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임오군란(1882) 답⑤
문제에 제시된 상황은 구식 군인이 선혜청을 습격하고 흥선 대원군이 재집권하였으며, 청군이 이 사건에 개입하였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1882)임을 알 수 있어요.
신식 군인인 별기군에 비해 구식 군인에 대한 대우는 열악하였어요. 그러던 중 구식 군인들은 1년도 넘게 밀린 급료 중 한달치를 선혜청에서 지급받았는데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자 불만이 폭발하여 반정부·반외세 성격의 임오군란이 일어났습니다(임오군란, 1882).
구식 군인들은 흥선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민씨 세력과 정부의 고관,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습니다. 여기에 정주의 개화 정책 추진에 따른 세금 부담 증가와 일본으로의 곡물 유출로 인한 쌀값 상승 등으로 개화 정책 등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서울의 도시 하층민까지 가담하여 군란의 규모는 확대되었습니다. 이때 명성황후는 난을 피해 멀리 장호원까지 피난하였어요. 고종은 흥선 대원군에게 사태 수습을 위임하였는데,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청의 군대가 개입하면서 재집권 1개월 만에 흥선 대원군은 청으로 비밀리에 압송되었고 난은 진압되었습니다.
청은 군란 진압 후에도 3,000명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며, 정치·군사고문으로 마젠창, 외교고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파견하여 내정과 외교 문제에 간섭하였어요. 또한, 조·청 상민수륙 무역 장정을 강요하여(1882) 청 상인들이 내륙 시장에까지 진출할 수 있는 경제적 특권을 보장받지요. 일본은 일본 공사관이 습격받고 일본인 교관이 살해당한 일을 구실로 제물포 조약을 강요하고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ㄱ - 갑신정변에 대한 설명입니다.
임오군란은 정부의 개화 정책에 대한 반발도 그 배경이었어요.
ㄴ - 갑신정변에 대한 설명입니다.
개화당 정부가 발표한 14개조의 혁신 정강에는 내각 중심의 정치 운영, 즉 입헌 군주정 수립이 나타나 있어요.
ㄷ - 청은 군란을 진압한 후 군대를 주둔시키며 고문을 파견하여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였어요.
ㄹ - 별기군에 비해 구식 군인은 처우가 열악하였는데, 이러한 차별 대우가 군란의 배경이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⑤번입니다.
유사 기출문제
24회 중급 30번 문제
30. 강화도 조약과 임오군란 사이의 모습 답⑤
강화도 조약은 1876년, 임오군란은 1882년에 있었어요.
따라서 이 시기 사이에 있었던 모습이 아닌 것을 찾으면 되겠네요.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한 이후 정부에서는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어요. 먼저 개화 정책을 총괄하는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1880) 개화파 인사들을 등용해 외교, 군사, 산업, 외국어 교육 등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어요. 또한 5군영을 무위영, 장어영 등 2영으로 개편하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습니다(1881). 그리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일본에는 수신사(1876, 1880)와 조사 시찰단(1881), 청에는 영선사(1881)를 파견하였어요.
① 정부는 1880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해 개화 정책을 총괄하였어요.
② 별기군은 1881년 창설한 신식 군대로, 일본인 교관이 훈련을 맡았어요.
③ 정부는 1881년 영선사 김윤식과 유학생,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무기 제조법과 근대식 군사 훈련법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④ 정부는 1881년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을 조사 시찰단으로 일본에 파견하였어요.
이들은 당시 국내의 개화 반대 여론을 의식해 비밀리에 파견되어 4개월여 동안 근대 시설과 근대적 법률·조세 제도
등을 살펴보고 돌아와 상세한 보고서를 올려 정부의 개화 정책에 도움을 주었어요.
⑤ 개화당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해 갑신정변(1884)을 일으켰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23회 중급 32번 문제
32.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1882) 답⑤
제시된 (가)를 보면 외국 상인이 개항장으로부터 일정 거리 안에서만 활동하도록 제약을 받고 있었네요.
(나)에는 외국 상인들도 자유롭게 대도시와 지방 장시 등에서도 상업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나타나 있어요.
따라서 외국 상인들이 개항장을 벗어나 내륙 지방에서도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계기를 찾으면 되겠네요. 이와 관련된 사실은 임오군란 후 조선이 청과 체결한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입니다.
임오군란 당시 청은 조선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병해 흥선 대원군을 청의 톈진으로 납치해가고 군란을 진압합니다. 이를 통해 청은 조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체결합니다(1882.9). 여기에는 조선에 대한청의 종주권이 명시되었고, 청 상인이 양화진과 한성에서의 점포 개설(한성 개잔)을 할 수 있도록 명시하였어요. 이에 청 상인들은 처음으로 조선에서의 내지 통상권을 허용받게 됩니다.
당시 조선은 각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최혜국 대우 조항을 포함하였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도 최혜국대우 조항에 의거에 자동적으로 내지 통상을 허용받았어요.
내지 통상권이 허용되자 개항장의 외국 상인과 내륙을 중계하는 활동을 통해 이익을 얻던 객주, 여각 등 국내 상인들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렇듯 청, 일을 비롯한 외국 상인들의 활동으로 국내 상인들과 수공업자, 가내 수공업 등이 큰 타격을 입으면서 외국 상인들에 대한 반감도 커져 상권 수호 운동을 펼치기도 합니다.
① 독립 협회는 외국인들의 경제 침탈에 맞서 이권 수호 운동을 펼쳤습니다.
② 청·일 전쟁은 조선에서의 세력 우위를 위해 일본이 일으킨 전쟁입니다.
③ 거문도 사건은 갑신정변 직후 조선이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조선에서의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입니다(거문도 사건, 1885~1887).
④ 황국 중앙 총상회는 상권을 확대해 나가는 외국 상인들을 막기 위해 시전 상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어요(1898).
⑤ 임오군란 이후 청 상인은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통해 내지 통상권을 얻었어요.
일본과 서구 열강도 최혜국 대우를 근거로 동일한 권리를 보장받아 외국 상인들의 내지 통상이 허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21회 중급 35번 문제
35. 제물포 조약의 체결 배경 답①
개항 후 일본 상인의 대량 수입으로 점차 쌀이 부족해진데다가, 때마침 1882년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쌀값이 폭등하였다. 이로 인해 서울의 하층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커져 갔다.
한편,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비하여 구식 군인들에 대한 대우는 매우 열악하였다. 심지어 민씨 일파 등 집권층의 부패로 구식 군인에게 13개월 만에 월급으로 지급한 쌀에는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다. 이에 그렇지 않아도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불만을 품었던 구식 군인들은 마침내 선혜청을 습격하며 임오군란을 일으켰다(1882.6).
구식 군인들은 흥선 대원군을 찾아가 지지를 요청했으며, 정부 고관들의 집을 부수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이 와중에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이 죽었다.
그 후 서울의 하층민들이 가세하여 세력이 더욱 커지자, 구식 군인들은 왕궁을 습격하고 민씨 일파 등 고위 관리들을 처단하였다. 군인들이 궁궐에까지 침입하자 민비는 종적을 감췄고(장호원 피신) 고종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흥선 대원군에게 정권을 맡겼다.
그러나 민씨 일파로부터 군대 파견을 요청받은 청은 일본의 무력 개입을 막기 위해 신속하게 군대를 출동시켜 군란을 진압했으며, 군란의 책임을 물어 흥선 대원군을 자국으로 납치해 갔다.
일본은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군란의 책임을 물었다. 이에 굴복한 정부는 제물포 조약(1882.7)을 체결하여 사과 사절단의 파견, 주모자 처벌, 배상금 지불, 공사관 경비를 위한 군대 주둔 등 일본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② 1889년과 1890년 일본에서는 대흉작으로 쌀 소동이 일어났다. 조선에서도 흉작으로 식량이 부족해지자 함경도, 황해도 관찰사가 조·일 통상 장정의 규정에 따라 곡물의 일본 수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내렸다.
③ 갑신정변(1884.12) 이후, 조선 정부는 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 확장에 불만을 느낀 영국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다(1885~1887).
④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에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관리를 포로로 잡고 대포와 총을 발사하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하여 주민들이 사망하였다. 이에 평양의 주민들이 관군과 합세하여 화공으로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침몰시켰다(1866.7).
⑤ 일본은 포함외교의 일환으로 운요호를 조선에 보내 무력시위를 하며 통상 수교할 것을 강요하였다(1875). 조선은 찬반의 논란 끝에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1876.1)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20회 중급 28번 문제
36. 임오군란의 결과 답⑤
문제에 제시된 내용 중 '구식 군인', '청군이 흥선 대원군 납치', '청군에 의해 난 진압' 등이 나타나 있으니, 이 사건이 임오군란(1882)의 전개 과정임을 알 수 있어요.
따라서 임오군란의 영향을 찾으면 되겠네요.
구식 군인들이 13개월이나 급여를 받지 못하다가 한달치 급료를 받았는데 그것마저 모래와 겨가 섞인 쌀을 받게 되자, 그들의 불만은 일시에 폭발하여 난을 일으켰습니다(임오군란).
불만이 폭발하여 궁궐을 습격한 구식 군인들은 흥선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일시 재집권)하는 한편, 개화 정책을 추진한 민씨 정권의 고관 집을 습격하고 일부 관리들을 죽이죠. 도시 하층민까지 가세한 군중들은 관청을 공격하고, 별기군의 일본 교관을 살해하였으며, 일본 공사관을 습격합니다. 이때 민비(훗날 명성황후로 추존)는난을 피해 멀리 장호원까지 피난을 하였어요.
난이 일어나자 민씨 정권은 청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에 청이 원군을 보내 우선 난의 주동자로 흥선 대원군을 비밀리에 청으로 납치하고 이어 난을 진압하였습니다.
청은 임오군란 진압 후에도 3,000명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며, 정치·군사고문으로 마젠창, 외교고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파견하여 내정과 외교 정책을 간섭합니다. 또한, 조·청 상민수륙 무역 장정을 체결(1882)하여 청 상인들이 내륙 시장에까지 진출할 수 있는 경제적 특권을 보장받지요.
① 운요호 사건(1875)은 강화도 조약(1876)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② 영남 만인소(1881)는 정부의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하여 일어난 위정척사 운동이었어요.
③ 정부의 개화 정책의 하나로 청에 영선사를 파견한 것은 1881년으로, 임오군란 이전의 일입니다.
④ 별기군이 창설된 것은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881년입니다.
⑤ 청은 임오군란을 진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을 강요하여 체결하였습니다(1882).
이를 통해 청 상인들이 내륙 시장에까지 진출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외국 상인들의 내륙 통상이 확대되어 조선 상인들
(보부상, 객주)의 피해가 커집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5회 중급 39번 문제
39. 임오군란의 전개 답③
정부의 개화 정책이 추진되는 군사 제도도 개편되어 종래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2영으로 축소하고 새로이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습니다(1881). 이러한 가운데 2영에 소속된 구식 군인들은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낮은 대우를 받고 있었어요.
구식 군인들이 한동안 밀렸던 급료로 모래와 겨가 섞인 쌀을 받게 되자, 불만이 일시에 폭발하여 선혜청을 습격하면서 난이 전개되었어요. 이들은 정부 고관들의 집을 습격하고,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였으며, 별기군의 일본인 군사 교관을 살해하였습니다(임오군란, 1882). 구식 군인들과 민중이 합세해 궁궐로 쳐들어오자 명상황후는 서울을 탈출해 충주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급히 피했습니다. 구식 군인들의 요청으로 흥선 대원군이 일시 정권을 잡았으나 조선에 세력을 침투시킬 기회를 엿보던 청이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군대를 보내 난을 진압하고 흥선 대원군을 납치해 감으로써 민씨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았어요. 임오군란 진압을 계기로 청은 조선에 군사 고문과 외교 고문 등을 파견하여 내정에 간섭하였습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은 일본의 강압으로 제물포 조약을 맺었어요. 이 조약으로 조선은 일본에게 임오군란 중에 일본측이 입은 피해에 대한 배상금 지불, 일본 공사관의 경비를 구실로 일본군이 서울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제물포 조약 후 박영효가 일본에 3차 수신사로 파견되었는데, 이때 태극기가 처음 사용되었어요.
③ 전주성 점령은 동학 농민 운동과 관련 있는 사건입니다.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정부는 농민군과 전주 화약을 맺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효율적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법
카페에서 추천하는 부담 없는 [한권으로 끝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교재로 중요내용을 공부하고
마지막으로 카페에 올려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해설을 꼼꼼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고급 교재지만, 고등학교 교과서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3급 준비에도 최고!!!!!
25회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국사사랑방/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출문제/한국사기출문제해설/
한국사능력검정시험난이도/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권으로끝내는한국사능력검정시험
첫댓글 중급 문제는 그런대로 잘 풀었네요. ㅎㅎ
해설이 참 자세해서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해설 감사합니다. 직접 이야기해 주시는 것처럼 머릿속에 잘 들어와요.
25회는 더 자세히 설명되는것 같아 좋아요^^
댓글은
감사합니다....라는 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문제에 대한 난이도, 자료 등에 대한 느낌이나
개인적인 문제풀이 접근법 등을 달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자주 출제되는 내용임을 알기는 하지만 순서나 발발 원인이 헷갈려서 자주 틀리는 내용입니다! 자세한 해설 덕분에 확실히 암기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임오군란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알 수 있 좋았습니다!!~~
기본적인 내용 흐름을 이해하는것이 좋겠네요
해설만 봐도 이해가 잘 됩니다~~~ 조아요
주제별로 모아놓아 보기편하네요^^
저는 시기문젝 약한데 설명을 잘해쥬셔서 참 좋았습니다
진짜 좋아요 너무 좋아요 ㅜㅜ ~~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시기 따지는 문제는 진짜 강의를 듣지 않고 그냥 외우려면 너무 힘든 것 같아요 ㅜㅜ 헷갈리는 부분은 2배속으로 여러번 들어야 겟어요
년도 안외워도 흐름이 이해되는 것 같아요.
제대로 하나하나 풀이하기 좋네요!
해설이 자세해서 이해가 잘 되네요!
보기하나하나 상세한 설명과 같은 주제의문제를 묶에놔서 좋았습니다
진짜 짱이에요
각문항별 해설이 이해하기 쉽게 되어있습니다.
단순히 이게 답이다 하면서 외우기만 하는게 아니라 그에 따른 설명이 있어서 이해도 쉽고 재미가 있네요!!
설명이 자세하여 한 번 더 공부할 수 있겠어요.
임오군란에 대해서 공부 많이했다고 생각햇엇는데 생각보다 많은 내용이 있군요
개념 잡혔어요~~ 이놈의 청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