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25.(화) 아침부터 종일 비
코로나19 가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해서, 컴퓨터와 놀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글을 접하는 시간도 많아졌습니다.
지난 밤은 <박쥐의 반격>이란 수필 한 편을 썼습니다.
웹서핑을 하다가 좋은 글을 만났습니다.
시인이라면, 또는 작가라면 읽어볼 만한 내용이기에 요약했습니다.
* 시의 창작 동기는 독자들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시인이 살아가는 가운데 감동을 받은 체험을 형상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자기 감정을 과장되게 표출하기 보다는 진솔하게 나타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 형상화는 어떻게 하는가
시는 직접적인 메시지의 전달적 기능을 배제하고,
사물 혹은 존재의 언어를 지향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에 의미의 전달적 기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시는 비록 좁은 의미의 전달적 기능은 배제한다 하더라도
화자를 통해 사물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에게 주관적 진실을 깨우치게 한다.
시는 기본적으로 감정을 통해 주관적 진실을 표현하는 장르이며,
이를 통해 넓은 의미의 전달적 기능을 갖는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에는 감정적 진술과 감정환기적 진술 두 가지가 있다.
감정환기적 진술은 화자가 직접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그것을 깨우치게 하거나 느끼게 만드는 방식인데,
이는 글쓰기의 네 가지 형식 중에서 '묘사'에 해당한다.
이미지와 비유가 사용된 시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주로 서술적 이미지가 드러난 경우,
주로 비유적 이미지가 드러난 경우,
서술적 이미지와 비유적 이미지가 혼용되어 나타난 경우가 그것이다.
한 편의 시는 같은 유형의 이미지로만 형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서술적 이미지와 비유적 이미지가 상호 교환되고 혼용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미지의 종류에는 감각적 이미지,
비유적 이미지,
상징적 이미지 등 세 가지가 있다.
감각적 이미지는 시각적, 청각적, 미각적, 후각적, 촉각적, 기관적, 근육감각적 이미지 등이 있다.
비유적 이미지는 유법, 은유법, 환유법, 제유법, 의인법 등의 수사법에 의해서 비유적 형상을 획득한다.
상징적 이미지는 한 작품이나 한 작가의 작품들 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 공통적인 상징으로까지 확산된다.
어떤 시가 감동적인 시인가
시를 읽고 감동을 느낀다는 것은 시에서 어떤 효용을 얻어낸다는 의미이며,
이런 관점에서 문학작품을 대하는 것을 효용론적인 관점이라고 한다.
효용론적인 관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쾌락적 기능을 중시하는 관점과 교훈적 기능을 중시하는 관점이다.
훌륭한 문학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둘 모두를 변증법적으로 잘 승화시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두 기능이 시 작품 안에서 균형을 이룰 때 독자들은 감동을 느끼게 된다.
관능적 쾌락만을 추구할 때,
시는 자칫 저속하게 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지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 에로티시즘은
철학의 결여로 독자의 얄팍한 관능성만을 자극하고 나쁜 욕망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떠한 사상과 관념이건 그것이 시로서 표현되기 위해서는
시적 형상화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이러한 전제를 망각할 경우 시는 시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단순히 정치적 목적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적 정서화와 형상화를 통해서만이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교훈은 더욱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경험을 써라!
가장 절실한 것을 써라!
줄거리를 만들어라!
한가지를 추가하면 '드라마틱'을 만들어라.
좋은 시에는 분명 드라마틱이 있다.
드라마틱을 만들기 위해서는 3미를 창출해야 한다.
3미란 바로 흥미, 의미, 재미이다.
드라마틱은 경험이고, 진실함이고, 줄거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흥미,
그 안에 의미를 집어 넣을 수 있는 능력,
재미를 주는 것이다.
너무 흥미를 추구하면 소재주의에 빠진다.
너무 의미만을 추구하면 잠언에 빠진다.
너무 재미만을 추구하면 꽁트가 된다.
이 상태를 얼마나 적적하게 간을 맞출 수 있는가가 시인의 관건이다.
[시란?]
예술가가 한 편의 작품을 구상하고 완성하는 일체의 활동을 창작이라 한다면,
시가 언어의 예술이란 점을 생각할 때
언어의 표현 수단으로 하여 시를 구상하고 완성하는 모든 작업을
시창작이라고 소박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시창작이 시작된 것은 아득히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원시시대에 우리의 조상들도 제천의식을 치렀는데,
여기에 음주가무가 함께 어우러졌다.
일종의 미분화 상태였던 원시종합예술의 형태가 점점 분화되어
춤은 무용과 연극으로,
소리는 음악으로,
노래의 가사는 시로,
의식의 줄거리는 소설로 분화되었다고 몰톤은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시의 발생을 말해주는 가장 적절한 보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아득한 원시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 창작의 전통은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그동안 끊임없이 다양하게 변화하는 인간의 삶 속에 적응하면서,
또는 나름대로 변화를 꾀하면서
시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동,서양의 문화는 이러한 시의 본질을 캐려고 수많은 물음을 던지고 다양한 정의를 내렸지만
"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한 엘리어트의 말처럼
시에 대하여 어떤 일관적인 정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쓰는 일은 시 창작의 처음이자 끝이다.]
시 창작의 실제는 쓰는 일에서 시작되고 쓰는 일로 끝난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수 많은 詩 지망생들이 습작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치열한 습작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좋은 시가 창작될 수 없다.
시 창작은 철저한 연습을 필요로 하고 문장과의 싸움이다.
워즈원드의 말대로
최상의 언어를 최상의 순서로 늘어놓은 것이 詩 이기에
어떠한 문학보다도 준엄하고 치열한 언어를 요구한다.
써보는 일에 부단한 노력 없이는 제대로 된 문장,
제대로 된 표현에 제대로 된 시가 태어날 수 없다.
부단한 노력은 비단 詩 창작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어떤 분야이든 프로가 되려면 자기와의 싸움과 수련은 필수적이다.
텔레비에서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고난도 기술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김연아 선수의 피겨 스케이팅,
손연재의 리듬체조, 박태환 선수의 수영이나
TV프로중 생활의 달인을 보고도 놀랄 때도 있는 데
더욱 감탄하는 것은 그런 묘기 뒤에 숨어있는 그들의 피나는 수련이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수련을 쌓았기에 저런 신기가 몸에 배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해지고 숙연해진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한다.
그 무엇이든 한 가지씩은 신께서 주었다고 한다.
지금 시를 써 보려고, 거기에 뜻을 둔 지망생은 분명 시에 대한 재능을 갖고 있다.
시에 관심이 있고 또 좋아하고
스스로 써 보려고 노력 한다는 것은 재능의 싹을 갖고 있다는 표시이다.
그러나 자기 안에 무궁무진한 능력이 잠재되어 있더라도 각고의 노력없이는 스스로 솟아나지 않는다.
그냥 묻혀버리기 쉽상이다.
거듭 써 보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잠재된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이런 수련과정에서 자기만의 개성과 독창성도 발견할 수 있다.
문단의 고수들이 쓴 좋은 시들을 눈여겨 보는 것도 좋다고 한다.
낙서 같은 시라도 오래 연습을 거치다보면
다른 차원의 글이 보이고 경이로운 시 세계와 만날 수도 있다는 게 선배들의 설명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다'는 말처럼
시 수련이 중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수영선수가 최고의 실력을 쌓기 위해서 물 속에서 온 몸을 놀려야 하고
소리꾼은 득음을 위해 목구멍에 피가 나도록 연습을 해야 하는 것처럼
좋은 시를 쓰는 것도 다르지가 않다.
쓰고 또 쓰는 수련만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한다.
[관찰하는 눈을 가져라.]
우리들은 주변의 모든 것에 익숙해져 있고 낯이 익어서 별반 새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이것을 봐도 무덤덤하고 저것을 봐도 시큰둥하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타성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고전적인 생각일 뿐
세상의 모든 사물은 어느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변화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아침에 본 꽃의 모양과 빛깔이 다르고
점심 때와 저녁 때도 각각 다르다.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빛의 각도 세기 밝기에 따라서도 꽃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을 똑 같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들의 섬세한 변화를 무심하게 지나쳐 버리는 것이다.
적어도 시를 쓰려는 사람들은 사물 하나를,
그리고 자기 주변의 형상들을 주의 깊게 볼 줄 아는 섬세한 눈을 갖고 있어야 한다.
여느 사람들 모양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무덤덤하고 무신경해서는 절대 좋은 시를 쓸 수가 없다.
정확하고 예리한 관찰을 통해서 자기의 눈으로 본 사물의 의미를 건질 수가 있어야 좋은 시가 나온다.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작가 모파상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표현력이 시원치 못함을 느끼고 플로베르에게 표현의 비법을 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고 한다.
"날마다 자네의 집 앞을 지나가는 마차를 관찰하고 그것을 그대로 기록하게나.
그것이 글쓰기의 가장 좋은 연습이네."
모파상은 스승의 말에 한 이틀 동안 관찰해 보았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단조롭고 따분해서 실상 관찰할 필요조차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그러한 생각을 갖고 찾아 온 모파상에게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고 한다.
"관찰이야 말로 훌륭한 글쓰기의 연습인데 어째서 쓸모 없다고 하는가?
자세히 살펴 보게나.
개인 날에는 마차가 어떻게 가며 비오는 날에는 어떤 모습일지?
또 오르막 길에서는 어떠한지?
말 몰이꾼의 표정도 비가 올 때, 바람이 불 때, 뙤약볕 아래서는 어떤 변하가 있는지 살펴보면
결코 단조로운 일이 아님이야."
그후 플로베르는 모파상이 원고를 가지고 올 때마다 더욱더 정확히 관찰하는 눈을 갖출 것을 요구했고
모파상은 끊임없는 글쓰기를 연습함으로써 명작을 남길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관찰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개성과 독창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새로움을 창조해 내는 것을 생명으로 하는 시 창작에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관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나의 사물을 제대로 관찰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상투적인 인식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애정과 관심을 갖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기 위해 집중적으로 마음의 눈까지 열어 보이는 행위이다.
이때 사물은 경이로움과 눈부심으로 자신들의 모습과 의미를 우리 앞에 드러내 놓게 된다고 한다.
[문학 체험을 많이 해라.]
좋은 글을 쓰기 위하여 구양수가 말한 삼다가 필요하다.
첫째가 다독인데 풍부한 독서가 시 창작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한 기초로서 독서체험을 풍부하게 가져야 하는 것은 시창작의 필수 조건이다.
독서 체험은 실제의 체험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글쓴이의 체험, 사고, 감정, 인격, 사상 등의 총체적인 것과도 만남이 되며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우리들이 부딪히는 세계의 폭은 좁고 한정되어 있다.
당연히 경험도 거기에 비례해서 좁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우물안 개구리식의 자기 생각이나 세계를 뛰어 넘어서
더 넓은 세계로 우리의 사고와 정신을 이끌어 갈수 있는 게 독서다.
그러므로 독서는 우리의 정신세계를 살찌우고 풍요롭게 만든다.
또한 사물을 보는 방법이나 시각을 다양하게 만들고 사고를 깊게 해준다.
[사고를 깊고 풍부하게 해라.]
'사고'는 창작의 다탕이며 밑천이다.
텅 비어있는 돼지 저금통에서 꺼내 쓸 돈이 없듯이
자신의 생각이 들지 않고서는 시를 쓸 수가 없다.
시 창작은 어떠한 것보다도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며 개성과 독창성을 발휘하는 창조적인 예술이다.
그 창조성과 개성의 근원은 자신의 '사고'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시창작 뿐만 아니라 모든 오피니언 리더들의 갖추어야 할 일이기도 하다.
- 한국신춘문예 카페에서 요약으로 편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