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특집 | 문예바다 신인상 수상 작가들 |
액화液化된 담론과 ‘몸짓’으로서의 신新서정
― 이혜미 시집 『흉터 쿠키』, 김훈 산문집 『연필로 쓰기』를 중심으로 ―
신승민
1. 들어가며 : 아! 인생아, 세상아, 어디로 가느냐
가수 한승기의 노래 「불어라 바람아」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거친 세상을 나 혼자 걷는다
해가 지는 거리에 차가운 비바람
지친 몸을 휘감아 어둠 속에 잡아 두는데
아~ 인생아 어디로 가느냐……
중년을 향해 가는 한 사내의 인생길도 이토록 험난하고 고단하거늘, 오늘날 해가 다르게 상전벽해하는 세상의 이치는 오죽하랴. 순리가 엎어지고 역설이 난무하는 시대 앞에서 민중은 입을 잃었다. 곳곳에서 들끓는 봉기로 그 울분을 포효하나니,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대책 빠진 탁상공론의 무게는 쇠털처럼 가뭇없이 흩어지고 없도다. 보이는 것은 뒤꽁무니, 얼빠지고 어안이 벙벙해진 위정자들의 것이라니.
전염병, 전쟁, 재난…… 소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 한꺼번에 닥쳐왔다. 대공황의 팬데믹 속에서 그 회오리에 난타당하는 것은 연대의 손길이 절실한 시민들.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저 독한 가차 없는 시대여. 수많은 절규가 떨군 눈물에 녹아내린 혹세무민하는 담론들이여. 사랑은 사치요, 사람다움은 기만이라. 서로에 대한 냉정과 이기의 질시가 바야흐로 거대한 분쟁이 되고,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어 지혜의 뗏목이 떠내려가게 만들었으니. 자연에게는 사람이 죄라지만, 옳고 그름이 자꾸만 뒤집히는 세태에 구역질을 참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 무슨 중죄가 있겠는가. 지진 같은 괴로움에도 홀로 나는 나비가 부러울 뿐.
다 타 버린 나비의 날갯짓처럼, 죄 많은 시대에 인간은 언어를 잃고 몸짓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 간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복원의 움직임이지만, 현실의 지옥을 다스리고 길들여 최소한 불모지 정도라도 갱생케 해 보이겠다는 의지의 소산이다. 화전을 일궈 희망의 싹을 ‘지금, 여기’의 자리에서 틔워 보겠다는 다짐이다. 이혜미의 근작 『흉터 쿠키』와 김훈의 노작 『연필로 쓰기』에서, 그렇게 인간의 마지막 구원은 다시금 서정적으로 드러나 보인다. 서정, 우리가 너무도 잊고 살았던 감수성의 본질 말이다.
쿠키를 나눠 먹으며 흉터는 모두의 것이 된다. 차별과 낙인은 함께 당하고, 함께 일어설 때 연대의 표식이 된다. 개인의 상처이든, 사회의 부조리이든, 거창하고도 구태의연한 담론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응어리가 서정의 수심에서 녹아내린다. 그것은 지난한 육필과도 같은 뭉근한 정열이요, 힘겹게 썼던 것을 다시 지워 나가는 지우개의 반성이다. 마음이 메마르고 반성하지 않는 자들 때문에 시대는 항상 무도한 방랑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라도 자각했는가, 네게 묻노라.
2. 이혜미 : 낯선 생生의 몸짓, 담론을 녹이는 상처
알맞은 테두리를 얻기 위해
도려내진 잔해를
덮지 못한 무덤이 되어
몸은 세계로 열리고
― 이혜미, 「흉터 쿠키」 중
달고나 모양을 내기 위해 틀에 찍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처럼, 쿠키도 제 모습을 갖추기 위해 밑그림을 제공했던 불필요한 반죽을 털어 낸다. 화자는 그것을 일러 ‘잔해’라 칭하는 것 같은데, 다음 연에서는 규격에 알맞은 덩어리가 떨어져 나간 그 자리의 ‘공허’를 ‘덮지 못한 무덤’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 무덤은 ‘몸’이 되고 다시 ‘세계로 열’린다. 빈자리의 절망이 앞으로 나아가는, 지향성을 부여받는 단계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쿠키 반죽의 나머지, 즉 잔해가 결코 변두리, 찌꺼기가 아니라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이다. 테두리는 쿠키뿐 아니라, 그것이 빠져나간 나머지에서도 형성된다. 어떤 것을 중점적으로 바라보느냐의 차이, 바로 ‘인식의 전환’이다. 그래서 다시 읽어 보면, 잔해(쿠키)를 벗은 나머지의 빈자리가 쿠키의 ‘덮지 못한 무덤’이고, 나머지는 하나의 주체가 되어 세계로 나아간다. 시각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주객전도가 일어나는 우리의 시대. 먹구름처럼 가득 드리웠던 법과 규칙의 담론은 스스로 구체성을 지니지 못한 채, 시비의 전도가 빈번한 현실에서 맹독의 수은처럼 액화됐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 채 독심만 품고서 덧없이 흘러가고 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 아닌 모든 것을 영원이라 부르지. 미래는 이미 끝나 버렸고 옛날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뜨겁게
탁자 위로
엎질러졌다
― 이혜미, 「원테이크」 중
‘뜨겁게 엎질러진’ 담론을 주워 담기 위해서는 ‘옛날’로 회귀해야 한다.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액체가 돼 현실에서 복원할 수 없는 담론은, 굽이쳐 돌아가며 은은한 몸짓으로 사회적 반성의 필요성을 내비치고 있다. 후회막급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면, 최소한 반성이라도 해야 다가오는 미래에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난파 같은 위협에 응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을 타자에게서 구하지만, 기실 자기 마음과 의지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죽는다. 자기만 달라지면 세계의 영원이 도래한다는 것을 결코 모른다. 기껏해야 남 탓이요, 사회 탓이다. 세계와 나라가 망했으니 막 살아도 거리낄 것 없다는 고의적인 막무가내다. 스스로는 변할 생각조차 없고, 반성할 자신도 없으면서 어디에 영원이 있는지 보물찾기만 하려 한다.
그렇게 자각과 행동을 상실한 담론화된 인간은 액체처럼 흘러 끝내 죄의 구덩이에 고여 든다. 뜨겁게 엎어져도 뭘 잘못했는지 어리둥절하다. 결국에는 피안의 세계에 영원이 있다고 믿으며, 차라리 사후의 단계에서 찾아보겠다는 허망한 마음을 품고 잠든다. 주체를 상실한 액체의 담론은 자아를 파괴시키고 사회 정의를 녹슬게 한다. 그 무서운 시대의 흐름을 읽는 자 과연 누구인가.
‘미래를 단절시키고 옛날을 복기하는 자’들은 거대한 담론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옛 시절이 좋았다고 그 시대의 유물을 현재의 제도와 생활방식에 도입하려 한다. 나라는 일이 꼬이고 인명은 휩쓸리는데 옛것의 논리로 계획사회를 꿈꾼다. 근거는 ‘지식’이다. 축적된 경험의 지식으로 밀어붙이다 스스로 넘어진다. 넘어지고 나서는 다시 일어날 힘이 없다. 액체로 흘러 다니며 옛날의 권위만 반복 언급하는 유령이 된다. 지식의 포로, 미셸 푸코가 논한 ‘지식을 참칭하는 권력의 노예’가 된다.
겨울 장미들은 가시가 붉지
얼어붙은 정원 난간에 매달려
핏줄의 형상을 되새기듯이
무채색의 몸을 열어 기다리던 색을 꺼내 놓으며
상처로서 아름다워지려면
낯선 생을 한 번 더 살아 내야 한다고
― 이혜미, 「스크래치」 중
그래서 그늘진 세상에서는 주체성이 중요하다. 주체적 인식과 기억은 자립의 기반을 형성한다. 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장미는 붉음을 잊지 않고 가시를 곧게 해 자신의 핏줄을 그려 넣는다. 핏줄은 태생을 기억하는 징표다. 삶이 바빠 망각하고 살아왔던 자신의 내면(무채색)을 침투해 들어가는 혈맥(색)은, 앞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낯선 생을 한 번 더 살아내기 위해, 그래서 그 몸짓이 아름다움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상처를 인내하고 색을 피워 낸다. 제 한 몸 아끼지 않는 희생의 정신은 회생의 기회로 또 다른 차원의 생을 여는 열쇠가 된다.
이는 ‘서정의 역할’이 단순히 미적 감상과 자아회복을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다. 서정이 행동할 때 세계는 감동으로 물든다. 정적이고 박리된, 표피적 서정은 암호가 되어 불통을 유발하는 문제적 감정이 된다. 조화에게서 거룩한 꽃의 생로병사를 느낄 수 없듯, 생동하지 않는 서정은 담론과 유착된 또 다른 시대의 미로일 따름이다. 교감하는 인간을 객체로 만들고, 투쟁 의지를 빼앗아 언어의 장막 너머로 가둬 버리는 구악의 서정이 된다.
‘얼어붙은 정원 난간에 매달려’ 신음하는 민초들은 발목 잡기에 지친 ‘우리 시대의 군상’이다. 몸짓으로 서정을 꽃피우고 싶지만 넝쿨 같은 담론의 허울에 휘감아져, 한 치 앞도 내디딜 수 없는 신세가 됐다. 모두를 위한다는 거짓 미망 속에서는 개개의 꽃이 붉은색을 피워 낼 수도 없고 아름다운 고통을 인내할 수도 없이, 선전 구호의 화환으로 박제되어 싸구려 서정에 도매금으로 팔려 갈 뿐이다. 그사이, 특정 집단만 주체성을 부여받고 개인의 자유는 들러리가 돼 ‘핏줄의 형상’은 심연 속에 침몰되고 만다.
개성을 싫어하는 담론은 물처럼 능글맞게 ‘다 함께’를 외치고 틈만 나면 ‘민중’을 들먹거린다. 수수한 들꽃보다는 화려한 외래종을, 있는 그대로의 야생화보다는 값나가는 꽃다발을 추종한다. 집단화의 저주 속에서 자유와 개성의 몸짓은 사라지고, 진정한 서정은 메말라ㅍ가며, 권력에 의해 입력된 선전구호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기계로 영락한다. 일찍이 소설가 이문열은 『황제를 위하여』에서 담론의 본질을 이렇게 갈파하였다.
“너희들은 입만 벌리면 인민, 인민 하며 오직 백성들만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꾸미지만, 실제로 너희가 구하는 것은 순리順理로는 얻을 수 없는 다스리는 자의 자리이다. 이 백성이 너희들의 달콤한 꼬임에 빠져 나라의 대권을 너희 손에 쥐여 주기만 하면, 너희들은 지금에 다스리는 자의 몇 배로 혹독하게 이 백성을 착취하고 부려먹을 자들이다. 결국 너희들은 무슨 천지개벽이나 되는 것처럼 혁명을 말하고 있으나 이 백성의 입장으로 보면 다스리는 자가 달라지고 빼앗기고 혹사당하는 구실이 달라질 뿐이다. 너희들이 말하는 낙원은 오직 새로운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일 따름이다.”
담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중앙당 기관지 식의 말은 항상 낙원을 지향하지만 인민의 몸은 실락원의 세계를 보여 준다. 누군가가 말라 감에 따라 누군가는 배가 부른 다단계식 착취사회. 그래서 누구를 위한다는 자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언어도 잃고 몸도 잃는다. 세상은 앗아 가기 위해 먼저 달콤한 말들을 떡밥처럼 뿌려 놓는다. 혼탁한 수질 속에서 그 말들을 물었다가는, 그 속의 낚싯바늘이 입을 꿰어 온몸을 끌고 간다. 이승은 그런 곳이다. 살벌한 세태에 난도질을 당하지 않으려면 보다 용감해져야 한다. 약자들과 연대하고 힘을 모아 전진해야 한다. 단, 공동의 무슨 목표를 지향하여 개인이 모래알이 돼 버리는 집단화가 아닌, 각자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돌진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투쟁이지만, 총칼이 난무하는 전쟁이 아닌 사실과 몸짓에 기반을 둔 ‘밀고 나가기’의 미학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인식을 새롭게 하고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는 건설적 행동이라 할 것이다.
색을 잃고, 몸짓을 잃고, 나의 자아가 한 생과 시대의 개혁을 이끌 주체라는 자기인식이 소실되면 남는 것은 달콤한 말뿐이다. 아무런 실속도 없는 거창한 말들. 빛의 시궁창에 숨어 있다 어둠의 상수도로 쏟아지는, 작금의 시대에서 액화된 담론이 노리는 것도 바로 그러한 ‘변명’과 ‘넋두리’다.
3. 김훈 : 죄스러운 말과 증거하는 몸의 분투奮鬪
김훈은 『연필로 쓰기』-「말의 더러움」이라는 산문에서 “말은 인간이 저지른 대부분의 죄악에 개입했거나, 그 죄악 자체다. 말은 말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며 “말로 말을 반성하는 말을 듣고 싶다. 듣는 자가 있어야 말이 성립되는데, 악악대고 와글거릴 뿐 듣는 자는 없다.”고 지적했다. 김훈은 국회 여야 간 정치 공방에서 ‘물타기의 저주’를 경멸한다. 카메라 앞에서는 대의를 위해 투쟁하는 듯하나,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는 함께 침묵하고 서로의 잘못을 묵인한 채 스리슬쩍 쟁점을 묻어 두는 위정자들을 개탄한다.
나아가 그는 “나는 말하기보다는 듣는 자가 되고, 읽는 자가 아니라 들여다보는 자가 되려 한다. 나는 읽은 책을 끌어다 대며 중언부언하는 자들을 멀리하려 한다.”며 “나는 글자보다는 사람과 사물을 들여다보고, 가까운 것들을 가까이하려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야, 보던 것이 겨우 보인다.”고 응시의 가치를 강조했다. 관찰에서 직관이 나오고 직관에서 통찰이 비롯되는 법, 담론의 사졸 노릇을 하는 언어로는 구성할 수 없는 각성의 전진단계다. 담론의 행동대장 격인 중언부언의 뗏장 아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과 사물이 희미해지고 죽어 갔는가.
‘말이 죄를 낳고, 또한 번성케 한다.’는 그의 진단은 내용 없고 때로는 거짓과도 같은 담론정치의 붕괴를 예고했다. 이 책이 나온 지 불과 1년 만에 세계는 전염병의 혼돈 속에 빠졌고, 지금까지도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어설픈 규제로 책임을 미루고, 책임 있는 자들이 액체처럼 쥐구멍으로 빠져나가면서 시민이 피해자가 됐다. 국가가 주체가 돼 국민의 피해를 방지했어야 했는데, 대책은 늑장이고 통제 일변도로 무방비사회를 초래했다. 휘황한 담론의 철퇴 앞에서 시민들은 몸짓 하나 제대로 내지 못했다.
말이 죄업이라는 시각은 시인 이혜미의 통찰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비밀이 무수히 많은 독백을 거느리듯이 // 말을 짓고 / 그 말을 믿는 일은 / 아름다운가 끔찍한가(「라파이티」 중)’ 가치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보류했으나, 이미 끔찍한 상황도 하나의 선택지로 내걸었다는 점에서 말이 가진 파괴적 성격에 경계심을 보내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도 사회도 마찬가지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조시키는 법과 정치는 말로써 움직인다지만, 그것은 권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힘을 얻을 수 있는 경우다. 아무런 행동도 없는 말을 어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말이 앞서는 사람은 행동이 부실하다. 말이 앞서는 사회는 비밀이 많다. ‘무수히 많은 독백이’ 웅성거리며 진리를 가리고 논의를 무화시킨다.
말의 궁성은 허장성세요, 사상누각의 담론으로, 개인을 주체로 거듭나게 하지 못한 채 매번 조련돼야 하는 객체로 전락시킨다. 말에 세뇌당한 이들은 행동, 사실, 진실을 믿지 못하고 도돌이표 같은 말 속의 돌림노래에 갇혀 시들어 간다. 철학자 한병철은 『땅의 예찬』에서 “니체는 이름 붙이기를 권력행사로 파악한다. 지배자들은 ‘각각의 물건과 사건을 하나의 소리로 낙인찍고 그로써 그것을 소유한다.’”며 “그에 따르면 언어의 기원은 ‘지배자들의 권력선포’이다. 모든 낱말, 모든 이름이 니체에게는 하나의 명령이다.”라고 논한 바 있다. 조작된 언어, 액화된 담론은 명명과 명령으로 인간을 상징계의 그물 속에 포박시킨다. 탄압을 밀고 나아가는 몸짓은 반역자의 몸부림으로, 희망을 꿈꾸는 서정은 음험한 역모의 사상으로 취급된다. 재앙은 입만 남고 몸을 잃을 때 현실화한다.
“진실의 산뜻한 연대기는 허위로 가득할 수 있다.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렇게 단순하고 단선적인 일대기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 줄리언 바지니, 『진실사회』 중
진실 찾기는 지난한 여정이다. 복잡한 언어를 걷어 내야 진실을 직시할 수 있다. 그러려면 언어의 구조를 혁파해야 한다. 한 줄기 빛의 통찰, 그것은 주체의 의지 그리고 육화된 서정에서 비롯된다. 단순히 상상하고 느끼는 비판의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진실은 몸으로 부딪혀 도전하는 자에게 그 자태를 드러낸다. 말로써 담론을 이기려 하지 마라, 몸으로 버티고 깨지면서 싸워라. 밀고 나가는 몸짓의 힘, 그것이 통제의 기호로 가득한 상징계에 균열을 내는 떨림이요, 같이 손잡고 시대의 아픔을 공감하는 울림이다.
다리로 공을 찰 때, 팔은 저절로 덩달아 움직인다. 이 ‘저절로’가 완벽한 율동과 곡선을 이루어 낸다.
팔은 다리의 움직임과 엇갈리는 동작을 거듭한다. 이 ‘저절로’ 속에는 직립보행 이전에, 네발로 땅을 기던 시절의 추억이 살아 있다. 인간의 육체 위에서 그 추억은 불멸의 등불로 빛난다.
― 김훈, 『연필로 쓰기』 중
글은 지면에 박제된 기록이 아니다. 읽는 이가 어떻게 곱씹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생명을 부여받아 어두컴컴한 야만의 시대를 비추는 문명의 등불이 된다. 단, 움직이는 글, 몸짓으로서 태동하는 글만이 가능한 새 삶이다. 그래서 글도 움직여야 한다. 단순히 움직임을 표현하고 장면과 상황을 묘사하는 수준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의미 부여의 과정이 설득력을 지녀야 하고,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분명해야 한다.
김훈은 앞의 글에서 공놀이가 지닌 육체적 미학을 논하고 있다. 그러면서 ‘팔과 다리가 저절로 엇갈리는 동작’을 인류 태초의 사족보행과 연관 짓는다. 사족에서 이족으로 발전했다는 뜻이 아닌, 움직임 그 자체가 지닌 ‘숭고함을 강조하는 차원’의 내용이다. 빛나는 인간의 육체, 그것은 몸짓을 통해 서정의 깊이를 표현하는 성스러운 고행이다. 언어 이전의 원시적 행위일지언정 그 어떤 속박과 잡념도 없이 홀로 서는 위대한 주체화의 과정이다. 김훈의 글은 그 과정의 생동감을 연상시키기 위해 공놀이의 역사를 거론했고, 공을 차며 움직이는 인류의 모습은 글을 통해 우리 뇌리 속에 각인됐다.
움직이지 않는 언어, 몸을 잃어버린 생각은 이성조차 메말라 정상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생각 없이 말만 떠드는 자아상실의 고통을 겪게 된다. 담론은 물처럼 기어 그 고통의 피 맛을 느낀다. 벗어나려면 달리 방도가 없다. ‘완벽한 율동과 곡선’을 그리며 해방의 춤사위를 몸으로 표현하는 수밖에. 현란한 언어에 주눅 들지 않는 솔직한 춤, 투박해도 건강하고 거칠지만 용기 있는 몸짓은 모순적 담론의 장벽을 돌파하고, ‘있는 그대로의 주체적 나 자신’을 복원할 수 있다.
사춘기 소년 앨런의 비틀린 애욕을 상징화한 문제작 연극 〈에쿠우스〉에는 우람한 육체미를 과시하는 7마리 말들이 등장하는데, 앨런은 그중 ‘너제트’라는 말의 위용에 사로잡혀 합일되고자 하는 욕망을 내비친다. 말과 한 몸이 되어 솟구치는 정욕의 군무는 담론이 금기시한 불순의 잠재의식을 일깨운다.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아의 혼돈과 광기, 마치 ‘네발로 땅을 기어’ 다니던 태고의 원시세계로 회귀하는 듯한 몸짓은 언어의 장막을 찢고 벌거벗은 실재의 덩어리 전체를 세계의 한복판에 고발한다. 이것이 진정한 존재 그 자체라고, 형언도 지목도 불가능한 실재의 결정체라고.
그렇게 몸은 진실을 증거한다. 상처 나고 결핍된 몸일수록 증명의 수위는 높아진다. 언어는 몸의 증거 앞에 근엄한 체제로 서지 못하고 하릴없이 흘러내린다. 담론의 강은 교언으로 쥐 떼를 부르고 그 사체로 연명하나, 몸의 실재적 증거가 시대에 남아 있는 한 결코 육지로 올라오지 못한다. 담론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힘을 빼놓을 수 있는 건 결국 격렬하고도 아름다운 우리들의 몸짓, 변화를 시도해 꿈을 실현하는 직진 행동이다.
4. 김훈 & 이혜미 : 육화肉化된 기록, 서정의 진경珍景
“할매들의 언어는 몸의 언어이다. 이슬비가 오면 몸이 끄끕하니 개작지근하고, 밭에 가 보면 파란 잎이 팔랑팔랑하고, 이파리와 사람이 서로 알아본다.”
“인간의 존엄은 인간 스스로에 의해 더럽혀진다. 몸에는 자연과 생명의 경계선이 없다. 모든 몸은 빛나는 몸이다. 모든 몸은 ‘real’하다.”
― 김훈, 『연필로 쓰기』 중
김훈 문학의 진가는 사실 소설보다 산문, 수필에서 더 자세히 드러난다. 「화장」에서의 감각적 묘사, 『칼의 노래』에서의 묵직한 주제, 『현의 노래』에서의 비극적 서사는, 그의 수필의 진미에서 배어나온 메타포이다. 베테랑 기자 출신인 그는 기자의 필법처럼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육필로써 기록의 가치를 존중한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나열하는 것 자체가 생생한 문학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의 글은 현실에서 출발해 현실에서 끝나지만, 독자들은 여운에 휩싸여 아스라한 이상의 출구를 발견한다. 왜 그러한가? 형용사와 감탄사가 남발하는 언어적 기교 대신, 발로 뛰는 현장기자처럼 정직하게 기록한 글이 웅숭깊은 미학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말은 기본적으로 저의가 달라질 수 있는 가변의 소통수단이다. 담론은 액체처럼 언제든지 구멍만 있으면 자꾸 이상한 곳으로 흘러내려 흑백을 어지럽히고 논리를 왜곡해 편향된 세계를 창출한다. 작가 김훈은 혼란하기 그지없는 말 대신, ‘연필로 쓰기’ 즉 ‘몸으로 기록하기’를 고집한다. 그것만이 담론의 곡해를 막고, 사실과 진실로써 오롯하게 설 수 있는 단독자의 길이기 때문이다. 담론의 권력구조를 혁파해 나가는 그의 글쓰기 몸짓은 소소하고 둔탁하지만, 세계의 압제를 밀고 나가는 힘이 서려 있다.
그러나 ‘주체적 몸짓’으로서의 그의 문체는 결코 장엄한 분위기이거나, 무슨 비장의 일격처럼 무게를 잡지 않는다. 오히려 ‘서정적’이다. 서정은 이미지에서 형성된다. 이미지는 감각의 집합체다. 육필의 현실 기록은 이미지 그 자체다. 눈으로 읽으면 몸으로 시를 쓰는 할매들의 움직임이 그려지고, 입으로 읽으면 ‘리얼한’ 생명의 소리가 들려온다. 서정은 기술이 아닌 진정성이다. 김훈의 글이 가식적이지 않고 담백한 맛을 지닐 수 있었던 이유는, 가감 없이 현실을 기록하고 자신의 논리를 포장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전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체적인 서정적 세계다. 그 옛날 ‘날 이미지 시’를 중시했던 오규원의 포부가 그랬듯, 그 누구의 훼예포폄毁譽褒貶에도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는 ‘우직한 서정의 몸짓’이었다.
서정, 우리가 잊고 지냈던 가치. 조금 먹고살 만하니까 그새를 못 참고 악동들처럼 터져 나왔던 해체주의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던 것들이 요즘에는 잘 찾아보기가 어렵다. 대안도 없고 문제의식도 없었던 정신분열의 말놀이 장은 그렇게 싱크홀처럼 꺼져 버렸다. 핵심과 내용이 없는 껍데기들은 유행병처럼 번져 나갔다가, 현실적 위기 앞에서 감동도 위로도 없이 담론과 함께 자멸했다.
압도하는 자연의 위용, 대재난의 시대 앞에서 독자는 파괴와 조롱의 유희가 아닌 사실의 기록, 진실의 서정 찾기에 다시금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로, 자아로 돌아가는 것이다. 뭐 좀 얻어먹을 거 없나, 하면서 자기 노력도 없이 타인의 세계를 함부로 헤집고 다니던 포스트모던의 철부지 기생충들은, 담론 권력과 적대적 공생 관계를 이루며 시대정신을 갉아먹었다. 그들이 스스로 스러지고 나니, 나를 위로하는 것은 오직 나뿐이라는 것을, 대공황의 팬데믹을 통해 우리는 다시 깨달았다. 연대와 상생도, 나 자신의 주체의식이 기본이 될 때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범람하는 삿된 언어들 속에서 그 속박의 해협을 거슬러 오르는 몸짓. 바로 오늘날 박준으로 대표되는 김소월 풍의 신서정시, 최동호의 극서정시 등의 사조가 그것이다.
소용돌이치는 울려 퍼지는 튀어 오르는
침묵을 휘저으며 입안을 맴도는
혀
― 이혜미, 「빈」 중
언어에 짓눌린 혀가 되지 말지어다. 담론에 묶여 아무 말이나 떠드는 공상의 혀가 되지 말지어다. 권력의 침묵을 휘젓고 파문을 일으키는 한 떨기 몸짓으로서의 혀가 되어라. 입안에서 춤추며 소용돌이치는, 진실을 구현하는 주체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이 되어라. 말이 말로써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지려면 진정성, 즉 서정적 태도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이혜미의 시는 그러한 서정적 태도 위에서 무너진 세계를 응시하고 깔려 죽어 가는 것들의 어둠을 어루만진다. 토속적이고 자연친화적인 표현을 넘어, 주체적 세계를 형성하는 새로운 서정의 발견과 포옹의 순간순간들.
5. 나가며 : 하늘아! 저 불타 오는 태양과 같이…
새로운 서정, ‘신서정’은 그렇게 몸짓으로 우리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다. 당신이 방황할 때 서정은 여기 있었노라고, 당신이 기억한 서정이 당신을 당신답게 만들 것이라고. 다만 당신만의 슬픔을 넘어 모두의 아픔을 자각하라고, 그리고 변화의 행동을 실천하라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열린 몸의 시학으로, 선을 참칭하지 않는 솔직한 몸의 기록으로. 액화된 담론의 그림자는 그 서정의 빛에 쓸려 흩어진다.
한승기의 노래는 이렇게 끝난다.
비라도 내려라 가슴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씻겨 가게
하늘아 저 불타 오는 태양과 같이
나에게 뜨거운 정열을……
비가 씻어 간 자리에 해를 기다리며 오늘도 밤을 지새운다.
신승민 | 2015년 『미네르바』 신인상 시, 2016년 『문예바다』 신인상 평론 당선. 시집 『일곱 번째 감각-ㅅ』(공저), 평론집 『한국문예작가연구』. (사)한국시인협회 기획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