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통치자에 대한 두 가지 그림(10,5-11,16)
이 대목은 상반된 두 부류의 통치자를 묘사한다. 10,5-34이 묘사하는 아시리아 임금은 하느님을 거스르면서 점점 상승하지만, 결국엔 몰락하고 만다. 이어지는 11장은 이와 상반된 이상적인 통치자를 소개한다. 그는 이사이의 뿌리에서 움튼 새싹이며 그에게 주님의 영이 수여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스라엘과 세상의 변화가 노래로 울려 퍼진다. 상반된 두 개의 그림은 하느님께서 역사에 직접 개입하셨음을 의미하며, 이 개입으로 구원이 준비된다.
1) 교만한 아시리아의 불행(10,5-34)
본문의 구조를 알려주는 주요 표지는 단락의 시작과 함께 선포되는 “불행하여라”(10,5)와 두 번 반복되는 “그날에”(10,20.27)이다. 이에 따르면 10,5-34은 5-19절, 20-26절, 27-34절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단락(10,5-19)에서 하느님과 아시리아 임금이 화자로 등장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둘은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 이 단락은 아시리아 임금의 교만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를 예고한다. 아시리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였을 뿐이다(10,5 ; 참조 9,9-10). 하지만 아시리아는 자신을 하느님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의 능력을 뽐내고 자랑하며,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가운데 하느님을 많은 신 가운데 하나로 치부하였다(10,8-11.13-14). 그는 이렇게 잘못된 인식을 가진 탓에 하느님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예고된다(10,16-19).
두 번째 단락(10,20-26)은 남은 자들에게 구원이 선포될 것을 예고한다(10,20-23). 남은 자들은 하느님께 충실히 의지하면서 새로운 하느님 백성 공동체를 위한 밑거름이 된다. 그들은 더 이상 아시리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진노가 이제 아시리아를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10,24-26). 죄악을 저지르는 백성은 아시리아를 통해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하느님께 충실한 남은 자들은 하느님의 구원을 선사 받는다.
세 번째 단락(10,27-34)은 아시리아의 진격과 이를 두려워하는 유다 주민들의 반응을 보여준다. 여기서 언급되는 지명들, 아얏, 미그론, 미크마스, 게바, 라마, 사울의 기브아, 밧 갈림, 라이사, 아나톳, 마드메나, 게빔, 놉은 예루살렘의 북쪽과 서쪽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예루살렘을 위협하는 군대의 행진 여정을 암시한다. 이에 대해 두 가지 관점의 해석이 존재한다. 하나는 역사적으로 기원전 720년경 사르곤 2세의 침입을 묘사한다는 해석과, 다른 하나는 북쪽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는 아시리아 군대의 일반적 모습으로 보는 해석이다. 어떠한 해석이든 10,27ㄴ-32은 “딸 시온산”과 “예루살렘 동산”을 향하고 위협하는 아시리아의 움직임을 묘사한다. 아시리아는 “가지들”, “높이 솟아오른”, “드높은” 것들에 비유되며, 하느님께서 그들의 교만을 꺾으실 것이라는 사실이 선포된다(10,32-34). 아시리아가 심판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이사야서가 전하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 곧 하느님은 인간의 교만을 심판하고 처벌하신다는 가르침 때문이다(2,6-22 참조).
2)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솟아난 햇순과 그 위에 머무르는 하느님의 영(11,1-16)
11장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1-9절은 메시아적이며 이상적인 통치자의 도래를 선포한다. 그는 은유적으로 이사이의 뿌리에서 움튼 새싹으로 표현되며, 그에게 하느님의 영이 작용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이어지는 10-16절은 남은 자들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첫 번째 단락(11,1-9)은 하느님의 주도권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고유한 사건을 묘사한다. 선행하는 10,5-34의 맥락을 고려하면 이사이의 뿌리에서 새싹이 솟아나고 하느님의 영이 수여되는 장소를 시온으로 볼 수 있으며(10,12.24.32), 그 장소는 주님의 ‘거룩한 산’으로 명시된다(11,9). 하느님께서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게 하신다.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는데, 그것은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11,2).
이어지는 구절은 새롭게 움튼 싹으로 표현된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습을 묘사한다(11,3-5). 그의 다스림은 백성의 지도자들의 통치와 대조된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가난한 이들과 고아와 과부를 돕지 않지만(1,23: 10,2), 이상적 통치자는 정의와 신의를 바탕으로 정당하게 재판하고 무뢰배를 내리치고 악인을 죽이기 때문이다(11,4-5). 이 같은 이상적 통치는 백성 공동체만이 아닌 자연 질서에도 영향을 준다. 맹수들이 가축들과 함께 어울리고 풀을 먹는다(11,6-7). 다소 황당하게 들릴 수 있는 이 진술은 하느님께서 창조 때 모든 생물에게 모든 풀과 과일나무를 양식으로 주신 것에 부합한다(창세 1,29 참조). 따라서 이렇게 변화된 세상은 창조 질서가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 자연의 변화와 함께 땅도 “주님을 앎으로 가득”(11,9)하게 된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 예언자의 비판을 받았던 상황이 서서히 변화된다(1,2-3 참조).
두 번째 단락(11,10-16)은 남은 자들을 위한 희망을 선포한다. 메시아에 대한 은유로 사용된 이사이의 뿌리는 깃발이 되어 겨레들이 알아보고 모일 수 있는 표지가 된다. 하느님께서 그 깃발을 높이 드시면(11,10-12), 유다와 에프라임의 적개심은 사라지고 그들은 새로운 하나의 백성이 되어 이방 민족을 물리칠 것이다(11,13-14). 하느님의 위력으로 아시리아에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한 큰길이 만들어진다(11,15-16). 하느님의 활동으로 움튼 새싹은 이제 민족들의 깃발이 되고, 하느님께서 친히 그 깃발을 들어 올리시면서 남은 자들은 그것을 보고 높이 솟은 깃발이 있는 시온을 향해 모여든다.
은유적 표현으로 가득한 11,1-6은 메시아적 인물의 통치와 이를 통한 변화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사이의 뿌리에서 움튼 새싹으로 비유된 그는 하느님의 영 안에서 이상적으로 통치하여 창조 질서를 회복시킨다. 이제 오물을 뒤집어쓴 시온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하느님의 영이 이끌어주는 이상적인 통치자의 다스림을 받으며 새롭게 변환된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남은 자들이 시온으로 모여들며,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한 큰길을 마련해주신다는 희망이 선포된다. 시온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변화는 장차 바빌론 유배로부터의 귀환(40-55장)과 영광스러운 시온의 변화(56-66장)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메시아 예고의 삼부작(7,14 ; 9,1-6 ; 11,1-9
이사야서에서 7,14 ; 9,1-6 ; 11,1-5은 이상적인 통치자를 예고하는 이른바 ‘메시아 본문’으로 지칭된다. 이사야 예언서는 이 본문들을 분리된 것이 아닌 연속물로 인식하도록 배열한다.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의미를 지닌 임마누엘의 탄생이 예고되고(7,14), 메시아적 인물이 탄생하여 통치자로 즉위하며(9,1-6), 그가 이상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여 창조 질서가 회복되는 세상을 묘사하기 때문이다(11,1-9). 서로 다른 세 개의 본문을 연속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은 이것들이 서로 연결 고리를 갖기 때문이다. 우선, 임마누엘은 그 이름 안에 ‘우리’라는 공동체를 전제한다. 이사야 예언서에서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주님의 표징으로 활동하는 이들을 지칭한다(8,16-20). 이어서 ‘우리’라는 공동체는 메시아적 인물의 탄생을 목격한 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9,5)라고 고백한다. 그 아기는 즉위식을 거쳐 통치자의 자리에 앉은 뒤 통치자의 이름을 얻는다. 그는 하느님의 영 안에서 정의와 신의를 바탕으로 통치하여 세상을 변화시킨다(11,1-9). 그러므로 세 개의 메시아 본문은 메시아적 인물의 탄생 예고(7,14), 그 인물의 탄생과 즉위(9,1-6), 그의 통치와 그로 인한 창조 질서의 회복(11,1-9)이라는 삼 단계 과정을 보여준다.여기서 주목할 점은, 메시아적 인물을 묘사할 때 그에게 임금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연이 아닌 의도적인 표현으로, 만군의 주 하느님만을 유일하고 참된 임금으로 바라보는 이사야 예언서의 신학을 반영한 결과다(6,5 ; 24,23 ; 33,22 참조). 그래서 즉위식 때 그에게 주어진 이름은 임금이 아닌 통치자(9,5 : 싸르 שׁר)이다. 또한, 메시아적 인물의 기원은 다윗이 아닌, 이사이의 뿌리로 언급된다(11,1.10). 이 표현은 다윗 왕조, 또는 다윗 혈통에서 나올 메시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적 인물이 다윗을 넘어 새로운 시작을 가져올 인물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