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정음시조문학상 보도자료
● 제6회 수상자 선정 과정 및 시상식
각종 문예지에 발표한 2,000여 편이 넘는 신작 중 치열한 선고 과정을 거쳐 10명 50편이 본심에 올랐고, 조경선 시인이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본심은 손진은, 이형우 문학평론가가 맡았다. 제6회 정음시조문학상 수상 작품은「연적」외 4편이다. 상패가 수여되고, 창작지원금은 오백만원이다.
시상식은 2024년 7월 6일 토요일 오전 11시30분 대구 한영아트홀에서 열린다.
● 수상작
연적
조경선
들어오는 길 있으면
나오는 길 있습니다
작지만 그 안에 큰 뜻을 채워 넣고
내 곁을 지키고 앉아 열리고 닫힙니다
숨구멍 손 뗄 때마다
쏟아내는 울음들
한 번 품은 생각은 물결 따라 퍼져나가
갇혔던 감정을 풀어 몸 낮춰 번집니다
천년을 걸어온 말
물방울로 읽어내도
그 속을 알 수 없어 몇 번을 기울이면서
제 속을 비워냅니다 하루 받쳐 공손하게
조경선시인 약력
◆ 1961년 경기 고양 출생
◆ 201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 천강문학상, 김만중문학상,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수상
◆ 시집 『목력』, 『개가 물어뜯은 시집』
● 수상소감
몸 낮춰 흐르는 연적처럼
조경선
내 이름을 불러주면 겁부터 나 나무 뒤로 숨는 날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집 가까이에 있는 금광 호수의 물결에 두려움을 흘려보내기도 합니다.
아직 덜 가신 안개가 얼굴에 닿아 호수 건너편이 희미하게 보여 다행입니다.
혼자서 걷는 길은 발맞춤이 필요 없어 사물과 그 소리와 호흡하면서 바람의 속도를 따라 먼 길을 돌아가기도 합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다짐들은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아 무채색의 시간을 퍼내며 그냥 또 걷습니다.
물과 뭍을 오가며 안개를 마시고 물 위에 발을 담근 버드나무들이 가볍게 몸을 맡기는 것 같아, 그동안 길 위에 뿌리를 내리느라 헤진 내 발도 물결에 맡겨 봅니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마음을 옮겨와 화선지 한 장 펴놓고 먹을 갑니다. 갈면 갈수록 짙어지는 먹, 한 번 더 연적을 들어 물을 붓고 내 몸을 기울입니다. 손끝에서 숨이 멎으면 좋은 문장은 살아날까, 뾰족한 붓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순간에 실패작으로 끝나버리는 날이 많아 바깥의 세계는 너무 캄캄했습니다. 하얗게 놓인 화선지 앞에 앉아 다시 또 나를 희석해 봅니다.
저 큰 호수도 처음엔 한 방울의 물이었듯이 한번 품은 생각이 내면으로 끝없이 흘러들 때 말없이 그저 담아두고 몸 낮춰 흐르는 연적처럼 하루를 열어놓겠습니다.
꽃들이 춤을 추며 말을 걸어와 눈과 귀에도 꽃이 반사되는 요즘 반가운 소식까지 전해 들었습니다. 한쪽 벽면에 연적의 공손함으로 낮게 걸린 족자의 “舞”가 오늘따라 더 활기찹니다. 그 활기로 계절이 다시 태어나 나무의 뿌리는 하늘 바람 구름 낮과 밤을 곱게 갈아 더 진하게 길을 뻗습니다. 나의 모습 그대로 써 내려가다 보면 걸음의 흘림과 멈춤 사이에 여백이 생겨 흐트러진 마음을 또 가지런히 여미게 됩니다. 아직도 먼 시조에 가 닿기 위해 사유의 잔뿌리를 깊은 곳까지 뻗어보지만 늘 가장자리만 맴돕니다.
쳐다만 봐도 좋은 자리에 붓 한 자루 연적 하나 놓겠습니다. 내 앞에 놓인 흩어진 일상을 가지런히 하고 먹물처럼 번지겠습니다. 시조가 내게 와서 좋은 날, 물음이 많아질수록 마당에는 눈물과 웃음의 춤이 살아서 움직입니다. 오른쪽만 고집할 때 왼쪽이 무너지는 날이 많았습니다. 독자들이 떠나가지 않도록 한 호흡 한 호흡 공들여 붓끝을 바로 세우겠습니다.
외딴집 나무에 산까치가 둥지를 짓고 있습니다. 저도 조그마한 집하나 만들겠습니다. 끝으로 정음문학상 수고해주신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글을 선정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영광을 같이 공부하는 시란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 심사평
조용한 깊이, 조용한 혁명
조경선의 작품에 손을 들어주었다. 작품의 균질성이 돋보였지만 무엇보다 개성적인 생태적 사유를 보여주는 그의「스치로폼 후생」이 다른 작품들을 뒤로 밀쳐내게 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생태시대에 거의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 존재의 가치를 폄훼하고 불길하게 몰아가는 것(“나쁘다는 낙인으로 몰아붙인 미래들”)과는 달리 시인은 스치로폼의 요긴함과 종요로움이라는 반쪽 가치를 알기에 또 다른 반쪽 가치인 용도가 다한 스치로폼의 후생의 비애를 공감할 줄 아는 안목을 가졌다는 것이다. 스치로품 덕분에 얼음이 쉬 녹지 않아서 한여름의 생선 이동을 도울 뿐 아니라, 내용물을 잘 감싸준 재료의 특질과 가벼움 덕분에 부서지지 않게 깨지기 쉬운 물질의 이동수단으로도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가. 그러기에 시인은 후생의 비애, 그 작고 나직한 몸짓 속으로 들어간다.
“사라져야 산다는 말에 최대한 가벼워진다”는 첫째수 초장부터가 소외된 주체의 몸짓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런 안간힘과는 달리 노출된 “후생의 알갱이들은 뭉쳐지지 않”는다. 의지와 몸이 따로 노는 그것은 우리 시대의 불안이 야기한 (“금 갈 바에야 깨지는 오늘의 불안 앞에”) 개인 주체의 양상이다. 마침내 살아있음을 알리는 “바스락” “소리조차 물렁해”지고, “아직은 살아있는데 날마다 죽어가는” 잔잔하게 파문을 일으키는 비애에 다다른다. 시인은 생태문제를 내세워 그 존재의 반쪽 가치가 폄훼 수준을 넘어 타기의 대상으로 여기는 시단의 관행이 놓친 부분을 조심스럽게 파고들어가 생태시학의 심부에서 자성을 촉구한다.
사는 게 달라 “너는 풀 피” “나는 풀 물”(「풀 피」)하는 인식은 또 어떤가? 또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의 “그것이 길이었을 때 울음마저 사라져/깡마른 뒷모습 빗자루처럼 꼿꼿한데/나는 더 무거워졌다/바람도 멈춰 있다”는 그의 시가 시적 화자의 내면 속에 침묵의 심연을 만들어 내는 복합적인 시적 회로를 갖추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궁이에 “녹이는 곱은 손”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눈사람”으로 화하는 지점(「어때요 이런 고요」)도 선명했다, “한 번 품은 생각은 물결 따라 퍼져나가/갇혔던 감정을 풀어 몸 낮춰 번집니다”(「연적」)의 사물을 통해 자신의 감성을 유장하게 풀어내는 작품도 든든하게 느껴졌음은 물론이다.
확실히 조경선의 작품에는 동양적인 고요와 관조, 비움, 이런 깊이가 있다. 무엇보다 시의 현실을 한 잎 벗겨내는 듯한 조용함의 미학이 있다, 조용한 깊이, 조용한 분노. 조용한 혁명, 조용한 눈물이 따뜻하게 읽혀졌다. 이런 시도를 통해 시조가 성숙해가고, 관점도 더 풍요롭고 깊어질 것이다. 우리 시조단에 정말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부탁한다.
심사위원 : 손진은(시인·문학평론가)
정음시조문학상의 주인공
몇 번을 통독하고 나니 4번 시인과 6번 시인의 작품에 눈이 멈추었다.(수상자 결정 후 조경선 시인과 김석인 시인임을 알았다.) 조경선 시인의 시편들은 편차가 없었다. 또, 그는 세련된 작법을 체화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시작 전체를 아우르는 편법(篇法). 시조 각 장을 조화롭게 엮는 장법(章法), 장을 탄탄하게 엮는 구법(句法)과 어휘를 주무르는 자법(字法)을 제대로 구사하는 시인이다. 「연적」의 시구처럼 시작(詩作)의 “들어오는 길”과 “나오는 길”을 안다. 높이고 낮추고, 밀고 당기고, 끊고 잇는 창법들이 “천년을 걸어온 말/물방울로 읽어내”며 자신의 속을 비워내고 있다. 그의 시는 “아직은 살아있는데 날마다 죽어가는”(「스치로폼 후생」), “아직도 남아 있”는 “누군가 버리고 간 말”[「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을 쓸어버리는 빗자루다. “숲으로 일어”낸 “그날의 눈물”(「풀 피」)을 읽게 해 주고, “일몰은 남아 있는데 고요가 타오”르는 풍경을 떠 올리고, “서 있는 눈사람처럼 어때요 이런 고요”(「어때요 이런 고요」) 속으로 침잠하게 한다. 작품을 보자마자 이번 정음시조문학상의 주인공이다 싶었다.
김석인의 작품들도 살아온 세월이 곰삭아 있었다. “끊어진 기억 뒤로 산도 다 돌아앉았는데/모진 삶 등피를 말아 밀어 올린 묵란 한 촉”(「치매, 열반 꽃」), “바람을 걸쳤어도 입은 더 무거워서/피붙이 살붙이에 뼛속까지 다 내주고/억새꽃 스치는 울음”(「허수아비」)은 고색창연한 슬픔이 켜켜이 배어있다. 그 바탕 위에 만나는 손주 이야기는 가슴을 더 뭉클하게 한다. “엊그제 세어볼 때 무량대수 같았는데/지난밤 세어보니 두 개가 모자라더라/그저께 태어난 손주 감고 있는 저 눈”(「별 2」) 무량대수였던 엊그제 밤의 별이 지난밤에 두 개가 모자라더라. 알고 보니 우리 손주 놈이 그 별 두 개를 붙이고 나오느라 그리 됐다. 할아버지의 이 이실직고에 온 우주의 밤하늘이 아름답게 반짝인다. 억겁의 세월을 살아가는 목숨들, 대대손손 이어지는 그 유전의 현장이 어찌 그 집안만의 일이고, 이 땅만의 일이고, 인간만의 일이겠는가? 자손 번식이라는 삶과 힘의 원천이 가문의 일, 새 생명 탄생이라는 작은 환유로 환치되어 있다. 이처럼 김석인의 글들은 나즉하고 담담해서 좋다. 그러나 그것이 본상을 수상하기에 미비하다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심사위원 : 이형우(시인·성결대 교수)
20 24. 5.16
정음시조문학상 운영위원장 이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