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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행
정 명 수
한 발을 딛자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시간마저 삼키는 듯 했다. 바람도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거대한 괴물이 입을 벌리고 먹이가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한발 한발 차갑고 으스스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횃불을 비추니 바닥이 온통 물이다. 불빛이 닿는 곳 까지 물이 가득했다. 누군가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횃불이 바닥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세상이 사라졌다. 죽음의 공포가 휘몰아쳤다. 잡고 있던 손이 허공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 밑으로 꺼졌다. 그도 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힘을 주었다. 잡아 당겨 보려 하였으나 알 수 없는 힘이 우리를 분리시켜 나갔다. 나를 잡고 있던 손도 차가워졌다. 그도 한계와 다가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손이 미끄러져 나갔다. 그 순간 빛이 들어왔다. 내 손을 잡고 있던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희수였다. 아니 스물 중반에 죽은 사촌 동생 같기도 했다. 누구인지 기억해내기 전에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더욱 강렬한 빛이 얼굴을 덮쳤다.
고속버스가 쿨렁거리면 급정거 했다. 벌어진 커튼 사이로 가을 햇살이 들어왔다. 대현은 쏠린 몸을 일으키며 잠이 덜 깬 듯 낯선 풍경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얼룩진 안경 밑으로 손바닥을 밀어 넣어 얼굴을 비볐다. 가칠한 수염들이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세포들을 깨웠다. 내 손을 놓고 사라진 얼굴이 희수인지 죽은 사촌 동생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좀 넘어서 순천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밤새 마신 술 때문에 속이 쓰려왔다. 대현은 순천행 버스를 타자마자 후회했다. 마무리 져야할 회사 일도 있었고, 급한 집안 행사도 참여해야 했다.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는 매 시간마다 있었다. 그렇다고 곧장 서울행 버스를 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터미널을 빠져 나오니 손님을 태우려는 택시들이 길게 줄지어 서있다. 대현을 기다리던 택시 기사 눈빛을 피해 승강장을 스쳐 지나갔다. 중식당 안은 꽤 복작거렸다. 탈색된 노란색 머리를 한 배달원은 배식구에 거의 매달리다 시피 주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식이 나오는 사이 단무지와 양파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성의 없이 던져진 그릇 안에는 단무지들이 위태롭게 쏠려 있었다. 대현은 젓가락으로 단무지를 집어 접시 중앙에 놓았다. 언제부터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야 안심이 됐다. 제 자리에 벗어난 것은 불안했다. 끝이 말라 있는 윤기 없는 양파를 춘장을 찍어 씹었다. 알싸한 매운맛을 따라 어제 술 자리에 있었던 기억들이 잘린 필름처럼 듬성듬성 입안을 감돌았다.
대현은 보험조사관이다. 어제 5억 대 보험사기 사건을 해결하고 회식을 했다. 모처럼 과한 칭찬들과 격려가 좀 들뜨게 만들었다. 술에 취해 그 동안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과거들을 떠벌렸던 것 같다. 잘린 필름들처럼 기억들이 듬성듬성 이어졌다. 부장은 자신이 순천고 출신이라고 하였다.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돈 자랑 하지 말고 벌교에 가서 주먹자랑 하지 말라는 남도 사람들 말이 있다고 하였다. 인물을 많이 배출한 순천고 출신임을 은근히 자랑했다. 술에 취한 대현도 순천고 후배가 있다고 말했던 것 같다.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대현이 알고 있는 순천고 출신의 후배는 희수 밖에 없다. 순천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희수 소식을 다시 들은 것은 이년 전이었다.
“여보세요”
“저 기억하시나요? 희수 누나 희연이에요”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잠겨 있었지만 금방 알 아 낼 수 있었다.
“아..... 네..... 기억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희수가.... 희수가 죽었어요”
희연이 흐느꼈다.
대현은 왜 죽었는지 묻지 않았다.
희수는 스스로 목을 맸다고 했다. 자신에게 점점 망상 증상이 심해지자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았다.
“대현씨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전화드렸어요”
희연의 전화를 받고 대현은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마지막 희수의 눈빛이 떠올랐다.
“선화원으로 가주세요”
대현은 택시 뒷좌석에 파묻히듯 쓰러졌다. 순천 시내를 빠져 나오자 온통 세상은 황금빛 물결이 넘쳐흘렀다. 창문을 내렸다. 바람 소리와 함께 산뜻한 가을 햇살이 얼굴을 휘감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얼굴 위로 가로수 그림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택시는 낙엽이 져 앙상한 가로수 사이를 달려갔다. 택시기사는 십 여분을 달려오도록 아무런 말 없는 대현에게 방지턱 때문에 속도가 줄어든 틈을 이용해 말을 걸어왔다.
“엄니 만나러 가는 갑소”
“...........”
“아따 볕 좋을 때 떠나셨소 그것도 복이제”
대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택시기사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았다. 택시는 이차선 도로를 한 참 달리다 선암마을 어귀에서 오른쪽 방죽 길을 따라 한참 올라갔다. 선화원이라는 한글이 음각되어 있는 바위를 돌아가자 야트막한 야산 중턱을 깎은 자리에 대리석으로 만든 이층 건물이 나타났다. 참배객은 물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복도 끝 사무실에는 앳된 여직원 한 명만 졸고 있었다. 어렵지 않게 희수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 희수는 2층 구석에 있었다. 작은 유리문 안에 희수가 웃고 있었다.
대현이 희수를 처음 만난 것은 군사정권이 끝나가 던 해였다. 대현이 백골단 의무 복무 기간을 마치고 파출소로 전출한 지 얼마지 나지 않은 때였다. 대현이 몇 년 앞서 경찰관이 되었지만 어찌 보면 그들은 둘 다 얼치기 초임 경찰관들이었다.
파출소에 적응이 끝 난지 얼마 되지 않아 희수가 전입을 왔다. 희수는 대현보다 두 살 어렸고 마르고 키가 컷다. 그는 고시 공부를 하였으나 매번 떨어졌다. 점점 폐인이 되가던 희수를 구출한 것은 희연이었다. 희연이 아직 미련이 남아 있던 부모를 설득해 신림동 고시촌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희수는 처음부터 적응을 잘 한 것은 아니었다. 법 공부를 했다고 하지만 파출소 업무는 이론이 아니었다. 이론과 현실은 달랐다. 희수는 팀원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고, 업무도 서툴렀다. 희수가 대현을 의지하게 된 것은 우연히 패싸움 사건을 처리하고 난 뒤 부터였다. 희수는 대현의 도움으로 빠르게 적응했다. 몇 개월 만에 ‘독일경찰’라는 별명을 얻었다. 대현의 경험과 희수의 지식이 잘 섞여 투캅스가 되어갔다. 의형제 같은 그들을 동료들도 부러워했다. 하지만 대현이 경찰서 강력팀으로 전출하면서 점점 멀어졌다.
대현이 강력팀으로 전출되던 다음 해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이 되자 경찰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서울청 개대가리들(감찰 은어)이 여기 저기 냄새 맡고 다니니 다들 조심해라 어제는 에이스 당구장에 나타났다고 하더라”
“소나기는 피해 가라고, 아지트 당구장은 당분간 출입금지다. 알았냐!”
박 팀장이 새로 맞춘 가발을 이리저리 만지며 아침 회의를 마쳐 갈 때 경비전화가 울렸다.
자살 신고가 있어 현장을 나갔는데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 의심된다는 형사당직팀 최 형사 전화였다.
11월 초였지만 갑자기 내려간 날씨는 한 겨울 보다 더 추웠다. 여관 여주인은 똥 마려운 강아지 모양 안절부절 못했다. 여관 주인은 현장을 뒤따라 올라가던 대현에게 손목을 슬쩍 건드리며 곁 눈짓을 했다. 대현을 불러 세운 후 비밀을 털어 놓듯 귓속말을 했다.
“자살이 아닌 것 같아”
여관 주인은 자신이 마치 형사인 것처럼 의심되는 부분을 떠벌렸다.
“아무래도 김 순경이 범인 같아!”
“김 순경? 어떤 김 순경?” 대현은 자꾸 떠오르는 희수 얼굴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다그쳐 물었다.
“거 있자녀 구동 파출소... 김 뭐시기 아따! 거시기 키 크고 마른 김 순경 있잖여”
대현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희수는 사건 옆방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피해자와 마지막까지 있었던 것도 자살 신고자도 희수였다. 희수는 체념한 눈빛으로 대현을 보았다.
“형.... 나 아니야 내가 그런게 아니야”
작은 목소리였지만 또렷하게 범행을 부인했다. 하지만 대현은 그런 희수에게서 수많은 범인들에게 보았던 공포가 잠식한 눈빛을 보았다.
죽은 피해자가 누워 있던 201호는 정오가 되었지만 어두컴컴했다. 자주색 벨벳 커튼과 황금색과 붉은색이 뒤엉킨 커다란 장미 무늬 벽지 때문에 더욱 우중충했다. 과학수사반에서 감식도 하지 않았지만 현장은 이미 오염이 된 상태였다. 범인을 검거한 것으로 생각한 형사들에게 증거는 중요하지 않았다.
미숙이 희수를 처음 만난 것은 목욕탕 앞에서였다. 무단횡단을 하다 걸린 미숙은 덜 마른 머리카락을 흔들며 봐달라고 애교를 부렸다. 둘이 실랑이를 하고 있는 사이 뒤따라오던 영미가 끼어들었다.
“어머 김순경님 한 번 봐줘 이런 것 가지고 그래.... 빡빡하기는...”
희수가 미쳐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영미는 미숙을 데리고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 나면 요 앞 궁전으로 와요 한 번 쏠게요”
미숙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미숙은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가출했다. 그녀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꾐에 빠져 미아리 텍사스 집장촌에 팔려갔다. 그곳에서 3년은 지옥과 같았다. 포주에게 조금씩 빌린 돈은 노예 문서가 되었다. 벗어날 틈이 없었다. 집장촌 옆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민원이 발생했다. 경찰에서는 고사 작전을 펼쳤다. 매일 집장촌 입구에서 출입자를 단속하자 성 매수자들이 발길을 끊었다. 돈 줄이 막힌 포주들은 장소를 파주나 수원 등지로 옮겼다. 그 틈을 이용해 그곳에서 만난 영미 언니를 따라 신림동까지 오게 되었다. 다른 직업을 가질 수 기회가 없었다. 지식도 기술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모아 둔 돈도 없었다. 미영 언니를 따라온 방석집(술도 팔고 성매매도 이루어졌던 변태 술집의 은어)은 술만 많이 팔아주면 몸을 팔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미숙은 아직 피지도 않은 나이였지만 몸과 마음은 상처로 가득했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웃음이 나올 시절에 인생의 쓴맛을 맛보았다.
희수는 궁전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었다. 미숙도 무뚝뚝하고 까칠한 희수가 좋았다. 무엇보다 경찰관이라 듬직했다. 희수는 미숙의 기둥서방이 되었다. 희망이 사라진 미숙에게 희수는 마지막 탈출구였다. 둘은 얼마 되지 않아 결혼 약속까지 하였다. 미숙의 과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미숙과의 교제를 알렸지만 과거를 모두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혼 승낙을 받아 내기 전 숨기고 싶었던 미숙의 과거가 알려졌다. 부모님은 물론 항상 희수 편이던 희연도 반대하고 나섰다. 희수와 미숙은 다투기 시작했다. 단단한 현실을 견디기에 그들의 사랑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새벽 두시 경 미숙은 술에 약간 취한 상태로 파출소로 희수를 찾아왔다. 화가 난 미숙은 진상 손님 때문이라고 했지만 희수는 부모님을 설득하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을 알았다. 희수는 아침까지 도보 근무였다. 순찰을 돌고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희수는 미숙을 데리고 황금장 여관을 찾았다.
“아줌마 나 여섯시에 깨워줘요! 까먹지 말고”
김 순경 졸린 눈을 겨우 붙잡고 있던 여관 주인에게 재차 다짐을 받았다. 방문을 닫자마자 희수는 나방이 불빛을 향해 달려들 듯 미숙의 품을 파고 들었다. 조금 전까지 화난 표정이던 미숙도 희수의 거친 숨에 녹아 들었다. 희수는 심장 박동 수가 잦아 들 때 쯤 다시 미숙을 더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숙이 돌아 누우며 감정 없는 말투로 말했다.
“피곤해”
“왜 그래 한 번 더 하자”
“안 한다고 피곤하다고 했잖아! 오빠에게 내 생각이나 기분은 아무것도 아니야?”
사정하는 희수를 향해 미숙은 매몰차게 말했다.
“너 결혼 허락 때문에 그러는 것 같은데 그건 좀 기다리라고 했잖아 내가 어떻게 해보겠다고”
희수도 목소리를 높여가며 화를 냈다. 싸움은 어딘 선가 항의 표시로 벽을 세게 두드려 끝이 났다. 일곱 시가 돼서야 여관 주인이 희수를 깨웠다.
“김순경 미안해 내가 깜빡 잊고 있다가... 좀 늦었어.”
“여자는 깨우지 마세요 제가 근무 끝나고 와서 깨울게요.”
희수는 깜빡 깜빡하는 여관 주인에게 다짐 시키듯 말하고 서둘러 나왔다.
오전 조회를 마친 희수는 미숙을 깨우러 갔다. 방문이 열려 있었다. 흐트러진 침대보 옆으로 미숙의 검은 머리카락이 비쳐 나와 있었다.
“일어나 열시 넘었어!”
희수는 미숙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순간 온기를 느낄 수 없는 서늘함에 희수는 온 몸에 피부가 솟아올랐다. 미숙의 굳은 손가락은 펴지지 않았다.
미숙은 목이 졸려 죽었다. 목에 손으로 누르면서 생긴 멍과 손톱자국이 여러 곳 있었고, 목이 졸렸을 때 나타나는 일혈점(눈꺼풀 안쪽 나타나는 작은 반점) 도 눈거풀 안쪽에 있었다. 새벽에 희수와 미숙이 다투는 소리를 여관주인과 2층 투숙객이 들었다고 말했다. 희수가 미숙과 다투고 화가 나 우발적으로 목 졸라 죽인 것으로 의심됐다. 미숙의 질에서 희수의 정액만 검출됐다. 모든 증거들이 희수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희수는 완강하게 부인했다. 희수가 범인이 아닐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아주 조금 있었다. 여관 방 시트에 희수와 미숙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음모(陰毛)와 정액이 발견 되었고, 시트에 희수의 구둣발이 아닌 다른 구둣발 자국도 있었다. 그렇지만 여관 청소 상태가 깨끗하지 않아 이런 증거는 무시되었다. 구둣발 자국도 과학수사팀에 나오기 전에 방 안에 많은 사람들이 드나 들면서 생긴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결정적으로 창문이 열려 있었다. 언제부터 열려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방 안 온도는 미숙의 사망 추정 시간에 중요한 변수였다. 하지만 모든 정황을 뒤집기에는 부족했다. 수사팀 분위기는 희수가 범인이었다.
박 팀장과 형사과장은 희수의 자백이 필요했다. 자백만 있으면 사건이 깨끗하게 해결되었다. 경찰청장의 특별 지시도 있었다. 여당 대통령 후보 측에 사건 내용이 흘러들어 간 모양이었다. 작은 여론에도 신경이 곤두선 유력 후보 측에서 사건을 빨리 마무리 하라는 압력이 들어갔다. 경찰청장 전화를 받은 경찰서장은 형사과장을 비롯한 강력팀 전원을 모아 놓고 신속한 해결을 강조했다. 대현에게 희수의 자백을 받아 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형사들이 급하게 되었다. 그들은 고문이라도 해서 자백을 받아 낼 것처럼 같았다. 다시 대현을 본 희수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이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쏟아냈다.
“형 진짜 나 아니야 형은 나 믿지”
희수는 그렁거리는 눈망울로 대현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대현도 희수를 믿고 싶었다. 그 동안 알고 지냈던 희수는 마음 여린 경찰관이었다. 하지만 모든 증거는 희수가 범인이었다. 의형제 같았던 희수는 자신의 범죄를 감추고 싶어 하는 범죄자가 되어 있었다. 더 이상 그들은 투캅스가 아니었다.
“희수야 너 일곱 시에 나올 때 미숙이 자고 있었다고 그랬지 그런데 미숙이 사망 추정 시간이 몇 신줄 알아 다섯 시 반이야 다섯 시 반”
과학수사팀에서 미숙의 직장 온도를 확인한 결과 사망 추정 시간이 다섯 시 반경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그 시간에는 희수와 미숙이 같이 있었던 시간이었다. 부검 결과에도 미숙의 위에서 소화가 덜 된 과일 조각이 나왔다. 사망 전에 스트레스가 발생하면 소화가 좀 더디게 진행됐다. 미숙이 희수를 만나기 전에 먹은 과일이 소화가 되기 전에 사망한 것이었다.
“아니에요 내가 나갈 때는 미숙은 자고 있었어요 진짜에요”
희수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럼 왜 사귄지 일 년이 넘었는데 얼마되지 않았다고 거짓말했어?”
“그리고 자살한 것 같다고 너가 신고했잖아 왜 그랬냐고”
“그건 무서워서 그랬어요 내가 범인으로 몰릴까봐”
대현은 희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미숙이 코에 휴지를 넣었어?”
순간 희수는 온 몸을 떨기 시작했다. 희수는 넋이 나간 것처럼 표정 없이 대현을 바라보았다. 대현은 좀 더 다그치면 자백을 받아 낼 것 같았다.
“너가 죽이지 않았다고 치자 그런데 왜 죽은 사람 코에 휴지를 넣어 임마”
대현의 목소리가 커졌다.
“으흑 으흑 으흑”
희수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너 계속 이렇게 버티면 살인죄로 갈거야 그럼 최소 15년 아니 무기징역이야 그러니 좋게 좋게 마무리하자 너가 자백하면 상해치사로 할 거야”
대현은 협박하듯 자백을 강요했다. 희수는 대현의 설득에 흔들렸고 결국 자백했다. 희수의 자백은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믿음도 사라지게 했다. 그것이 강요에 의한 자백이라도 대현은 범인이 희수라고 확신을 갖게 했다.
사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구속영장이 떨어지고 현장검증을 마치고 희수는 검찰청으로 넘겨졌다. 대현은 일 계급 특진했다. 희수 누나 희연이 몇 번 찾아와 법정에서 진술을 해달라고 했으나 대현은 거절했다. 희연은 자기 집을 팔아 희수 바라지를 했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희수의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다시 시작됐다. 사건이 송치되고 난 일 년 뒤 강도범이 잡혔다. 강도범은 황금장 살인사건 진범이 자신이라고 자백했다. 주운 열쇠로 돈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잠에서 깬 미숙이 소리를 질러 엉겁결에 목 졸라 죽였다고 했다. 그 증거로 죽은 미숙의 핸드백에서 훔친 자기앞 수표를 제시했다. 수사팀 전원은 감찰 조사를 받고 수사 부실을 이유로 모두 징계를 받았다. 그렇게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그러던 중 대현은 뇌물 수수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서 파면되었다.
희수는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된 후 경찰에 다시 복직했다. 하지만 대현은 물론 수사팀 어느누구도 희수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희수는 구속되면서부터 조현 증상이 나타났다. 복직 후에도 환청과 망상에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희수는 정신병원을 입원하기 전 날 경찰 넥타이로 목을 매 자살했다.
“미안하다 희수야”
대현의 어깨가 흔들렸다. 가을 햇살이 길게 드러 누우며 희수의 납골함까지 비췄다. 대현은 희수에게 사과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자기에게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자책했다.
조사실에서 본 희수의 마지막 눈에는 배신과 간절함, 불안이 뒤엉켜 있었다. 대현은 아직도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대현은 희수를 믿지 못했다. 적어도 희수에게 자백을 강요하지 말았어야했다. 사과를 하고 싶어도 이제는 사과를 받아 줄 희수가 없었다.
선화원 밖은 향 냄새 대신 옅은 국화향이 가득했다. 선화원에 들어설 때부터 명치끝이 저려오더니 아직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대현은 휴대폰을 꺼내 희연의 전화번호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생각나지 않았지만 늦으면 더 후회할 것 같았다. 대현의 등 뒤로 석양이 더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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