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이 뿌리내리는 곳
1. 경원선 위에 단풍잎 한 장
by문두Oct 30. 2023
대륙으로 뻗어나갈 철길의 길목, 변방 동두천은 7할이 산인 분지이다. 예로부터 산골마다 내려오는 맑은 물이 많아 가뭄을 타지 않는다 하여 옛 지명이 이담(伊淡)이다. 특히 우리 동네 앞산 소요산은 규모가 작지만 계곡의 물이 풍성하고 오목조목 산천이 수려해 경기의 소금강이라 불렸다. 가끔 볼 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 돌아올 때면 동두천의 품이 더 편안하고 정답게 느껴진다. 도봉산까지만 해도 산등성이에 힘이 들어가 있는데 동두천의 산등성이는 부드러운 것이 푸근하기 그지없다.
우리 지역은 6.25 동란 이후 미군부대가 들어서며 대대로 살아오던 아름다운 터전을 내어주고 반쪽짜리가 된 아픔이 있다. 미국이라는 큰 나라를 도시가 품고 살았기에 누렸던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인 혜택도 있었지만, 아프고 어두운 그늘도 많았다. 이제 하나 둘 부대가 빠져나가며 돌려받은 땅에 대학교가 들어서기도 했다.
나는 소요산 맞은편 마차산 아래 살고 있다. 밖에 나가려면 날마다 북으로 흘러가는 신천을 지나 철길 건널목을 건너야 한다. 이제 이 건널목도 새로운 교각철도가 건설 중이어서 곧 추억 속으로 사라질 예정이다. 물이 끊임없이 흐르거나 기차가 시간 맞추어 다니는 것은 해가 뜨고 지는 일과 같다.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여서 젖먹이 아이의 귀에 들리는 엄마의 심장 뛰는 소리처럼 안도감을 준다.
아귀다툼을 해야 하는 생존의 현장에 나서기 전 몸과 마음을 정비하는 곳은 소요산 산책길이다. 나는 마당을 쓸 듯 산에 간다. 소요산역에서 5분 이내에 단풍나무 길로 들어서고, 곧 계곡물을 만날 수 있다. 계곡 따라 잘 포장된 길을 30분 정도 걸으면 원효폭포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 10분 정도를 더 가면 자재암이다. 속리교(俗離橋)를 지나 108 계단을 오르면 관음봉이 눈에 들어오는 원효대가 있다. 거기서 세심교(洗心橋)를 지나 유심정토(唯心淨土)가 새겨진 바위가 있는 계단 길을 오르면 비로소 자재암이다.
이 길에서 만나는 단풍나무, 벚나무, 버드나무, 밤나무, 굴참나무, 느티나무, 귀룽나무, 칠엽수, 야광나무, 올괴불나무……, 소나무. 그중에 계곡에 서 있는 귀룽나무가 마음에 들어온다. 봄이면 소요산에서 제일 먼저 서둘러 새잎을 내놓는데, 그 잎이 참 곱다. 축축 늘어진 가지마다 연초록빛 잎들이 나비처럼 붙어있어 발을 쳐놓은 것 같다. 곧 순식간에 잎이 무성해지고 하얀 꽃이 쌀밥처럼 푸짐하게 피어나 뭉게구름 같다. 잎을 빨리 낸 만큼인지, 꽃을 너무 많이 피워 기운이 소진되어서인지 잎이 서둘러 빨리 진다. 아직 다른 나무들의 잎이 푸르러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 찬란했던 빛은 어디로 가는지 끝날 때는 눈여겨보지 않게 된다.
이렇게 품이 활짝 열려있는 소요산은 전철이 들어오면서 문턱이 더 낮아져 서울 어르신들의 효자산이 되었다. 날마다 공짜 전철을 타고 물통과 도시락이 든 배낭을 멘 어르신들이 한가득 몰려온다. 여기는 돈을 쓰러 오는 유원지가 아니라 물과 공기가 좋아서 운동 삼아 심심풀이로 찾아오는 동네 뒷산이 되었다. 봄이면 진달래, 벚꽃에 여름이면 시원한 계곡물에, 가을이면 고운 단풍에, 겨울이면 눈이 와도 걸을 수 있는 경치 좋은 산책로에 이끌려온다. 평일에는 한가하게 자연을 즐길 수 있고 주말에는 다양한 문화행사까지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전셋값으로 집을 사고도 생활비가 남는 동두천으로 이사와 자리 잡는 노인들이 많다.
서울 어르신들이 위안받으러 오는 이 길은 반대로 우리 아이들이 꿈을 찾아 떠나는 길이기도 하다. 손금 같은 철로를 따라 어릴 때는 어린이 대공원의 동물원, 놀이동산, 아쿠아리움에 간다. 좀 커서는 일탈을 꿈꾸며 여러 가지 공연, 카페, 한강에 있는 유원지를 쫓아다니기도 한다. 성인이 되면 대학교, 공무원시험대비 학원 등으로 공부하러 가는 아이들이 많다. 우리 아들처럼 특성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서울에서 월세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한다. 아이들은 돈을 벌려고 갔는데 쓸 것이 많아져 더 가난해진다. 그러다 금방 배가 고프다고, 몸과 마음이 아프다며 집에 돌아오고 싶어 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조용하고 한가한 이곳이 그립다고 한다. ‘내 몸과 마음이 깃들어 있는 이곳은 아이들의 고향인 것이다.’ 다행히 고향에 돌아와 정착할 수 있는 아이들은 이어받을 가업이 있거나 실력과 연줄을 동원해 작은 회사라도 들어간 아이들이다. 고향에 돌아올 수 없는 우리 아이들은 성공을 꿈꾸며 더 먼 곳으로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연어가 꿈을 따라 찾아갔던 바다에서 강물을 거슬러 다시 올라오듯 우리 아이들에게도 세파에 부대끼다 언제든 돌아올 계곡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삶이 뿌리내리는 곳, 아이들의 고향인 동두천이 산이 보물인 자연환경을 잘 살려 발전하길 바란다. 한 자리에 공장, 축사, 주택을 함께 세우거나, 깊은 산골일수록 땅값이 싸다고 공장, 축사, 고물상이 들어서는 어지러운 개발이 멈추었으면 한다. 산뿐만 아니라 풍성하고 맑은 물도 지켜지면 한다. 신천이 옛날처럼 계곡마다에서 흘러드는 맑은 물이 그대로 흘러 더 많은 물고기와 새들이 돌아오면 좋겠다.
돌돌 도르르 돌돌 흐르는 소요산 계곡물소리를 벤치에 앉아 듣는다. 이 물은 어디에서 흘러와 어디로 가는가? 나도 저 물처럼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나와 우리 아이들의 꿈도 저렇게 잘 흘러갔으면 좋겠다. 남북분단으로 반쪽이 된 이 도시가 남북교류협력으로 대륙으로 나가는 발판이 되어 온전한 하나로 재생되길 바란다. 동두천의 경제가 살아나 우리 식구가 이곳에서 함께 일하고 같이 살 수 있길 꿈꾼다.
갈 곳이 있고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명확한 행복인가? 오늘도 소요산이 내 앞에 있고 그곳으로 가는 길이 있어서 나는 이 길을 나선다. 소요산의 계곡물도 신천으로 한탄강으로 임진강으로 서해로 가는 명확한 길이 있어서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는 것이다. 머지않아 우리 앞에 대륙으로 나갈 수 있는 철길도 그렇게 흘러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