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후회 없는 삶
부제 : 진정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사마천이 사내자식으로서 그의 근본을 잃고도 소금덩이 핥듯이 세월을 아껴서 핥았습죠"
-박경리. 토지 2권 58페이지 13행-
고통과 모욕 속에서도 자신이 바라보는 한 목표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야말로 고귀한 인생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아버지의 직업으로 인해 전국을 보부상처럼 떠돌던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오랫동안 정착한 곳은 경기도 군포시였다. 사람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지식과 음악이라는 어머니의 양육 가치관과 '책의 도시'라는 슬로건으로 길을 걷다 보면 30분마다 독서 공간이 있었던 군포시의 사업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절묘하게 맞물려 5살짜리 꼬마에게 독서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어머니는 갓 유치원에 입학한 5살 꼬맹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을 바라보는 3학년 될 때까지 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가 끝나면 3살 어린 동생과 함께 도서관을 들렀다. 평일에는 걸어서 10분 거리의 군포시 공공도서관과 자전거 타고 10분인 산본도서관을, 주말에는 지하철 정거장 4개를 천문대가 있는 대야미 도서관을, 버스 타고 30분 정도 어린이책이 가득한 어린이 도서관을. 어머니는 폭염주의보가 내려도 장맛비가 거세게 내려쳐도 아이들이 원한다면 언제나 함께 도서관을 가서 목이 쉬어도 아랑곳하지 않으시며 읽고 싶다는 책을 아름다운 목소리로 읽어 주셨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또 얼마나 왕성한지, 다 먹은 밥그릇이 쌓여갈수록 책에서 본 내용은 전부 실제로 보고 느끼기를 원하였다. 언제나 '왜'를 달고 살던 아이들의 질문을 무시하지 않고 어머니는 그 바람을 이루어주고자 과천과학관, 현대 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경복궁, 서대문형무소, 여러 뮤지컬, 음악회, 전시회 등 갈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경험시켜주고자 헌신하셨다.
이러한 어머니의 희생으로 나는 어릴 적부터 여러 분야를 탐구할 수 있었는데 그중 유치원생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다름 아닌 역사였다. 과거 사람들의 삶과 이와 연결되는 현재, 흥미로운 전쟁과 사건들은 아이의 도파민을 자극하였다. 구구단보다 임진왜란, 명예혁명이 머릿속에 박혀있던 예비 초등생은 입학날 5학년부터 역사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고 아쉬움에 그날 밤 오열을 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이내 기운을 회복한 말하기를 좋아했던 아이는 책에서 본 역사를 친구, 동생에게 이야기하며 더욱 역사에 매료된다. 그 때문에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진로 희망란에는 푸르른 상록수처럼 언제나 '역사 교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앨범 개인 컷조차 고등학교 국사랍시고 A4용지에 써서 당찬 포부를 붙인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를 들고 있는 모습이 남아있다.)
하지만 현실은 바라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요술램프는 아니었다. 저출산, 학교 통폐합, 교사 TO 축소처럼 어두운 전망을 연달아 보도하는 뉴스들과 교권 추락, 낮은 연봉, 임용 고시의 어려움은 암울한 미래를 그렸다. 주변에서 걱정인지 비웃음일지 모르는 안타깝다는 말들에 10년간 굳건했던 바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급하게 역사 관련 다른 직종, 학과를 알아보거나 다른 취업 잘되는 분야 중 맘에 드는 걸 끄집어내지만 금을 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미 연봉과 취업에 초점이 맞춰진 눈에 일명 취업 안되는 문·사·철은 가당치 않았고 흥미 발굴의 시도는 불안감만 계속 자라날 뿐이었다. 반평생 바라봄 꿈이 한순간 신기루가 되어버리고 모래폭풍 같은 혼란이 나의 정신을 잠식시켰다. 하필 19살에...
고등학교 2학년 세계사를 배우며 사마천과 그의 사기에 대해 배웠다. 암기식 교육에 맞춰진 교과서는 '사기'의 우수성과 역사적 의미에 대해 서술하며 대단하다 극찬하지만, 정작 사기의 본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입시에서 너무나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예비 고3, 고2 겨울방학에 궁금증과 답답함을 느낀 나는 과감히 수학을 등지고 사기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다 읽진 못해도 나름 진시황 본기. 흉노 열전 등과 저자 사마천과 아버지 사마담을 다룬 태사공자서를 읽으며 사기 내용 뿐만 아니라 사마천의 삶을 알 수 있었다. 궁형(거세)과 조롱, 신체적 고통 속에서도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과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를 위해 한평생을 사기 저술에 매진한다. 고통을 감수하면서라도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가치 있는 것을 바라보고 이를 위해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의미 있는가. 기원전 열악한 환경 속 궁형을 당한 사마천이 어떤 마음으로 죽간에 역사를 써 내려갔을지 그 고통은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의 삶을 돌아보며 나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질없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살아오며 내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진정하고 싶은 일을 해낼 때이고 취업과 연봉만을 바라보는 삶으로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남들의 말과 미래의 걱정에 휩싸여 잠시나마 망각한 것이다. 남들이 추구하는 돈, 안정, 명예가 아닌 나만의 가치를 위해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매우 험난하지만, 그 가치가 올바르다면 과정 속 고난조차도 아름다울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는 단순 희망찬 이야기가 아닌, 역사 속 성인들의 일생과 그들이 추구한 가치를 통해 알 수 있는 기원전부터 지속된 당연한 사실인 것이다. 내 인생을 걸어도 후회 없을 꿈을 위해 사는 인간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