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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무신론자는 마귀인가?(1)
- 무신론의 비판 앞에 서 있는 기독교
하나님은 계시는가? 만일 계시다면 어디에 계시는가?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침묵을 지키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우리의 고통을 보고만 계시는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든지 아니면 죽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질문은 오늘도 우리 주변의 고통과 고뇌로 가득한 사람들로부터 쉽게 들을 수 있는 질문이다. 교인 수가 늘어나고 교회 수가 늘어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 우리는 “기독교인이 된 것을 후회한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고뇌에 찬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있다면 이 세계는 왜 이렇게도 부조리와 모순투성이인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최소한 그들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이 역사의 현실 앞에서 왜 보여 주지 못하는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비젤(E. Wiesel)은 그가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포로수용소에서 겪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밀경찰은 두 명의 유대인 남자와 어린 소년 한 명을 운집한 포로들 앞에서 교수대에 매달았다. 두 명의 남자는 곧 죽었다. 그러나 어린 소년의 죽음과의 싸움은 반 시간이나 걸렸다. 이때 내 뒤에 있던 어느 사람이 물었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어디에 있는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그 소년이 밧줄에 매달려 몸을 뒤틀면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나는 그 남자가 다시 한번 말하는 것을 들었다. 지금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E. Wiesel, Night, 1969)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죽지 않았는가? 이 질문은 무신론자들의 질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어떤 분들은 이러한 질문을 하는 무신론자들을 “마귀”라고 몰아붙인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무신론자들은 과연 마귀인가? 그들을 마귀로 몰아붙이는 그분들이 혹시 마귀의 짓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물론 무신론자들의 모든 이야기가 마땅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무신론자들이 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왜 하나님이 없는 게 더 낫다고 말하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래서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되받아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상대방을 ‘마귀’, ‘신신학자’, ‘자유주의 신학자’로 정죄하고 자기는 ‘순수’요 ‘보수’요 ‘정통’이요 ‘순 보수정통’이라고 자처하는 일이야말로 마귀의 모습이 아닌가? 하나님 앞에 가서 누가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판단을 받을지가 관심의 초점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무신론에 대하여 고찰하는 것은 결코 우리의 신앙을 포기하고 무신론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다. 단지 무신론의 비판 내용을 알아봄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보다 더 올바른 신앙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1) 저항적 무신론
무신론 가운데 가장 큰 설득력을 가진 것은 저항적 무신론이라 생각된다. 저항적 무신론은 본래 기독교의 전통적 하나님 존재 증명, 특히 우주론적 증명과 목적론적 증명에 대한 비판으로서 제기되었다.
우주론적 증명과 목적론적 증명에 의하면 이 세계는 신(神)의 존재로부터 나온 것 혹은 유출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신적인 구조와 질서를 가지고 있다. 라이프니츠의 표현에 의하면 이 세계는 “하나의 작은 신성(神性)”이요, “신의 국가”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조화와 질서와 합목적성을 가진다. 모든 것은 신이 태초에 정하신 “조화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주론적 증명과 목적론적 증명의 논리에 의하면 이 세계의 모든 것은 그에게 주어진 위치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 모든 것은 주어진 질서와 법칙과 상황에 순종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이 세계는 신의 신성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 된다. 현존하는 질서를 깨뜨리는 자는 신성을 비추어 주는 거울을 깨뜨리는 자이다. 있는 자는 있는 자의 위치를, 없는 자는 없는 자의 위치를, 다스리는 자는 다스리는 자의 위치를, 다스림을 받는 자는 다스림을 받는 자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양반은 양반으로, 상놈은 상놈으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신의 존재가 이 세계를 통하여 인식되고 증명된다. 조화와 질서를 가진 현존의 세계,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 이 속에서 우리는 신의 살아 계심과 섭리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우주론적, 목적론적 세계관에 대하여 무신론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그것은 결국 기존하는 인간의 세계를 정체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가진 자, 다스리는 자의 위치와 기득권을 영원히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이 세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을 방조하고 고난 당하는 사람들의 고난을 지속시키는 일이 아닌가?
우주론적, 목적론적 세계관을 거부하는 무신론자들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죄와 죽음의 세력이 다스리고 있는 이 세계는 결코 신적인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악한 세계이다. 그것은 조화와 질서의 세계가 아니라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이다. 그것은 신성의 거울이 아니라 악마의 깨어진 거울이다. 현존하는 세계를 들여다볼 때 그 속에는 신의 존재와 오묘한 섭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악마의 존재와 그의 음흉한 섭리가 나타나지 않는가? 만일 이 세계가 신의 존재로부터 오는 신적인 세계라면,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신의 조화와 섭리에 따라 일어난다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고난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가? 이 세계의 불의와 고난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것을 방조하는 역할을 하는 신의 존재가 거부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독교 종교가 철폐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동기에서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니체, 그리고 까뮈, 싸르트르 등 많은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한다.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다음과 같이 기독교를 비판한다.
기독교 종교는 인간이 현실의 세계에서 당하는 억울함과 고통을 위로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설정한다. 인간은 현실의 세계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도피한다. 그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하소연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그리하여 현실의 억울함과 고통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러나 종교를 통하여 얻는 위로는 참 위로가 아니라 환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에게 현실적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환상적 행복을 준다. 그것은 인간의 억울함과 고통을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을 줄 뿐이다. 종교적 위로는 결국 인간이 현실적으로 당하는 억울함과 고통을 지속시키고 그것을 방조한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현실적 문제로부터 눈을 돌려 환상적인 종교의 세계 속에서 위로와 행복과 기쁨을 찾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기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비난한다. 그것은 지배계급의 기득권을 옹호하고 방조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기독교의 철폐를 요구한다. 아니, 인간의 억울함과 고통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공산주의 사회가 오면 인간은 환상적인 위로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는 자연히 없어질 것이라고 그는 확신한다.
이와 같은 저항적 무신론의 비판이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비판에 대하여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가? 혹시 기독교는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현실의 세계에 대하여 사람들을 무관심하게 만들어 버리고 종교적인 환상 속에서 마치 아편 주사를 맞은 사람처럼 몽롱한 의식을 가지고 살도록 유도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억울한 일들과 고난이 일어나는 인간의 세계를 그의 현 상태 속에서 지속하도록 방조하지 않는가?
한때 우리나라에서 불길처럼 일어났던 성령 운동의 중요한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성령 운동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성령 운동을 보면 기독교가 과연 민중의 아편 역할을 하지 않나 생각될 때가 많다. 만일 성령 운동이 인간을 현실의 세계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지으신 현실의 세계로부터 도피하도록 유도한다면, 그리하여 악한 인간의 세계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성령 운동이 아니라 잡령(雜靈) 운동이거나 악령(惡靈) 운동일 것이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의 세계를 현실적으로 구원하고자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도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령 운동은 많은 민중들을 매혹시키겠지만 사실상 민중의 아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현실의 세계는 아직도 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계 속으로 들어오셨고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람들을 이 세계에 대한 방관자와 방조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또한 기독교는 이 세계를 신적 조화와 질서를 가진 세계로 보는 우주론적, 목적론적 세계관을 포기해야 한다. 이 세계관은 본래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물의 근원자(archē)로 본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유래한다.
성경에 의하면 이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그것은 신적인 세계, 부분적으로 신성을 가진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자연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죄와 죽음의 세력에 묶여 있다. 물론 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하여 유지된다. 그러나 죄와 죽음의 세력이 아직도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독교는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현존의 세계와 그의 모든 질서는 현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사랑과 평화와 자유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변화되어야 한다. 이 세계의 그 무엇도 신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자기를 절대화시킬 수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향하여 개방되어 있고 미완성의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저항적 무신론의 비판 앞에서 다음의 사실을 명백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기독교는 자기를 절대화시키며 현존의 세계를 고정시키려는 세력에 동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기독교는 이 세계의 고난을 직시하고 고난 당하는 자의 편에 서서 고난을 현실적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기독교는 사랑이신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사랑은 약한 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이런 자기반성은 저항적 무신론의 모든 주장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위에 기록한 대로 기독교는 자기를 반성하고 수정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이 저항적 무신론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부인되고 기독교를 위시한 모든 종교가 없어졌다고 하여 인간의 세계는 더 이상 고난이 없는 이상적인 세계로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이 더 이상 계시지 않을 때 인간의 생각과 결단과 행위를 통제할 수 있는 최고의 기관은 인간의 양심이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은 인간의 자연적 본능과 이기적 욕구에 대하여 너무도 무력하지 않은가? 때때로 흰 것을 검다 하고 검은 것을 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양심이 아닌가? 이렇게 힘없는 양심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이상적인 세계를 이룰 수 있겠는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세계는 결국 인간의 지옥이 되지 않겠는가? 죄 없는 사람을 파리 목숨 죽이듯 죽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잔인한 인간의 세계가 되어 버리지 않겠는가? 하나님 없이 이상적인 세계를 이루어 보겠다는 공산주의 사회 속에도 불의와 부패가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없는 무서운 경직성과 폐쇄성이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이 더 이상 인정되지 않을 때 하나님 아닌 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요구하고 모든 인간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우리의 역사적 경험이 아닌가? 하나님 없는 세계에서는 결국 인간 자신이 인간에 대하여 최고의 존재가 아니겠는가?
인간의 세계 속에서 신적인 조화와 질서 대신에 혼돈과 불의와 무질서와 악의 장난을 보는 저항적 무신론자들에 대하여 우리는 일면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도 인간의 세계를 죄 되고 악한 세계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인간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역사의 이 혼돈과 무질서와 불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하여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세계를 스스로 구원할 수 있을까?
물론 종교가 잘못 발전하면 더 큰 해독을 인간의 세계에 남길 수 있다.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그것은 아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턱대고 열광적 신앙에 심취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현실과 세계에 대하여 아편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참으로 기쁜 소식(복음)의 역할을 하는지 언제나 다시금 조심스럽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개인의 조그마한 죄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 기독교가 민족의 운명을 쇠퇴시키는 더 큰 사회적, 역사적 죄에 대해서는 너무도 침묵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과연 이러한 기독교를 하나님이 아신다고 할지 우리는 정직하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현실의 종교는 문제점과 위험성을 가지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종교가 철폐되고 하나님의 존재가 부인될 때 인간의 생각과 의지와 행동을 규제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마지막으로 남은 길은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는 길밖에 없다. 법은 인간의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벌을 줌으로써 범죄를 행하지 않도록 인간을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악한 생각을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은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아니면 법의 효력을 무효화시키면서까지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저항적 무신론은 인간을 억누르고 비인간화시키는 악의 세력들과 이 세력에 방조하는 기독교에 저항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 의도에 있어서 우리는 저항적 무신론을 이해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함으로써 일어나는 문제점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 하나님 존재 증명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라는 반박을 듣는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자신도 회의에 빠질 때가 있다.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신학은 이 문제를 아주 옛날부터 다루어 왔는데, 대표적으로 네 가지 이론이 있다.
① 우주론적 증명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가장 오래된 시도는 우주론적 증명이다. 이 증명은 우주(그리스어로 kosmos)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이것을 우주론적 증명이라고 부른다. 이 방법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나타나는데, 기독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이 우주론적 증명을 가장 뛰어나게 체계화시킨 인물은 중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대전』에서 우주론적 증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 우주론적 증명의 첫째 증명은 이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활동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세계 속에서 수없이 많은 활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 운동들은 가능성으로부터 현실로 실현되는 과정이다. 한 가능성은 다른 가능성에서 실현된 것이요, 이 가능성은 또 다른 가능성에서 실현된 것이다. 이렇게 무한히 소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가능성으로 더 이상 소급되지 않는 존재, 곧 그 자신은 어떤 다른 것에 의하여 움직이지 않으면서 최초로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는 존재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이 존재가 곧 하나님이다.
나. 우주론적 증명의 둘째 증명은 이 세계의 원인들로부터 출발한다.
이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떤 원인으로부터 일어난 결과이다. 이 원인은 또 다른 원인으로부터 오는 결과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계속하여 보다 더 높은 원인으로 소급하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무한하게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소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더 이상의 원인을 갖지 않는 최초의 원인 또는 제1원인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다.
다. 우주론적 증명의 셋째 증명은 가능성의 존재와 필연적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 곧 필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의 존재이다. 한 가능성의 존재는 그것을 존재하게 한 필연성을 가진 존재로부터 오며, 이 필연성을 가진 존재는 그보다 더 큰 필연성을 가진 존재로부터 온다. 이렇게 끝없이 소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존재하게 된 필연성을 자기 자신 안에 가진 존재 곧 순수 필연성의 존재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이 존재가 곧 하나님이다.
라. 우주론적 증명의 넷째 증명은 이 세계의 사물들이 가진 존재의 단계들로부터 온다.
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무(無)의 요소도 가지고 있지만, 유(존재)의 요소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유의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파멸되지 않고 존속한다. 그들은 존재의 많고 적음에 있어서 여러 단계들을 형성하고 있다. 큰 단계는 작은 단계의 원인이 되며, 이리하여 우리는 가장 큰 존재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이 존재가 이 세계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요 곧 하나님이다.
② 목적론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은 원래 우주론적 증명의 다섯째 증명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목적론적 증명을 우주론적 증명으로부터 구분한다.
목적론적 증명에 의하면 이 세계 속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다. 이 질서는 우연히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어떤 이성적 존재에 의하여 있게 된 것이다. 이 이성적 존재가 곧 하나님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 하나의 목적은 다른 목적을 지향하며 이 목적은 다시 그보다 더 높은 목적을 지향한다. 이렇게 끝없이 소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이상 다른 것으로 소급되지 않는 최고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이 최고의 목적에 의하여 질서 있고 조화있게 배열되어 있다. 이 최고의 목적이 하나님이다.
③ 존재론적 증명
이 증명의 대표자는 중세기에 영국의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안셀름이다. 우주론적 증명과 목적론적 증명은 우주로부터 출발하는 반면, 존재론적 증명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이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그의 저서 『신학서론』(Proslogion)에서 안셀름은 하나님을 가리켜 “그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것”이라고 전제한다. 이러한 존재를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은 이미 우리의 머리 속에 있다. 그런데 그것은 머리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있을 수밖에 없다. 말이 그것이 머리 속에만 있고 현실적으로 없다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그러므로 그는 머리 속에만 있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칸트의 표현을 따른다면 하나님은 완전하시므로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현실적인 존재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여 “그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의 머리 안에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
④ 도덕론적 증명
이 증명이 대표자는 칸트이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얻고자 한다. 참된 행복은 단순히 욕구 충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는 도덕법과 일치할 때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양심의 갈등과 가책 때문에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다. 인간은 일면에 있어서 자연적 욕구를 가지고 있고 다른 일면에 있어서 도덕법의 요구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갈등 속에 있다. 그런데 최고의 선(善)이 가능하기 위하여 우리는 행복과 도덕이 완전히 일치하는 존재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이 존재가 곧 하나님이다.
칸트는 이러한 그의 생각을 “증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실천적, 도덕적인 면에서의 “요청”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이 미치는 한계에 속하지 않으며, 따라서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증명될 수도 없지만 부인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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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적 무신론은 인간을 억누르고 비인간화시키는 악의 세력들과 이 세력에 방조하는 기독교에 저항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 의도에 있어서 우리는 저항적 무신론을 이해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함으로써 일어나는 문제점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