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한 맛과 영양으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천안 호두입니다
천안 호두의 주산지인 광덕면에서 하는 천안 호두 축제에 참여하러 왔다가
생긴 모양이 복숭아와 같다고 하여 호(胡) 자와 도(挑) 자를 따서 호두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호두 나무의 유래를 따라 천안 광덕산에 위치한
광덕사를 찾아보았습니다.
![천안 호두의 유래가 숨쉬는 광덕사 사진](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chungnam.net%2Fexport%2Fmedia%2Farticle_image%2F20161010%2FIM0000980456.png)
광덕면 호두축제장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이정표가 보이네요
광덕사 호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 398호로 천안시의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입니다
아산시와 천안시의 접경지대에 있는 광덕산을 이곳 주민들은 태화산(泰華山)이라고 부른다.
광덕산의 높이는 699미터로 1미터만 더 높았으면 700미터가 될 것이라 하여 정상에 바위 하나를 올려 놓앗다고 하는데,
호젓한 등반로와 풍광이 좋아 주말의 등산코스로 손꼽힌다. 장군바위를 거쳐 절골로 하산하는 길도 아기자기하고, 정상에
올라 아산만을 한 눈에 굽어보는 즐거움 또한 무엇에 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광덕사는 바로 그 광적산 남쪽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고랴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때 주민들이 왕건을 열렬히 환영해
맞았으므로 '천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 곳'이라는 뜻으로 지명을 '天安'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지명 유래를 가진 천안
에서 승용차를 타고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광덕사는 위치해 있다.
광덕사 입구에는 다른 절집과 달리 일주문 앞에 우람한 크기의 '호두전래사적비(胡桃傳來史蹟碑)'가 우뚝 서서 순레자를
맞는다. 중국에서 들여온 호두나무의 시배지(始配地)가 이곳임을 알리는 비이다.
호두는 고려 말에 유청신(柳淸臣 : ? ~ 1329)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가져온 것이라 한다. 원나라
에서 묘목과 종자를 가지고 돌아온 유청신은 묘목은 광덕사 보화루(普化樓) 앞에 심고, 종자는 광덕면 매당리의
자기 집에 심었다고 한다.
유청신은 초명이 비(庇)인데, 어려서 몽고어를 배워 여러 차례 원나라에 다녀왔고, 외교에 능했으므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낭장(郎將)이 되었으며, 뒤에 대장군, 밀직승선, 동지밀직, 광정부사, 찬성사에 이어 정승에까지 올랐
던 인물이다. 그러나 충숙왕 8년(서력 1321년)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던 그는 간신 오잠(吳潛)과 함께 왕위를
노리는 심양왕(瀋陽王)을 고려왕으로 옹립하려는 모반을 꾀하다 실패한 뒤 계속 원나라에 머물며 본국에 정동성
(征東城)을 설치할 것을 청하는 등 반역 행위를 일삼다가 마침내 그곳에서 죽게 된 역신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호두(胡桃)란 이름의 유래를 살펴보면 복숭아처럼 생겨서 도(桃)라 했으니 원나라에서 가져왔으면 원도(元桃)라고 해야
하지만, 호국불교관이 투철했던 광덕사 스님들이 오랑캐 호(胡)자를 써서 호도라고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우리나라
호두 생산량의 60%를 이곳 광덕면 일대에서 수확한다.
일주문을 뒤로 하고 보화루를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새로 단청을 한 전각들이 단정하게 앉아있다. 숙종 6년(서력 1680년)
안명로(安明老)가 지은 <광덕사사적기(廣德寺事蹟記)>에는 광적사의 개창을 신라 흥덕왕 7년(사력 832년)으로 적고 있다.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치(佛齒) 1과와 사리 10과를 진산화상(珍山和尙)에게 주어 광덕사를 개창케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것이 신라 선덕여왕 때이므로 광덕사 개창 시기와는 시대가 맞지
않는다.
광덕사에서 펴낸 자료에는 선덕여왕 5년(서력 636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통일신라 때 진산화상이 중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광덕사사적기>에 의하면 광덕사가 개창 당시에는 금당이 아홉, 종루가 여덟, 2층 범각과 3층 법전이 있는 절로 충청도와
경기도 지방에서 가장 컸다고 한다. 절 소유 토지가 광덕면 전체에 이르고, 부속 암자가 89개에 달해 광덕사 골짜기 마다
독경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온양온천에 왔던 세조가 광덕사에 들러 부처님 치아와 사리를 친견한 뒤, 절의 부역을 면제시켜 주고 밭을
내리기도 했으니, 이런 내용을 기록한 세조어첩(世祖御帖)이 지금도 절의 귀중한 보물로 전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뒤 대웅전과 천불전만을 중건한 채 1980년까지 사세가 계속 기울다가 최근에 이르러서야 새
모습의 도량을 갖추게 되었다. 대웅전과 명부전, 그리고 선방으로 사용하는 적선당(寂禪堂)과 요사채로 이용되는 덕장전
(德藏殿), 보화루, 종각 등 거의 모든 건물이 근래에 세워졌다.
새로 단장한 사찰답게 경내의 나무 한 그루에도 정성스런 손길이 느껴지지만 대웅전 계단 앞에 세워 둔 해태상과 보화루
앞쪽 호두나무가 이 절의 오랜 내력을 조용히 상기시켜 줄 뿐 고아한 옛 정취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유청신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묘목을 심은 것이라는 이 나무는 옛 이야기대로라면 수령 700년을 넘긴, 우리나라 최초의 호두나무가 되겠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명부전 옆으로 난 길은 천불전 가는 길로 이어진다. 천불전은 화장교(華藏橋) 너머 독립된 영역에 모셔져
있는데, 화장교 앞 바위에 조각된 역사상(力士像)의 무시무시한 표정이 그 배경처럼 서 있는 노란 은행나무의 화사함과
대조를 이룬다.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양 협시로 하여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 천불전 안에는 천불이 그려진 후불탱화가
3점 있어, 전체 삼천불의 그림이 장엄한 기운을 풍긴다.
마곡사의 말사인 광덕사에는 자장율사가 창건 당시 가져왔다고도 하고 832년 진산화상이 가져왔다고도 하는 부처님 치아
1과와 사리 10과 등을 비롯하여 금,은,흑자로 된 <법화경>, 금자사적기(金字寺蹟記), 세조어첩 등이 전한다. 고려 말기의
사경(寫經)으로 추측되는 <법화경>은 비록 낙절본이기는 하지만 여러 본 남아 있고, 그 중 여섯 권의 책이 보물 제390호로
지정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보물 제269호와 제270호로 지정괸 마곡사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 두 권
도 원래 이 절에 소장되어 있던 것이라 한다.
호두나무가 유난히 많은 광덕산은 또한 모기가 없기로도 유명하다. 강감찬 장군이 어느 해 이곳에서 야영을 하는데 큰
모기들이 어찌나 달려드는지 모든 군사들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화가 난 장군은 벌떡 일어나 온 산이 울릴 만한
큰 목소라로 "모기들은 물러가라"고 호령을 했다. 이날 이후 광덕산에서는 모기를 볼 수 없었다고 전한다.
새로 지어진 건물들과 아직 연륜의 옷을 입지 못한 단청들로 인해 깊은 운치는 좀 떨어지지만, 가을 풍경 속에 들어앉은
광덕사는 세수를 방금 끝낸 처녀처럼 정갈한 느낌을 주는 사찰이다. 호두가 잔뜩 열릴 무렵이나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
었을 때 들려 보면 더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