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생태 해설사 수료증과정
(제 15 강 강의 자료)
제목: 애월읍 유수암리 마을 길 탐방
일시: 2019년 11월 13일 (수요일)
강사: 부두홍 (010-3696-0629)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제주지역대학 웰빙 아카데미
주제: 중산간 마을 유수암리의 오방석을 찾아서...
Ⅰ. 탐방지 소개
1. 유수암리 마을소개
: 유수암리는 제주시에서 남서쪽으로 18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 200∼250m 높이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로서 640여 세대에 1,5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마을로 유수암, 거문덕이, 유수암상동(개척단지)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고성리⋅소길리⋅장전리와 이웃하고 있으며, 큰노꼬메오름을 비롯한 여러개의 오름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올록볼록한 오름들과 맑게 샘솟는 유수암물, 무환자나무 및 팽나무 군락지와 어우러져 천혜의 자연환경과 비경을 자랑하는 마을이다. 특히 유수암천은 오랜 세월동안 주민들의 식수원이자 설촌의 역사를 품은 곳이며,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무환자나무 및 팽나무군락지가 유명하다.
2. 유수암리 마을 약사
: 유수암의 설촌은 항몽 삼별초군이 항파두성에 웅거할 때 함께 따라 온 어느 한 고승이 지금의 유수암 절동산 아래 맑은 샘을 발견하고 그 언덕 아래 조그만 암자를 지어 태암감당이라 이름하여 불시를 시작한 것이 처음으로 이곳에 인적이 닿은 시초이다. 수년 후에 항파두성이 함몰할 때 김통정 장군의 처 이화선의 모가 수하를 데리고 유수암천이 흐르는 이곳으로 피신하여 양지 바른 곳에 토실을 짓고 남은 여생을 살다가 명을 마쳤으므로 속칭 종신당이라 전해오며, 이때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국영목장인 10개소의 목마장 중에서 5소장에 속한 유수암경의 금물덕악(지금의 금덕봉)아래에 목동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곳이 거문덕이였으며, 유수암 본동 보다 약 100년 가까이 먼저 촌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수암은 절산 아래에 생수가 용출하여 춘하추동 끊이지 않고 물이 흐르는 언덕이란 연유로 유수암이란 지명이 생기어 인적이 닿을 때부터 불려졌으며, 조선 개국 초기에 마을이 형성됨에 따라 마을명으로 사용하여 구한말까지 내려오다가 일제가 침략하여 민족의 정기를 꺾고 억압·착취하는 식민지 정책에 따라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리를 구로 개정하고 유수암 본동을 금덕리로, 유수암 1구와 금덕본동(거문덕이)을 2구로 하여 이장을 구장으로 변경 호칭하였으며 이로서 고유한 유수암이란 명칭은 폐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1995년 광복5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려는 정부의 뒷받침과 지방자치의 실현으로 '옛 지명 찾기 운동'이 전개됐다. 유수암 마을에서는 강충희 개발위원의 진언과 발의에 의하여 마을 주민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결실을 거두어 정신문화의 꽃을 피워 조상의 얼이 담긴 유수암이란 고유한 옛 이름을 다시 찾아 1996년 1월 1일부터 마을이름을 유수암으로 다시 쓰게 되어 81년 만에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획기적이고 실질적인 광복을 맞이하였다.
3. 금덕봉과 금덕리(今德峰과 今德里)
: 옛날의 속칭은 거문덕 오름이다. 거문이란 말은 풍수지리학에 나오는 '원방권국거문(袁方觀局巨文)'이란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수암 산세의 심장부인 큰동산에서 바라보면 원방이 된다. 고려조 후기에는 거문이 변형되어 가문덕악이라 했으며 조선초기에는 거문이나 가문이나 모두 같다는 의미로 흑덕악이라 불리웠고 중기후에는 금물덕악으로 불렸으며 구한말 후에는 금덕봉으로 불려왔다고 한다. 금물이란 말은 괸물오름에서 연유한 것으로 이두문자로 지도상에 표기할 때 이에 관한 글자가 없기 때문에 가장 근접한 발음으로 금물이라 표기한 것이다. 덕이란 글자는 옛날에 여자들의 이름으로 많이 씌어졌는데 그 예로 산방덕이, 김천덕이, 김만덕이 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즉 괸물오름은 베틀기의 형국인데 젊은 여인이 베틀에 앉아 열심히 옷감을 짜는데 중이 권제를 받으러 다가오자 깜짝 놀라서 꼬리박을 내던지고 달아나 현 위치에 이르렀다 하여 괸물에서 온 여인이란 뜻으로 금물덕이란 지명이 생겼다. 지금도 괸물오름에 가보면 베틀기 모양이며 꼬리 박 모양의 지형이 있다. 따라서 이 오름 아랫마을도 지명 따라 거문덕리, 가문덕리, 흑덕리, 금물덕리, 금덕리로 변경되면서 불려졌다.
Ⅱ. 탐방지의 볼거리
1. 유수암천
: 유수암천은 설촌의 역사를 품은 곳으로 마을 이름이 유수암천에서 연유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의 설명은 유수암천에 세워진 비석 ‘유수암천명’에 나와 있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한라산서북 나래 드리운 곳에 우뚝 솟은 절마루! 그 아래 십리 허에 봉소형을 이루었고 감천이 용출함에 이름하여 유수천이라 하였다. 극심한 가뭄에도 끊이지 않으며 여름에 차갑기가 빙수와 같고 겨울에 따스함이 온천을 의심할지 내 이 맑은 물은 온 마을에 역질을 예방하고 성인병을 볼 수 없으니 예천에 비할 지로다. 4·3사건으로 동네가 초토화되어 인적이 끊이기 일 년 이 샘은 흐름을 끝이고 식수 조 바닥에 겨우 고였을 뿐이었는데 마을이 재건됨에 큰비가 내리지 않았음에도 차츰 흐르기 시작한 것을 볼 때 과연 영천이라 아니할 수 없음이로다. 고려중엽 항파두성에 삼별초군이 웅거 할 즈음 태암사 들어오며 손길 닿아 판석과 장여의 고목판으로 상하식수조, 세소조, 세탁조등으로 개수됨이 그 몇 번이런고! 일제말 연대이상의 병마를 본리에 주둔함에 상하식 수조를 확장 상조를 복개 하였더니 해방 후 장전, 소길리에 식수를 공급키 위해 개수배관시설도 하였고 지금은 집집마다 상수도시설을 하더니 더더욱 관심 밖으로 밀려난 이 영천을 잊지 않고 이응호 사장이 애향심을 발휘하여 거금을 쾌척함에 본리이 자부담과 정부의 지원으로 향민의 조언을 들어 우하문교원의 안으로 새롭게 개수 단장하여 선선히 후손들에게 물려주기에 이르러 향민일동은 깊은 감사를 표하고 이 유수암천을 영원히 애호할 것을 바라 이 단석에 명하는 바이다.』라고 씌어 있다.
※물거리못: 유수암천의 끝자락에 있는 연못으로 유수암천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여 만들어진 연못이다. 특히 이 못은 넷째통에 해당하는 연못으로 우마급수용으로 사용하였으나 도로확장으로 인하여 많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또한 유수암천에서 흘러내린 물은 네 개의 통을 걸쳐 흘렀는데, 첫째통(식수), 둘째통(음식물 씻는용), 셋째통(빨래), 넷째통(우마급수용)으로 구분하였다.
2. 오방석
1) 중(中) 솔동산석(중앙석): 마을 한가운데 있는 솔동산에 있으며 솔동산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여기에 솔대(활을 쏠 때 과녁판을 달고 버티게 하는 기둥)을 세웠었지 않았는가 생각되며 선인들은 이 바윗돌을 저울 형이라고 하였는데 옛날에 있었던 저울의 형체를 알 수 없어 이해하기 어려우며 그 옆에는 전기가설공적비와 광전로 포장 공로비가 서 있다.
2) 東(동) 선돌(立石): 이 지역의 속명을 ‘선돌선’이라고 하는데 선돌이 다음에 ‘밭(田)’ 또는 ‘왓(員)’이라고 아니하고 ‘선’을 부친 것도 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가 하는 궁금증을 갖게 한다. 한자어로는 동입석이라고 하며 완여필봉형이라고 한 것은 지금도 그러함을 충분히 느끼게 한다.
3) 西(서) 선돌: 지금은 충혼비와 순국자명단비의 대석이 되어있으나 원래는 입석되었던 것을 이씨댁의 귀복이라는 힘센 종이 분풀이로 이 돌을 쓰러뜨렸다는 전설이 있으며 선인들은 금퇴형, 즉 돈이 쌓인 형이라고 하였다. 2007년도에 원래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4) 南(남) 모남돌: 우리나라 사학자나 일본의 고고학자들이 고인돌이 아니냐고 의문을 남기기도 하는 높은 동산에 크고 작은 세 개의 왕석이 거의 접하여 있으며 선인들은 ‘코끼리’형이라고 하였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북쪽으로 고여진 돌은 혹 인공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낳게 하는데 아무튼 보존가치가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5) 北(북) 왕돌(왕석): 이 돌은 확실히 괴인돌인 것만은 틀림없으며 원래는 길 가운데 있었는데 서쪽편만 도로를 확장하는 바람에 동편은 대와 가시들이 밀생하여 길인지를 의심케 하나 좌우로 길이 있었음은 우리도 아는 바요, 크기로는 아마 100톤은 되지 않을까 한다. 선인들은 수문장형이라고 하였으나 ‘왕석(旺石)’이라는 자어를 보면 ‘일어난 돌’이라고 되어 있으며 돌이 크다는 뜻으로 왕석(王石) 또는 왕돌이라고 하는데 여기를 속명으로 왕돌맥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 후인들이 상고하여 볼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3. 무환자나무 및 팽나무군락지
: 1973년 4월 3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 6 호로 지정된 곳으로 애월읍 유수암리 1920번지인 속칭 '절동산'에는 무환자나무와 팽나무의 군락지가 있다. 이곳에는 팽나무의 고목들이 집단으로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에 무환자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무환자나무는 무환자나무과의 낙엽활엽수로 제주도 방명으로는 '도육낭' 또는 '데육낭'으로 불리워지며 열매는 염주를 만드는데 쓰여졌고 과육은 비누의 대용품으로 사용하여 예로부터 절 주변에 식재하였던 나무로서 과거에 절터였다는 절동산이라는 지역 명칭과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이고, 절이 세워진 후에 심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유수암리에 있는 무환자나무는 원래의 무환자나무가 벌채되어 잘려진 후 맹아(萌芽. 움)가 자란 것으로서 원래는 밑둥 부분의 둘레가 3m 이상되는 대목이었으나 벌채된 후 3개의 맹아가 나와서 높이 12m, 가슴높이의 둘레 1∼2m, 수관폭 8m에 달하는 큰 나무로 자라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팽나무 노거수 9그루가 집단으로 자라고 있다. 팽나무는 느릅나무과의 낙엽활엽수로서 도내 각처에 정자목이나 당목(堂木)으로서 남아있으나 특히 유수암리에는 마을 곳곳에 팽나무의 노거수가 남았다. 가장 큰 나무는 키 16m, 가슴높이의 둘레 6m가 된다. 절동산에 있는 팽나무는 높이 13m, 흉고둘레는 2∼4m이며 나무 밑에는 제주어로 '수리대'라고 하는 이대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고 팽나무에는 오래된 송악, 보리밥나무 등이 감고 올라가서 노목의 기품을 한층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쐐기풀도 많아서 사람의 왕래가 어렵다. 기념물로 지정된 팽나무 이외에도 마을 내에는 팽나무 노목이 많이 자라고 있어 마을 전체가 아늑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4. 큰동산 (절모루)
: 절모루에서 일마장하에 있는 곳이며 유수암 산세의 심장부가 되는 곳으로 큰 장사가 앉아 있는 형상이라 하여 큰동산이라 부른다. 유수암목장 속칭 상장털 아래에 있는 유수암 지맥의 원조봉으로 일망지하에 우뚝 솟아 안계가 광활양명한 요봉으로 우뚝하게 높이 솟았다 하여 절(絶)모루 또는 옛날에 절이 있었다 하여 절모루라 부른다.
5. 절동산과 종신당(終身堂)
: 마을 한복판에 우뚝 솟은 언덕으로 큰 장수가 병영을 이루고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하여 삼별초군과 함께 따라온 한 고승이 언덕 아래 암자를 지어 태암감당(泰岩龕堂)이라 했으며 후일 척화라는 스님이 사찰을 중건하여 천고사라 하였음으로 이 언덕을 절동산이라 부른다.
유수암천이 흐르는 마을 아래에 위치한 곳으로 항파두성이 함몰할 때 김통정 장군의 처 이화선의 모가 몇 사람의 수하를 데리고 이곳으로 피신하여 양지바른 곳의 토옥 속에 불빛이 꺼지면 입구를 막아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명을 마쳤다 하여 후세인들이 이곳을 종신당이라 부른다.
6. 태산사터
: 태산사(泰山寺)터는 애월읍 유수암리 속칭 ‘절동산’이라고 불리는 곳에 있으며, 이 절동산은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이 동산의 하단부에는 '유수암천'이라는 샘이 있는데 태산사는 이 유수암천을 중심으로 동·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유수암천 남쪽에는 ‘태산석'이라고 음각된 비가 있다. 또한 유수암천비의 내용에 태암사가 있었다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옛 비(앞의 비)에 음각된 ‘태산석(泰山石)'의 ‘山石'을 두 자가 아닌 한 자 ‘岩'으로 보아 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태산사 사찰에 관한 문헌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절터의 주변에 아름드리 무환자 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옛 태산사의 스님들이 염주를 만들 때 사용하려고 심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볼 때 태산의 창건연대는 상당히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7. 동문지(東門地)
: 이곳은 마을의 동녘에 있는 작은 동산으로 일명 ‘양태모루’라고 한다. 1948년 제주 4.3사건이 발발하여 그 여파가 중산간 마을에 이르게 되자. 주민들은 마을이 전소되어 잿더미가 되자 아래쪽 해안 마을로 산산이 흩어졌다. 그 후 마을은 물은 마르고 잡초도 무성하여 끝내 폐허의 땅이 되고 말았다. 1950년 다시 돌아와 마을을 재건할 때 돌성을 쌓고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을 달아 출입을 통제하고 포대를 지어 무장대의 습격에 대비하며 밤낮으로 경계 근무를 섰던 곳으로 유수암 마을의 고통과 애환이 서린 곳이다. 이에 표석을 세워 옛 고적의 광경을 후세에 알리고자 하였다.
Ⅲ. 탐방경로
남방 오방석 ‘모남돌’ → 주)우진 유수암샤시공장 → 궤네기동산 → 유수암정수장 → 겔러리 여름 → 서방 오방석 ‘서선돌’ → 북방 오방석 ‘왕돌’ → 팽나무 노거수 → 유수암천 → 태산사터 → 절산108계단 → 무환자나무 및 팽나무군락지 → 유수암 운동장‘절산’ → 중앙 오방석 ‘솔동산 중앙석’ → 동방 오방석 ‘동선돌’ → 동문교차로 → 유수암리사무소 → 퐁낭쉼팡
【길 생태 상식】제주도 중산간 마을의 풍속도
1. 사냥과 분육
: 대개 '꿩사농'과 '노루사농'을 하고, 아이들은 오리나 참새 등을 덫(태기)을 놓아 잡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눈우윗사농'(적설기 사냥)이라고 하여, 동네에서 '사농패'를 모아 꿩과 노루 사냥을 했다. 인원은 딱히 몇 명이라고 정해진 바가 없이 "오라, 사농가게"하고 누군가 눈 온 날 아침 골목을 돌며 소리치면, 바지에 대님을 치고 '윤노리막댕이' 하나씩 둘러매고 나왔는데, 개가 있는 집에서는 데리고 나왔다. 사냥은 전적으로 남자의 모임이다. 사람이 모이면 그 자리에서 패장을 정하여 그날 할 사냥 전반의 지휘권을 맡긴다. 각자 역할이 분담되면 맡은 직책, 그러니까 망보는 이는 높은 동산을 찾아 오르고, '훈누는' 몰이꾼은 꿩이나 노루가 숨었음직한 덤불이든지 머들을 들쑤셔 짐승을 '훈누고' 잡은 짐승은 운반꾼이 져 나르게 된다. 그날 사냥에서 노획한 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분배양식에 의해서 나누게 되는데, 이를 분육, 혹은 분짓이라고 한다. 분육의 원칙은 나이든 어른에게 살코기를, 나이가 어린 순으로 차츰 살과 뼈의 비율이 뼈 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그날 사냥에 동원했던 개한테는 내장을 주어 수고를 위로 해 준다. 이제도 눈이 대지를 살 풋 덮게 내려 덮이면 어쩌다 재미삼아 눈우윗 사농을 하는데 예전 같지는 않다.
2. 장담그기
: 한해살이를 마련하는 주부의 일로 가장 큰 일은 장 담그는 일과 김장하는 일일 것이다.
“동짓달 그믐에 콩 삶앙, 섣달 그믐에 장 담그민 아무탈 어신다”는 제주속담이 말해주듯이 일에는 여러 가지 금기사항이 따른다. 콩을 삶는 날부터 주부의 생기(生氣)에 맞추어 하되, 용, 뱀, 쥐, 범날은 피하고, 개, 닭, 염소, 토기, 말 날을 택하여 콩을 삶는다. 주부가 만일 생리중이면 그때도 피해야 한다. 동짓달에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어 발효시킨 후 섣달이 되면 돼지날(亥日)이나 소날(牛日)에 장을 담근다. 장을 담글 때는 메주를 잘 씻은 후 소금물에 띄우고 숯불잉겅(불이 붙은 숯)이나 익은 고추를 넣어 봉해 두었다가(즉 장독에 숯과 고추를 넣어 희게 갓 쓰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봄에 된장과 간장을 구분하여 따로 보관한다. 이를 장 거린다 하였다. 옛날 장을 맛있게 담그려면 상당한 솜씨가 있어야 했는데 장은 맛을 내는 조미료 역할을 했기에 그 집의 음식 맛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그 풍습은 있으나 꼭 동짓달이어야 하는 것은 없고 새해가 오기 전에 해일(亥日), 우일(牛日)에 장 담그는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3. 수눌음
:『수눌음』이란 제주방언 『수눌다』의 명사형으로 농촌에서 서로 차례를 바꿔가며 일하는 하나의 노동은행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기 밭에 김매는 때가 이르면 수눌어 두었다가 적기에 많은 인원을 동원해서 거뜬히 해치울 수 있다. 이렇게 수눌어 일하면 적기를 놓치지 않고 급한 일을 처리할 수 있고 한가한 시기의 노동력을 저축하였다가 쓸 수 있어 능률적이며 농촌에서의 고된 작업도 재미가 있어 즐겁게 할 수 있다.
『수눌음』을 노동력의 저축이라 볼 때 그것은 인력의 1:1의 비율만은 아니다. 노동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면 소 와 말, 여자의 일 과 남자의 일 도 수눌어 할 수 있다. 남자가 없어 밭갈이를 못하고 있을 때 소를 끌고 남자가 하루 밭을 갈아주면 여자가 이틀 김을 매어 주거나 사흘 매어 주는 것으로 서로 협조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수눌음』은 주로 여름에 김을 매는데 많이 이용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무더운 여름날 처녀, 총각들이 어울려 사데를 불러가며 밭일을 하는 것은 하나의 낭만이었으며 고된 노동을 노래로 승화시키는 선인들의 슬기라 할 수 있다.
4. 초가집에 관한 풍속과 주거환경
: 1950년대만 해도 지금과 같이 훌륭한 건축자재가 많이 없었다. 블록이나 벽돌, 철근이나 합판, 자갈이나 시멘트 등의 레미콘이나 대리석 등 외장제나 내장제가 구하기 어려웠으며 거의 생산이 되지 못하였다. 집을 지으려면 먼저 정시(지관)를 초청하고 "작(방향)"을 보아 길일에 공사를 착수하였으며 이때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노력부조를 하게 된다. 벽이나 축에 흙칠을 하려면 아낙네들이 물을 길어 와야 했고 남자들은 돌을 구해다가 맞축을 쌓았으며 목수들은 건물의 뼈대를 세우고 서리를 걸쳐 서슬을 하며 그 위에 띠(새)를 덮어 지붕을 만들고 굵은 집줄로 가로 세로 든든하게 동여 메었다. 집은 바깥채(밖거리, 외동)는 안채(안거리, 내동)보다 지붕이 높아서는 안 되며, 집이 좁아 확장할 때도 뒤쪽으로 늘리지 않는다. 또 집의 방향에 따라 동 부자, 서 가난, 남 장수, 북 단명 한다고 했다. 잠을 잘 때도 머리를 북쪽으로 하면 단명하고 남쪽으로 향하면 장수한다고 믿고 있다. 집안의 살림도구는 대부분 일정한 위치에 놓고 있다. 부엌에는 문에서 벽 쪽으로 솥 덕을 큰 차례로 앉히며 물항, 살레(찬장) 순서로 하고 솥덕 후면 공간에는 불 재 쌓는 곳과 소금 망대기가 있다. 부엌에는 작은 장팍문이 있어 장독대에 출입을 하게 된다. 마루에는 발궤가 있고 젯상[제사용상(祭祀用床)]등이 옆에 세워지게 된다. 궤방(고방)속에는 곡식을 담은 항아리들이 있고 구들방에는 벽장이 있어 궤가 한 두 개 놓여 있으며 옆으로는 침구들을 개여 놓는다. 집 위 뒷부분인 뒷 지슬에는 비가 올 때 땅이 패이는 것을 막기 위해 양하를 심었다가 봄에는 순을 이용, 떡을 삶을 때(좁쌀침떡 등) 시루에 깔기도 하고 가을에는 연한 뿌리를 캐어 반찬해 먹기도 한다.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쇠막사리(牛家) 부근에는 통시(변소)가 있어 쇠거름(소의분뇨)을 운반해다 넣는데 편리하게 하려했다.
5. 물구덕, 정낭과 돌울타리
1) 물구덕: 물구덕은 식수를 운반할 때 식수를 담는 물 허벅을 넣고 등에 짊어지고 다녔던 대나무로 만든 대바구니를 말한다. 이 물 구덕은 1972년 11월까지도 각 가정에 수도가 설치되기 전, 또는 전리에 공동수도가 설치되어있는 동안에도 각 가정까지 식수를 운반하는 데는 물허벅을 이용하였다. 그 후 1973년 후반기 각 가정에 수도시설을 갖추면서부터 물구덕과 물허벅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여 지금은 농어촌 어디를 가보아도 물구덕은 찾아보기 힘들다. 1970년대 이전까지는 이 물구덕에 물허벅을 넣고 해안가 용천수나 빗물을 저장한 저수지(못)에서 식수를 운반할 때는 반드시 사용하였다. 부드러운 새끼줄로 양어깨에 짊어지고 다니는데 편하게 만든 이 물구덕과 물허벅은 동네 아낙네들의 몫이었다.
동네에 결혼식이나 장례식등 경조사가 있을 때면 온 동네 아낙네들이 짊어진 물구덕의 행렬은 마을 안 골목을 누볐다.
육지부에서는 식수를 나를 때 물동이를 이용, 힘겹게 머리위에 올려놓고 다니고 또 가정의 물항아리에 쏟아 부울때도 머리위의 물동이를 내려놓아야 하는 불편이 따르나 제주지방의 물구덕과 물허벅은 등에 짊어지고 다니기 때문에 힘이 덜 들고 또한 항아리에 쏟아 부울 때도 짊어진 체로 어깨 넘어 거꾸러지게 해서 쏟아 붓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묘기(妙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 정낭과 돌울타리: 초가집 주위에는 돌로 울타리를 높게 쌓아 바닷바람과 해수를 막고 진입로에는 올래를 만들어 정주석 또는 정주목으로 정낭을 만들었다. 올래에 걸쳐 놓는 정낭의 수는 집마다 달랐다. 한 개를 올려놓은 집이 있는가 하면 2개나 3개를 올려놓는 집도 있었다. 제주도의 정낭(대문 대신 출입로를 가로지르는 긴 막대기)과 정주석(출입구 양쪽에 세워 정낭을 끼워놓은 돌)은 도둑, 거지, 대문이 없는 삼무의 상징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정낭을 모두 내려놓으면 집안에 사람이 있다는 표시이고 1개올려놓으면 가까운 곳에 가 있다는 표시이며 3개 모두 올려져있으면 농장(밭)이나 먼 곳에 가 있다는 표시이다. 이 얼마나 멋지고 지혜가 담긴 무언의 약속이었던가. 또 한 가지 정낭을 올려놓는 이유는 소나 말이 들어와 쌓아놓은 곡식이나 "우영밭"에 채소등을 먹어치우는 것을 막기 위한 울타리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길 생태 상식】 제주 올레의 의미
1. 대문이 없는 제주의 특성상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차단하고 독립적인 공간을 가지려는 영역성과 경계선의 기능을 한다.
2. 가름길에서 초가 마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를 줌으로써 방문객에게 즐거움과 신비감을 갖도록 한다.
3. 올레는 바람이 많은 제주풍토를 잘 활용한 선인들의 지혜로운 산물이다.
4. 올레의 구조는 길고 지루함을 전환하기도 하고, 곧바르거나 휑하게 크지도 않고, 구부러지기도 하고, 넓거나 좁아지기도 하는 곡선미를 잘 살린 주거공간이다.
5. 4.3사건 당시에는 올레를 서로 공유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길고 구불구불하게 조성함으로써 인명피해를 줄이려 하였다.
6. 제주는 화산섬이라 경작할 공간이 좁아 머들(머체) 위에다 집을 짓기도 하고, 돌을 쌓아 올레를 만들다보니 자연적으로 구불구불하게 된 곳이 많다.
7.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는 외부 인들이 출입하는데 불편을 주기도 한다.
【길 생태 상식】 제주 돌담의 유산화
1. 2013년 1월 국가중요농업유산 제2호 지정
·제1호 청산도 구들장 논
·제2호 제주 돌담밭
·제3호 구례 산수유 농업
·제4호 담양 대나무밭
·제5호 금산 인삼농업
·제6호 하동 전통 차농업
2. 2014년 4월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 (그들장 논과 돌담밭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