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뜻대로 비전을 세워야 한다(1) ♡♡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크리스천이면서도 세상 자기계발 서적들의 영향을 받아서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살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신앙 따로 사업 따로였다. 그때만 해도 나의 신앙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는 통전적인 신앙은 아니었다.
하나님과는 상관 없이 내 나름대로 목표를 세워놓고 자기계발과 성공철학 서적들을 읽으면서 ‘나의’ 꿈을 키워갔다.
자기계발과 성공철학 서적들은 원래 성경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런 책들을 보면 가끔씩 성경 구절이 등장하기 때문에 자신이 미래의 비전과 목표를 세우고 간절히 추구하는 것은 당연히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책들을 보면 미래의 비전과 계획은 모두 당사자가 알아서 세우는 것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 관장하시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을 관장하신다.
자신이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웠더라도 상위 프로그램인 하나님이 OK 하시지 않으면 헛수고만 잔뜩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비신자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일반은총의 범위 안에서 생활하므로 세상적인 방법을 통해 성공이나 출세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자는 비전이나 목표 설정은 물론 성취의 과정조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
사실 미국은 물론 한국의 경우에도, 이런 책을 지은 사람들을 보면 기독교 신자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런데 책에서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기계적인 공식만 알려준다.
그러나 하워드 휴즈처럼 세상적인 성공에는 휴유증이 따르기 쉽다. 성공한 기업가가 반드시 존경 받는 기업가, 행복한 기업가는 아니다.
세상적으로는 성공하고 존경 받고 행복한 성공자라도 솔로몬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성공자는 아닌 사람도 많다. 시편 73편에 등장하는 인물과 같은 사람이다.
시편 기자는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되는 일이 없고 매일 하나님의 책망을 받아서 마음이 곤고하다.
주변의 어떤 불신자를 보니 만사가 형통하고 손 대는 일마다 잘되는 것을 보고 엄청나게 시험이 들었다.
“혹시 내가 하나님을 잘못 믿는 것이 아닌가?”
그의 결말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문제가 없이 세상에서 만사가 형통한 사람은 지옥행 급행열자를 탄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생을 살다가 고난과 역경이 있어야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절대자를 찾는 마음이라도 생길 텐데 만사 형통한 불신자는 그런 기회조차 갖지 못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예수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요즈음의 신자들은 똑똑해서 세상적으로도 성공하고 좋은 믿음도 갖기를 원한다.
많은 신자들이 사업하고 성공하면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한다. 물론 목적은 선하다. 그런데 이런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보면 완전히 세상 방식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하는 것 같지만 목표를 세우는 과정은 물론 성취해 가는 과정 모두를 자기 생각, 자기 경험대로 하고 있다.
많은 신자들이 비전과 목표 설립은 물론 성취의 과정조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자기 스스로 목표를 세워놓고 하나님께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 과거의 필자 모습이다.
본인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그럴듯한 계획을 세워도 하나님의 뜻대로 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받지 않으면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목회자도 마찬가지다. 성도들이 세상 성공, 사업 성공에 매달리는 것 못지 않게 목회자는 교회 성장에 매달린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내가 보기에 괜찮고 남들이 보기에 괜찮다고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은 인간적인 발상이므로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들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미래의 비전과 계획을 세워놓고 하나님께 결재를 해달라고 떼를 쓴다. 애쓰고 힘쓰지만 열매는 별로 없고 곤고하기만 할 뿐이다.
미래의 중요한 계획과 비전을 세우고 또한 성취해 가는 과정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이루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전의 필자처럼 열매도 없이 헛수고만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세우는 비전인가?
◇ 하나님이 직접 비전을 주신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비전을 주셨다.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베드로 12제자 및 사도 바울 모두를 하나님이 직접 부르셔서 소명과 비전을 주셨다.
◇ 성경 말씀을 통해 비전을 주신다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조지 뮐러(George Muller, 1805-1898)는 어느 날 시편 68편을 묵상하던 중이었다.
“하나님은 고아들의 아버지시며……”(5절).
이 말씀이 그의 마음에 와 닿았다. 만일 하나님이 고아들을 돌보신다면 자신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감동 받은 그는 고아와 거리의 아이들을 위한 기독교 학교를 설립했다. 얼마 후 그는 고아원도 설립했는데 몇 년 후 고아가 100명을 훌쩍 넘게 되었다.
그는 먹을 것을 쌓아놓고 고아들을 돌 본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음식과 물건으로 그들을 돌보았다.
어느 날 식사 시간에 고아들을 식당에 모아놓았지만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기도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빵 제조업자가 문을 두드렸다. 밤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고아들을 먹일 빵을 구우라고 하셔서 그 빵을 가져왔다고 했다.
얼마 후 우유장사가 문을 두드렸다. 그의 마차가 하필이면 고아원 앞에서 고장이 나서 마차를 고치기 위해 우유를 처분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때 그는 2,000명의 고아를 이런 식으로 돌보았다. 그는 기도만을 통하여 750만 달러를 모금했고, 나중에 189명의 선교사를 파송했고, 100여 개의 학교를 지원했고, 복음 전파를 위해 수천 권의 성경과 수백만 장의 전단지를 돌렸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 간증, 설교, 문서 등을 통해 비전과 소명을 주신다.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 우리를 부르시든 그것은 성경에 부합되는 것이고 성경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조지 뮐러에게 하신 것처럼 구체적인 성경 구절을 통하거나, 때로는 성경 구절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해주셔서 비전과 목표를 주시는 경우도 있다.
한 개인의 범위에 국한되면 개인의 비전이 되지만 한 개인을 뛰어 넘으면 시대를 바꾸는 운동(movements)이 된다.
종교 개혁가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로마서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깨닫고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하나님은 이후 영국의 요한 웨슬리 (John Wesley. 1703~1791)와 성결운동 등을 통하여 신분의 변화는 물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중요시한 ‘성화’를 강조하게 하셨다.
방언운동으로 알려진 20세기 오순절 성령운동이 시작된 것은 1900년에 미국의 성결운동에 소속되어 있던 찰스 파함(Charles Parham. 1873~1929)이라는 목사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세례의 외적 표적은 방언이다’라는 깨달음을 통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점차 확산되어 기존의 교단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근엄하고 까다롭던 성공회의 데니스 베넷(Rev. Dennis J. Bennett, 1917~ 1991) 신부가 ‘나도 방언한다’는 폭탄 선언을 한 것을 시작으로 기존의 교단인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 장로교에도 은사운동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성령세례의 외적인 표적은 방언만이 아니라 다른 표적들도 있다는 좀 더 넓은 입장을 견지했는데 이를 은사운동이라고 한다.
이후 1980년대에는 신약의 신자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사와 이적을 행할 수 있다는 주장을 표방하면서 기존의 교단에 속하지 않은 독립 교회들을 통해 은사운동의 폭이 넓혀졌다.
아직도 일부 전통주의자들은 은사운동의 폐해만을 지적하고 있지만 은사운동이 한국교회에 끼친 좋은 영향이 많다.
새벽기도, 삼일 예배(주중예배), 주일예배 및 주일저녁 예배를 중심으로 성수주일과 십일조 생활을 주로 강조해 온 전통적인 교회생활에 은사운동은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찬양과 경배, 철야기도, 금식기도, 소그룹 모임, 중보기도, 더 나아가서 내적치유, 셀그룹 운동, 일터 사역운동 등은 모두 은사운동에서 시작된 것들이다.
요즈음 이런 것을 하지 않는 교회가 없을 정도로 은사운동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 마음의 소원과 부담을 통해 비전을 주신다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 20:4).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 107:30).
미국 시카고 대학의 벤자민 블룸 교수는 스포츠 스타, 예술가, 저명한 학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120명을 연구하여 그들이 큰 성공을 거둔 원인을 분석했다.
“성공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변수는 선천적 재능이나 후천적인 양육환경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의 가치관에 따라 선택한 일, 즉 ‘하고 싶은 일을 했느냐’에 달려있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당연히 예외가 존재한다. 사람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내 마음에 소원한 것을 구하여서 받은 것이 많은데?”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기들의 소원대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 이스마엘의 후손-아랍제국들-과 약속의 아들 이삭의 후손-이스라엘-이 지금도 티격태격하면서 지구촌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신자는 내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 재능이나 은사를 통해 비전을 주신다.
1901년에서 1990년까지 90년간 자연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 404명의 종교 실태를 조사해 보니, 기독교 76퍼센트, 유대교 22퍼센트, 불교 0.9퍼센트, 회교 0.1퍼센트로 나타났다.
그런데 유대교(구약)와 기독교(신·구약)는 성경을 기초로 한 종교가 아닌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우리는 미국은 하나님을 잘 섬겨서 복 받은 나라라는 말을 자주 한다.
미국뿐만 아니라 한때 하나님을 잘 섬긴 서부 유럽도 이전의 영광만 못하지만 여전히 세계 국민소득 순위 상위이고 객관적인 인프라-민주정치, 국민의 평등과 자유, 소득 수준, 교육 수준 등-에 있어서 상위이다.
그들의 종교는 절대 다수가 기독교이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이 개인은 물론 국가에도 복을 주신다. 농경시대에는 하나님이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황충과 해충을 막으심으로써 복을 주셨다.
그렇다면 산업사회에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복을 주시는가? 나는 이것이 궁금하여 기도하면서 나름대로 연구했다. 그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님은 축복을 위한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신다.
종교 개혁가인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은 '직업 소명론'을 주장했다.
직업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소명(calling)이므로 성직자든 평신도든 주어진 직업에 충실한 것이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직업 귀천의 담을 허물었다.
더 나아가서 칼뱅은 노동을 금욕의 수단으로 여기면서 누구나 근면, 성실, 정직하게 일한 대가의 일부를 축적해도 좋다는 이윤제도를 허용했고, 또한 당시에 금지된 이자제도를 허용하여 자금이 필요한 상공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독일의 막스 웨버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상술한 것처럼, 종교개혁가의 이런 주장은 유럽의 산업발전과 자본주의 형성의 주춧돌이 되었다.
이후 인간의 탐욕으로 자본주의가 변질되어 많은 문제가 발생하여 그 대안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한때 번성했지만 이제는 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나님의 축복은 지혜와 창조의 영을 통해서 온다.
천지 만물과 사람의 창조주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신앙심이 깊은 개인이나 국가에 지혜와 창조의 영을 통해 복을 주신다. 전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보라. 정치적 안정, 경제적 부요, 사회적 성숙을 누리는 나라는 거의가 기독교 국가들이다.
세상적 역사관에 의하면 영국이 강대국이 된 것이 우연으로 보일 수 있다. 세상 역사관은 ‘우연’을 중시한다.
그러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구원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삼상 2:7-8).
영국이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영국에 영적부흥이 불어 닥쳤기 때문이다.
대륙의 독일과 프랑스가 자유 신학의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영국은 요한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 등과 같은 영적 지도자를 중심으로 영적부흥의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혜와 창조의 영을 부어주셔서 새로운 발명과 발견을 통해 산업혁명을 주도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땅 좁고 천연 자원이 부족한 한국인에게 지혜와 창조의 영을 물 붓듯 부어주셔서 경제를 발전시키시고 또한 한류열풍-가요, 배우, 탤랜트, 스포츠, 디자인, 음식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이신다.
물론 이 축복은 우리만 잘 먹고 잘 살아라는 축복이 아니라 아시아를 섬기고 열방을 섬기라고 주신 축복이다.
어떤 사람은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발명과 발견을 하는 사람이 모두 크리스천인가?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독실한 불교 계통 신자이고 요즈음 뜨는 경영 컨설턴트나 학자 중에도 불교 계통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그런데 그들의 국적이 어딘가를 살펴보라. 절대 다수가 미국이나 유럽과 같은 기독교 국가 출신들이자 유대인들이다.
『아웃라이어』의 저자인 말콤 그래드웰은,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재능은 물론 문화적 유산과 역사적 공동체의 혜택을 누려왔다고 말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자수성가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자기 혼자 잘 나서 성공한 것 같지만 소속된 사회나 국가의 인프라가 받쳐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만일 빌 게이츠[MS], 스티브 잡스[Apple], 마크 저커버거[Facebook], 래피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Google]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모두 ‘대학 중퇴’라서 제대로 된 회사에 취직도 못하여서, 공시족(공무원 시험공부하는 족(이나 되었을 것이라면서 창업과 벤처기업을 가로막는 한국의 상황에 대해 자조적인 말을 한 사람도 있다.
천재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한다. 첫째 천재로 태어나고, 둘째 천재로 길러지고, 마지막으로 천재성을 발휘할 장(場)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한국은 수많은 천재가 태어나지만 천재를 기를 스승이 부족하고 더 나아가서 온갖 규제로 천재성을 발휘할 장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 문제인 것 같다.
◇ 하나님의 축복은 분명한 목표와 비전을 통해서 온다
자기계발 서적에 약방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이 다음의 예화이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배경이 비슷한 대학생들을 상대로 조사를 한 적 있다.
학창시절에 미래의 명확하고 장기적인 목표를 가진 학생은 3퍼센트, 비교적 단기 목표를 가진 학생은 10퍼센트, 희미한 목표를 가진 학생은 60퍼센트, 아무런 목표가 없는 학생은 27퍼센트였다.
25년 후 다시 조사를 해보았더니 분명한 목표를 가진 3퍼센트에 속한 학생은 각계의 정상급이 되어 있었고, 비교적 단기 목표를 가졌던 10퍼센트에 속한 사람은 중상층, 희미한 목표를 가졌던 60퍼센트에 속한 사람은 중하위층이었다.
그러나 무계획한 사람은 빈곤층에 머물면서 사회를 원망하고 국가를 원망하고 있었다고 한다.
혹시 당신의 미래가 학벌, 배경, 부유한 부모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즉시 생각을 바꾸어 당신의 미래에 대한 분명하고 장기적인 비전부터 설정해 보라.
분명한 목표와 불타는 소원은 심해에 묻혀있는 재능을 태산으로 끌어올리는 강력한 엔진이다.
“예수 믿으면 모두 부자가 되는가? 우리 나라 재벌이나 부자들을 보면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많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개인적으로 보면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이 노(No)일 수도 있다.
비록 예수를 믿어도 믿음의 과정에 있거나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나 자발적인 가난 등의 이유로 인해 모두가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재벌이나 잘사는 사람을 보면 크리스천이 드물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현재 세계에서 부요한 서부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 등은 모두 기독교 국가이다. 국가가 부유한 것은 개인이 부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잘 사는 일본이나 싱가포르, 최근 급부상하는 중국은?
이들은 원래 잘 산 것이 아니라 잘 사는 유럽이나 미국의 문물들을 열심히 잘 받아들였기-복사-때문이다.
일본은 우리나라 보다 100년 정도 먼저 명치유신(1858년)을 통해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인 덕분에 아시아의 강대국이 되어, 한때 아시아를 지배했고 오랫동안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자리를 유지하다가 얼마 전 중국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중국이 지금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급부상 한 것도 압도적인 인구를 바탕으로 한 저(低)임금과 유럽이나 주로 미국에서 훈련받은 우수한 인재들을 대량 확보했기 때문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나름대로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세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자기 영광, 세상 영광을 위한 성공이다. 모든 재능이나 창의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나에게 부여된 재능을 나의 영광, 세상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오남용하는 것이다.
요즈음 자기계발과 성공철학 서적과 세미나들이 한국에서 확산되면서 성공을 부추기고 있지만 그와 못지 않게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 바로 성공하려고 하는 '마음의 동기'이다.
신자의 경우,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내 영광이나 세상 영광의 동기로 아무리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실현을 위해 노력해 보았자 헛일만 하기 쉽다.
나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때 하나님의 지혜와 창조의 영이 풍성하게 임하고 일도 형통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
(계속)