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스의 유령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내용은 어떻게 보면 이 책을 쓰는 동안 끊임없이 떠올랐던 한 가지 진실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돈에는 본질이란 것이 없다는 진실 말이다. 돈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돈의 본질이 끊임없이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미국 역사 초기 단계도 에외가 아니었다. 19세기에 금본위 지지자들과 법정지폐 지지자, 은행권 지지자, 금은 복본위 지지자, 은본위 지지자들 사이에 벌어진 투쟁이 그걸 생생하게 증언한다. 미국 유권자들이 중앙은행이라는 제도를 매우 의심하여 연방준비제도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야 창설하게 된 것도 좋은 증거이다. 영국은행이 설립되고 3세기나 지나서야 연방준비제도가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이미 논의한 것처럼, 중앙은행이 자국 국채를 사들이는 조치도 상반된 효과를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제퍼슨이 본 것처럼, 전사와 금융가의 치명적인 연합이 될 수도 있다. 그런 한편으로 정부를 도덕적 채무자로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이것이 가장 정확하게 표현된 곳이 아마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가 1963년 링컨 메모리얼 계단에서 행한 연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미국의 수도를 찾은 것은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한 것입니다. 이 공화국의 건설자들이 헌법과 독립선언서의 장엄한 내용들을 적을 때, 그들은 모든 미국인들이 상속할 약속어음에 서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어음은 모든 사람들, 맞아요, 백인들만 아니라 흑인들까지도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보장받을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은 이 약속 어음에 대한 채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적어도 유색 인종과 관련해선 그렇습니다. 미국은 이 신성한 의무를 존중하기는커녕 흑인들에겐 불량 수표를, ”예금부족“이라는 도장이 찍혀 되돌아올 수표를 주었습니다.”
2008년의 붕괴도 똑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몇 년에 걸쳐 채권자들과 채무자들,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벌인 정치적 투쟁의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정말로 사기이다. 범죄자들이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결국엔 피해자들이 자신들을 구해줄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반드시 붕괴하도록 설계한, 놀라울 만큼 정교한 폰지 사기극인 것이다. 또 다른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돈과 신용의 정의(定義) 자체를 둘러싼 투쟁의 정점일 수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앞서 1세기 동안 유럽과 북미의 지배계층을 괴롭혔던 노동계급의 봉기라는 유령이 거의 사라졌다. 계급전쟁이 암묵적 타협에 의해 중단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를 조금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미국에서 서독까지, 북대서양 국가들의 백인 근로계층에게 협상 제안이 들어왔다. 백인 근로계층이 시스템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리겠다는 환상을 접기로 동의한다면, 그들에게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다양한 사회적 혜택(연금, 휴가, 건강보험 등)을 누리고, 아마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공공교육제도의 확대를 통해 자녀들이 근로계층에서 완전히 벗어날 기회를 갖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협상 내용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근로자들의 생산성 향상이 이뤄지는 만큼 임금 인상이 있을 것이라는 암묵적 보장이었다. 그 보장이 1970년대 말까지는 제대로 지켜졌다. 그 결과 그 시기 동안엔 급격한 생산성 향상과 급격한 임금인상이 동시에 이뤄졌다. 이것이 오늘날의 소비자경제의 바탕이 되었다.
경제학자들은 이 시기를 “케인스 시대”라 부른다. 이미 미국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에 채택되었던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경제이론들이 산업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 폭넓게 채택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이론들과 함께 케인스의 보다 태평한 화폐관도 받아들여졌다. 독자 여러분들은 케인스가 은행들이 “희박한 공기에서” 돈을 창조하는 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떠올릴 것이다. 케인스는 정부정책이 경기침체기에 수요를 창출할 방법으로 은행의 화폐 창조를 고무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믿었다. 오랫동안 채무자들에게는 매우 사랑스러웠지만 채권자들에겐 저주로 작용한 관점이었다.
케인스는 생전에 급진적인 소란을 떨었던 인물이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부채를 바탕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을 철저히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불로소득생활자의 안락사”를 요구한 것이다. 그래도 그가 옹호한 안락사 방법은 이자율의 점진적 인하였다. 케인스의 경제학설 상당 부분이 그렇듯이, 이는 얼핏 보이는 것만큼 급진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보면 그의 학설은 부채 없는 유토피아라는 애덤 스미스의 이상까지, 특히 지주들을 경제성장에 해를 끼치는 기생충이라고 비난한 데이비드 리카도까지 닿는 정치경제의 위대한 전통에 충실했다. 케인스는 단지 불로소득생활자들을 자본축적의 진정한 정신과 일치하지 않는 봉건적 잔재로 보면서 같은 길을 그대로 걷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혁명은커녕 자본주의를 혁명을 피할 최선의 방법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나는 자본주의의 불로소득적인 측면을 제 역할이 끝나면 사라질 과도기적 단계로 본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그런 측면이 사라지고 나면, 그 외의 다른 요소들도 현저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불로소득자들의 안락사도 절대로 급작스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이며, … 혁명도 전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케인스의 경제학설에 근거한 해결책이 도입되었을 때, 그 정책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숫자는 세계 인구 전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작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그 협상에 포함되기를 원했다. 1945년부터 1975년 사이에 일어난 민중운동의 대부분, 아니 혁명운동까지도 그 협상에 포함되길 원한다는 외침이었다. 정치적 평등은 어느 정도의 경제적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무의미한 것이었다. 북대서양 연안 국가들의 국민들 중에서 그 협상에서 배제된 소수 인종들, 말하자면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옹호하고 나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벌인 운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알제리에서 칠레까지 당시 “민족해방”이란 이름으로 전개된 운동과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가장 극적으로 펼쳐졌던 페미니즘도 거기에 해당되었다.
1970년대 어느 시점에 이르러, 모든 것이 한계점에 도달했다.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자본주의는 그런 협상을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확대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모든 근로자들이 모두 자유로운 임금노동자가 될 경우엔 자본주의의 존립 자체가 위험할 것처럼 보였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1960년대 미국 미시간이나 이탈리아 토리노의 자동차공장 근로자들이 살던 삶을, 말하자면 자기 집과 자동차를 소유하고 자녀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는 삶을 절대로 보장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자녀들 중 상당수가 의미 있는 삶을 요구하기도 전에 이미 그런 우려들이 사실로 드러났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포용의 위기’(crisis of inclusion)란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1970년대 말, 기존 질서가 붕괴 상태에 이른 것이 분명했다. 금융혼란과 식량폭동, 석유위기, 성장의 종언과 생태적 위기에 대한 불길한 예언 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 모든 것들은 민중들에게 모든 협상은 어긋나버렸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들이었다.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풀어나가기만 하면, 그 다음 30년도, 그러니까 대충 1978년부터 2009년까지도 거의 똑같은 패턴을 따랐다는 사실이 쉽게 확인된다. 해결책 자체가 바뀐 것만 빼고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케인스의 유산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권한에 대해서까지 체계적으로 공격하고 나섰을 때, 그것은 분명히 그 전의 모든 협상은 무효라는 것을 명백히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제 정치적 권리는 누구나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990년대에는 심지어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주민들 대부분도 정치적 권리를 누렸다. 그러나 그 정치적 권리는 경제적으로는 무의미했다. 생산성 향상과 임금인상의 연결도 완전히 끊어졌다. 생산성은 끊임없이 향상되었지만 임금은 제자리걸음을 걷거나 오히려 떨어졌다.
이어 가장 먼저 “통화주의”로의 회귀가 나타났다. 비록 통화가 더 이상 금이나 다른 물건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지라도, 정부와 중앙은행의 정책은 주로 통화가 귀중품처럼 다뤄지도록 통화의 공급을 주도면밀하게 관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원칙이 바로 통화주의이다. 동시에, 자본의 금융화는 시장에 투자된 대부분의 돈들이 상업의 생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순수한 투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가 제공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조건이 달라졌을 뿐이다. 새로운 분배에선 임금은 더 이상 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근로자들은 자본주의의 한 조각을 구입하도록 부추김을 받았다. 불로소득계층을 안락사시키기는커녕, 이젠 모두가 불로소득자가 될 수 있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 심하게 착취당함으로써 생기게 된 이익의 한 토막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수단은 다양했고 또 낯익은 것이었다. 미국엔 401(k) 은퇴계좌가 있고 이것 외에도 보통시민들이 시장에서 활동하도록 고무하는 다른 방법도 수없이 많다. 이 방법들은 동시에 보통시민들이 돈을 빌리도록 고무했다. 대처리즘과 레이거니즘을 이끌던 원칙 하나는 근로하는 보통사람들이 적어도 자기 집을 가질 수 있다는 꿈을 품게 하지 못하면 어떠한 경제개혁도 폭넓은 지지를 절대로 얻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다양한 형태의 주택담보융자들이 더해졌다. 이 융자들은 주택을 마치 그 당시 유행어를 빌리면 “ATM 기계처럼” 다뤘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주택은 ATM 기계가 아니라 신용카드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이어서 신용카드의 남발이 있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에겐 “자본주의의 한 조각을 구입한 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워킹 푸어’(근로 빈곤층)를 괴롭힌 천벌 즉 고리대금업자나 전당포 주인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미국 연방의회도 엉뚱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자율 상한선을 7-10%로 정한 연방고리대금법이 1980년 의회의 법률에 의해 폐지되었다. 미국이 의원들에 대한 뇌물을 사실상 합법화함으로써(“로비”라는 이름으로 다시 정의되었다) 정치부패의 문제를 제거하려 했던 것과 똑같이, 고리대금의 문제 역시 25%, 50%, 아니 어떤 경우(예를 들면 일일 융자) 엔 연 120%의 이자율까지 완벽하게 합법적인 것으로 정함으로써 털어냈다.
“금융의 민주화”에서부터 “일상의 금융화”까지, 새로운 분배를 묘사하기 위한 용어들이 수도 없이 만들어졌다. 미국 밖에서는 “신자유주의”로 알려졌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는 시장만 아니라 자본주의(독자 여러분들에게 시장과 자본주의는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키고 싶다)도 거의 모든 것들의 조직원칙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하나의 작은 법인으로 생각해야 한다. 투자자와 회사 간부의 관계를 중심으로 조직되는 그 법인으로 말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내면엔 은행가의 냉철한 수학이 있고 또 빚에 눌려 개인의 명예를 몽땅 팽개치고 일종의 기계로 변해버린 전사(戰士)가 있다.
이 같은 세상에선 “부채를 상환하는 행위”가 도덕의 정의(定義)처럼 보이게 되었다. 빚을 갚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큰 회사든 작은 회사든 부채를 지게 되면 거의 자동적으로 그걸 상환하지 않을 경우 닥칠 일부터 계산한다. 법적 소송 같은 것이 예상될 때만 빚을 갚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달리 말하면, 명예의 원칙이 시장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뜻이다. 짐작컨대 그 결과 부채라는 주제가 종교의 후광을 두르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도 신학은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채권자들을 위한 신학이 있고 채무자들을 위한 신학이 있는 것이다. 미국 부채 제국주의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 때 미국의 복음주의 우파들이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는 사실도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당시 복음주의 우파들은 기존의 기독교 신학 이론 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공급측면 경제학”의 원칙, 즉 돈을 찍어서 부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성경에 비춰볼 때 국가의 번영을 부르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는 입장을 옹호했다.
가장 열정적이었던 지식인은 아마 ‘레이건 혁명’으로 알려질 정책이 막 선보일 때인 1981년에 베스트셀러 『부와 빈곤』(Wealth and Poverty)을 쓴 조지 길더(George Gilder)였을 것이다. 길더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돈을 창조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무(無)에서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이 돈도 창조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유물론의 진창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선물이 창조성이며, 인간의 창조성도 하느님의 창조와 똑같이 발휘된다는 주장이었다. 투자자들은 정말로 다른 사람들의 창의성에 대한 신뢰에 따를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아무것도 없는 데서 가치를 창조해낼 수 있다.
길더는 ‘무’(無)에서 만물을 창조해내는 하느님의 능력을 모방하려는 인간의 행위를 오만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신의 뜻이라는 주장을 폈다. 돈의 창출은 하나의 선물이요, 축복이요, 사랑을 전하는 도구였다. 맞다. 그건 약속은 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채권이 지속적으로 돌고 돈다 하더라도, 그건 이행 가능한 약속은 아니다. 돈의 가치란 것은 신뢰가 뒷받침되어야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미래를 믿지 않는 경제학자들은 대체로 그 미래의 대부분을 결정할 우연과 신앙의 동력을 무시한다. 종교를 믿지 않는 경제학자들은 언제나 진보의 성취를 돕는 신앙의 유형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연이야말로 변화의 바탕이자 신성의 혈관이다.”
이러한 글들이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 같은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공급측면 경제학을 “화폐창조의 신성한 이론”을 처음 제시한 것이라고 선언하도록 만들었다.
반면 돈을 창조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신학은 이와 크게 달랐다. 마가렛 앳우드는 최근 “부채는 새로운 지방덩어리”라고 지적했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 토론토의 버스에 붙은 광고들의 주제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육체적 추함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던 광고들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채권회수 대리자들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요령을 제시하는 광고가 많아진 것이다.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앳우드는 이렇게 썼다.
“심지어 TV 프로그램에 부채 쇼도 있다. 시청자들에게 부채에서 벗어나 환생할 수 있는 요령을 가르쳐준다. 자신도 모르게 빠지게 된 쇼핑중독증에 대한 설명이 있고, 부채에 짓눌려 불면의 밤을 보낸 사람들이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는다. 돌려막기와 거짓말, 속임수, 절도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어 그 사람의 유해한 행동 때문에 고통을 당한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증언이 따른다. 그러면 그 프로그램에서 성직자 역할을 맡은 호스트가 동정어린 훈계를 늘어놓는다. 빛을 보는 순간에 이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회개와 약속이 이어진다. 가위로 신용카드를 삭둑삭둑 자른다. 지출을 줄일 계획이 마련된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면 부채는 다 청산되고 죄도 용서되고 사면이 허용된다. 이제 새 날의 동이 터온다. 그 날 아침 그 채무자는 조금 더 슬퍼지겠지만 지불 능력은 조금 더 갖추게 된다.”
여기선 위험 감수가 어떠한 의미에서도 신성의 혈관이 아니다. 그와 정반대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겐 언제나 다르다. 어떻게 보면, 앳우드가 묘사한 내용은 킹 목사의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에 드러난 예언자적 목소리와 정반대이다. 전후세대는 국가를 향해 국가가 비천한 시민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거짓 약속을 한 사람들이 속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상황이 확 바뀌었다. 똑같은 비천한 시민들에게 스스로를 죄인으로 보라고 가르치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도덕적 관계를 이룰 권리를 다시 찾기 위해선 개인적으로 속죄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친다.
동시에 거기에는 기만적인 요소가 있다. 도덕을 이야기하는 이 모든 드라마들은 모두가 개인의 빚은 최종적으로 그 사람 본인의 방종의 문제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속죄에는 반드시 금욕적인 극기의 회복이 따르게 되어 있다. 여기서 들춰지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이 지금 부채를 안고 있으며(현재 미국의 평균 가계부채는 소득의 130%로 추산된다). 이 부채 중에서 경마나 사치 때문에 생긴 부채의 비중이 매우 낮다는 사실이다. 그 부채가 경제학자들이 ‘재량지출’이라고 즐겨 부르는 항목으로 지출된 것이라면, 그것은 주로 자식들을 돌보거나 친구들과 함께하거나, 아니면 물질적 계산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데 쓰였다. 그렇다면 미국인의 경우 단순한 생존 그 이상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선 빚을 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정치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여명 이래로 보인 어떤 주제의 변형처럼 보인다. 종국적으로 보면, 학대를 당하거나 범죄 취급당하거나 악마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이 사교성이다. 이런 압박이 가해지는 가운데서도 대부분의 보통 미국인들(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중남미계 미국인, 최근 이민자들과 한때 신용거래에 배제되었던 사람들 포함)은 서로를 강하게 사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미국인들은 가족을 위해 주택을, 파티를 위해 술과 오디오시스템을, 친구들을 위해 선물을 구입했다. 심지어 파산의 위험까지 무릅쓰며 결혼식과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오늘날 모두가 자본가의 축소판이 되어야 하는 마당에 그들이라고 무(無)에서 돈을 창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재량지출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파산의 주요 원인은 병이다. 대부분의 차입이 단순히 생존의 문제이다(자동차가 없으면 직장에 다니질 못한다). 또 대학에 다닌다는 것이 직장을 가진 뒤 노동햇수의 거의 반을 부채노예로 지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여기서 진정한 인간 존재들에게는 생존만으로는 절대로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절대로 생존만을 추구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1990년대에 이와 똑같은 긴박감이 글로벌 무대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스완 댐 같은 국가 주도의 웅대한 프로젝트에 대한 대규모 융자보다 소액 대출이 강조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방글라데시 그라민 뱅크(Grameen Bank)의 성공에 고무 받은 새로운 모델은 가난한 공동체에서 비전 있는 기업가들을 발굴하여 저리 융자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라민 뱅크는 “신용은 인권이다”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 아이디어는 “사회적 자본”(지구촌의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이미 이용하고 있는 지식과 네트워크, 커넥션, 독창력 등을 일컬음)을 활용하여 연 5% 내지 20% 성장을 누리도록 함으로써 더욱 많은 자본을 일으키겠다는 것이었다.
줄리아 엘리어차(Julia Elyachar) 같은 인류학자들이 발견했듯이, 결과는 양날의 칼이다. 특별히 솔직했던 어느 NGO(비정부기구) 컨설턴트가 1995년 카이로에서 그녀에게 설명한 내용을 들어보자.
“돈은 곧 권능이다. 이것은 권능이 실린 돈이다. 여기선 성공하려면 힘이 필요하다. 또 크게 생각할 필요도 있다. 여기서는 돈을 빌려놓고 갚지 않으면 감옥에 갇힐 수 있다. 그런데 걱정할 이유가 뭔가? 미국에선 매일 신용카드를 만들라는 안내장이 열 통 가량 날아온다. 그 신용에 대해 연 40%가량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그래도 미국엔 그런 제안이라도 있다. 카드를 만들어 지갑을 불룩하게 채우고 다닌다. 그러면 당신은 기분이 좋아진다. 여기도 그런 식이다. 사람들이 빚을 지도록 도와주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융자를 갚는 한, 그 사람들이 돈을 실제 어디에 쓰는지 신경을 써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 인용에 드러나는 모순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 같다. 이 글의 골자는 사람들이 빚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빚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힘을 부여한다. 어쨌든 그 빚이 채무자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던 것으로 드러나면, 그 사람을 체포하면 된다. 부채와 권력, 죄와 숙죄가 거의 구분되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 자유가 노예의 신세이고, 노예의 신세가 자유이다. 엘리어차는 카이로에 머무는 동안 NGO 훈련 프로그램을 마친 젊은이들이 창업 융자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 모두가 그 프로그램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훈련을 받은 동료 학생들 대부분도 그 시스템을 자신의 금고처럼 여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오랫동안 신뢰관계에 바탕을 두었던 경제생활의 모든 측면이 신용 관료주의의 침투로 인해 오염되고 있다.
그러고 10년의 세월이 더 지나는 동안에 그 프로젝트는 처음 시작한 남아시아에서조차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와 거의 구분되지 않기 시작했다. 온갖 부류의 파렴치한 융자업자들이 끼어들고 또 온갖 부류의 금융 사기가 횡행하고 연체이자가 누적됨에 따라, 차용자들은 집단적으로 상환을 거부했다. 그러자 융자업자들이 폭력단원들을 보내 차용자들이 가진 것을 몽땅 빼앗기 시작했다. 그 결과 결코 탈출하지 못할 덫에 갇힌 가난한 농민들 사이에 자살이 유행처럼 일어났다.
1945년부터 1975년까지의 그 사이클과 똑같이, 새로운 사이클도 또 다른 ‘포용의 위기’로 정점을 찍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미니 법인’으로 바꿔놓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말하자면 모든 가족이 주택을 소유할 수 있도록 “신용을 민주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임금노동자들에게 조합과 연금, 건강보험혜택을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과 똑같다.
자본주의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종국적으로 자본주의는 계급과 배제의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이 한계점에 닿으면, 여러 징후들이 다시 나타난다. 1970년대에 나타났듯이 말이다. 식량폭동, 석유파동, 금융위기, 온갖 종류의 종말론, 현재의 생활방식이 생태학적으로 지속 불가능하다는 자각 등이 그런 징후들이다.
서브프라임 붕괴 후, 미국 정부는 무(無)에서 진정으로 돈을 창출할 수 있는 존재가 누구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다시 결정을 내려야했다. 금융가들인가 아니면 보통 시민들인가. 결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금융가들이 “납세자들의 돈”으로 구제를 받았다. 이는 기본적으로 금융가들의 상상의 돈이 마치 진짜 돈처럼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시민들은 의회가 1년 전에 채무자에게 더 가혹하게 만든 파산법에 따라 법원에 운명을 맡기는 신세가 되었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중대한 결정들이 연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중대한 대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653-667)
[출처] 부채: 그 첫 5,000년
Debt: The First 5,000 Years(2011)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2011
(부채, 첫 5,000년의 역사, 2021년 재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