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동학농민군의 백산(전북 부안 소재) 봉기를 그린 그림
동학농민전쟁에는 농민군 1백만명이 참여했고 30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농민군들은 산속이나 섬으로 도망해 몸을 숨겼고 죽음을 면한 처자식은 재산을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졌다. 당사자나 가족은 살아가면서 결코 농민군에 가담한 사실을 가슴에 묻어두고 말하지 않았다. 역적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록의 계절인 5월은 동학농민전쟁의 단초를 연 달이다. 1894년 연초에 고부(현 전북 정읍)를 중심으로 한 농민봉기는 부안의 백산대회를 거쳐 5월10일(음력 4월6일) 전라감영에서 파견된 관군과 향병(鄕兵)을 일거에 쳐부쉈다. 이어 5월25일 장성 황룡강에서 중앙에서 파견된 관군과 접전하여 일대 승리를 장식하고, 승승장구한 끝에 전주로 내달아 5월31일 호남의 수부(首府)인 전주성을 점령했다.
농민군이 한 도의 수부를 점령한 것은 조선조 건국 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더욱이 전주는 국가재정의 4분의 1을 담당하는 호남의 심장부였기에 그 파장은 더욱 컸다. 이렇게 하여 온 나라를 미증유의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근대사의 새 장을 연 농민전쟁의 횃불이 올려졌다. 농민군들은 전주에서 관군 대장인 초토사 홍계훈과 몇 가지 중요한 약속을 하고 집강소(執綱所) 활동을 전개했다.
농민군은 첫 봉기 때부터 정부의 비정을 지적하는 글을 보냈으나 전주를 점령한 뒤에는 이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농민군의 요구는 국가제도로 이루어진 비정, 곧 국가수탈을 중지할 것이며, 모든 벼슬아치의 부정행위를 척결하고 쌀의 외국 유출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왜 관군과 농민군은 서로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전주에서 물러갔던가?
-집강소 설치지역 ‘해방구’-
간단히 분석하면 관군은 서울에 일본군과 청군이 진주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고, 농민군은 북접(北接·농민전쟁 당시 충청도 지역의 동학 조직. 전라도 지역은 남접이라 했다)의 호응이 없어서 고립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관군과 농민군은 각기 이해득실에 따라 타협을 하고 다음의 정세에 대비하려 했던 것이다.
아무튼 농민군들은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자신들이 내건 강령을 실천했다. 집강소는 국가에서 임명한 수령들을 몰아내거나 하수인으로 부리면서 지방행정의 직접 통치를 이룩했다.
만석보 유지비 - 동학농민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만석보가 있던 자리에 세운 비석
집강소를 통해 수행한 주요 조항을 보면 신분관련 조항으로는 ▲유림과 양반무리의 소굴을 없애버리는 일 ▲종의 문서를 없애버리는 일 ▲백정의 머리에 패랭이를 벗기고 갓을 쓰게 하는 일 등이었다. 국가수탈 문제로는 ▲모든 부당한 조세를 중지하는 일▲무명 잡세를 없애버리는 일 ▲탐관오리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토지문제로는 토지를 고루 나누어 짓게 하는 일 등이며, 여성문제로는 과부의 재가를 허락하는 일 등이었다. 또 외국세력과 결탁하는 자들은 잡아죽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오지영의 동학사 필사본)
이를 폐정개혁이라 부른다. 조선왕조는 신분제도와 토지제도를 골간으로 지배체제를 유지했다. 다시 말해 양반과 상인을 가르고 노비와 천민을 최하층으로 하여 양반(사림) 중심의 관료사회를 이룩했던 것이다. 온갖 특권을 누린 양반들과 달리 양인들은 국가조세와 군대경비를 부담하면서도 벼슬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천민들은 갓을 쓰지 못하고 패랭이를 쓰거나 맨상투 차림을 하고 돌아다니며 양반의 부당한 부림을 받아야 했다.
또 토지 소유를 무한정하게 허락하여 양반과 지주들은 수천석, 수만석의 잉여생산을 거두어들이면서도 소작인에게는 8~9할의 소작료를 물렸다. 따라서 소작농들은 생존할 수 없는 처지에 몰려 춘궁기가 되면 굶어죽는 사태가 연이어졌다. 그런데도 국가에서 농지소유를 제한하려는 정책이나 소작료를 낮추려는 제도를 만들지 않았다.
소농민들과 하층민들은 이런 불평등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오랜 투쟁을 벌여왔으나 번번이 좌절하고 말았다. 지배세력은 지배체제의 유지를 위해 완강하게 이를 개혁하지 않으려 했다. 농민군들은 집강소 활동을 통해 이를 실현하려 했다. 그리하여 노비들은 종문서를 불태워버리고 해방되었으며, 백정들은 패랭이를 벗어 던지고 양민과 같은 차림을 하고 돌아다녔다. 또 자작농과 소작농은 과도한 소작료나 고리채를 물지 않거나 부당한 국가수탈에 저항했다. 집강소가 설치된 지역은 바로 해방구였다.
또 집강소는 합의에 의해 조직을 결성하고 당면의 정책을 결정했다. 여기에는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 집강소 관계자와 일반 민중에게는 서로의 호칭을 접장(接長)으로 통일하여 부르게 했다. 곧 부인접장(여성), 동몽접장(어린이) 등 신분과 남녀와 나이를 떠나 동등한 호칭을 사용케 하여 사민(四民)평등의 의지를 드러냈다. 상하와 존비와 남녀의 차별관념을 타파하려는 평등의 호칭이었다. 접장 호칭의 등장은 러시아 혁명 뒤 ‘동무’라는 호칭을 쓴 시기보다 적어도 20여년 앞섰다.
이해 7월 일본군은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고 이른바 개화파를 등장시켜 갑오정권을 탄생시켰다. 갑오정권은 개혁조치로 ▲문벌과 반상을 타파하고 인재를 고루 뽑아 쓴다는 것 ▲부녀의 재가(再嫁)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자유의사에 맡긴다는 것 ▲모든 노비제도를 없애는 것 등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했으나 조세와 토지제도의 개선 등 국가수탈과 지주수탈의 조항은 하나도 반영하지 않았다. 이는 신분제도는 개혁하되 민중의 생존과 직결되는 경제제도의 개혁은 외면한 것이다. 그러니까 개화정권이 추진한 갑오개혁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조치였다.
-남녀노소 떠난 호칭 ‘접장’-
농민군들은 호남을 중심으로 6개월쯤 집강소를 통해 반봉건투쟁을 줄기차게 벌였으며 충청도, 경상도로 번져나갔다. 신분평등과 토지개혁은 바로 근대국가가 지향하는 기본 요소이다. 바로 신분제적 계급을 해소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철폐하며 대의제를 이룩해 주권재민의 국민국가를 여는 이념을 제시한 것이다. 본질을 호도한 개화정권의 지향과는 사뭇 달랐다.
그리하여 집강소의 합의적 의사결정과 평등실현의 활동을 두고 아시아 민주주의 맹아(萌芽)라 평가하기도 하고 밑으로부터 변혁을 지향하여 근대국가의 이념을 실천적으로 제공한 반봉건 투쟁이라 규정하기도 한다.
〈이이화/역사학자〉
- 2남2녀둔 전봉준, 농민전쟁뒤 절손 -
전봉준은 두 아내를 둔 것으로 전해진다. 첫째 부인 송씨는 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사망했고, 둘째 부인 이씨는 농민전쟁 당시에 생존했다고 한다. 전봉준은 공초(供招)에서 가족이 6명이라고 밝혔다. 곧 본인 부부를 포함해 자녀를 4명 두었다는 말이다.
전봉준이 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전 고부 조소리에서 살 때 아이들의 손을 잡고 황토재에 있는 아내의 무덤에 성묘했다고 마을사람들은 전해주고 있다.
전봉준은 공초에서 주소지를 태인 동곡리(현재 정읍시에 속함)라고 밝혔다. 아마도 고부봉기가 있은 뒤 가족을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자녀 4명이 태어난 순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2남2녀였던 것으로 보인다.(최현식 조사)
전봉준이 체포된 뒤 전봉준의 고향으로, 전씨들이 집단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 고창 당촌은 깡그리 불에 탔고 전씨들도 몰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봉준의 첫딸 옥례는 15세의 나이로 화를 피해 이름을 바꾸고 진안 마이산 금당사로 들어가 공양주로 있었다. 그녀는 23세 때 이씨 집안으로 출가했는데, 1970년 자신이 살았던 고부의 전봉준 고택을 일러주어 복원케 했다.
전봉준의 옛집 방안 모습
둘째 딸은 뒤에 태인 지금실로 출가해 살고 있었다. 장남 용규는 동곡리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차남 용현(또는 동일)은 누나가 사는 지금실에서 몸을 숨겨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고 한다. 지금실에는 동네사람들이 전봉준의 가묘를 만들고 받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용현은 머슴살이를 하면서 동네에서 노름을 일삼다가 노름빚을 져서 남의 소를 팔아먹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의 두 딸은 살아남아서 자식을 두었다. 외손녀인 강금례는 동곡리에 살면서 자식을 두었다.
전봉준은 외손을 둔 것으로 보이나 친손들은 있는지 없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전봉준만이 절손이 된 것은 아니다. 많은 농민군 지도자들의 가족이 몰살이 되거나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 그리하여 오늘날 확인할 길이 없게 되었다. 지난 2월 국회에서 농민군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어 110년 만에 농민군 지도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들에게 주는 훈장이나 표창장은 누가 받아 보관할 것인가?
동학농민전쟁 上
일제는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유폐시켰으며 개화정권을 수립하여 하수인으로 만들었다. 이어 정부의 요청으로 파견된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개화정권은 조선 땅에서 침략전쟁을 벌인 일본군의 물자를 공급해주는 따위의 편의를 제공하였고 조선의 군사지휘권도 일본군에게 넘겨주었다. 이렇게 조선은 일본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다.
집강소 활동을 벌이면서 정세를 예의주시하던 농민군은 1894년 9월 일본제국주의자들에 항거하는 봉기를 서둘렀다.
전봉준은 남접의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를 향해 진격했으며 최시형은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전봉준과 손병희는 논산에서 대회를 가지고 결의를 다졌으며 전국의 농민군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하고 곳곳에서 봉기했다.
-곡식 익는 9월 전국적 봉기-
이것은 반외세 반침략의 항거였다. 전봉준은 왜 9월에야 전면적 항일전선을 구축했을까? 전봉준은 군량미를 확보하려 곡식이 익기를 기다렸다고 말했다. 또 그동안 집강소 활동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던 교단세력인 북접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남접의 농민군 역량을 결집한 것도 하나의 재봉기 동기가 될 것이다. 농민군은 전주감영에 이어 공주감영마저 석권해 일본군과 장기전의 태세를 갖추려는 계획이었다.
아무튼 주력 농민군은 일본군과 일본군의 작전지휘를 받는 관군과 공주에서 수십 차례의 공방전을 벌인 끝에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지방의 농민군은 서울로 진격하거나 공주전투에 합류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진로차단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황해도 농민군은 해주감영을, 동해안으로 진출한 농민군은 강릉관아를 점령했다. 서해의 농민군은 홍성을 공격했으며 남해의 농민군은 진주병영·강진병영·해남우수영을 잇달아 함락했다.
일본군은 서울에서 북쪽의 농민군을 공격해 남하의 통로를 차단했고, 공주전투에 참여하여 신무기로 농민군을 공격했다. 또 부산에 상륙하여 경상도의 서부지대와 호남 남해일대의 농민군을 토벌했다. 관군들은 일본군의 지휘와 지원을 받으면서 골골을 누비면서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민보군(民堡軍·민간인 자원병)들은 관군과는 별도로 조직을 결성해 농민군 섬멸에 나서 일대 복수전을 펼쳤다. 산골짜기와 들판은 농민군의 피로 적셨으며 섬진강의 바닥에는 무수한 농민군의 시체가 깔렸다.
농민군들은 모진 눈보라 속에서 죽창을 꼬나들고 얼음밥을 먹으며 전투를 벌이는 의기를 과시했으나 끝내 곳곳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정식 재판을 받은 지도자는 전봉준·손화중·김덕명·최경선·성두환 등 5명뿐이었으며 다른 농민군들은 불법적 방법으로 효수(梟首)되거나 시체가 토막 나거나 한꺼번에 구덩이에 묻혔다. 홍천의 서석 자작고개와 보은의 북실에서 수백명의 집단 무덤이 발견되었다.
일본군에 희생된 숫자보다 더 많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연출되었다. 광기가 어린 잔인한 12월이었다. 일본군과 관군은 서울 이남의 농민군을 몰아 바닷속으로 처넣는 전술을 구사했다. 이 작전을 그들 처지로 보면 성공을 거두었다.
2차 봉기의 반침략 전쟁은 거대한 민족적 의미를 던지고 있다. 전봉준은 공주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전국민의 경각심을 환기시키고 항일전선의 의미를 천명했다.
“개화 간당이 왜국과 손을 잡아 밤을 틈타 서울로 들어와서 군부(君父)를 핍박하고 국권을 멋대로 천단했으며 하물며 방백수령이 모조리 개화 무리 소속으로 인민을 어루만지지 않고 살육을 좋아하며 생령이 도탄에 빠지매 이제 우리 동도가 의병을 들어 왜적을 소멸하고 개화를 제어하여 조정을 청평하고 사직을 안보할세….”
곧 일본과 개화파 정권을 타도하려 일어섰음을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도 관군과 구실아치와 상인들이 일본군과 손을 잡고 자신들을 공격한다고 전제하고 “기실은 조선끼리 서로 싸우려 하는 바 아니어늘 이와 같이 골육상전하니 어찌 불쌍치 않으리오”라고 언급하면서 골육상전을 막고 “다함께 척왜(斥倭) 척화(斥和)하여 조선이 왜국이 되지 아니케 하자”고 호소했다.
이 대목에서 전봉준과 농민군의 지향하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관군과 관료들은 일본군에 협조하여 반침략 세력인 농민군을 탄압하고 있었다. 더욱이 평생 경전의 글을 읽으면서 충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 유림들은 도리어 농민군 섬멸에 앞장서는 자기 모순을 범하고 있었다.
유림들은 반봉건의 기치를 내건 농민군을 일본군보다 더 무섭고 간악한 적으로 돌린 탓으로 일본군에 맞서 의병항쟁을 벌이지 않았던 것이다. 또 유림들은 침략세력과 손을 잡고 있는 개화정부에 대해서도 이때까지 표면적 저항운동을 벌이지 않았다. 다만 다음해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그때에야 “형체를 보존하고 복수를 해야 한다(保形復●)”고 외치고 의병항쟁을 벌였을 뿐이다.
-“왜적소멸·개화제어하려”-
어쨌든 농민군은 반봉건·반침략 항쟁이 좌절한 뒤에도 끈질기게 민족운동의 대열에 앞장섰다. 그런 탓으로 살아남은 농민군들은 기존의 양반지배세력과 일본제국주의자들로부터 양면의 압제를 받았다. 그리하여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두더지처럼 살았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농민군들은 명예회복은 물론 후손들마저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살았다.
1895년 ‘보형복수’의 기치를 내걸고 일제와 개화정권에 항쟁했던 의병들에게는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여 국가적 예우를 베풀었으나 농민군은 여전히 동비(東匪)나 비도(匪徒)로 지목되어 보상이나 명예회복을 해주지 않았다.
그동안 역대 독재정권 아래에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많은 민주인사들이 투쟁을 벌였다.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현장에는 어김없이 전봉준의 초상이 내걸렸다. 민주인사들에게 전봉준은 저항의 표상으로 받들어졌던 것이다.
또 1994년 농민전쟁 발발 100주년을 즈음해서는 봉기지역을 중심으로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으며, 기념사업을 활발하게 벌여 그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켰다. 또한 국제학술회의에서는 “집강소 활동이 아시아 민주주의의 기원”이며, “‘2차봉기’는 일제 침략에 최초로 저항한 사건”이라는 평가를 각각 받았다.
꼭 110년이 지난 봄, 국회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참으로 오랜 세월을 거친 뒤에야 국가에서 법으로 공인한 명예회복이었다. 그리하여 역적의 누명을 벗기고 역사의 왜곡을 바로잡게 되었다.
농민군의 후손들은 100여년 동안 온갖 핍박을 받은 끝에 출세도 못하고 가난하게 살아왔다. 후손들은 보상을 받지는 못했으나 조상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회생되었다는 명예 회복 하나만으로 오랜 한을 풀고 새로운 시대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는 역사의 승리였다.
〈이이화/역사학자〉
동학농민전쟁 하 - 농민군, 그후
전라좌도의 집강소 통치를 지휘했던 김개남(金開南)은 지리산 너머 경상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려 노력했다. 그리하여 부하인 김인배(金仁培)를 영호대접주라는 직함을 주어 순천지역으로 내려보냈다. 곧 김인배를 영남과 호남 아래 지역의 최고 두령으로 임명한 것이다.
김인배는 금구 출신으로 24세의 열혈 청년이었다. 그는 영호대접주로서 순천에 접소를 차리고 집강소 활동을 전개했다. 그에 대해 농민군 토벌대장이었던 이두황은 “지난해 6월 이후 금구의 도둑 우두머리 김인배가 이끄는 무리는 여러 지역에서 모인 10만명이었다”면서 “순천 성중에 들어와 영호도회소를 설치하고 관가의 무기를 거둬들이고 남의 돈과 재물을 빼앗으면서 감히 군수(軍需)라고 일컬었다”고 보고했다.
김인배는 직계 농민군을 거느리고 현지 농민군의 협력을 얻어 섬진강을 넘어 하동 진주를 석권했다. 진주는 남해지대의 요충지로 병영을 두었는데 김인배가 이끄는 농민군의 손에 함락되었다. 일본군과 관군이 부산에서 파견되어 섬진강으로 밀려오자 하동 여수 광양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김인배는 마침내 광양에서 잡혀 머리가 잘려 죽었다.
김인배의 아내는 남편의 죽은 날을 몰라 제사를 지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떡시루에 흰 쌀가루를 깔고 매일 아침 들여다보았는데 12월9일 쌀가루에 새 발자국이 뚜렷이 나타나서 제삿날로 정했다 한다(증손자 김영중의 증언). 이 말대로 김인배는 12월9일 죽음을 당했다.
김인배는 죽음을 앞두고 동행했던 처남 조씨에게 “장부가 나서 죽을 자리에서 죽음을 얻는 것은 떳떳한 일이요. 다만 뜻을 이루지 못함이 한이로다. 나는 함께 살고 함께 죽기를 맹세한 동지들과 최후를 같이할 것이니 그대는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라”고 타일렀다 한다.
아마 조씨가 고향으로 돌아와 김인배가 죽은 날짜를 전해주었을 것이다. 많은 농민군의 경우 죽은 날짜조차 알지 못했다.
김인배의 경우처럼 많은 후손들은 농민군들의 시체를 찾지 못해 고인이 쓰던 용품이나 나무 인형을 만들어 묻는 가묘(假墓)를 만들고 받들었다. 올 봄에도 문경에서 농민군의 가묘를 발굴하여 나무 인형의 흔적을 찾아낸 적이 있었다. 또 뇌물을 쓰거나 줄을 대서 잘린 머리를 찾아 항아리에 담아 묘지에 묻기도 했다.
[출처] : 이이화 역사학자 : [한국사 바로보기] / 경향신문
첫댓글 역사를 바로알아야 세상이
보인다했읍니다 동학군 전봉준을 붇잡고 정치를 햇
어야햇는대 그걸모르는 정부와 민비 김씨양반들...
미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