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쩌다 만난 심리학
<우선 어느 목회자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분이 쓰신 내용이 내가 의도하는 “완전한 구원을 위한 심리와 영성의 만남”이라는 의도와는 다소 다르다. 그러나 현대심리학의 무분별한 확장이나 개입이 위험한 지경에 이른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을 이해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데는 도움이 되지만 치유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완전한 구원이란 법리적인 구속(객관적인 사실)과 유기적인 구원(주관적인 만남)으로 구성된다(로마5,10).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 곧 구속의 역사를 믿으면 우리는 법적인 구속으로 구원에 이른다. 법적인 구속은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우리 영의 살아남과 성령의 영접을 순간적으로 얻게 되는 믿음의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거듭남의 수준이며 성령세례와는 다르다.
그러나 완전한 구원을 위한 또 한 면인 유기적 구원(주관적 체험), 곧 그 사람의 기질이나 성격의 변화는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믿는 이들이 잘 모르고 있는 부분일 뿐 아니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참으로 어려운 과제이다. 구체적인 성화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자기를 아는 지식과 자아의 파쇄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수적이지만 심리학이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유기적 구원이 없이는 완전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성경을 연구하면서 완전한 구원, 죄와 사망의 법, 성령세례와 거듭남, 무의식의 세계, 기질과 성격의 내적 변화를 말하는 유기적 구원을 연구해 왔다,
다른 표현으로는 까르마, 업식, 습관(불교심리학), 상처 난 감정의 치유, 정서적 상처의 치유, 혼의 변화, 심리학과 성경의 만남(목회상담학), 심지어 귀신을 쫓는 축사까지, 유기적 구원에 이르기 위한 여러 가지 측면들을 체험하고 연구해 왔다. 오랫동안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특히 이 주제에 관한 자료를 독서하면서 혼란스러웠다.
왜냐하면 심리와 성경의 통합된 자료들을 거의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관심하는 대상은 심리학의 기초가 성경적 치유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많은 믿는 이들 중에는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심리학은 자기를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학문이다.
그러나 심리적인 치유를 받았다는 것은 근본적인 치유에는 매우 불안전한 것이다.
또한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믿는 이들도 그의 어릴 때부터의 정서적 장애를 치유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체험으로는 자가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만이 치유받는다는 것이다. 이 목회자의 글은 심리학의 지나친 확장의 위험성에 대한 체험적 글이다. 여러 가지 비판적인 시각이 있겠지만 내가 우려하던 바로 그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이글을 먼저 소개하는 것이 나의 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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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로 30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저는 심리학에 어떤 관심도 없었습니다. 프로이트와 융이라는 심리학자의 이름 외에는 심리학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또 심리학은 저 개인이나 목회 사역과 관계없는 것이었습니다. 2018년 여름에 어떤 특별한 계시로 심리학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그러했습니다. 실은 마주친 정도가 아니라 이마가 깨질 만큼 세게 부딪쳤습니다.
어떤 집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아내가 ‘‘내면 아이’’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저는 대답을 못 했습니다. 여기저기서 그 용어를 보기는 했지만 아무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림짐작으로 내면의 자신, 즉 자아(自我)가 아니겠느냐고 했더니 아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갓길에 차를 세우고 검색해서 읽은 게시물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도 나의 ‘내면 아이’를 만나려고 노력했다. 워크북에 안내된 대로 시도했지만 전문가의 도움 없이 하는 게 참 어려웠다. 그러던 중 마법 같은 경험을 하게 됐다. 2012년 한여름 정오였나? 조깅을 하다가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뜀박질을 멈추었다. 문득 나무들 사이에 가려진 하늘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중학교 2학년 시절의 상처받은 나’가 곁에 서 있는 것이다.
눈에 직접 나타났다기보다는, 마음속에서 생생하게 그 상(image)이 떠오른 느낌이었다. 눈으로 보듯 아주 생생하게. 그 중 2학년의 나를 보니 측은함이 올라오는 것이다. 눈물이 흘렀다. 정말로 눈물이란 게 하염없이 흐를 수가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중2 아이를 다독여 주었다.
‘괜찮다, 괜찮아’, ‘약한 건 네 잘못이 아니다’, ‘그 상황에선 충분히 무서워할 수 있어.’ 약했던, 무력했던 자아의 한 단편을 흠뻑 수용하고 안아준 사건이었다.” 계속된 검색으로 ‘내면 아이’를 만나고,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고백을 거듭 읽으면서 ‘이게 뭐지?’ 하는 생각과 함께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내면 아이’ 이론을 도입하고 전파한 모 교수가 최면술을 이용해서 ‘내면 아이’ 상담을 진행하는 동영상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십이 넘은 여인이 어린아이 목소리로 울부짖는 장면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내가 속한 교단 안에도 이런 ‘내면 아이’ 상담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밤중에 나타난 괴물 같은 ‘내면 아이’를 모른 척할 방법이 없었고, 정체를 확인하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첫 만남이 그랬으니 ‘내면 아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최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바라보았고 비판적 관점에서 접근했습니다. 두 가지 기준을 정했습니다. ‘내면 아이’ 상담 방법이 성경과 조화될 수 있는가와, 내 아이들과 섬기는 성도들을 그러한 상담자에게 맡길 수 있느냐였습니다. ‘내면 아이’와의 씨름으로 그해 여름을 통째로 보내면서 두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내면 아이’는 심리학의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만 ‘내면 아이’와 씨름하다가 그것의 뿌리와 배경이 심리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면 아이’가 심리학계 전반의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리학에서 분리되는 상담 기법은 아닙니다. ‘내면 아이’는 심리학의 열매이므로, 심리학 없는 ‘내면 아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 글을 심리학으로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둘째, 내적 치유 또한 심리학의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대학 강의실이나 심리상담소에서는 ‘내면 아이’가 주로 사용되고, 기독교의 부흥회와 치유 집회에서는 ‘내적 치유’가 환대를 받지만, 사실상 그 둘은 이름만 다른 쌍둥이입니다.
기독교가 ‘내면아이’와 내적 치유에 문을 연 것은 벌써 오래전입니다. 설교, 교육, 상담 출판 등 영향을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습니다. 위험을 경고하는 일부의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면 아이’ 상담과 내적 치유 세미나를 통해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회복한 경험, 쓴 뿌리를 제거함으로 가정이 회복되었다는 고백은 책과 인터넷에 차고 넘칩니다. 저는 몇 분에게서 직접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란 말일까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효과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효과보다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저는 ‘내면 아이’와 내적 치유의 효과가 성경적이 아니며 결과적으로 유익한 것도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내면 아이’와 내적 치유는 물론 그 뿌리인 심리학 또한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8) 저는 개인적인 판단으로 ‘내면 아이’와 ‘내적 치유’는 나쁜 나무가 맺은 나쁜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실을 밝히는 것이 제가 이 글을 쓰는 목적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심리학은 셀 수 없이 다양한 이론과 주장이 존재하는 바다와 같은 학문이고, 저는 그 바다에 겨우 한쪽 발을 넣어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알고 경험한 것에 기초한 이 글은 전문 심리학자들의 시각으로는 얼마든지 편중되고 편협할 것일 수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제가 발견하고 확인한 ‘내면 아이’ 심리상담의 위험을 알려야 한다는 부담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 글의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분이 계시더라도 저의 처지를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드릴 말씀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드넓은 심리학의 바다에 성경과 조화되는 영역이 있다면, 그리스도인이 뛰어들어도 위험하지 않은 심리학이 존재한다면, 그것과 제 글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점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심리학이라면 저도 진지하게 공부하고 싶습니다. 혹시 아신다면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