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부문 예심의견>
이번 달에는 수필 부문에 이재영 작가의 ‘나의 저주로 세계 평화를’, 임창순 작가의 ‘추억의 동요 봄소식’, ‘비록 노래는 못 부르고 다루는 악기는 전혀 없지만 음악 자체는 좋아한다’, 안영신 작가의 ‘막걸리 한 잔’ 임한호 작가의 ‘내비게이션’ 등 다섯 작품이 올라왔다.
심사에 앞서 이재영 작가와 임창순 작가의 작품은 수필로써 형식을 벗어난 느낌이 들어 심사에서 제외하고 안영신 작가와 임한호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만 심사의견을 올림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우선 안영신 작가의 ‘막걸리 한 잔’은 작가가 말한 것처럼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한 아버지가 살아생전 한평생 어머니를 고생시킨 당신에 대한 나의 원망과 미움까지 송두리째 거두어 가신 것은, 그 후론 일부러 아껴 마시며 여유를 부리곤 했던 혼술의 막걸리 한 잔이 마냥 즐겁지만 않을 때가 있다.’라는 말에 작가의 막걸리에 대한 생각과 살아온 인생의 의미를 담아냈다.
작가는 막걸리 한잔을 통해 인생의 희로애락을 작품에 그렸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다 막걸리 한 잔을 기울이며 초등시절과 군대에서 교회와 내무반에서 크리스마스 날에 마신 막걸리에 대한 추억, 그리고 군 제대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과 돌아가신 후에 막걸리 한잔에 대한 추억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수필이 어려운 것은 주제와 소재의 끊임없는 연결성이다. 안영신 작가의 ‘막걸리 한 잔’은 주제와 소재를 자연스럽게 물이 흘러가듯 담담하게 이어간 솜씨가 놀랍고 수작이다.
그리고 임한호 작가의 ‘내비게이션’도 글의 전개 방식은 안영신 작가의 ‘막걸리 한잔’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갖추고 있다. 특히 임한호 작가는 자신의 ‘몸치’라는 신체적 약점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내비게이션과 관련한 인생의 추억을 글에 담아냈다. 작가는 동료가 골프를 가자고 하면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비게이션에 좌표를 찍고 가야 안심하는 사람이다. 작가가 자신의 몸에 대한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가 없다.
삶에서 한 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없듯이 작가가 비록 어제 갔다 온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해 몇 번씩 반복하면서 길을 찾아가는 작가의 마음과 심정이 이해가 간다. 초등시절 고집스럽게 자기만 아는 길로 학교에 다니고, 내비게이션에 의지해서 여동생 집을 찾아가다 내비게이션이 제대로 안내하지 못해 주변만 빙빙 돌다가 결국에 목적지를 찾아가는 작가의 삶의 철학이 ‘길은 가끔 잃을지언정 그래도 네가 누군지는 안 잊어 먹었잖아!’라고 마무리하는 말에 들어 있다. 작가의 말처럼 비록 길은 잃어도 사람은 잊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갈 것을 부탁드린다.
이번 달 수필 부문은 안영신 작가의 ‘막걸리 한 잔’과 임한호 작가의 ‘내비게이션’을 추천한다. 두 작품은 글의 전개 방식은 비슷하지만, 작품에 녹아든 인생 경험과 작품의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워 두 작품을 추천하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막걸리 한 잔
화원 안영신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 헬멧까지 갖춰 쓰고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다 보니 쉴 새 없이 땀이 줄줄 흐른다. 머리는 물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물통의 물도 금방 미지근해져서 마셔 봐도 갈증 해소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날씨에 한 시간 반 넘게 타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듯싶어서, 호수 둘레길 한쪽 끝까지 갔다가 방향을 반대로 돌렸다.
농장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한 병 꺼낸 다음 원두막에 자리 잡고 앉는다. 큰 사발에 막걸리를 한 잔 가득 따르고 천천히 잔을 들어 마신다. 쉬지 않고 그대로 반 잔을 들이켜면, 소스라치게 시원한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게 느껴진다. 바로 이 맛이다. 말 그대로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그런 맛이다. 이것이 요즘 내가 즐겨 찾는 막걸리 한 사발의 행복이라고 할까. 두 번째 잔부터 느끼는 청량감은 급전직하로 하락하기 시작하니, 큰 사발로 들이켜는 첫 번째 한 잔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갈급증을 가시게 하는 최상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혼자 술 마시다가 막걸리와 관련된 옛날 추억이 생각날 때면 반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어두기도 하면서 미각의 즐거움을 잠시 유보하는 여유까지 부리곤 한다.
최근에 들어와서야 나는 오랫동안 잊었던 막걸리의 미각을 다시 즐기게 되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땐 주로 소주와 맥주를 마셨다. 물론 내 생애 최초로 접한 술은 막걸리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아버지 술 심부름으로 이따금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오곤 했는데, 돌아오는 도중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몰래 한두 모금 마셔 보곤 했다. 그 당시에는 술집이 아니라 동네 가게에서도 막걸리를 항아리에 담아두고 팔았으므로 미성년자들도 어렵지 않게 구해서 먹을 수 있었다. 그런 접근의 용이성 때문에 우리 어린 시절엔 어른들 몰래 막걸리로 술을 시작하긴 했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후엔 회식 자리나 사적인 모임에서나 주로 소주나 맥주를 마시는 음주문화가 대세였으므로,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그런 술 문화에 적응하게 되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 한동안 막걸리를 많이 마셨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 내가 일부러 아껴 마시며 최고의 청량감을 만끽하곤 하는 막걸리 한 사발의 참맛을 처음으로 알게 된 건 실로 수십 년 전, 그러니까 내 나이 이십 대 초반 군 복무 할 때의 일이었다. 논산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마치고 전방의 육군 보병부대에 배치된 첫해. 고달픈 이등병 시절 유일한 낙은 일요일 오전 교회로 외출하는 일이었다. 민간인출입통제선 안 우리 부대에는 교회가 없었으므로, 십여 명 정도 되는 기독교 신자들은 주일날 철원 시내 소재의 교회로 예배를 보러 나갔다.
한 시간 반 정도 산길을 걸어가면 검문소가 있었고, 그곳을 통과한 후 오 분쯤 가다가 만나는 첫 번째 가게에 들러서 정해진 순서처럼 으레 막걸리 한잔 걸치고 나오곤 했다. 각자 주머닛돈 몇 백 원씩 갹출해서 일인당 막걸리 한 잔씩 주문하면 김치 한 접시를 무료로 제공해 주었다. 한 잔 더 청해서 먹은 일도 없었고, 딱 막걸리 한 잔에 김치 한 젓가락뿐이었다. 교회 예배 시간에 맞춰야 했으므로 시간도 촉박했고 다들 금전적 여유 또한 없었다. 그래도 아쉬운 대로나마 심신의 갈증을 달래준 고마운 막걸리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의 나와 같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도 아닌 군대 신병들에겐 교회가 목적이 아니었고, 시중에서 파는 진한 막걸리 한 사발과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휴식이 절실히 필요했다. 예배 시간에는 잠시 눈 감고 졸면서 마음 놓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주님의 은총이요 일거양득이었다. 휴일이라도 부대에 남아 있으면 각종 사역에다 선임 사병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쉴 시간이 없었으므로, 당시 이등병 시절의 교회 외출 시간은 일주일 중 가장 기다려지는 행사였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의 막걸리 회식도 내겐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저녁 식사 후 내무반 침상에 정렬해 앉아 있으면 각자 위문편지 한 통과 삼사 명당 종합선물 과자 한 세트가 지급되었다. 그리고 사오십 분쯤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선임 사병들은 따뜻한 페치카 옆에 둘러앉아 양동이에서 PX 막걸리를 연신 떠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울 때, 나를 포함한 삼사 명의 이등병들은 반합 뚜껑으로 한잔 밖에 돌아오지 않았던 막걸리는 물론이거니와 선물 세트 과자도 냉큼 다 먹어 치우고 찬바람 새어 들어오는 내무반 한 귀퉁이에 우두커니 모여 앉아 있었다.
이런, 쫄따구들이 군기 빠졌네! 그때 얼굴 벌게진 말년 병장 한 명이 우리를 힐끗 쳐다보며 소리쳤다. 야, 니네들 뭐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 재밌게 놀아야지. 다 일어서서 춤춰. 신나게 흔들어 대란 말이야! 평소 성질 급하고 사사건건 트집 잡아 하급자들을 자주 구타하고 괴롭히던 최 병장이었다. 그 순간 우리는 잠시 엉거주춤하다가 일어서서 몸을 마구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하던 고고춤이었다. 나도 덩달아서 거의 반사적으로 춤을 춰 댔지만 멀쩡한 정신에 마음은 오히려 불편하기만 했다. 뭐 좀 얼큰한 취기라도 있어야 흥이 날 텐데 이건 숫제 고문이 아닐 수 없었다. 비단 나만이 아니었다. 그때 박 이병의 웃는 듯 찡그린 듯 이상야릇한 표정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우린 춤을 추면서도 마음속으론 모두 울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생애주기에 따라 생활양식이나 교우관계 등에서 많은 변화를 겪게 마련인데 음주 습관도 덩달아 그렇게 바뀌는 것 같다. 30여 년간 봉직했던 직장에서 퇴직한 후엔 봄에서 가을에 이르는 동안 우리 집 다음으로 근처 농장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곳에서 농사일도 하고 틈틈이 유산소 운동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막걸리를 자주 찾게 되었다. 이젠 나도 웬만큼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한가하게 혼자 막걸리를 마시다가, 지난 시절의 웃기고도 슬픈 추억을 상기하면서 아련한 그리움에 젖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불현듯 막걸리 주전자와 함께 아버지의 잔상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위로 겹치면서 눈앞을 스쳐 가자 절로 숙연한 기분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지지난해 가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병상에서 막걸리를 찾은 건 정말 뜻밖이었다.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던 아버지는 80대 후반까지도 식사 때마다 반주를 한두 잔 즐겨 드셨다. 술은 항상 더덕주나 매실주 같은 담금주나 소주였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땐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채 링거와 영양제 수액을 맞으며 누워계셨다. 그런데, 7일째 되는 날 갑자기 몸을 일으켜달라고 하시더니, 시워언한 막걸리 따악 한 잔만 마셨으면 좋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입원할 때부터 의사가 하룻밤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고 했던 터라, 그 자리에 있던 우리 가족은 모두 할 말을 잃고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버지는 이틀 뒤 아침부터 상태가 급격히 악화하였고, 그날 정오가 되기 전 그예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지를 대전 현충원에 모시고 난 다음 해 추석 성묘 갈 때 막걸리 한 병을 챙겨 가지고 갔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제야 아버지도 젊은 날 주전자 막걸리를 종종 드셨다는 생각이 났다. 우리는 묘비 앞에서 아버지께 차례로 막걸리 한 잔씩 올리고 절을 드렸지만, 막상 그 술을 묘소 주변에 뿌리진 못했다. 혹시 냄새를 맡고 산에서 짐승들이 내려오지나 않을까 걱정이 돼서 그랬는데, 그 순간 예상치 못했던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왈칵 밀려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한 아버지가, 살아생전 한평생 어머니를 고생시킨 당신에 대한 나의 원망과 미움까지 송두리째 거두어 가신 것은. 그 후론 일부러 아껴 마시며 여유를 부리곤 했던 혼술의 막걸리 한 잔이 마냥 즐겁지만 않을 때가 있다. 내 목이 마르면 언제라도 막걸리 한 사발로 시원하게 해소할 수 있지만,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내 마음속 갈증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로 남아 버렸기 때문이다.
내비게이션
시형 임한호
휴일이라 쉬고 있는데 동료로부터 쇼핑을 가자는 톡이 날아왔다. 난 자연스럽게 좌표부터 보내라고 한다. 그런데 동료는 그 때 갔던 그 곳이니 거기서 만나자며 '그'라는 지시어만 남발하고는 답을 더 이상 안한다. 난 내비게이션에 쇼핑몰을 검색해서 찍고 나서야 '그'것이 기억에서 기어 나온다. 난 항간의 명칭으로 '길치'인가보다. 분명 어제 갔던 곳도 기억이 잘 안날 때가 많다. 20분 거리에 있는 골프 연습장에 가는데 그것도 내비게이션을 켜고 열 번 이상 반복해 가봐야 그때서야 주변 건물이나 신호등, 길의 요철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러다보니 함께 연습장에 다니는 동료마저 조기 치매 아니냐며 비웃을 때도 많다.
동료 말대로라면 난 태어나면서부터 치매였던 것이겠지만 난 그렇지는 않다고 부정한다. 십리 길을 등하교하던 초등학교 시절엔 갔던 길을 그대로 갔다 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름길을 발견한 한 친구를 따라갔다가 헤맨 이후로는 혼자서만 지름길을 마다하고 빙 둘러서 오는 원래의 길을 고수했던 기억이 있다. 벌써 동네 어귀에 도착해서 구슬치기 중반전까지 치르고 있는 친구들에겐 난 고집 센 샌님이었지 길치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건 그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지 이것이 치매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싶었다.
지금은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그런지 길 찾는 데 별로 어렵다거나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 같다. 그럼 이게 없었던 시절에는 난 어땠나. 군대에서 위생병으로 근무할 때 계급이 낮아서 앰뷸런스를 못타는 시절이라 행군 말미에 의료 가방을 메고 보병들과 함께 보조를 맞추던 날이 있었는데, 상병이 본부에 알콜을 빠뜨리고 왔으니 뛰어갔다 오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갔다 돌아오는 길을 잃어서 하마터면 탈영병이 될 뻔 했었다.
또 한 번은 직장인 초기에 전셋집으로 평수를 늘려 이사 가는 집을 그 전에 몇 번 어머니와 답사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퇴근 후 새 집이 기억이 나질 않아 근처까지만 겨우 겨우 찾아 간 다음에 전화로 어머니를 불러낸 적도 있었다. 대체 이건 무슨 병인가 싶었다.
그런데 이건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누나도 여동생도 모두 나와 같은 증세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유전자가 그런가 보다. 내비게이션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래서 우리들은 쾌재를 불렀었다. 이젠 목적지에 가다 말고 가다 말고를 반복하며 차창을 내리고는 연신 행인들을 불러 세워놓고 물어보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초기 모델들이 버퍼링이 너무 심해서 어떤 지역에서는 아예 기계가 멈춰서 길을 안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한 번은 여동생이 양재동에서 밤늦게 울먹이며 다급한 전화가 왔었다. 차가 밀리는 퇴근 시간에, 그것도 갓길도 거의 없는 서울 도심에서 네비게이션이 먹통이 된 것이다. 이것이 다시 일을 시작할 때까지 그 주변을 한 시간 째 빙빙 돌고 있다는 소리였다. 하기야 안양으로 오는 이정표가 눈에 안 들어오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믿음이 안서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서울서 안양까지 계속 '안양'이란 글씨가 보여야 하는데 오다보면 중간에 이정표에서 '안양'이 사라져 있는 황당한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원래 길 잘 찾는 사람이야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과천 쪽으로 넘어가면 거기서부터 또 안양이란 글씨가 등장할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지리 의식이나 공간 감각을 이용해 추론을 해야 하는 이정표의 불친절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날도 여동생은 밤늦도록 기계의 부활만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양재동에서 주행 운전연습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저 공간 감각이 남들보다 좀 떨어진다는 것으로 단정해서 그런가, 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데도 주변의 시선들 때문에 그래도 한 번은 진짜 알츠하이머 뭐 그런 건 아닐까 싶어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 본 적도 있다. 그 때도 인지장애라든가 기억력이라든가 이런 검사 항목에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인 것이, 만약 기억력이 문제가 되었다면 가장 기억력이 중요한 공부는 어떻게 해서 사대문 안의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며, 또 학기 초에 새 학급의 아이들을 얼굴과 이름을 연결해 외워야 하는 담임의 역할을 다른 선생님들보다 더 빨리 끝낼 수 있었을까 말이다.
생각건대, 이건 골프 동료가 오이를 못 먹는 것처럼 음식 알러지 같은 것은 아닐까. 대개 다른 것들은 다 정상인데 유독 한 분야에서만 뇌가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 말이다. 아니면 어쩌면 디지털 치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내비게이션이란 기계에 대한 의존이 반복되다 보니 애써 지도를 찾고, 가는 길을 구상해 보고 하는 부분을 생략하는 데서 오는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는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서'라는 말을 가장 싫어하는 내가 어느 때부턴가 나도 모르게 '그런 사람'으로 날 편입 시키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의 샌님이나 공간감각의 부재자로서도, 기계의 탄생 후에 그 뒤에 치부를 숨겨버린 결핍자로서도 난 이것들을 이겨낼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적이 있었는지 반문하고 있다.
용기를 내어 오늘은 골프연습장에 내비게이션 없이 출발해 보려한다. 가다가 동료 집에 들러 그를 태우고도 갈 요량이다. 또 헤매다가 평소보다 두 배나 걸릴 나를 동료는 다시 핀잔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오늘만큼은 태평할 것이다. 왜냐하면 줄곧 지금까지 내 삶의 내비게이션은 안내자 따로 없이도 정직했고 정확했기 때문이다. 만약 동료가 치매냐고 또 묻는다면 난 이렇게 답할 생각이다.
"길은 가끔 잃을지언정 그래도 네가 누군지는 안 잊어 먹었잖아!“
첫댓글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