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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련지와 애련정 |
天圓 사상 담은 인공연못 부용지 일대 부용정·주합루 등 자연속 경관 자랑 영화당서 선비들 과거시험 치러 | 옥류천 일대 아늑한 정자들 운치 더해 초가지붕 청의정서 임금이 직접 농사체험 백성 향한 긍휼한 마음 엿볼 수 있어 |
당(唐)에서는 왕궁을 국정을 처리하는 치조(治朝; 外殿), 임금과 왕비의 사적 공간인 침전(寢殿; 內殿), 그리고 휴식공간인 정원(庭園; 後苑) 등 3구역으로 나눴는데, 조선에서도 이 제도를 따랐다. 태조의 한양천도 후 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 방석과 정도전이 죽자 왕위를 둘째 방과에게 넘기고 함흥으로 낙향하자 정종은 개경으로 천도하지만, 개경에서 제2차 왕자의 난을 맞아 왕위를 셋째 방원에게 넘긴다. 태종은 한양 재천도를 시도했지만, 신하들이 경복궁은 흉지라고 만류하자 1405년 경복궁 대신 지은 창덕궁으로 이전했다.
창덕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는데, 숙장문을 경계로 외전과 내전으로 나누고, 내전 뒤편에 창덕궁 전체의 60%나 되는 13만 5000여 평의 후원을 만들었다. 후원은 창덕궁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원(北苑) 혹은 일반인은 갈 수 없는 장소라 하여 금원(禁苑)이라고 했는데, 성종 때에는 창경궁까지 확장되었다. 창덕궁도 1623년 인조반정 때 정전인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이 소실되었다가 복구되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조선의 궁궐이자 자연경관과 잘 조화된 후원의 다양한 연못, 정자, 수목 등이 한국의 전통조경으로 평가받아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창덕궁과 후원을 자세히 그린 동궐도(東闕圖)가 있다(국보 제249호)(2014.05.07. 창덕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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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는 후원을 왕실의 은밀한 공간이라는 부정적인 어감을 갖게 하는 비원(秘苑)이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비원이라 말하기도 한다. 후원은 일반 공개로 훼손이 심각해지자 1976년 공개를 중단했다가 1979년 재공개를 했는데, 그때에도 일부는 비공개하다가 2004년 5월부터 옥류천과 관람정까지 모두 개방했지만, 관람은 매 시간마다 100~150명씩 입장시킴으로서 혼잡을 피하고, 절반은 인터넷 예약으로, 절반은 현장에서 매표한다. 관람객은 창덕궁 입장료 1인당 3000원 이외에 별도로 5000원의 입장료를 내야 하는데, 내국인이 많지만 조선궁중의 정원을 관람하려는 외국인들이 많아서 영어, 일어, 중국어 등으로 안내하는 문화해설사가 동행한다.
본래 궁궐에는 관청 이외의 건물이 많지만, 각 건물들은 구조와 크기는 물론 건물 명칭에 일정한 기준이 있어서 예를 들면, 황제와 임금, 왕비 등이 정사를 보거나 생활하는 건물을 전(殿), 왕자나 공주들이 거주하는 공간을 당(堂), 기타 왕실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은 재(齋)라고 했다. 부속건물도 일정한 기준이 있어서 전에 속하는 부속건물은 합(閤), 당의 부속건물은 각(閣), 비공식 휴식공간은 헌(軒)이라고 했고, 1층 휴식공간을 정(亭), 2층 휴식공간을 루(樓)라고 했다(2013.10.30. 경복궁 참조).
후원은 인조반정으로 즉위한 인조가 정치보다 풍류에 더 심취해서 여러 정자를 짓고, 물길을 돌려서 폭포를 만들고 바위에 옥류천이라는 친필을 새기는 등 큰 공을 들였는데, 인조의 이런 자세가 왜란 후 불과 30년 만에 다시 호란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든지 후원을 한 바퀴 돌아본다면 과연 이곳이 지엄한 왕실의 비밀스런 공간이었는지, 아니면 왕조사회에서 얼마나 백성에게 가까이 다가서려고 노력했는지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후원은 크게 부용지(芙蓉池) 일대, 애련정(愛蓮亭) 일대, 관람정(觀纜亭) 일대, 옥류천(玉流川) 일대 등 4지역으로 나뉘지만, 그 중 부용지 주변이 가장 중심이 된다. 후원 입구에는 소양문(小陽門)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후원 부용지 일대는 300평정도 사각형 인공연못 부용지 한 가운데에 둥근 인공 섬이 있고, 섬에는 노송이 있는데, 부용지의 사각형과 둥근 섬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는 주역의 천원사상(天圓思想)을 의미한다.
부용지 남쪽에는 부용정이, 북쪽에는 주합루(宙合樓)가, 동쪽에는 큼지막한 정자 영화당(暎花堂)이 있는데, 영화당은 임금이 과거시험인 전시(殿試)를 보는 등 큰 행사장으로, 그리고 숙종이 지은 택수재를 정조가 부용정으로 개칭한 정자에서는 과거급제자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보물 제1763호).
정조 원년(1766)에 지은 주합루는 정면 5칸, 옆면 4칸의 2층인데, 주합루란 우주를 한 곳에 모으는 곳이라는 뜻이다. 정조는 이곳에서 정약용 등 학자를 불러 개혁정치를 추진했는데, 정문 어수문(魚水門)은 물과 고기라는 의미로서 임금과 신하간의 불가분한 관계를 상징한다. 1층은 임금의 친필문서를 보관하는 어제각으로, 2층은 풍광을 감상하는 정자로 사용하다가 어제각을 규장각으로 고쳐서 서고로 만들고, 누마루는 열람실로 사용했다.
주합루 앞 경사지에 꽃을 심은 여러 단의 꽃계단은 창덕궁 내전인 대조전 뒤뜰의 꽃계단과 같은 형식이고, 주합루에 오르면 부용지 일대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듯 부용지 주변의 모든 건물과 정원은 하나가 된 자연 그 자체이다(보물 제1769호).
후원 제2영역인 애련정 일대는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로서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孝明世子; 익종 추존, 1809∼1830)의 생활공간으로서, 네모진 연못 애련지에는 연꽃을 심고, 그 오른쪽에 정자 애련정이, 남쪽에는 효명세자의 개인서실 기오헌(寄傲軒)이 있다.
애련정으로 가려면 약2.5m 높이의 대리석이 ∩자 모양인 불로문(不老門)을 지나야 하는데, 불로문이란 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늙지 않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애련지 안쪽에는 1823년 효명세자가 사대부 생활을 체험하기 위하여 지은 99칸 연경당(演慶堂)이 있는데, 연경당은 애련지로 흐르는 작은 개울을 건너 솟을대문인 장락문(長樂門)으로 들어간다. 장락문 안에는 동쪽 사랑채, 서쪽 안채로 통하는 두 개의 중문이 있으며, 사랑마당과 안마당은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집안에서는 사랑채와 안채건물이 서로 통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가묘(家廟)가 없고, 안채에 부엌이 없고 따로 부엌을 두는 점 등이 일반 사대부 집과 다르다. 지금 연건당은 1846년(헌종12)에 다시 지은 것이다.
후원의 제3영역은 부채꼴 모양의 특이한 관람정과 존덕정(尊德亭) 일대인데, 존덕정은 여섯 모난 정자여서 육면정(六面亭)이라고도 한다. 존덕정에는 ‘모든 하천에 달이 비치지만, 하늘에 뜬 달은 오직 하나다’며 자신이 절대군주라는 것을 개울물에 비친 밝은 달에 비유한 정조의 '萬川明月主人翁自序(만천명월주인옹자서)'란 편액이 걸려 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난 비탈길을 오르면 승재정(勝在亭)이 있는데, 승재정은 연못을 사이로 하여 관람정과 마주본다.
후원의 마지막 제4영역은 가장 깊숙한 옥류천 일대로서 계곡물이 휘돌아 떨어지는 옥류천 주변에 소요정(逍遙亭), 취한정(翠寒亭), 청의정(淸線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등 5개의 정자가 있는데, 그중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을 삼림삼정(山林三亭)이라고 한다. 특히 유일한 초가집 정자인 청의정은 바닥은 사각형이고, 천장은 팔각형, 지붕은 원형인데, 사각형은 땅을, 원형은 하늘을 상징한다. 이곳에는 임금이 직접 농사를 체험하기 위한 벼를 심고 여기서 나온 볏짚으로 청의정 지붕을 잇는 작은 논도 있는데, 지금도 농촌진흥청과 문화재청에서 벼를 심고 볏짚으로 지붕을 잇는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처럼 사대부 생활이며, 농부 체험을 했던 임금들의 마음자세가 새롭게 느껴지는 후원은 가을과 겨울철에 가보면 더 풍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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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밴드에 몰려서 그런지 카페가 한산해진 것 같아요.
일부 회원들은 카페를 없애자고도 하는데,,,,,
대화통로는 다양한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