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야 그 애들은 누구니?"
소영이와 혜진이의 눈빛이 음험하다.
"오세훈 친구."
"오경영이 친구도 있었니?"
오경영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 나오는 오세훈에게 나의 동무들이 붙인 별명이다.
"그럼 있지 없냐."
"그... 얼굴 좀 구릿빛에 키 큰 애... 금마 뭐 하는 놈이냐."
"여친 있어. 내가 카톡 프로필 다 봤어."
개구라다.
김종인과 변백현은 객관적으로 킹카이지만, 얘네야 말로 진정한 나쁜 남자의 부류 안에 들어간다고 난 자부할 수 있다.
김종인은 여자의 마음을 잘 알지만 그녀들에게 마음을 안 주고, 변백현은 고작 1년 전에 내 친구랑 썸도 탄 사이다. 항시 처져 있는 눈웃음과 친화력 때문에 마음도 잘 줄 것 같지만, 해라의 경우를 떠나서 변백현도 결정적일 때 틈을 안 주는 남자이다.
나처럼 아직 남자 경험도 없는 친구들에게 김종인과 변백현 같은 나쁜 남자를 소개시켜 착한 내 친구의 인생을 먹구름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
"나 사진 좀 찍어주라."
"에휴... 저 병신 쪼다 같은 년."
브이 사진 잘 나왔네 쩝
"난 아무리 생각해도 오경영이 너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도. 그냥 그런 애들 있어. 감정 표현 잘 못 하고 마음이 조급해서 헛 나가는 애들. 교양에서 들었는데 다 애정결핍에서 오는 거래."
사실 나도 오세훈의 친구들에게 들은 게 있다면서, 상담 겸 내 사심을 좀 드러내며 잘생긴 남자가 나한테 관심있는 것 같다고 답정너 짓을 하고 싶지만, 마음이 무거운 나는 어쩐지 오세훈을 가볍게 여기고 싶지 않아 그냥 웃고 넘겼다.
"뭐냐."
"뭐가."
"웬일로 입을 닥치고 있는 거지?"
"뭐가?"
"우리가 그 새끼 욕하면 너도 잘 받아 쳤잖아."
"어우 야. 오세훈 그렇게 나쁜 애 아니야~"
다시 한 번 음험해진 눈빛.
장난이라도 그러면 안 됐었는데, 사실 입덕 부정기라 오세훈을 좀 욕했었다. 내가 오죽 욕했길래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도 못한 내 친구들이 이 새끼, 저 새끼... 남의 집 귀한 새끼인데 내 입으로 오세훈을 욕 먹인 꼴이니 미안한 마음 뿐이다.
"걔 매너도 되게 좋고 생각보다 엄청 친절해. 그리고 공부도 잘 가르쳐주고 자기 사람한테는 되게 잘 하는 스타일이야."
"아... 걔가 자기 사람한테 잘 하는 스타일이야?"
"성격이 좀... 부드러운 편은 아닌데.. 근데 너네도 알다시피 남자 애들이 서열 나누고 그러잖아. 그래서 일부러 싸가지 없게 벽치고 더 그러는 것 같아."
"어머~ 저런... 싸가지 없는 행동으로 자신을 감싸는 구나~"
소영이의 물음에 신난 나는 같이 덕질할 친구도 아닌데, 오세훈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한번 열린 입은 멈추지 않았던 김첨지의 다리처럼 닫을 생각을 안 했다. 소영이가 나에게 엑소 노래 좋다고 한 마디 했다고, 엑소의 장점 수 천가지를 설명했을 때처럼 말이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 랜선으로 키운 내 새끼도 아닌데.
단점이 확실해서 그렇지, 장점은 수백가지인 사람이다.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다, 오세훈은. 괴물이라는 터무니 없는 억측과 어두운 장막으로 스스로를 가렸던 아름다운 에로스처럼.
그러나 뒤이어 따라온 혜진이의 말은 나를 뜨끔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너 걔 믿는 것 같아."
이런 상황에서 보통 쓰이지 않는 '믿는다'는 말은 겨우 20년 살은 나에게는 어려운 말이었다. '믿는다'는 말은 왠지 모르게 '좋아한다'는 말보다 더 거대하고 특별하게 느껴졌다.
"무슨 말이야?"
"그런 거 있잖아. 서로 간에 어느 정도 믿음과 결속력이 있어야 장단점을 파악하고 누군가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거. 뭐, 지금의 너는 약간 까도 내가 깐다? 이런 게 있었던 것 같아. 지금 너 어땠는 줄 알아?"
"난 뭔지 안다. 우리가 걔 욕하니까 김여주 네가 감싸는 것처럼 보였거든."
참나. 얘네는 도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이래뵈도 중학교 때 선행상을 연속으로 두번이나 탔던 몸인데! 뭐... 상 탄 이유는 지우개를 잘 빌려줘서였지만...
"뭐야. 그렇게 따지면 너네도 그렇거든? 나도 다른 애들이 내 앞에서 너네 욕하면 화내고 감싸."
"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죽여야지. 어떤 개잡년이 감히 나를 욕해. 난 내 부모 욕은 참아도 내 욕하는 건 못 참는 사람이야."
어려 보이는 아가씨들의 살벌한 패륜에 옆에서 짬뽕을 흡입하시던 한남 둘이 눈치를 보며 쳐다봤다.
"야. 너 걔랑 우리 같은 친구야? 네가 친구 아니라며."
"친구는 아니지... 그렇다고 친구가 아예 아니라고 하기는 좀 그렇긴 한데, 너네 같은 친구는 아니지."
"장금이야 뭐야. 그래. 그러니까. 그리고 네가 그랬잖아. 어떻게 남자랑 친구를 하냐고."
"그렇긴 하지."
어째 사이비교에 끌려 들어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생각해보니... 난 무엇 때문에 굳이 오세훈의 좋은 면을 설명하려고 했을까. 관심은 있다. 물론 그 얼굴은 관심이 안 가면 이상한 얼굴이다.
그런데 나는 왜 나랑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오세훈이 좋은 사람으로 보였으면 하는 걸까?
"20년 째여도 50년 째여도 남녀는 항상 가능성이 있다고 네 입으로 말해놓고 걔랑 친구라고?"
"야 이년아. 좀 솔직해져라. 뭘 부정하냐? 걔네 집이 뿌리 깊은 새누리도 아니고 친일파도 아닌데 뭐 어떠냐."
아까보다 더 불편한 마음...
사실 마음은 있는데, 확신이 없다.
그렇다고 아예 물증이 없는 건 아니다. 얼마 전만 해도 나는 낡은 고무줄 따위를 반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버리지 않은 오세훈을 목격했었다. 게다가 방금 전엔 오세훈의 유일한 친구들에게 들은 것도 있고 말이다.
아 복잡하기만 하구나...
동네 개들도 저들끼리 짝 지어서 썸 타는데, 나는 마음 가지는 것도 더럽게 힘들기만 하다. 가성비충도 아닌데, 오세훈이 나에게 좀 더 제대로 확신을 주지 않으면 마음도 품지 말고 뒤돌아 서야 할 것 같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람의 마음 따위에 누구의 감정이 더 있는지 저울질 하는 내가 밉기만 하다. 꼭 남자가 먼저 마음을 보일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불편했던 식사가 끝나고 약속대로 카톡을 보낸 뒤 우리의 최종 목적지였던 칵테일바로 들어갔다. 경제가 어렵다보니 가성비를 따지는 사람들이 많아 졌다. 돈 쓰는 재주 조차도 없는 한남들은 육아와 프로포즈에도 가성비를 따져 헬조선을 더 헬스럽게 만들었지만, 뭐든 간에 세줄 요약 부탁한다는 한남들은 이게 다 김기춘이 벌인 라면 정책이라는 걸 알까?
어쨌든 우리는 헬조선의 불행한 노예들이니 라면 정책 이후 임대료도 김기춘의 입맛에 맞게 헬스러워진 어느 무한리필 칵테일바에 입성했다.
역시나... 여탕이다. 사실 좀 기대했는데 그러면 그렇지.
칵테일을 쪽쪽 빨며 수다 삼매경인데 이 시간에 나에게 전화를 걸 사람이라곤 단 한 명 뿐이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는 표정의 두 여인네...
워낙 시끄러운 공간이다 보니 목소리가 하나도 안 들렸다. 그러다 전화가 끊기고 오세훈에게 카톡이 왔다.
[시끄러운데 클럽은 아니지?]
이러고 가니...? 클럽을...? 예전처럼 드레스업 하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얘는 도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입은 툴툴 대는데 사실 마음은 아직도 편하진 않다. 가슴 한 구석이 얕게 진동하는 기분.
땡땡이 무늬의 라임색 벽을 바라 보았다. 한놈 두식이 석삼 너구리... 윤동주 시인은 땡땡이처럼 빼곡한 가을밤의 하늘을 보고 가을 속의 별을 다 헤아릴 수 있다고 했지만, 다른 쪽으로 마음이 복잡한 나는 땡땡이 벽지를 다 셀 것 같다. 윤동주 시인처럼 나라를 잃은 것도 아니고, 아직 내가 쟤랑 뭔 사이인 것도 아닌데 확신이 없는 나는 무언가 을이 된 것 같기만 하다. 내가 뭐 제대로 된 연애를 해봤어야 유연하게 대처를 하지.
솔직히 내가 내 마음을 인정해도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까.
결국 돌고 돌아서 언니와 이야기를 나눴던 그 때로 돌아왔다.
오세훈은 솔직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정말 나에게 딱 그 정도인 걸까.
마음을 확인하는 일은 이래서 짜증난다. 세상에 나처럼 무던하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런 나를 나답지 못 하게 만든다.
우선 기대하면 안 된다. 기대하면 될 것도 안 되는 게 바로 내 인생이다. 아시다시피 나는 겁쟁이에 쪼다이다. 정의로운 쪼다도 아니고 못난 쪼다...
쪼다인 나는 내 마음 편하기 위해 나와 그 놈의 상황을 최대한 비관적으로 그렸다. 오세훈이 얼굴도 모르는 낯선 여자의 손을 잡고 있는 상상. 그래야만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내가 덜 상처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맨날 좆같은 막걸리랑 소주만 마시다가 칵테일 마시니까 존나 맛있지 않냐?"
"막걸리랑 소주가 어때서 그래. 문화 사대주의 같은 년아. 너 에즈라 밀러 좋아할 때부터 알아 봤어."
잘생긴 걸 어떡하누... 자국민을 사랑하고 싶어도 보라고 있는 눈깔인데 어떻게 한남을 좋아하니. 심지어 쟤네는 씻지도 않고 좆도 작아. 어떻게 아냐고? 이 고추 저 고추 꼭 다 먹어 봐야만 아니? ㅎ
"야... 우리 진짜 우정 백년천년 가자."
"씨발 당연하지. 존나 뽀렙이야."
"사진 한방 찍을까? 저기요. 사진 좀 찍어주세요."
우정은 둘째치고 사심 채우기에 급급한 소영이가 잘생긴 알바생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역시... 잘생긴 외모는 인생이 평탄하기 때문에 성격도 좋다. 알바생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고 그는...
"브이 하세요!"
잘생긴 건 알겠는데 본인이 잘생긴 걸 너무 잘 아네 빼애앰!
어쨌든 사진 하나는 건졌다.
얼굴이 약간 체리톤으로 나온 것 같지만 이 정도면 잘 나온 것 같다는 생각에 카톡 프로필로 지정까지 해놨다. 사람들이 셀기꾼이라고 할까봐 두렵긴 하지만 뭐 어때 ㅎ
"김여주. 너 전화 오는데? 걘 가봥."
달달한 알콜은 다시는 애교를 부리지 않겠다고 맹세한 페미니스트 전사도 애교쟁이로 만드는 법.
혜진이의 말에 테이블에 올려둔 핸드폰을 보니 오세훈이 맞긴 하다. 날 이리저리 감정 따위에나 휘둘리게 하는 게 괘씸하기는 하지만, 감정을 따지기 전에 오세훈은 존나 무서운 사람이다. 점쟁이는 내 대운이 서른 이후에 온다고 했다. 살고자 하는 욕망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취했어?]
"아니..."
[취한 것 같은데]
토라진 소녀 같은 말투에 흥이 거나하게 오른 나의 친구들의 표정이 급 썩었다.
알콜 쓰레기는 아니지만... 나는 아빠를 닮아 술 먹고 끼를 좀 부리는 편이다. 물론 와꾸는 가려가면서 한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그러는 걸 어떡하냐고요. 큼큼 목을 가다 듬은 나는 사심이 들킬까봐 최대한 무심한 척 말을 이어갔다.
"아니. 칵테일만 마셨다니까..."
[데리러 갈게. 그래도 돼?]
으레 그렇듯 술을 마시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감해진다.
"있잖아.."
손톱 만큼 남아 있는 이성은 제발 입 좀 닥치라고 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인간은 감정의 동물...
Aㅏ... 내가 왜 그랬을까? 난 왜 항상 일을 크게 만드는 것인가... 제발 생각만으로 끝나야만 하는 것은 입 밖으로 내주지 말아주라 여주야
"너랑 나... 무슨 사이야?"
오세훈은 대답이 없었다.
고요한 적막은 취한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취했어도 이 정도 정신도 없을까. 오세훈이 내 맘을 눈치 챘을까봐 두렵다. 친절과 배려에서 나온 그의 행동을 내 멋대로, 내 입맛에 맞게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네 친구 좀 아무나 바꿔봐.]
너랑 나의 관계를 확인하는데 도대체 왜 내 친구를 바꿔 달라는지 모르겠다.
말이 없는 내게 오세훈은 다시 한번 정신 차리라며 내 친구 중 아무나 바꿔 달라고 성화를 해댔다. 뜬금 없는 대답에 아리까리하긴 했지만, 순간 눈이 마주친 소영이를 바꿔줬다. 오세훈이 너 좀 바꿔달래.
곧이어 소영이가 전화를 받고... 얼굴은 송강호처럼 취했으면서 그녀는 차가운 도시 여자를 코스프레 하며 말을 이어가다...
존댓말을 하다 결국 전화를 끊었다.
뭔 지랄이지? 반말에서 존댓말? 오세훈이 서른마흔다섯살도 아닌데?
"여주야..."
아 뭐야. 존나 무섭게... 왜 끝에 쩜 붙이고 그르냐. 점 때주라 ㅎ
"너 집에 가라..."
____
"야야 왔다"
30분이 지났을까. 온다고 하는 게 구라는 아니었는지 오세훈은 정말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워낙 화려한 비쥬얼이다 보니 오늘 하루 한남들 때문에 안구폭격을 낭낭히 받은 바 안의 여자들이 오세훈을 흘끔거렸다. 아직 제 남자는 아니지만 마음껏 보셔요. 환경 오염이 꼭 미세먼지 투하하고 빙하가 녹아야만 환경오염입니까? 지금 대한민국 한남새끼들 존재 자체가 환경오염이라고요.
그러나 그 놈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나만 뚫어져라 시선을 보내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잘생기긴 했지만 개부담이다. 저럴 때면 꼭 고등학교 때 전교생이 모인 강당에서 나보고 뚱땡이라고 쿠사리 맥이던 오세훈이 생각나고 그렇거든 흑흑...
"가자"
아니, 보자 마자 '안녕'이라는 그 흔한 말도 아닌 가자 라니...
"잠깐 있다 가지?"
혜진이가 못된 시어머니처럼 말했다. 누가 봐도 벌겋게 취한 얼굴로 저러니 혜진이가 내일 하이킥을 할까봐 걱정이 된다. 역시 난 정말 좋은 친구야. 친구 흑역사도 걱정해주고 말이지.
"..."
잠깐 날 한번 보더니 내 옆에 털썩 앉았다. 확 다가온 우드향 계열의 향수 냄새에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니, 스무살 밖에 안 된 간나 새끼가 무슨 이런 어른 남자 향기를 풍기고 다니는 건지 몰라. 뭐, 물론 좋다고요...ㅎ
"조금 취했네."
내 볼에 손등을 살짝 가져다 댔다. 생각지도 못한 스킵쉽에 깜짝 놀랐다.
가끔 이런 짓을 한다. 사람이 많은 주말의 영화관이나 만원인 엘리베이터에서 그 큰손으로 어깨를 감싸기도 하고, 얼굴에 속눈썹이 떨어졌다고 세심한 손길로 떼어주기도 한다. 과연 내가 의미심장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얘도 그렇게 생각할까? 나는 내가 의미부여를 해서 나 혼자만 두려운 상황에 처할까봐 두렵다.
"여주 원래 술 마시면 얼굴 빨개져. 요... 많이 취한 건 아니야. 요..."
소영아... 어디 아파? 말 하는 게 왜 이렇게 병신 같아? 할 거면 하나만 하지. 그 의도된 것 같은 근본 없는 존대는 뭐니?
"우리가 여주랑 제일 친한 친구야."
"근데"
보통 저렇게 말하면 '아, 그래? 만나서 반갑다.'하는 것이 디폴트다. 근데 '근데'라니. 싸울 때마다 '어쩌라고'를 붙여서 결국을 주먹이 나가게 만들었던 초딩 때 짝꿍 신경호 만큼이나 재수 없는 말투다. 신경호 그 개자식은 유치를 나에게 털리는 영광을 누렸고, 신경호에 대한 처리는 노무사인 우리 엄마가 깔끔하게 정리했다.
"전부터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나는 여주랑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는 아니지만, 우리는 단순한 대학 동기가 아닌 정말 영혼을 나누는 자매라고 생각해. 그래서 난 여주를 항상 걱정하고, 너랑 함께 있는 것도 혹시라도 모를 상황 때문에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야. 그래서 그런데 너에게 뭘 좀 물어 보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그래도 돼?"
오세훈이 혜진이의 물음에 내게 물었다. 아니, 여기 무슨 아무말 대잔치야? 너한테 물어보는 건데 왜 나한테 물어보니?
"나?"
"네 친구가 뭐 물어 보고 싶다는데?"
"아, 뭐. 어. 서로 물어 볼 게 있으면 물어 보고 대답해주면 더 좋지."
왜 이래 오늘? 오세훈에게 물어 봤는데, 저 새끼는 왜 나한테 물어 봐? 상황이 왜 이 따위로 흐르는지 모르겠다. 정말 박근혜 때문에 이 나라가 썩었는지 여기 저기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넌 여주랑 무슨 사이라고 생각 해?"
침을 크게 꿀꺽 삼켰다. 얼굴이 달아 올랐던 나의 친구들도 사뭇 진지한지 낯빛은 몰라도 눈빛 만큼은 초롱했다. 긴장 되어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할 때쯤 오세훈은 나를 보면서 싱긋 웃으며 답했다.
"임종을 봐줄 사이... 안 그래?"
소오름...
전부 얼음이 됐다. 심지어 옆 자리에서도 에그머니나 쨍그랭! 했던 소리도 났던 것 같다.
아까 김종인이 한 말이고 나발이고 사자 꼴로 하고 와선 죽음을 논하다니...! 임종을 봐주겠다고? 진짜 나에게 살인예고를 날리는 거야? 동반 자살을 말하는 거야? 나 죽이겠다고? 그리고 내가 부가의문문 쓰지 마라고 했잖아.
그리고 어깨에 손은 왜 올려? 아직도 웃는 얼굴에 웃는 귀신이 제일 무섭다는 인터넷의 괴담이 떠올랐다. 역시 할머니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귀신보다 사람이 훨 무섭다. 두려운 나머지 어깨를 슬쩍 빼려고 했지만, 나에게 동반자살을 제의한 오세훈은 다시 한 번 나의 듬직한 어깨를 안았다.
방금 전까지 살인예고를 하고 치대는 거 싫어하는 놈이 아는 사람들 앞에서 이러니까 '자꾸 이러면 성추행으로 고소하겠어요!' 가 아니라 이상하게 괜찮네 ㅎ 난 원래 껍데기에 잘 현혹되고, 그것은 우리집 가풍이궁... ㅎ 목숨의 위협까지 받았는데도 잘생긴 와꾸에 갈대 같은 마음이 또 흔들린다. 저승사자도 잘생기면 번호라도 딸 기개다.
"김여주 좋아해?"
소영이가 혜진이를 말리기 시작했다. 역시 그녀는 취한 것이 분명하다. 소영이의 눈빛이 간절하다. 그래. 너도 아까 통화해 봤으니까 알지? 죽는 건 나 하나만으로도 되는데, 외동딸인 애가 왜 죽을 걸 알면서도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저러는 거니.
그러나 한 편으로는 오세훈의 대답이 궁금하다. 사실은 아주 많이... 존나 많이. 매일 자기 전 생각할 정도로 궁금하다.
솔깃솔깃
"남의 일에 관심이 많네. 그건 나랑 얘랑 해결 볼 일이야."
이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쩝... 솔직히 기대했는데 재미 없어...
"가자."
놈이 내 팔을 잡아당기며 내 가방을 들었다. 친구들을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보니 그저 손을 흔들어 준다.
밖을 나오니 딱 술 마시면 좋을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도때기 시장처럼 바글바글 했다. 게다가 입구 바로 앞에서 담배 피던 한남 원투쓰리가 치마를 입은 내 다리를 쓸었다. 눈깔을 뽑아서 찜통에 쪄버리고 싶은 마음을 담아 꺼츠 부분을 전래 야렸더니 그제야 눈을 피하고 다리를 오므렸다. 무려 동생 사랑 가득한 언니에게 배운 방법이다.
시끄럽고 정신 사나운 홍대 거리를 오세훈과 걷고... 아니 난 끌려 가고 있다. 날 끌고 가기가 쉽지 않을텐데... 얘가 저번에도 보니까 깡이 세서 그런가 은근 힘이 있네. 껄껄
바로 차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세훈은 날 새벽까지 운영하는 한 체인점 카페로 이끌었다.
"커피 마시게?"
"어. 한잔만 마시고 가자. 마시던 거지?"
고개를 끄덕였다.
2층으로 올라 오고, 얼마 안 있어 커피를 들고 오는 놈을 보니... 역시 껍데기는 예술이라는 생각 뿐이다. 키가 크고 늘씬하니 움직이는 모양새 하나 하나가 그림이 된다. 사람들이 왜 돈도 안 나오는 예술 작품에 억 소리 나는 돈을 쏟아 붓는지 대충 알 것 같다.
내가 마시 카페모카와 오세훈의 바닐라 라떼가 테이블 위에 올라 오고,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초코 시럽이 잔뜩 뿌려진 달달한 휘핑크림부터 빨대로 핥아 먹는데 눈빛이 너무 노골적이다. 먹고 싶으면 지도 카페모카 시키지 왜 내 걸 탐내? 나 A형이라서 너랑 못 먹어.
"아까 하려던 말 계속 해봐."
"무슨 말?"
"우리가 무슨 사이냐며"
사실 입 안에서 계속 맴도는 말이 있다. 다른 애들이 말했던 것처럼 용기있게 물어 보고 싶다.
너 나 좋아해? 사실 나도 너한테 좀 관심 있어...
근데... 아니면 어떡하지?
겁쟁이인 나는 차일 것부터 생각한다. 감당할 수 없는 진실과 그 후에 올 상실. 내가 과연 그 상실을 의연하게 버틸 수 있을까?
등신 쪼다인 나는 판단을 내렸다. 오늘은 때가 아니다.
좀 더... 내가 나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있고, 덤덤하게 상황을 받아 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오세훈에게 확인을 받기로. 확신이 없는 건 오세훈 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이니까.
계속 어리버리한 척을 하는게 내 살 길이다.
나는 장나라다. 나는 토마토지롱이야. 나는 신채경이야. 테디보이 유소은이야. 늑대의 유혹 한경이 년이야. 한예원이야... 신조마유의 처녀인 모든 여주인공 년들에게 빙의한다... 빙의한다.........
빙의 완료!
//ㅇㅅㅇ//
뀨?
"아까 네가 임종을 봐주는 사이라며..."
"그게 끝이야?"
"음... 더 말 해야 돼?"
"아하하... 진짜... 넌 존나... 씨발 진짜..."
오세훈이 황당한지 어이 없다는 듯 욕까지 써가며 어그를 끌었다.
"그게 무슨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드라마를 그렇게 많이 봤으면서 아직도 그게 뭔지 몰라?"
"음... 대감마님이랑 돌쇠?"
"하아... 내 팔자야."
오세훈이 빡침 게이지가 80까지 올랐다.
어떡해... 근데 차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는 말 못하겠어. 네가 그랬잖아. 하면 안 될 것 같은 말은 닥치는 게 미덕이라며.
"됐어. 내가 병신이지..."
중얼중얼 오세훈의 한탄이 시작됐다.
배가 또 간지럽다. 정확히는 뱃속이 간지럽다. 어색함에 배 부분을 만지자 오세훈이 걱정스럽게 나를 쳐다본다.
"짬뽕 많이 매웠어?"
"어? 어... 좀 그렇더라."
"매운 거 그만 좀 먹으라니까... 약 사다 줄까? 지금 약국하는 데가 있는지 모르겠네."
참 신기한 인연이다. 나를 보는 이 사람의 눈빛과 느낌을 난 그대로 믿어도 될까? 스치기만 해도 먹구름을 몰고 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치기만 해도 남의 인생에 빛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다던데, 과연 너도 그럴까.
그리고 나도 너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을까.
간지러운 눈빛. 꿈틀 대는 내 발가락.
내가 용기를 내면 너도 나에게 긍정적인 확신을 줄 수 있을까?
배는 아직도 간지럽다. 뱃 속에 나비가 있나 봐.
간질간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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