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4장 11-14절. 주님을 믿고 역경을 이깁시다. 031005
1. 오늘은 구주 예수님을 늘 마음에 모시고 살아서, 마음에 행복이 가득하므로,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궁궐이나 초막이나, 어떤 형편에서도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아는 자족하고 감사하는 신앙생활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능력의 주님을 모시고 살면, 고난과 질병과 죽음까지라도 능히 극복할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선교헌금을 보냄으로써, 바울 사도의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한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주님 믿고 역경을 이깁시다”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은혜 안에서 궁핍함과 풍부할 때에도 자족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t that I speak from want, for I have learned to be content in whatever circumstances I am.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οὐχ ὅτι καθ’ ὑστέρησιν λέγω·
not that as to destitution I speak
‘아니니라’(οὐχ, not)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말하는’(λέγω)은 현재형(I speak)으로서 ‘궁핍한 것 때문에 말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ἐγὼ γὰρ ἔμαθον ἐν οἷς εἰμι, αὐτάρκης εἶναι.
I for I learned in that which I am, content to be
직역하면 ‘왜냐하면 나는 어떤 형편에 내가 있든지 만족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나는’(ἐγὼ, I)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에서 동사(εἰμι)는 현재형으로서(I am) 현재 내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자족한다는 뜻입니다.
‘만족하는 것을’에서 동사(εἶναι)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be), ‘배웠노니’(ἔμαθον)는 부정과거로서(learned) 과거에 확실하게 배운 상태를 가리킵니다.
1.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것은 원래 스토아 철학자들의 생활 모토였는데, 바울이 자족하기를 배운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성취한 것입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4:27).
바울은 세상 염려를 다 버리고, 자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1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세상 염려는 자족하지 못한 탐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7-10.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2.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이 10년 만에 다시 복음 사역을 위해서 헌금으로 동참하는 것을 크게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물질적 도움을 받게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 자기는 물질이 궁핍한 속에서도 자족하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선교헌금을 기뻐한 것은 빌립보 성도들이 주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의 믿음을 다시 되찾은 데 대한 기쁨이었습니다.
즉,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이 경제적으로나 영적으로 한동안 침체에 빠져 있었는데, 다시 구원의 감사와 기쁨을 되찾아서, 주의 일에 헌신하고 봉사하고자 하는 구원의 첫사랑을 되찾은 데 대한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녀들이 사춘기가 되어 갑자기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부모를 거역하다가, 다시 원래 대로 부모와 사랑의 관계를 되찾으면, 부모의 마음이 기쁜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부모에게 잘해주어서 기쁘기보다는, 자녀가 올바른 길을 되찾은 데 대해 감사하고 안심한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이 구원의 첫사랑을 회복한 데 대해서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원래 바울 사도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의 용서와 사랑의 감격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복음 전도를 위해서 처음부터 헌금으로 선교에 동참하였습니다.
빌립보서 4: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세우고 데살로니가로 떠날 때도 선교헌금을 드렸고, 또 데살로니가에서 선교할 때도 선교헌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베뢰아를 거쳐 고린도에 가서 선교할 때도, 실라를 통해서 선교헌금을 보냈습니다. (사도행전 18:5)
이처럼 빌립보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처음부터 열심히 선교헌금으로써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던, 빌립보 성도들이 10년 동안이나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복음을 전해준 바울에 대해서 선교헌금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즉,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① 에베소 전도 3년, ② 다시 빌립보를 들렸을 때, ③ 또 고린도에 갔다가 다시 빌립보를 들렸을 때, ④ 그 후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가이사랴에서 감옥살이 2년할 때, ⑤ 로마 감옥으로 이송되어 3년이 다 지나도록, 계속 10년 동안이나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을 통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하여 이전에 그토록 열심히 바울에게 선교헌금 드리던 것을 10년 동안에 선교헌금을 한 번도 안 보냈던 것입니다.
이처럼, 빌립보 교회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바울에 대한 첫사랑의 관계가 10년 동안이나 식어버렸다가, 드디어 첫사랑을 회복하고, 선교헌금과 함께 감옥에서 시중들 에바브로디도까지 보내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빌립보 교회가 한동안 죽었던 것 같았던 사랑이 다시 되살아난 것을, 오늘 성경은, 죽었던 나무에서 새 싹이 난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제 사랑의 새싹이 돋기 시작한 빌립보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은 계속해서 감사와 기쁨 속에서 성장하고 열매 맺어나갈 것입니다.
3. 세상에서는 물질적인 손실을 당하면, 마음이 상하고, 우울해지는데, 주님을 위해서 헌금을 하고 나면, 신기하게도 오히려 드리면서도 감사와 기쁨을 갖게 됩니다.
헌금해서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산 사람보다는 오히려 헌금을 잘해서, 나중에 자신과 그 후손들이 복 받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0장 35절에는 “주는 자가 복되다”고 했습니다.
또, 시편 112편 5절에는, “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된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는 “주라, 그리하면, 후히 되어 흔들고 넘치도록 하여 안겨주리라”고 했습니다.
4. 예화
아이 셋을 키우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과자를 사서 가방에 가득히 가지고 집에 왔습니다.
그리고서, 가방에 든 과자 중 절반은 그대로 놔두고, 절반만 꺼내서 아이들 셋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서는, 한 참 맛있게 먹고 있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아빠도 먹고 싶으니 좀 줄래?” 하고, 과자를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막내가 과자 하나를 손에 들더니 절반을 잘라 아빠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둘째는 한 개를 집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첫째는 “아빠, 이것 모두 아빠와 같이 먹어요”라고 했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가방 안에 든 과자들을 전부 내놓으면서, 막내에게는 한 개의 절반을 더 주었습니다.
그리고, 둘째에게는 한 개를 더 주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에게는 가방 안에 있는 것을 다 내어주면서 같이 먹자고 했답니다.
이처럼 부모도 감사하며 부모를 사랑하는 자식에게 더 주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은 물질을 탐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를 갖고자 해서입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 성도들이 선교헌금을 보내준 것을 보고 기뻐한 이유도 자신의 물질적 해택보다도, 빌립보 교인들이 다시 구원의 은혜와 감사와 행복을 되찾은 그 모습이 너무도 감사해서 크게 기뻐했던 것입니다.
즉, 바울은 자족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보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5. 어떤 형편에도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바울은 가난하더라도 예수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릴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빌립보 전도시에, 억울하게 매 맞고 감옥에 갇혀서도, 예수님 모시고 감사 찬송할 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가난해도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느냐”고 노래했습니다.
가난을 탓하고 짜증 내봤자 마음만 상하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에서 만족을 누리는 방법을 찾았던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분들도 현실을 인정하고 정신적 행복을 추구하면서, 삶의 멋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난해도, 병들고 늙었어도, 찬송하면서 삽시다.
전에 우리 권사님들 강원도 가실 때, 찬송하시는 것을 보니, 세상 시름 다 이겨버린 모습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난해도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성령님의 기쁨과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평안과, 천국 영생의 행복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가난을 기회로 삼아서, 허상을 벗어버리고,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고, 어려운 직업을 가지고 성공하신 분들을 봅니다.
과거에 이북에서 피난 오신 분들이 그래서 많이들 성공을 했습니다.
부자라서 노래 부르는 것은 불신자들도 다 할 줄 압니다.
그러나, 성도님들이 가난해도 예수님을 모시고, 구원의 은혜를 찬송하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불신자에게 전도도 됩니다.
시편 50편 23절에는, 이처럼 가난과 환난 중에 감사로 예배하고 찬송하는 성도에게 하나님이 행위가 옳다고 하시면서,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툼이 일어난다도 했으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유익이 된다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5-10절에,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은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돈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여러 가지 시험과 근심과, 올무와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어떤 형편에서든지 예수님 모시고, 행복이 가득한 삶, 세상을 초월한 기쁨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 know how to get along with humble means, and I also know how to live in prosperity; in any and every circumstance I have learned the secret of being filled and going hungry, both of having abundance and suffering need.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οἶδα καὶ ταπεινοῦσθαι,
I have known also to be brought low
직역하면 ‘또한 낮아지게 되는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낮아지게 되는 것’(ταπεινοῦσθαι)은 현재 부정사형 수동태 동사(to be brought low)이고, ‘나는 알고’(οἶδα)는 현재완료형으로서(I have known) 이미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οἶδα καὶ περισσεύειν·
I have known also to live abound
직역하면 ‘또한 풍부하게 사는 것도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풍부하게 사는 것’(περισσεύειν)은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live abound), ‘알아’(οἶδα)는 현재완료형으로서(I have known) 이미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일
ἐν παντὶ καὶ ἐν πᾶσιν
in everything and in all things
직역하면 ‘모든 것과 모든 일에’로서 강조되어 있습니다.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μεμύημαι,
I have learned the secret,
직역하면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 대하여) 비결을 내가 배웠노라’는 뜻입니다.
‘처할 줄 아는 일체의’는 번역상 첨가한 것입니다.
‘비결을 배웠노라’(μεμύημαι)는 완료형으로서(I have learned the secret) 이미 과거에 배웠다는 뜻입니다.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καὶ χορτάζεσθαι καὶ πεινᾶν,
also to be full and to hunger
풍부와 궁핍에도
καὶ περισσεύειν καὶ ὑστερεῖσθαι.
and also to abound, and to be deficient
1. 비천할 때는 겸손히 기도하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풍부해지면 기도를 게을리하고 방탕해진 경우가 있고, 풍부할 때는 잘 섬기다가 비천해지자 낙심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두 경우에도 흔들림 없이 주님을 잘 섬겼습니다.
‘비결을 배웠다’(μεμύημαι)는 말은 신비스러운 종교적인 비법을 터득한 것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바울은 많은 극한 연단과 고난을 통해서 풍부와 궁핍 그리고 배부름과 배고픔에 일체의 비법을 성령님의 은혜로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2. 자족하는 생활은 반드시 가난하게 살면서도 자족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수도사들처럼 부유하면서도 신앙에 흔들림 없이 성령님만 의지하면서 사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탐욕이나 원망을 멀리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에서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3. 바울 사도가 빌립보 성도들의 선교헌금을 받고 크게 기뻐한다고 하니, 어떤 성도가 “바울도 별수 없군. 자급 전도한다고 하더니, 감옥에 들어가고 보니 별수 없이 물질을 요구하는구만. 보아하니 앞으로도 더 달라고 하겠구먼” 하고 오해할 것 같아서, 내가 궁핍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이 선교헌금을 받고 크게 기뻐한 이유는 재정 보조를 계속 받으려는 데 있지 않고, 빌립보 성도들의 신앙이 다시 구원의 첫사랑을 회복한 데 대한 기쁨이었습니다.
이미 바울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이 한동안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바울 사도를 잊고 살다가, 다시금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감사와 행복감 가운데서 바울을 생각하게 된 것을 보고 기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이미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면서, 구원의 감격과 용서와 사랑과 행복감을 가지고 만족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궁핍하거나 풍부하거나, 비천하거나 존귀하거나, 배고프거나 배부르거나,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잃지 않고, 언제나 예수님을 모시고, 구원의 기쁨과 감격과 행복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4. 바울이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한 것은 예수님을 모시고 마음에 가득한 구원의 행복감을 가지고 살면서, 어떤 환경을 만나도 예수님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신앙의 연단과 실력을 갖추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모심으로 처음 체험한 구원의 용서와 사랑과 영생 천국의 행복감을 갖고 살다가, 돈에나 권력에나 세상 향락에 예수님을 빼앗겨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가난이나 질병이나 마귀의 공격이나 사망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마음에서 예수님을 내버리고, 천국 구원의 행복도 잃어버린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처음 구원받은 회심 체험이 너무나 극적이었기 때문에, 세상 권력이나 돈이나 향락의 유혹이나, 핍박과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감옥에서도 구원의 기쁨과 감사와 행복감을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5. 그런데, 바울도 그냥 저절로 이런 자족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배웠다>는 것은 단번에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니고, 여러 환란을 통과하면서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굳게 믿었으며,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 예수님을 굳게 믿고 사는 신앙으로 무장된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어떤 형편에서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만을 모시고 만족하는 신앙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일단 구원의 감격을 가진 성도도 처음에는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고 고백하지만, 신앙생활을 해가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나, 사람들에게 고통을 당하게 되면, 구원의 감사와 행복감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저 아무개는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를 못했는데도, 사회적으로 저렇게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가 있구나. 나는 사회적으로 권력도 없고, 돈도 없어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고 해도 소용 없구나” 하면서, 구원의 감격과 행복감을 잃어버린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족하기를 배우는 것”은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고, 반복된 훈련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즉, 여러 어려운 환경과 시험을 통하면서도,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므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감격과 행복감을 가질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상대적으로 비천한 자리에 있다는 생각을 하면 낙심과 우울함을 느끼기 쉽고, 풍부한 처지가 되면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심으로, 비천함이나 풍부함 속에서도, 오직 주님의 구원으로 인한 용서와 사랑과 천국 행복감과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 믿는다고 세상적으로 당장 팔자를 고치는 고소득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되기를 바라려면,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세상에서는 가난과 고난과 질병과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떠한 형편에서도 성령님 마음에 모시고 살기만 하면, 마음속에 구원의 감격과 기쁨과 행복감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495장.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454장, “주 사랑 안에 살면 나 두렴 없도다. 그 사랑 변함없어 늘 마음 편하다. 저 폭풍 몰아쳐서 내 마음 떨려도 주 나의 곁에 계셔 겁낼 것 없어라”
455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473장, “아 내 맘속에 참된 평화 있네, 주 예수가 주신 평화. 주가 항상 계서. 내 맘속에, 주가 항상 계서 아 기쁘다. 주 나의 맘에 계셔 위로하시네, 어찌 내가 주를 떠나살까”
500장, “주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즐겁고 슬플 때 늘 계시옵소서.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나 주께 왔사오니 복 주옵소서”
218장,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날 붙들어 주시고, 내 마음에 새 힘을 주사 늘 기쁘게 하소서.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내 맘속에 찾아오사, 내 모든 죄를 사하고, 내 상한 맘 고치소서”.
능력의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 어떠한 역경과 물질이 넉넉할 때도 불신앙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 can do all things through Him who strengthens me.
πάντα ἰσχύω ἐν τῷ ἐνδυναμοῦντί με.
all things I have strength in the (One) strengthening me
‘능력주시는’(ἐνδυναμοῦντί)은 현재분사로서(strengthening) 언제나 능력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할 수 있느니라’(ἰσχύω)는 현재형으로서(I have strength) 원형(ἰσχύω)은 ‘강하다, 능력을 갖고 있다’( be strong, have power)는 뜻입니다.
1. 바울이 풍부와 비천에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알게 된 것은 그 배후에 그에게 ‘능력을 주시는 자’인 성령님이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수양을 믿었고, 후대의 나폴레옹은 자신의 힘을 믿었으나, 바울은 오직 능력주시는 예수님, 성령님을 믿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의 일체의 성공의 비결은 예수님이시고 성령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라고 고백했습니다.
인간 권력자는 의지할 것이 못 되고(이사야 2:22), 은과 금도 인간을 건지지 못한다고(에스겔 7:19) 했습니다.
2.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바울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늙어서 경수가 끊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 능치 못함이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8:14).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1개월간 고기를 먹이시겠다고 하셨을 때, 모세가 의심하자,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역대하 16장 9절에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40:28-29.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들(πάντα: all things)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3.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바울을 건방진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마치 나폴레옹이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말이 없다”고 한 것처럼.
그러나, 나폴레옹은 대포로 세계를 지배할 것으로 생각하다가 세인트 헬레나 섬에 갇혀서, “나는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다 실패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세계를 지배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그냥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고,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전능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주의 일 하는데 장애가 되는 궁핍과 가난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여기 모든 것이란, 주의 일을 하는 모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 신자들은 이 말씀을 오해하여,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복 받는 일을 모두 할 수 있다고 기복신앙적으로 잘못 이해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처럼 복음 사역하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떤 환난이나 역경을 만나도, 능력의 주님이 함께 하시면, 그 모든 역경을 극복하면서 복음 사역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역경을 극복한다는 것은 순교도 감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주님이 능력을 주시면, 복음 사역을 하다가 죽게 되어도, 불신앙 가운데 떨어져서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조차도 감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복 받는데, 세상 복을 다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이 말씀을 정반대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이러한 이치는 같습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서 정말 마음이 하나가 되어 있으면, 어떤 가난과 질병과 감옥 같은 역경이 닥쳐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의 힘으로 가난과 질병과 감옥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춘향이가 이 도령을 사랑하기 때문에, 변 사또의 온갖 유혹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불사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나가지 않습디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떤 환난과 역경을 만나도, 사랑의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 사랑 가운데서, 가난과 질병과 죽음을 극복해가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능력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아가서 8장에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사랑은 많은 물이 끄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에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어떤 위험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문제니, 인재가 없어서 문제니, 무엇이 없어서 문제니 해도, 주님의 사랑이 없어서 문제일 따름입니다.
내 안의 행복도, 내 가정의 행복도, 교회의 행복도, 성령님의 사랑이 있으면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는 모든 것이 부족해도 초월적인 행복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복음 전도와 교회를 위해서 괴로움에 동참하는 것은 잘 한 일입니다.
4: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evertheless, you have done well to share with me in my affliction.
πλὴν καλῶς ἐποιήσατε, συνκοινωνήσαντές μου τῇ θλίψει.
but well you did, having had fellowship in my the affliction
‘참여하였으니’(συνκοινωνήσαντέ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had fellowship in) 과거에 분명히 참여한 것을 가리키고, 원형(συγκοινωνέω)은 ‘함께’(σύν)라는 전치사와 ‘참여하다’( κοινωνέω)는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잘하였도다’에서 동사(ἐποιήσατε)는 부정과거로서(you did) 대단히 잘한 과거의 행동을 가리킵니다.
1. 바울이 자신은 어떤 풍부와 비천에 처할 수 있는 비결을 가지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이 말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보낸 것이 쓸데없는 일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 선교헌금 보낸 것을 잘한 일이라고 칭찬한 것입니다.
‘함께 참여한다’(συνκοινωνήσαντές)는 것은 ‘함께 교제한다’(σύν+ κοινωνέω)는 뜻이기도 해서, 이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는 교회의 근본 본질을 말해주는 단어입니다.
이처럼 헌금은 복음 전도에 참여하는 교제에 해당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2.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헌금에 대해서 감사할 뿐만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의 훌륭한 신앙 행위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3. “그러나”(πλὴν: but)라는 말은 앞에서 바울이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웠고,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한 데 대한 오해를 없애기 위한 말씀입니다.
즉, 바울이 감옥에서도 자족하고, 궁핍해도 자족할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니까, 어떤 성도들은 “그러면 바울 사도를 재정적으로 도울 필요가 없겠구나. 주 안에서 다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선교헌금을 보낼 필요 없이 가만 놔두자”라고 오해하는 것을 방지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영적, 정신적으로는 주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고, 자족할 수 있지만, 육신은 괴로운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감옥 밖에 보다도, 감옥 안에서는 돈이 훨씬 더 필요합니다.
돈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감옥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 사역을 하다가 감옥에 갇혀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을 위해서 헌금을 해주는 것은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마태복음 10장 41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해서 고난당하는 바울을 대접하는 것은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대접을 받는 주의 일꾼들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말고, 주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4.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 하였도다”
교회 일은 혼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고 해도, 혼자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혼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일체의 비결을 배웠지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괴로움에 함께 참여했으니 잘했다는 것입니다.
기도로, 육체적인 봉사로, 찬양으로, 교사로, 헌금으로 주의 일에 동참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골로새서 1장 27절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함께 고난에 참여하고, 희생하고 봉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성령 충만하고, 주님이 주시는 모든 복을 받으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218장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날 붙들어주시고
455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495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