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으로 떠나는 여행
일 시 : 원기 102년 5월 9일 (일)
원/불/교/함/라/교/당
◉ 일정표 ◉
교당 출발 (7시)
이순신공원 도착 (10시) – 통영교당 부회장님과 만남
한산대첩에 대하여
바닷물에 손 담그기
청마문학관 (11시) - 생가 관람
동피랑 (12시) - 강구안에 대하여
세병관에 대하여
통영성에 대하여
벽화에 대하여
점심 – 늘해랑 생선구이
아름다운 길 – 산양일주로
(길혜선이네 집)
여객선터미널 도착 (오후 2시 30분)
한산도행 배 (3시)
한산도 도착 (3시 30분)
한산도 출발 (4시 30분)
서호시장 도착 (5시)
서호시장 출발 (5시 30분)
저녁식사 (6시) 조바우추어탕
교당도착 (10시)
1. 이순신 공원
이순신공원(구,한산대첩기념공원)은 통영시의 대표적인 성지로, 1592년 8월 14일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해상주도권을 다툰 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대파함으로써 해상
주도권을 장악하여 식량보급로를 확보하고
수륙병진작전을 전개하려던 일본 수군의 전의를
상실케한 임란의 최대승첩지인 이곳이다.
이순신공원은 성웅 이충무공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거룩한 호국의 얼과 높은 뜻을 선양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곳이다.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은 1592년 8월 14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살수대첩, 귀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이순신은 7월 5일(양력 8월 11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 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고, 다음 날인 6일에 이억기와 더불어 48척을 거느리고 출진하였고,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의 전력은 55척이 되었다. 7월 7일(양력 8월 13일) 저녁, 조선 함대는 당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이때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서 일본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견내량(見乃梁 :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했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 길이 약 4km에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는 데다,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운신하고 전투를 벌이기에 좁은 해협이었다. 반면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이 없는 섬이었기 때문에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 5~6척 만으로 한산도 앞바다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격멸한다는 전략이 세워졌다.
대여섯 척의 조선 함대를 발견한 일본 수군은 그들을 뒤쫓아 한산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전 조선 함대가 배를 돌려 학익진(鶴翼陣)을 펼쳤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地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층각대선(層閣大船) 한 척을 나포한 것을 비롯해 왜선 47척을 불사르고 부수었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했다. 이 해전은 조선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왜병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2. 청마 문학관
청마문학관은 청마 유치환 靑馬 柳致環 시인(1908~1967)의 문학정신을 보존,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2000년 2월 1,220평의 부지에 문학관(전시관)과 생가(본채, 아래채)를 복원, 망일봉 기슭에 개관하였다. 전시관(51평)에는 청마의 삶을 조명하는 '청마의 생애'편과 생명 추구의 시작을 감상하고 작품의 변천, 평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청마의 작품 세계'편, 청마가 사용하던 유품들과 청마관련 평론, 서적 논문을 정리한 '청마의 발자취'편, '시 감상코너'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마의 유품 100여점과 각종 문헌자료 350여점이 전시되어있다.
유치환(1908-1967) 시인. 대표시로는 '깃발'.'그리움'.'일월' 등이 있다.
호는 청마(靑馬). 경상남도 통영 출신. 유준수(柳焌秀)의 8남매 중 둘째 아들이며,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의 동생이다.
11세까지 외가에서 한문을 배웠다. 1922년 통영보통학교 4년을 마치고, 일본 도요야마중학교[豊山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형 치진이 중심이 된 동인지 『토성(土聲)』에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가세가 기울어 4학년 때 귀국, 1926년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이듬해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퇴폐적인 분위기에 불만을 품고 1년 만에 중퇴하였다. 당시 시단을 풍미하던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감동하여, 형 치진과 함께 회람잡지 『소제부(掃除夫)』를 만들어 시를 발표하였다. 1931년『문예월간(文藝月刊)』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 뒤 잡다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1937년부산에서 문예동인지 『생리(生理)』를 주재하여 5집까지 간행하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를 발간하였다. 여기에 초기의 대표작인 「깃발」·「그리움」·「일월」 등 55편이 수록되었다. 1940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연수현(煙首縣)으로 이주하여, 농장 관리인 등에 종사하면서 5년여에 걸쳐 온갖 고생을 맛보고, 광복 직전에 귀국하였다.
이때 만주의 황량한 광야를 배경으로 한 허무 의식과 가열한 생의 의지를 쓴 시 「절도(絶島)」·「수(首)」·「절명지(絶命地)」 등이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수록되었다. 광복 후에는 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문학 운동을 전개하였고, 6·25전쟁 중에는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의 일원으로 보병 3사단에 종군하기도 하였다.
『보병과 더불어』는 이 무렵의 시집이다. 1953년부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이 후에는 줄곧 교직으로 일관하였다. 안의중학교(安義中學校) 교장을 시작으로 하여 경주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를 거쳐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교통사고로 작고하였다.
묘지는 부산광역시 서구 하단동에 있으며, 그의 시비는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공원, 통영남망공원(南望公園) 등에 세워졌다. 2000년 2월에는 경상남도 통영시 망일1길(정량동)에 청마문학관이 개관되었다.
시집으로는 『울릉도』·『청령일기(蜻蛉日記)』·『청마시집』·『제9시집』·『유치환선집』·『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미루나무와 남풍』·『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등이 있다. 수상록으로는 『예루살렘의 닭』과 2권의 수필집,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 등이 있다.
3. 동피랑
동피랑은 ‘동쪽’과 ‘비랑’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생긴 이름이다. 비랑은 비탈의 통영 사투리이다. 통영 시가지 동쪽에 동호동과 정량동, 태평동의 경계를 이루는 이루는 산의 바위 피랑지대에서 유래한 토박이 지명이다. 옛 통영성의 동포루가 산 정상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푸른 통영21 추진협의회는 2007년 10월 도시재생의 색다른 시선 ‘통영의 망루 동피랑의 재발견’이라는 사업을 시행했다. 이는 통영시가 동포루 복원과 공원 조성 목적으로 마을을 철거하려고 하자, 공공미술을 통한 마을 살리기 사업이었다. 마을 곳곳에 그려진 그림들과 강구안 바다 풍경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통영시의 명소가 되었다. 2008민관포럼 최우수상, 2008전국 마을 만들기 대회 우수상 등을 받았다.
4. 한산도
한산도는 610세대 정도가 거주를 하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조선삼도수군통제영이 이곳 한산도에 설치되었고, 이 일대의 한산대첩을 이루었던 배경이 되는 지역이다. 최고봉인 망산은 해발 293m로 임진왜란 당시 망루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1]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행영을 이곳에 제승당을 설치하였고, 이듬해인 1593년에는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원균의 참패로 제승당이 소실되었다. 1739년 조경 통제사가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을 중건하였다.
청구영언에 실린 이순신 장군의 진중시 한산도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閑山島夜吟
水國秋光暮 (수국추광모) 바다에 가을 빛 저무는데
驚寒鴈陣高 (경한안진고) 찬바람에 놀라 기러기는 높이 나네
憂心輾轉夜 (우심전전야) 시름겨워 잠 못 드는 밤
殘月照弓刀 (잔월조궁도) 새벽달만 활과 칼을 비추는구나.
통영으로 떠나는 여행
일 시 : 원기 102년 5월 9일 (일)
원/불/교/함/라/교/당
◉ 일정표 ◉
교당 출발 (7시)
이순신공원 도착 (10시) – 통영교당 부회장님과 만남
한산대첩에 대하여
바닷물에 손 담그기
청마문학관 (11시) - 생가 관람
동피랑 (12시) - 강구안에 대하여
세병관에 대하여
통영성에 대하여
벽화에 대하여
점심 – 늘해랑 생선구이
아름다운 길 – 산양일주로
(길혜선이네 집)
여객선터미널 도착 (오후 2시 30분)
한산도행 배 (3시)
한산도 도착 (3시 30분)
한산도 출발 (4시 30분)
서호시장 도착 (5시)
서호시장 출발 (5시 30분)
저녁식사 (6시) 조바우추어탕
교당도착 (10시)
1. 이순신 공원
이순신공원(구,한산대첩기념공원)은 통영시의 대표적인 성지로, 1592년 8월 14일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해상주도권을 다툰 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대파함으로써 해상
주도권을 장악하여 식량보급로를 확보하고
수륙병진작전을 전개하려던 일본 수군의 전의를
상실케한 임란의 최대승첩지인 이곳이다.
이순신공원은 성웅 이충무공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거룩한 호국의 얼과 높은 뜻을 선양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곳이다.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은 1592년 8월 14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살수대첩, 귀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이순신은 7월 5일(양력 8월 11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 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고, 다음 날인 6일에 이억기와 더불어 48척을 거느리고 출진하였고,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의 전력은 55척이 되었다. 7월 7일(양력 8월 13일) 저녁, 조선 함대는 당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이때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서 일본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견내량(見乃梁 :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했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 길이 약 4km에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는 데다,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운신하고 전투를 벌이기에 좁은 해협이었다. 반면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이 없는 섬이었기 때문에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 5~6척 만으로 한산도 앞바다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격멸한다는 전략이 세워졌다.
대여섯 척의 조선 함대를 발견한 일본 수군은 그들을 뒤쫓아 한산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전 조선 함대가 배를 돌려 학익진(鶴翼陣)을 펼쳤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地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층각대선(層閣大船) 한 척을 나포한 것을 비롯해 왜선 47척을 불사르고 부수었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했다. 이 해전은 조선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왜병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2. 청마 문학관
청마문학관은 청마 유치환 靑馬 柳致環 시인(1908~1967)의 문학정신을 보존,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2000년 2월 1,220평의 부지에 문학관(전시관)과 생가(본채, 아래채)를 복원, 망일봉 기슭에 개관하였다. 전시관(51평)에는 청마의 삶을 조명하는 '청마의 생애'편과 생명 추구의 시작을 감상하고 작품의 변천, 평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청마의 작품 세계'편, 청마가 사용하던 유품들과 청마관련 평론, 서적 논문을 정리한 '청마의 발자취'편, '시 감상코너'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마의 유품 100여점과 각종 문헌자료 350여점이 전시되어있다.
유치환(1908-1967) 시인. 대표시로는 '깃발'.'그리움'.'일월' 등이 있다.
호는 청마(靑馬). 경상남도 통영 출신. 유준수(柳焌秀)의 8남매 중 둘째 아들이며,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의 동생이다.
11세까지 외가에서 한문을 배웠다. 1922년 통영보통학교 4년을 마치고, 일본 도요야마중학교[豊山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형 치진이 중심이 된 동인지 『토성(土聲)』에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가세가 기울어 4학년 때 귀국, 1926년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이듬해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퇴폐적인 분위기에 불만을 품고 1년 만에 중퇴하였다. 당시 시단을 풍미하던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감동하여, 형 치진과 함께 회람잡지 『소제부(掃除夫)』를 만들어 시를 발표하였다. 1931년『문예월간(文藝月刊)』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 뒤 잡다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1937년부산에서 문예동인지 『생리(生理)』를 주재하여 5집까지 간행하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를 발간하였다. 여기에 초기의 대표작인 「깃발」·「그리움」·「일월」 등 55편이 수록되었다. 1940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연수현(煙首縣)으로 이주하여, 농장 관리인 등에 종사하면서 5년여에 걸쳐 온갖 고생을 맛보고, 광복 직전에 귀국하였다.
이때 만주의 황량한 광야를 배경으로 한 허무 의식과 가열한 생의 의지를 쓴 시 「절도(絶島)」·「수(首)」·「절명지(絶命地)」 등이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수록되었다. 광복 후에는 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문학 운동을 전개하였고, 6·25전쟁 중에는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의 일원으로 보병 3사단에 종군하기도 하였다.
『보병과 더불어』는 이 무렵의 시집이다. 1953년부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이 후에는 줄곧 교직으로 일관하였다. 안의중학교(安義中學校) 교장을 시작으로 하여 경주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를 거쳐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교통사고로 작고하였다.
묘지는 부산광역시 서구 하단동에 있으며, 그의 시비는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공원, 통영남망공원(南望公園) 등에 세워졌다. 2000년 2월에는 경상남도 통영시 망일1길(정량동)에 청마문학관이 개관되었다.
시집으로는 『울릉도』·『청령일기(蜻蛉日記)』·『청마시집』·『제9시집』·『유치환선집』·『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미루나무와 남풍』·『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등이 있다. 수상록으로는 『예루살렘의 닭』과 2권의 수필집,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 등이 있다.
3. 동피랑
동피랑은 ‘동쪽’과 ‘비랑’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생긴 이름이다. 비랑은 비탈의 통영 사투리이다. 통영 시가지 동쪽에 동호동과 정량동, 태평동의 경계를 이루는 이루는 산의 바위 피랑지대에서 유래한 토박이 지명이다. 옛 통영성의 동포루가 산 정상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푸른 통영21 추진협의회는 2007년 10월 도시재생의 색다른 시선 ‘통영의 망루 동피랑의 재발견’이라는 사업을 시행했다. 이는 통영시가 동포루 복원과 공원 조성 목적으로 마을을 철거하려고 하자, 공공미술을 통한 마을 살리기 사업이었다. 마을 곳곳에 그려진 그림들과 강구안 바다 풍경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통영시의 명소가 되었다. 2008민관포럼 최우수상, 2008전국 마을 만들기 대회 우수상 등을 받았다.
4. 한산도
한산도는 610세대 정도가 거주를 하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조선삼도수군통제영이 이곳 한산도에 설치되었고, 이 일대의 한산대첩을 이루었던 배경이 되는 지역이다. 최고봉인 망산은 해발 293m로 임진왜란 당시 망루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1]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행영을 이곳에 제승당을 설치하였고, 이듬해인 1593년에는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원균의 참패로 제승당이 소실되었다. 1739년 조경 통제사가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을 중건하였다.
청구영언에 실린 이순신 장군의 진중시 한산도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閑山島夜吟
水國秋光暮 (수국추광모) 바다에 가을 빛 저무는데
驚寒鴈陣高 (경한안진고) 찬바람에 놀라 기러기는 높이 나네
憂心輾轉夜 (우심전전야) 시름겨워 잠 못 드는 밤
殘月照弓刀 (잔월조궁도) 새벽달만 활과 칼을 비추는구나.
忠武公 李舜臣 將軍 <陣中吟>(진중음)
誓海漁龍動(서해어룡동) 바다에 호국충성을 서약하니 어룡조차 감동해 꿈틀거리고
盟山草木知(맹산초목지) 태산에 맹세하니 초목도 다 알아 차리더라
충무공의 장검에 새겨진 글
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장검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벌벌 떨고
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는구나
必死卽生(필사즉생) 必生卽死(필생즉사)
이 명구(名句)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명량해전(울돌목해전)에 나가기 하루 전 전 장병에게 전투태세를 잡기 위해 배수진(背水陣)을 치면서 한 말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 허실편에도 유사한 말이 나온다. 장군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탐독하고 전략에도 활용하였다.
忠武公 李舜臣 將軍 <陣中吟>(진중음)
誓海漁龍動(서해어룡동) 바다에 호국충성을 서약하니 어룡조차 감동해 꿈틀거리고
盟山草木知(맹산초목지) 태산에 맹세하니 초목도 다 알아 차리더라
충무공의 장검에 새겨진 글
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장검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벌벌 떨고
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는구나
必死卽生(필사즉생) 必生卽死(필생즉사)
이 명구(名句)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명량해전(울돌목해전)에 나가기 하루 전 전 장병에게 전투태세를 잡기 위해 배수진(背水陣)을 치면서 한 말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 허실편에도 유사한 말이 나온다. 장군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탐독하고 전략에도 활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