 교정에서 잘못되었는지 꼭 챙길 일이다.
기나긴 잠을 자다 깨어난 기지개다
불화로 꽃불 위에 내맡긴 순간들이
빙렬(氷裂)의 아픔을 딛고 태어난 사기 한 점
태생이 점토인데 불사른 소신공양
상감문양 돋을새김 선 따라 오묘하고
연녹색 비단을 풀어 천년세월 휘감는다
정신 줄 놓을 번한 절명의 시간 넘어
비취색 연화문양 자체로 빼어난데
청 향로 타오른 단심 세세(歲歲)로 이어지고
잿상의 첫머리에 모셔진 청색 화로
자손들 서러운 맘 향 살라 잠재우며
제례 옷 여미는 손길 푸르던 성심이여.
-박일랑의 <청자향로(靑瓷香爐)>전문
박일랑 시인의 네 수로 된 <청자향로>전문이다. 제38회 한국시조문학상 수상작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이 고려청자가 아닌가.
첫수와 둘째 수에선 청자향로의 의의와 청자를 빚는 공정 그리고 그 오묘한 모양새를, 셋째와 마지막 수에선 자손들이 모여 향로에 불을 사르고 정성껏 제를 올리는 경건한 풍속도를 노래한다.
이렇듯 청자향로의 아름다운 예술미와 조상을 섬기는 후손들의 정성을 시인의 탁월한 경륜과 노련한 기법으로 표현한 솜씨가 잘 조화된 작품이다.
이 작품 전체에서 첫수, 둘째 수 셋째 수까지의 종장만을 그대로 연합하여 단수 한 편을 만들어 본다.
빙렬(氷裂)의 아픔을 딛고 태어난 사기 한 점
연녹색 비단을 풀어 천년세월 휘감는다
청 향로 타오른 단심 세세(歲歲)로 이으면서
-<청자향로(靑瓷香爐)>
거뜬히 압축된 단수 한 편이 빛난다. 원작에서 가락과 의미가 잘 조화된 종장들로 재구성하였기 때문이다.
재미있게 꾸며서 말하기 수업시간
살랑살랑 부는 바람, 까르르 웃는 웃음
그 소리 듣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요
새근새근 자는 아기, 꼬물꼬물 기는 벌레
조롱조롱 맺힌 이슬, 대롱대롱 달린 감
우리 말 아름다운 것 다시 한 번 느껴요
-양계향의 <아름다운 우리 말>전문
양계향 시인은 시작노트에서 나이가 들수록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듯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맑고 사랑스런 글을 쓰고 싶다고 한다.
이 작품에선 우리말의 의성어, 의태어를 활용하여 동시조 한 편을 내 놓았다. 첫수에선 ‘살랑살랑’ ‘까르르’ 의성어를, 둘째 수에선 ‘꼬물꼬물’ ‘조롱조롱’ ‘대롱대롱’등의 의태어로 아름다운 동시조 작품을 빚고 있다.
지금 세계에선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한글을 배우려고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발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작년 한글날 세계인이 뽑은 아름다운 한국어는 1) 사랑 2) 안녕 3) 아름답다 4)별 5) 봄 순이었다.
국보 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이 1997년 10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로 인해 한글의 우수성이 전 세계에 공인된 것이 아닐까. 때를 같이하여 양시인처럼 아름다운 우리말을 활용한 시조작품을 많이 생산하여 시조를 세계화함에 일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녁놀 자락 끊어
요 만들어 드릴 걸
삭신이 쑤신달 때 왜 눈치 못 챘을까
저녁놀 이제 곱게 피어도
깔고 잘 이 안 계시네.
저녁놀 보자기에
추위만 싸드렸네.
때늦게 깨달아 왜 후회를 쌓을까
저녁놀 얼른 마름질해
이불 한 채 해드릴 걸.
-유준호의 <사모곡(思母曲)>49 전문 -저녁놀
유준호 시인은 사모곡(思母曲)을 연작하여 발표하고 있다. 이 작품애선 ‘저녁놀’이 부제가 된다.
시인은 저녁놀을 바라보면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한 불효를 후회하고 있다. “저녁놀 자락 끊어/요 만들어 드릴 걸” 하고 초장부터 후회한다. 삭신이 쑤신다고 할 때 왜 바보같이 눈치 채지 못 했을까.
“저녁놀 보자기에/추위만 싸드렸네.” 라고 둘째 수에서 또 한 번 후회한다. 그러면서 “저녁놀 얼른 마름질해/이불 한 채 해드릴 걸”하고 세 번 째 후회한다.
이 작품에선 ‘저녁놀’이 핵심어다. 저녁놀이 이불과 요를 만드는 피륙으로 은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ㄹ 걸’ 후회하는 어미(語尾)로 작품을 열고 닫는 수미쌍괄법이 후회한다는 주제를 한층 끌어 올림에 성공한다. 유준호 시인은 우리말을 마음대로 구사하는 달인이다.
내 고장 바둑계의 참 스승 전영선 사범
아홉 살 꼬마제자 이창호의 첫 스승으로
비범함 읽어내고는 올곧게 내린 결단
창호는 내가 가르칠 재목이 아니라며
최고수인 조훈현 9단에게 추천하여
기어이 그의 애제자로 만들어 준 그 일화
제자의 미래 위해 자존심도 버리시고
더 좋은 스승에게 보내줬던 전영선 사범
누구도 생각지 못할 그 세심한 배려심.
-이재웅의 <거울·1>전문 -고 전영선 바둑사범
이재웅 시인은 작품 <거울·1>에서 바둑에 천재적인 재주가 있는 아홉 살 꼬마제자 이창호군을 발견하고, 내가 가르칠 재목이 아니라며 바둑계의 최고수인 조훈현 9단에 추천하여 기어이 조9단의 애제자로 만들어 성공시킨 고 전영선 사범의 이야기를 작품화 하고 있다.
제자의 미래를 위하여 나보다 더 훌륭한 스승에게 추천하고 보내줬던 감동적인 일화다.
이어지는 작품 <거울·2> 에선 조훈현 9단이 이창호 어린 제자를 아예 집에 들여 숙식을 함께하며 불철주야 바둑지도에 심혈을 기울여 밝은 미래를 열어준다.
마침내 이창호는 1986년 프로로 입단하여 세계 바둑챔피언으로 등극하고 1996년 바둑 9단으로 승단한다.
여기서 화자는, 고 전영선 바둑사범과 조훈현 바둑 9단의 감동적인 제자사랑의 정신과 수범적인 실천사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바둑계의 두 스승이야기가 세상의 거울이 되었다.
꾸움벅 꿈벅이는 크고 맑은 눈 속에
생각도 욕심도 없는 고요를 채워놓고
노을에 물이든 채로 세월을 되새김한다.
-임기종의 <황소의 명상>전문
임기종 시인은 지금 황소의 명상에 빠져 있다. 황소도 명상을 하나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란 말이 있다. 어쩌랴 기운이 센 황소도 코뚜레에 꿰어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명상만 할 수밖에 없다.
코뚜레는 생각도 욕심도 못하도록 고요만을 채워 놓는다. 모든 것을 가두어 놓고 자유를 유보한다. 그래서 눈에 황혼녘 물이 든 채로 세월을 되새김질만 한다고 한다.
직장생활을 마치고 나니 무료해서 막연한 시간의 끝이 보이기도 한단다. 세월에 순응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운명관을 황소의 눈, 황소의 반추(反芻)를 빌어 묘사하고 있다.
이어서 여름 시조단에 수록된 작품을 보자
지난밤 꿈자리가 사나워 허둥댈까
내다 늘면 거두어라 거두면 널어라네
온종일 허리 펼 새 없이 고추와 시름이네
앞산에 얄망궂은 흰여우 변덕보소
긴 꼬리 돌려가며 탈을 쓰다 벗었다 하네
변장술 기가 막혀서 어느 장단 춤을 출까
-권남이의 <비설거지> 전문
비설거지란 비가 오려고 하거나 비가 올 때 비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이나 농작물을 치우거나 덮는 일을 말한다.
권남이 시인은 온종일 오락가락하는 비 때문에 허리 펼 새 없이 고추와 시름한다. 비가 자주 오다 말다 하는 비를 여우비라 하는데 이 여우비를 시인은 ‘긴 꼬리 돌려가며 탈을 쓰다 벗었다 한다”고 여우 행동에 빗대면서 어느 장단에 춤을 출까 걱정이다.
마당에 고추를 널어놓고 여우비와 싸우면서 비설거지하는 상황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첫수 중장 ‘늘면’을 ‘널면’으로 ‘널어라네’를 ‘널라네’로 정정해야 바른 표기가 된다.
버림받고 버려졌던 볼품없는 이 내 신세
모진 겨울 동빙한설 웅크리고 견뎌내어
오는 봄 다시 살아나 새잎 돋아 꽃 피우리
늦가을 찬 서리에 서둘러 수확하고
찌끄레기 부실한 놈 그냥 버려두었더니
한겨울 혹한 속에도 파릇파릇 움 트누나
그렇구나, 우리 신세 이 보다 더 나을쏘냐
비정규직 무단해고 조기은퇴 모진 세월
그래도 참고 견디면 새봄 다시 맞으려나?
-박정섭의 <겨울 텃밭>전문
겨울 텃밭은 허전하고 쓸쓸하다. 모두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한 속에서 땅속에서는 파릇파릇 움이 튼다.
모진 겨울 동빙한설에도 웅크리고 견뎌내어 오는 봄엔 새잎 돋아 꽃을 피우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이것이 자연의 순리가 아닌가?
박정섭 시인은 비정규직 무단해고, 조기은퇴에 관해 걱정을 한다. 우리 사회에 고질화 된 정규직과 비정규직, 금수저와 흙수저간의 노사문제는 쉽게 풀기 어려운 사회적 난제의 하나다.
시인은 이러한 풀기 어려운 사회적 난제들을 겨울 텃밭에 비유한다. 얼어붙은 겨울 텃밭이 봄으로 풀리듯, 참고 견디면 비정규직도 반드시 따스한 봄이 찾아오리라 확신한다.
비 온 뒤 맨홀 틈새 풀 송송 돋아있다
달리는 바퀴에 잎줄기 찢겨져도
밤사이 다시 고개 든 저 새파란 웃음 봐라
-서명희의 <틈새 꽃>전문
서명희 시인의 <틈새 꽃>에서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을 다시 본다. 화자는 길을 가다가 맨홀 틈새 풀 송송 돋아난 풀잎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저 새파란 웃음을 보라한다.
“달리는 바퀴에 잎줄기 찢겨져도/밤사이 다시 고개 든 저 새파란 웃음”의 표현이 일품이다. 강인한 생명력은 달리는 차바퀴에 찢겨도 웃음으로 다시 일어선다.
시인 김수영은 작품<풀>에서 “풀이 눕는다.-중략-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의 <풀>이다. 앞의 서명희의 작품과 같이 풀의 강인한 생명력을 주제로 하고 있다. 다른 것은 서명희의 작품은 시조요 김수영의 작품은 자유시다.
어느 위대한 손이 저리 붉게 튕기고 있나
외줄로도 너끈하게 교향악을 탄주하는
까마득 벼랑 누르며 폭발하는 빛의 향연
-심석정의 <일출>전문
심석정 시인의 번뜩이는 발상을 본다. 동해 일출(日出) 순간을 저렇게 형상화(形象化) 할 수 있을까?
일출의 순간 장엄한 모습을 어느 위대한 손이 외줄로 된 교향악을 저리 붉게 탄주하는가. 폭발하는 빛의 향연이라 했다. 불덩이로 솟는 태양을 교향악을 탄주하는 빛의 향연이라 했으니 놀랍지 않은가.
불덩이와 교향악이 한데 어울리어 범벅이 된 공감각이 무르익은 놀라운 표현이다.
봄바람 손짓 따라 들판에 나갔더니
논두렁 양지쪽에 햇쑥이 무성하다
어머니 떠나신 뒤에도 제들끼리 자랐네
싱싱한 봄풀처럼 푸르른 꿈을 꾸던
아련한 추억들이 머무는 들판에서
쑥개떡 볼때기찜으로 보릿고개 넘겼었지
쑥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은 고향마을
허기진 보릿고개 견뎌낸 쑥버무리
정갈히 다듬고 씻던 엄마 손길 생각난다.
이명순의 <쑥을 캐며>전문
이명순 시인의 <쑥을 캐며> 전문이다.
쑥은 우리 조상들과 오랫동안 애환을 함께 해온 약초요 식량이었다. 가난할 때 배고파 허기졌을 때 쑥개떡이나 쑥버무리로 보릿고개를 넘겼다.
지금 시인은 쑥을 캐며 하늘나라로 떠나신 어머니를 회상하고 추억한다. 불과 삼사십년 전 우리 어머니들은 허기진 보릿고개를 쑥을 뜯어 밥을 짓고, 버무리를 빚어 배고픔을 달랬다.
지금도 봄이 되면 어머니들은 둑길이나 들녘에서 쑥을 뜯으며 향수를 달랜다. 쑥은 겨레와 함께 애환을 함께 해온 가난의 눈물이요 상징이었다.
숨차는 오르막 길 하늘과 가까운 곳
바람조차 마음대로 흐르지 못하는데
한 움큼 햇살마저도 그냥 스쳐 지난다.
GDP 세계 5위 비싼 사글세에
제외된 수급 혜택 마지막 보금자리
외롬만 넘치는 방에 아픈 하룰 접는다.
-이종욱의 <쪽방촌>전문
이종욱 시인의 <쪽방촌>이다.
시인은 우리나라 쪽방촌의 실태를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예로부터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한다고 했으니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쪽방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개 기초생활수급자나 독거노인, 장애인들이다. 열악한 주거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화자는 쪽방촌의 열악한 환경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그러한 환경에서도 수급혜택도 제외된 채 비싼 사글세에 쫓기면서 아픈 하루하루를 접는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다각적으로 연구하고 검토해야 한다. 복지정책은 어떤 특정 계층이나 인기영합에 편향되지 않고 정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혜택이 돌아가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일이다.
담금질로 배인 이랑 부스스 일어난다
촉촉이 식어간 수척한 혈관에
머금은 시름의 여울 녹이 되어 내린다
용마루 언저리에 비로소 빗장 풀어
주름 펴 원을 엮는 넉넉한 메아리로
긴 갈증 가슴을 열고 풀어보는 옷고름
접어둔 사설들을 새빛으로 두드리고
한마당 열린 문에 펼쳐보는 너름새
풍장 질 진한 울음에 기별 오는 백의(白衣)여.
-이처기의 <징>전문
이처기 시인의 <징> 전문이다. 징은 우리나라 고유의 타악기다. 태어날 때부터 뜨거운 불에서 나와 두들겨 맞으면서 찬물에 담금질을 한다. 얼마나 아플까? 그러기에 한이 서린 악기다. 징은 궁중에서, 절간에서, 굿을 할 때, 때로는 사물놀이 할 때 다양하게 사용한다.
기쁠 땐 용마루에서 빗장을 풀어 소원을 빌며, 긴 갈증 가슴을 열고 옷고름도 풀었다. 풍악놀이 한 마당 흐드러진 울음에 백의겨레여! 정녕 기쁜 소식 있으라.
징은 기뻐도 울고 서러울 때도 운다. 맞아야 소리가 나는 악기, 한이 많은 그래서 몸으로 우는 악기가 징이다.
작품에서 ‘시름의 여울’ ‘긴 갈증’ ‘진한 울음’등의 시어가 밝지 못하고 우울한 것은 바로 징의 속성이 아프기 때문이리라.
한(恨)이 많은 우리 민족은 징을 치면서 스스로 위로하며 살아 왔다. 징은 백의민족과 오래도록 애환을 함께 해온 운명의 악기요 애물이었다.
매화꽃 빨간 왕 눈 어느새 오셨는가
실버들 초록빛이 물위로 떨어지네
역병이 막아서는데 약속 지킨 임이여.
-임만규의 <호숫가>전문
임만규 시인은 지금 호숫가를 산책하면서 4월, 봄을 감상한다.
매화꽃, 실버들은 봄을 대표하는 예술이다. 매화꽃을 의인화하여 어느새 오셨는가 묻고, 실버들이 실실이 늘어진 모양새를 ‘초록빛이 물위로 떨어지네’ 하였으니 얼마나 시적인가?
코로나 역병이 만연한데도 자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의연하게 순리를 지키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순간을 조율하는 규칙적인 운율이다
쉬지 않는 걸음으로 우주를 거니는지
누구도 찌르지 않고 공생하는 두 바늘.
-한분순의 <시계의 정형시>전문
시계는 시간을 알리는 게 사명이다. 따라서 정확하지 않으면 그 시계는 무용지물이다. 초, 분, 시간이 항상 규칙적이어야 한다.
시계가 쉬면 고장난 시계로 쓸모가 없다. 항상 같은 음보(音步)로 진행을 해야 한다.
큰 바늘과 작은 바늘이 서로 찌르면 시계는 돌아가지 않는다. 서로 공생할 때 두 바늘이 돌아간다. 시조는 가락과 음보가 공생할 때 정형시로서의 사명을 다한다는 원리를 시인은 시계의 두 바늘에 비유한다.
화장지엔 마디 있네
엄한 듯 분명하고
함부로 쓴다 해도
무덤덤 아낌없어
한 번을 망설였다가
끝닿을 줄 모르고
내밀면 마냥 닿는
손쉬운 주변에서
무분별 뒤처리에도
군말 없이 술술 푸네
하루란 마디마디가
멈칫대지 않듯이.
-황삼연의 <두루마리>전문
황삼연의 <두루마리>전문이다. 화장지 두루마리에도 분명하게 끊어 쓰라는 마디가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낌없이 함부로 쓰고 있다.
황시인은 경고한다. 두루마리라 해서 마구 풀어서 쓰면 안 된다고.
하루란 마디마디가 참으로 소중한 것을 알고 화장지 두루마리도 마디마디 아껴서 써야 한다고,,,
“잘 풀리는 집”화장지가 있다. 화장지도 잘 풀어 아껴 써야 매사가 술술 잘 풀리는 집이 된다. 아껴 써야 복이 들어오는 집이 된다.
눈 녹은 물소리에 눈을 뜨고 일어나
봄 햇살 베어 먹고 허기를 채우더니
저것 봐! 과식 했는가 어린 볼이 터지네.
-김성수의 <버들개지>전문
김성수 시인의 단수 <버들개지>전문이다. 반짝 빛나는 재치에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이 작픔의 주어는 역시 제목인 ‘버들개지’요 서술어는 ‘터지네’이다. 무엇이 터지는가? 어린 볼이다. 어린 볼은 곧 어린 싹이다. 초장에서 상을 열고, 중장에서 그 상을 잇더니 종장에서 갑자기 가락과 의미를 3, 5, 4, 3으로 반전시킨다. 이것이 시조의 절묘한 비법이요 자유시에서 결코 맛보지 못하는 쾌미(快味)이다.
게다가 작품 전체를 의인화하여 “저것 봐! 과식 했는가 어린 볼이 터지네”라고 종장을 닫는다. 의미까지 반전시킨다. 절창이다.
지고 온 산 하나가 부표로 떠 있더니
흐르듯 떠밀리듯 큰 바다 건너와서
뭍에서 벙그는 봄빛 품어 안고 가는 길
-김성숙의 <삶>전문
김성숙 시인은 자기 삶을 지고 온 산 하나가 부표로 떠 있다가 큰 바다를 건너 이제 뭍으로 나와 벙그는 봄빛을 품어 안고 가는 길이라 고백한다.
시인의 과거의 삶은 바다에 부표로 떠 있는 삶이었다. 흐르듯 떠밀리듯 흔들리는 삶이었다. 과거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때로는 사나운 비바람에 거친 풍랑도 만났으리라. 그러나 그 힘들고 어려웠던 역경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어찌 보면 장한 삶이었다.
이제 화자는 벙그는 봄빛을 만났다. 봄빛이 누구였든 큰 희망임에 틀림없다. 살다보면 환난이 있고, 환난이 연단을 낳고, 그 연단이 소망을 낳는 법, 분명 화자가 가는 길엔 크나큰 빛이 함께하리라 확신한다.
부부를 발음해봐 바람만 나오잖아
똑같은 글자에다 받침도 하나 없어
파도에 부대끼다가 조약돌이 된 거야
-안태영의 <함께 산다는 건> 전문
부부(夫婦)는 서로 닮는다 하였다. 안태영 시인은 부부는 “똑같은 글자에다 받침도 하나 없어/파도에 부대끼다가 조약돌이 된 거야” 라고 말한다.
그렇다. 부부는 천생연분, 똑같은 글자에다 받침도 하나 없다. 세상사 거친 파도에 부대끼면서 40년, 50년 닳고 또 닳고, 닮고 또 닮아 같은 조약돌이 된다. ‘함께 산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부부가 25년을 함께 살면 은혼(銀婚)이요, 50년을 함께 살면 금혼(金婚)이요, 60년을 함께 살면 회혼(回婚)이라, 모쪼록 건강하고 즐겁게 오래도록 해로(偕老)할 일이다.
지금까지 시조문학 여름호에 실린 작품을 살펴보았다. 좋은 작품이 많았으나 모두 살피지 못한 점이 아쉽다.
코로나19에 관한 작품들이 많았다. 일찍이 없었던 역병,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가뜩이나 불확실성시대에 코로나까지 겹쳐 비대면 사회, 비정한 사회가 되었으니 인간의 정마저 앗아가 버렸다.
이 불안한 시대 우리는 ‘시조정신’을 갖고 굳건한 푯대를 세우자. 시조정신은 백의정신이요, 배달의 정신이다. 3장 6구, 하늘, 땅, 사람의 삼재(三才)정신이요, 반만년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는 끈기 있는 겨레정신이다.
이 정신으로 시조를 쓰고, 시조를 창달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